김병조
金炳朝
1950년 5월 23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개그맨이자 대학교수. 본관은 광산(光山).# 1950년 5월 23일(음력 4월 7일) 화요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신평리 거마마을[1]#에서 태어났다.
2. 연예계 데뷔 및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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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나거라~"'''
'''"나가 놀아라~ "'''
'''"바람과 함께 사라지거라~"'''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75년 TBC의 개그 프로그램 '살짜기 웃어예'를 통하여 데뷔하였다. 1980년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 MC를 맡았다. 이 프로그램이 훗날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프로그램인 일요일 일요일 밤에로 이어진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콩트와 슬랩스틱 위주던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닌 뉴스 보도 형식의 개그로 일요일 프라임 타임대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즉, 대한민국 최초로 TV에서 시사 개그를 선보였다.''''''"얼씨구~ 지화자~"'''[2]
당시 앵커 역을 맡은 김병조는 독특한 헤어 스타일 덕분에 '''배추머리'''로 유명했으며[3][4] , 극중 천태만상을 보이는 이들에게 일침을 놓는 "지구를 떠나거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거라", "제발, 교양있게 살아라", "먼저, 인간이 되거라", "인간아, 인간아 왜 사니?", "안녕~ 오지마~ 와봤자 주민등록 말소야~", "인도코끼리 방구끼는 소리 하고 있네~" 등의 유행어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밖에도 공처가 컨셉으로[5]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MBC 아동 프로그램인 뽀뽀뽀에서 뽀식이로 나온 이용식과 같이 뽀병이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성인 시청자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이렇게 막연한 프로필만 봐서는 감이 잘 안올 텐데, 김병조는 '''1990년대 후반의 김국진이나 2010년대 유재석에 비견할만한 인지도와 파워를 가진 개그맨이었다.''' 역대 시사 개그의 1인자로 꼽히는 KBS의 김형곤보다도 먼저 시사개그를 시도했고 인기를 끌었으며 당시 CF도 많이 찍던 잘나가던 개그맨이었다. 유튜브에서 80년대 옛날광고 모음을 보면 김병조가 정말로 많이 나온다. 그도 그럴것이 김병조는 당시 아주 잘나가던 빙그레의 전속 광고모델을 오랜 기간했으며 주력상품들은 물론 신제품이 나와 광고를 만들면 항상 출연했다. (근 10년 가까이 빙그레 광고를 찍었다.)
김병조의 리즈 시절은 케이블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SBS조차 개국하기 이전이라 시청자의 채널 선택권이라곤 KBS 아니면 MBC였다. 더구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제목 그대로 일요일 저녁 편성이었는데, 경쟁사 KBS의 대표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1번지는 토요일 저녁 편성이었다. 1980년대 말 KBS 쇼 비디오 쟈키와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두 프로그램이 일요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정면으로 격돌한 것에 비한다면 탄탄대로를 달렸던 셈이다.
3. 민주정의당, 망한나라당 사건
1987년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 김병조가 출연자(사회자는 임성훈)로 참석해서 진행하던 중 '''"대본"'''에 있던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이고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다."라는 멘션을 그대로 읽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정확하게는 MBC가 주도적으로 막간행사를 진행했고, 소속 개그맨 중 김병조가 동원된 것이었다. 즉, MBC가 책임져야 할 일을 김병조가 뒤집어 쓴 꼴. 관련 기사 보기. MBC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김병조는 1987년 6월 29일에 방송에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1987년은 1월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월의 4.13 호헌조치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상당히 뜨거운 시점이었다. 게다가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바로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된 1987년 6월 10일이었다.''' 그 결과 김병조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사그라들었다.
