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문학
1. 정의
장르문학, 또는 장르 소설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된 문학 작품을 뜻한다. 영어로는 Genre Fiction, 혹은 Genre Literature라고 표기한다. 장르문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개별 작품에 등장하는 공통적인 요소들을 묶는 문학적 분류와, 읽는 시간, 구매하는 장소 등 문학 외적 조건에 따른 마케팅적 분류다. 한국에서는 '장르 문학'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경우 전자를 가리킨다.
2. 테마에 따른 분류
특정 장르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는 문학들을 가리킨다. 대본 집필 분야의 유명 교사인 리처드 매키의 말에 따르면, '''장르적 관습'''(genre conventions)이란 "각 장르와 그 하위 장르를 정의하는 특정한 배경, 역할, 사건 따위"를 말한다(1997년). 이러한 장르적 관습을 따르면 장르 소설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관습은 항상 유동적이고 암묵적이다. 사실 장르적 관습이 무엇인가 확정 짓는 정의법 따위는 없으며, 장르 그 자체를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경우조차 없다. 어떤 작품이 어떤 장르라고 말하는 경우 이는 매우 임의적이고 주관적이다. 하지만, 시장에 책을 내놓으려는 출판사나 작가들은 그러한 장르적 관습을 뚜렷하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장르문학이란 단어는 사실 꽤 애매하다. 장르의 경계선이 없기 때문에, 해외의 장르계에서는 "장르란 곧 퍼지 집합"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결론 내린다. 퍼지 집합, 즉 경계선이 흐릿하고, 서로 겹치기도 하며, 장르라고 부르면 다 장르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식이다. 그래서 한 때 한국에서 창조된 말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장르"라는 개념은 해외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위키백과 장르 소설 항목 참조(2005년에 생성된 문서) 90년대 이후 등장한 단어로, 과거의 작품이나 작가에게 장르란 꼬리표를 붙였다가는 많은 오해를 빚을 수 있다.
사실, 장르가 없는 예술은 없기 때문에 '장르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의견도 있고. 이렇다 보니 대체할 만한 단어를 찾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애초에 장르는 제대로 정의하기 힘든 개념이라서 별 다른 수확은 없는 듯하다.
3. 마케팅에 따른 분류
출판사와 시장의 조건에 맞춘 소설은 소재에 관계 없이 어떤 장르로 분류하는 일이 상당히 많다.
- 공항 소설(Airport Novel)
두 가지로 나뉜다.
-긴 비행 시간 동안의 지루함을 달래고 싶은 사람들을 노린 소설군. 간단한 주제, 흥미로운 내용, 많은 분량이 특징이다. 스티븐 킹, 시드니 셸던, 앤 라이스, 파울루 코엘류 등이 유명하다.출처
-공항에 앉아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때우고 싶은 사람들을 노린 소설군. 간단한 주제, 흥미로운 내용, 전형적 패턴이 특징이다. 마이클 크라이튼, 톰 클랜시, 다니엘 스틸, 존 그리셤 등이 유명하다.
-긴 비행 시간 동안의 지루함을 달래고 싶은 사람들을 노린 소설군. 간단한 주제, 흥미로운 내용, 많은 분량이 특징이다. 스티븐 킹, 시드니 셸던, 앤 라이스, 파울루 코엘류 등이 유명하다.출처
-공항에 앉아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때우고 싶은 사람들을 노린 소설군. 간단한 주제, 흥미로운 내용, 전형적 패턴이 특징이다. 마이클 크라이튼, 톰 클랜시, 다니엘 스틸, 존 그리셤 등이 유명하다.
