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문학

 


1. 정의
2. 배경
3. 순수문학에 대한 인식
4. 업계의 사정
5. 관련 문서


1. 정의


純粹文學
철학·사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문학에서 시·소설·희곡을 가리키는 문학 용어이기도 하지만, 흔히 통속적인 내용을 소재로 재미 그 자체를 추구하는 대중문학 또는 장르문학같은 개념과 대비되어 '''순수하게 예술성을 추구하는 문학'''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이다. 다만 순수문학이 융성했던 시절에도 무조건 예술성만 추구하는 소설만 있었냐면 사실 그런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드라마영화를 통해 2차 창작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로맨스적인 요소나 협객물적인 요소를 넣는 경우도 허다했다.

2. 배경


과거에는 문학 작품의 도구성과 사회 참여적인 면모를 부정하는 문학 작품이나 문학 사조를 의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의 남북분단, 6.25 전쟁, 군사독재 등의 질곡으로 가득한 근현대사의 영향으로 저항문학, 리얼리즘 문학이 크게 융성했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계에서의 순수문학-참여문학 논쟁은 1960년대 조선일보 지면에서 벌어진 이어령김수영의 논쟁이 유명하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에는 루카치 죄르지, 가라타니 고진 등의 해외 문학평론가들의 저작이 수입되면서 이러한 논쟁은 현재 거의 일단락된 상태. 지금은 순수문학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서 사조에 따른 분류는 의미가 없다.
흔히 순문학이라고도 한다.
실질적으로는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 발표한 단편소설이나 장편소설, , 산문 등을 뜻하게 되었다. 그게 뭐야? 같은 반응도 있을 수 있겠지만 발행 매체에 따른 장르 구분법도 유효하다. 원래 비평이나 장르 구분은 별의 별 개념을 다 끌어오니 이런 구분도 안 될 이유는 없다. 대비되는 용어로 대중문학, 장르문학등이 있다.
원래 소설류의 산문문학은 순수문학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는 과거 사람들의 인식과 과거의 출판 환경 등의 문제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함축적이고 운율이 있는 시와 같은 것이 문학이고, 돈 벌려고 내용이나 늘려 하류계층이나 읽는 소설 따윈 '''종이낭비'''라는 것. 이는 소설이 원고에 쓰인 글자 수에 따라 돈을 받던 역사에서 비롯된 인식이다.