그나마 김병조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가진 개그맨이었고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그들 앞에서 제대로 말한 사람 얼마나 있었겠나?"'''는 동정론도 있어서 이후에도 MBC에서 뽀뽀뽀 출연, 전주 대사습놀이를 꾸준히 진행하는 등 계속해서 방송활동은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김병조 본인은 리허설때 대본을 보고 굉장히 당황스러워서 얼버무렸고 이런 그를 본 여당 관계자들은 김병조에게 "곤란하면 그 부분은 빼도 된다. '''물론 그 뒤의 일은 알아서 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특히 그때 시사개그를 처음으로 도입한 김병조의 성향으로 보아 그 때의 개그가 김병조 본인의 자발적 멘션이라고 보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후, 1991년 개국한 SBS로 옮겨가서 <사랑의 공개홀>, <웃으며 삽시다>, <코미디 전망대>, <현장쇼 주부만세>에 출연하며 방송에 복귀했고, 1996년에는 이상용의 후임으로 우정의 무대를 1997년 종영까지 진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망한나라당''' 사건이 터지게 된다. 1997년 <코미디 전망대>라는 프로그램에서 뉴스 앵커 역으로 출연한 김병조가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합쳐져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는 소식을 보도하면서 멘션 끝에 살짝 "망한나라당"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이를 풍자하였는데 당시 이미지가 안좋아[6][7] 정권교체 가능성이 커지는 정국이어서 높으신 분들이 대노, 김병조는 하루 아침에 방송에서 강판되었고 그나마 갖고 있던 방송가와의 끈이 완전히 끊기다시피 하게 되었다. [8]
4. 한학자로 제 2의 인생
1995년 고향인 광주에 KBC 광주방송이 개국하면서 열창무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조선대학과 인연을 맺어 학부와 교육대학원, 평생교육원에서 명심보감 강의를 하게 되었다. 현재 21년 째 조선대학교에서 명심보감을 강의하고 있다. 김병조의 높은 한학지식 덕분에 지역학계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인기도 많고 강의 질이 높은 교육봉사를 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간의 강의와 연구결과로 2014년에는 명심보감 해설서 전법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병조의 마음공부 上, 下권을 집필하였으며, 현재는 동 대학에 특임교수와 명예평생교육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매년 두 번 길벗과 JTS[9] 에서 주최하는 명동 거리모금 성금 사회자로 아들 김형주와 함께 참여하고 있다.
5. 현재 활동
그동안 이어온 명심보감 강의를 토대로 세대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8년부터 아들 김형주와 함께 1인 방송회사 소쿠리TV를 만들어 유튜브 채널 "김병조의 시래기톡"에서 인터넷 방송을 진행 중이다.
6. 기타
비평준화 시절 광주광역시(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주시)의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였던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실제로도 한문, 영어 등 어학 및 문자 분야에서는 거의 천재 수준이었다. 참고로 전직 광주광역시 동구·남구 을 국회의원이었던 박주선 의원이 광주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개그를 하기 전에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이수하였던 적이 있어서 한학 실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며[10] 또한 명심보감과 고전류 등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끔 한문을 이용한 개그를 내놓기도 하는데, 길에서 우연히 지인을 만나 안부를 묻자 지인이 말하기를 요즘 주식회사 하느라 바쁘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럼 큰 회사 차리셨군요 하고 감탄했더니 상대가 그게 아니라며 보여준 한자가 '''술 주(酒), 먹을 식(食), 모일 회(會), 일 사(事)'''자였다고(...).[11]
과거에 개그맨 장용[12] 이 군복무 중일때 편지를 보냈는데 '은, 는, 이, 가, 로써'와 같은 조사를 제외하고 전부 다 한자로 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카투사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고 있다.[13] 1990년대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토크쇼 방식으로 바뀐 후 "한 권의 책" 코너에 박미선과 함께 고정 출연하였는데, 한 번은 미국인이 출연했을 때 박미선에게 대화를 하도록 분위기를 띄운 후, 박미선이 말문이 막혀 데꿀멍 상태가 되자 김병조가 미국인에게 영어로 조리있게 설명하기도 했다.
방송가에서 구봉서와 쌍벽을 이루는 구두쇠로 유명했다. 상가집에 가서도 돈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오열하다가 후배들이 모범택시 부르자 일반부르라고 한 에피소드도 있다고....그러나 조상들을 위한 위선사업이나 종사에는 아낌없이 돈을 쓴다고 한다.