4. 장르론
4.1. 한국의 장르론
한국에서는 장르문학은 대개 '장르 소설(Genre Fiction)'을 가리킨다. 해외에서 '장르 문학'이란 개념은 없다. 즉 장르문학은 장르 픽션의 번역어라고 보아도 적절할 것이다. 원래 장르 소설(Genre Fiction)은 대중소설(Popular Fiction)이나 상업소설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즉, 대중소설의 한 형태로 장르적 관습(Genre Conventions)을 따르는 소설군을 가리킨다. 본래 문학은 소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지만, 한국에선 순수문학 또는 순문학이라는 용어가 주류 문학을 가리킨다는 암묵적 권위를 얻고 있기에, 순문학에 포함되지 않는 종류들이라는 대항적 의미로 '순' 대신 '장르'를 붙이고 있다. 적어도 2000년대 초반에는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다. 고로 한국에서 장르문학이란, 순수문학과 대비되는 소설들을 묶어서 일컫는 표현에 가깝기 때문에 국내에서 장르문학이라고 말하는 경우 장르소설과 치환해도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장르소설은 태생부터 규격이 느슨하고, 장르를 취급하는 출판사와 작가들은 많다. 다만 한국에서는 장르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논담이 드물다 보니 장르에 대한 정의나 해석,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과 대립에 대해 여러가지 헛다리 짚는 논의도 많다.
예를 들어 장르문학이 순수문학으로 대표되는 아카데미 중심의 문학 작품과 작법을 부정하고, 그보다는 자유로운 창작 방법을 기조로 삼으며 어떤 특정한 팬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이라든가. 그러나 애초에 이런 각각의 소설가들의 이런 순수문학의 작품과 작법을 부정하면서 소설을 지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건 차라리 아방가르드에 가깝다.
4.1.1. 한국 장르 문학 분류법의 역사적인 맥락
외국에선 학술적으로 장르 픽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서점과 대중들이 "장르 문학"과 "순문학"을 분류하지는 않는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순문학과 구분되는 상업지향적인 소설들을 콕 찝어서 장르 문학으로 분류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소설 시장이 대중문학과 문단문학으로 괴리된 상태로 기형적으로 발전했기에 발생했다.
일제강점기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른바 팔리는 작품들은 죄다 순수문학이나 참여문학으로도 불리는 문단문학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문단문학이 70%, 그 외 문학이 30% 정도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정치적으로 억압되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대중적으로 커졌기에, 대중지향적인 소설이 곧 자유와 민주성에 대한 순수문학(문단문학)으로 직결되었다. 해외에서는 화석 취급 당하는 장르인 시집의 비중이 유난히 높았던 이유도 이와 같다. 그래서 일본의 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은 한국 문단문학[1] 의 쇠퇴를 보고 "충격이었다." 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실제로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에는 문단문학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다. 그래도 문단문학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드는 작품도 많다. 물론 대중문학의 영향력이 커져가는 중이긴 하다.
물론 그렇다고 당대에도 추리소설이나 무협소설, 연애소설같은 장르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비중이 극단적으로 적었으며, 그 안에서 다시 장르가 갈리다 보니 개별 장르의 비중이 미미했을 뿐이다. 이후 판타지 소설, SF, 추리소설 등의 장르가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PC 통신이 유행하던 90년대 후반과, 인터넷 소설이 나온 00년대 이후다. 그 전까지는 몇몇 유명 작품만 알려진 정도로, 마니아나 문학계 사람들 외엔 그런 구분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90년대 이전에 알려진 유명작품들은 대부분 외국 소설인 탓도 있었다. 때문에 90년대 이후로는 어느 정도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통속소설과 구분된 형식으로써 순수문학과 비교하는 비평이 필요했던 것이다.
2010년대 이후에는 전자책과 웹소설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장르문학 시장도 무시 못할 정도로 급속도로 함께 성장하고 있다.[관련기사]
한때는 문예지의 양대산맥이었고, 현재도 4대 문예지로 꼽히는 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를 찾아보라. 당시는 장르 문학이 한참 주가를 올리던 시기라 문단에서도 크게 관심을 보였고, 문학과 사회는 '장르 문학의 현재와 미래'라는 특집을 냈다.
이처럼 장르 문학이라는 구분법의 단점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나름의 이유는 있었던 셈이다.