3. 순수문학에 대한 인식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본래의 뜻보다는 주로 대중문학 내지는 장르문학에 비교되는 고급문학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보다 중립적인 표현으로 '기성문학' '사회참여 문학'이 있지만 순수문학의 사용이 압도적. 당연히 이에 문학적 논쟁이 따라붙는다. " '순수문학'이 아닌 현 세대의 장르문학은 순수하지 않으냐" "문학의 순수함을 어떤 기준으로 논하냐" "문학에 순수함이 존재하냐" "문학의 순수함이 무엇이냐" 더 나아가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이냐" 같은.
문장력은 '순수문학'이 현 장르문학보다 확실히 압도적이다. 문장의 아름다움을 수십 년간 절차탁마한 기성문인들의 글 솜씨는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장르문학 작가들의 의성어 남발 장르문학에 비해 고급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시간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서사의 맛은 어딘가 밋밋한 것도 사실이다.
순수문학이란 말이 확립된 배경은 복잡하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문학은 '''시대의 등불'''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시위의 목적으로 촛불을 들듯 작가들은 문학이란 양식의 촛불을 든 것이다. 광복 이후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발간된 작품의 태반은 사회참여적 문학이었다고 보면 된다.
암울한 정치 상황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따라 사회참여적 작품이 쏟아졌으며 현실이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다보니까 더욱 비정상의 정상화에 대한 열망이 커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화석 취급 당하는 장르인 시집의 비중이 유난히 높았던 이유도 같다. 이처럼 순수문학은 주류로써 비평이나 상업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었다. 단지 특정 장르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용어라기보다는 이를 하나의 군(群)으로 묶어서 구분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문단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은 작품이 얼마나 사회를 반영했는가의 여부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르적 대중소설은 비평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이 작다보니 좋은 작가가 모이지 않고, 좋은 작가가 없으니 작품의 질은 떨어졌다. 또 번역서는 상대적으로 유명작만 들어오니 국내작의 조악함이 두드러질 수밖에. 기껏 양질의 작품을 수입해도, 중역은 기본에다가 질 나쁜 번역, 내용 축약 등을 거쳐 멀쩡한 작품을 충공깽한 막장소설로 바꾸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출판사가 할 일은 안 하고 돈 버는 데 급급해서 싼 값에 대충 찍어댔던 것이다. 이런 과거가 순수문학 외에는 저급한 문학이라는 인식에 일조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순수문학의 영향력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며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대공황, 잃어버린 10년, 1997년 외환 위기 등의 불황이 20세기 초반부터 전세계적으로 일어나 세계 경제가 호전되지 않는 동시에 컴퓨터와 스마트폰 기술이 발달하여 서브컬처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의 인싸들이 주로 사용하는 SNS인터넷 방송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대중들이 느끼기에 순수문학계가 음울한 느와르 스릴러를 사회 비판 메시지와 혼합시켜 불황 속 생계 문제로 현실주의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대중들에게 재벌과 법조계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찌든 높으신 분들[1]과 낡은 풍속[2]을 타파하는 사이다를 제공해주긴커녕 개개인간의 복수로 화풀이하는 것을 이상주의적으로 강요한다는 인상을 주게 되어 외면을 받는다[3].
순수문학은 인문학 중 철학적 주제와 종교적 주제를 주로 다루는 장르라 인간의 내면 문제를 파고들었으며 외부적 문제에 상대적으로 소홀하여 대중들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는 약점이 있었으나 순수문학가들이 그런 약점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대중들의 외면을 받은 것이다. 결국 순수문학계는 대중들의 외면을 완전히 받을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브컬처를 차용하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의거한 사상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택 중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그들은 서브컬처를 차용하면 순수문학의 정체성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정치적 올바름에 의거한 메시지 전달법을 연구하게 되었고 위기상황에서 온건한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음에 따라 그들 내부의 온건파가 힘을 잃어버리는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강경파가 주류가 되었다.
불황처럼 대중들도 인문학자들도 먹고 살기 바쁜 시기가 오면 부족해서 구하기 힘든 일자리라는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온건한 메시지를 낼 수 없게 되고 강경한 메시지가 집단 내에서 주류가 되기 쉬워져 파시스트사이비 종교가짜 뉴스 등 사기꾼들이 창궐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문학계가 아무리 강경파 위주로 변해도 결국 정치적 올바름으로 재벌과 법조계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사이다를 날리는 형식이 아닌 개개인의 복수를 정당화하는 비현실적인 줄거리 묘사를 고집함에 따라 대중들의 외면을 막을 수 없게 되어 대중들이 아닌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의 거대 정치집단의 힘과 자금을 빌리는 방식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에 따라 순수문학과 그 외 문학 간의 경계도 점점 옅어지는 추세이다. 더불어 인터넷의 발달로 여러 작품이 재평가되고 오역이나 내용 축약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되어 지금은 상황이 매우 좋아졌다. 그래도 비평적, 상업적인 필요성에 의해 여전히 순수문학이라는 개념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순수문학이 대중문학 시장의 정점을 차지하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봐도 찾기 어려워졌다. 이렇듯 과거에 비해 대중문학의 위상이 상당히 올라갔지만 고지식한 사람들은 여전히 장르문학을 폄하하기 일수다.
사실 순수문학이라고 '무조건' 수준 높은 작품만 있는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예술성이나 수준 높음을 '추구'할 뿐이지. 장르소설에 양판소불쏘시개가 있는 것처럼, 아무 알맹이 없는 순문학들도 상당수 있다.
여담이지만 장르문학에 대한 인식과는 별개로 순수문학만 보던 사람이 갑자기 라이트노벨이나 웹소설을 접하면 특유의 문체에 충격을 받는다.

4. 업계의 사정


순수문학과 그 외 문학 분류를 무시할 수가 없는 이유는 도서관이나 서점의 분류법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표준은 아니지만 사실상의 표준에 따라 분류하기 때문에 영향이 덜한 편이지만, 서점은 다르다. 이 분류법을 뒤엎으면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나 서가 분류를 다시 해야 하는데, 심한 경우엔 서가 리모델링까지 해야 하므로 서점은 굳이 이런 수고를 하려들지 않는다. 독자도 책 찾기 힘든 대격변을 겪느니 익숙한 분류대로 있기를 원할 것이다. 출판사로선 서점과 독자의 요구에 맞춰야 하므로 이런 구분법은 오래 유지될 것이다. 미터법이나 야드파운드법 등 여러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고 계속 쓰이는 이유와 비슷하다.
도서정가제와 관련해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장르문학 업계에서는 도서정가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있었던 반면 반대로 순수문학 업계에서는 도서정가제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출판사와 작가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문학 업계의 태도는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여러 소비자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문학계에서는 '''10년 동안 업계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사회초년생 작가지망생에게 사기계약을 하는 불법적 제도'''를 합법화하려고 야욕을 드러내어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한국 문단의 대부 백낙청고은을 한국 문단의 권력층으로 삼아 그의 성폭행을 고의로 은폐했다는 논란이 있다. 권력이 없다면 일개 파계승 시인에 지나지 않을 고은의 성폭력이 묵인된 것은 그를 동업자로 삼은 백낙청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백낙청과 고은 항목 참조.

5. 관련 문서



[1] 굳이 부정부패와 비리에 찌든 높으신 분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집단괴롭힘 가해자 집단과 똥군기에 찌든 똥별과 가혹행위 옹호자에게 어떻게 현실적으로 사이다를 제공할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었으나, 순수문학계에서는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2] 대표적인 예시로 한국에서는 명절증후군 문제를 타파하고 극복하는 사이다를 원하지 순수문학에서 자주 묘사하는 명절에 가족끼리 싸우는 머리 아픈 군상극을 원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스트레스 받는데 구태여 현실의 스트레스를 재연하는 위로되지 않는 순수문학을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3] 이런 경향은 2010년대 중반부터 정치적 올바름으로 정착하여 악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