불자이며, 환희장이라는 법명도 있다. 또한 BBS 불교방송의 "김병조의 이야기쇼"라는 프로그램을 25년간 진행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기진 않았지만(...)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 세월의 풍파를 적게 맞아서 외모가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비교적 잘 늙었다는 평을 받는다.
원래는 비장애인이었지만, 병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 13년 전 왼쪽 눈에 큰 병이 생겨서 치료에 최선을 다했으나 격통이 계속되고 시력을 살릴수 없게 되어서 시신경을 완전히 제거하던가 진통제로 버티던가 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결국 왼쪽 시신경을 제거했다는 사연이 있다. 기사.
음색이 성우 이인성과 비슷하다.
7. 관련 문서
[1] 제헌 국회의원 김상순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전주 대사습 놀이 진행 때만 사용한다. 김병조가 먼저 얼씨구나 지화자를 선창하면 여자 진행자가 좋다~ 이런다.[3] 이런 이유로 본인이 말했던 일화 중 한번은 동료 코미디언 이용식과 같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들을 보고는 말하기를. "에그머니나, 돼지보쌈 지나가네."[4] 자신은 배추머리, 집사람은 '''무우'''다리이니 둘을 합쳐서 김치깍두기를 담근다는 개그도 자주 했다.[5] 예, 아내가 "OO에서 할인행사하는데, 가격이 싸서 좀 더 사왔다. 오늘 OOO원 벌었다."는 말을 2번, 3번째 반복하면서 '''"돈 벌었다."'''고 자랑하자, '''"여보, 제발 돈 그만 벌어와!"'''라며 울상.[6] 신한국당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비정규직법, 정리해고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과 기아사태 및 한보그룹 부도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의혹 및 비리까지 겹쳐, '''국회청문회가 생방송'''될만큼 이미 민심이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대통령 선거 막판에 야당을 35만표, 즉 1개 시군 차이로까지 추격하였다. 그만큼 그간 구축한 기반이 단단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7] 정리해고법 날차기 통과 논란은 신한국당의 입법 포기로 무마됐으며 신한국당의 지지율은 97년 7월쯤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만 이후 터진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이 터지면서 한때 35%를 넘었던 이회창 후보의 대권 지지율은 10%초반대까지 떨어졌다.[8] 물론 대선막바지 국면의 방송에서 특정 후보와 정당을 대놓고 비방한 것은 그들만의 잔치인 전당대회에서의 언급보다 문제될 소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당시 여권이 '''환란'''(외환위기)과 정권말 스캔들로 민심을 많이 잃었다는 방증인데, 보복을 하기보다는 '''"우리 부덕의 소치"'''라는 식으로 몸을 한껏 낮추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게 득표 측면에서도 보다 도움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문화방송은(MBC) 96년 취임한 이득렬 사장이 논조에 관여하지 않는 방침을 세워, 데스크에서 DJ에게 중립 또는 우호적인 내용을 꾸준히 실어줬는데, 여긴 놔두고 김병조라는 ( )개인에게 보복을 한 것이기 때문에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9] 정토회 봉사단체다! 노희경, 배종옥, 한지민 등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10] 김병조의 별명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배추머리로 인한 배추였지만, 가끔씩 불리던 별명중에는 서당의 '''훈장'''도 있었다. 실제로 훈장 캐릭터로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11] 즉 '''모여서 술마시는 게 일'''이라는 뜻이다(...). 일요일밤의 대행진 271회(1986년 12월 14일 방송)에서 나온 개그.[12] 현재 라디오 여성시대 단결!필승!충성! 코너 진행자.[13] 그러나 전역은 한국군에서 했다. 백마부대로 원대복귀하여 지금의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 해당하는 문선대에 뽑혀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되며, 그 공을 인정받아 방송국의 개그맨으로 데뷔할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