사실 순수문학이나 참여문학을 굳이 장르 문학과 분리시키게 된 데에는 문학계의 사정 외에도 출판 업계의 사정도 존재한다. 바로 도서관이나 서점의 분류법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표준은 아니지만 사실상의 표준에 따라 분류하기 때문에 영향이 덜한 편이지만, 서점은 다르다. 이 분류법을 뒤엎으면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나 서가 분류를 다시 해야 하는데, 심한 경우엔 서가 리모델링까지 해야 하므로 서점은 굳이 이런 수고를 하려들지 않는다. 독자도 책 찾기 힘든 대격변을 겪느니 익숙한 분류대로 있기를 원할 것이다. 출판사로선 서점과 독자의 요구에 맞춰야 하므로 이런 구분법은 오래 유지될 것이다. 미터법이나 야드파운드법 등 여러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고 계속 쓰이는 이유와 비슷하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반론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분석에 근거한 해석이 '장르 문학'이란 용어를 순수문학이나 참여문학으로 대표되는 문단 문학의 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력이 주도한 끝에 스스로 만들어낸 긍정적 결과물이라는 느낌을 주어 일종의 역사 왜곡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을 실시하는 측에서는 장르 문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국 문학에 있어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기득권 출판업자 및 문학계 종사자들에 의해 생성된 차별적인 단어임을 강조하며, 특히 한국 국내에서 장르 문학이라 함은 높은 확률로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소설에 대한 멸칭으로 사용된 것이 시초였고 이후 SF나 라이트 노벨 등 주류 문단의 입맛에 맞지 않고 문단문학으로서 분류되지 않는 모든 부류의 문학에 대한 멸칭으로 그 의미를 확대하여 왔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장르 문학을 기득권에 대항하는 세력이 저항의 의미를 담아 자발적으로 자칭하였다는 해석은 역사 왜곡이 된다는 것이다.
4.2. 일본의 장르론
일본의 장르 문학은 많은 수가 오늘날의 일본 라이트 노벨과 유사성을 보인다. 특히 이름 있는 일본 판타지 소설(구인사가, 로도스도 전기 등)과 일본 SF 소설(은하영웅전설, 전투요정 유키카제 등)은 오늘날의 일본 라이트 노벨와 많은 유사성을 지니며,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오늘날의 일본 라이트 노벨에 끼친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일본이라고 해서 양판소 수준의 조악한 물건이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라이트 노벨 등장 이전의 일본의 장르 문학을 오늘날의 일본 라이트 노벨과 동일시하는 것은 일본의 장르 문학이 가진 역사와 특징을 잘 모르는 경우 벌어지게 되는 흔한 실수이기도 하다. 라이트 노벨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이전부터 일본의 장르 소설은 오늘날의 일본 라이트 노벨과 비슷한 문고본 형태로 유통되었으며, 소설에 삽화를 싣는 방식도 라이트 노벨 등장 이전부터 이미 시도되고 있었다. 라이트 노벨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판타지 붐보다 늦게 나왔음을 알아두자. 때문에 오늘날의 일본 라이트 노벨 역시 라이트 노벨 등장 이전의 일본의 장르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문고본 스타일 소설 중 하나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일본도 오타쿠 중심의 라이트 노벨은 당연하게 존재하지만, 그 이전부터 있어 왔던 문고본 시장이 함께 융화되어 있을 뿐이다.
한편 라이트 노벨 등장 이후로는 판타지나 SF 등 많은 분야에서 일본의 장르 소설이 오타쿠를 타깃으로 한 라이트 노벨로 변천하는 흐름을 보이게 되었고,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일본의 장르 문학에서는 라이트 노벨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장르 문학 전체가 라이트 노벨과 동일해진 것은 물론 당연히 아니고, 추리소설이나 역사소설 등의 분야에서는 라이트 노벨로는 분류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순수문학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독자적인 장르 문학으로서 오타쿠를 타겟으로 한 라이트 노벨이 아닌 일반인을 타깃으로 한 전통적인 형태의 장르 소설이 현존하는 사례도 많다. 이러한 전통적인 형태의 장르 소설 중에는 장르 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작품들도 있다. 때문에 오늘날의 일본의 장르 문학에서는 라이트 노벨로 분류되는 오타쿠 중심의 장르 소설과, 라이트 노벨로 분류되지 않는 일반인 중심의 전통적인 장르 소설이 각각 별개로 따로 존재하고 있다. 물론 이 둘은 모두 문고본 형태로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문고본 시장이라는 같은 시장 내에서 융화되어 있기는 하다. 서로 특성을 달리 하는 두 종류의 장르 소설이 같은 시장 내에서 융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라이트 노벨의 내부적인 세분화 역시 이루어지고 있다. 중견 작가들의 경우, 오타쿠를 타깃으로 한 라이트 노벨과 오타쿠가 아닌 일반인을 타겟으로 한 전통적인 형태의 장르 소설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작품들을 연재하는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는 (일반인 중심의 전통적인 장르 소설에서도 그러했듯이) 장르 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작품들도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품들은 분류상으로는 여전히 라이트 노벨이지만, 일반적인 라이트 노벨의 레이블과는 다른 레이블을 통해서 출간되는 경우가 많다.[2] 라이트 노벨로 분류되면서도 라이트 노벨을 위한 레이블이 아닌 일반인 중심의 전통적인 장르 소설을 위한 레이블로 출간되는 사례도 있을 정도.[3] 이러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작품의 내용의 차이도 있고, 또 출간 레이블의 차이도 있기 때문에 출판사만이 아니라 독자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인 라이트 노벨과는 구분해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학원물과 능력자 배틀물이 주축이었던 2000년대의 일반적인 라이트 노벨이나 이세계물이 주축인 2010년대의 일반적인 라이트 노벨과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순수문학에 근접한 내용을 가지는 작품들을 일본에서는 이른바 라이트 문예라 호칭하고 있다.
5. 장르 문학에 대한 오해
5.1. 장르문학은 순수문학보다 수준이 떨어지는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질적 차이에 대한 논란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평범한 탐정 소설의 수준은 평범한 순문학 소설과 아마 비슷하겠지만 독자들은 평범한 순문학 소설을 읽을 일이 없다. 그런 작품은 애초에 출간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혹은 그보다 조금 나은-탐정 소설은 출간이 된다. 출간될 뿐만 아니라 적은 양이나마 대여용 도서관에 판매가 되어 독자들 손으로 들어간다. 개중에 너그러운 사람들은 무언가 신선해 보이고 표지에 시체 그림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달러라는 정가를 다 주고 구매하기도 한다.
이러한 뿌리 깊은 논란이 생기는 데에는 역설적이게도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간의 역사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바가 있다. 우리가 읽는 상당수의 순수문학은 오랜 세월을 통해 수많은 평범한 순수문학 소설들이 잊혀지는 속에서 살아남아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읽혀지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들이다. 반면 장르문학은 그 수가 적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은 가까운 과거에 출판되었다. 순수문학에 비해 그 가치를 검증할 과정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사하는가, 오문과 악문이 없는가, 맞춤법을 준수하는가 등의 기준을 적용시켜 문장력의 우위성을 근거로 장르문학보다 순수문학의 질이 높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순수문학의 질적 우위를 주장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영미권 장르문학의 사례를 근거로 한 반론도 제기된다. 중세 영어를 전문적인 수준으로 연구해가며 써낸 반지의 제왕, 얼음과 불의 노래 등을 보면 장르문학이 꼭 순수문학보다 문장의 질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일명 '크툴루 신화'라고 불리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괴기소설들은 현대 영어에 통달한 수준의 문장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문장력의 우열이 아닌 작품의 내용 그 자체의 우열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문장의 질이 훌륭하더라도 이를 통해서 묘사하는 내용까지 반드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고, 따라서 작가의 문장력이 작품의 종합적인 질과는 직결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르문학의 경우 문장의 질을 놓고 보면 어지간한 순수문학에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수준을 이룩했으나 정작 그 뛰어난 문장력을 통해 그려내는 내용은 불쏘시개 수준인 작품들이 매우 많다. 또한 순수문학 역시 수려하고 기품 있는 뛰어난 문장을 구사하지만 그 내용을 파고 들어가면 스노비즘이나 반지성주의 등의 요소가 발견되는 등 역시 불쏘시개에 가까운 그런 작품들도 의외로 적다고는 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고전으로 분류되는 명작들조차도 후대의 독자들이나 평론가들이 제기하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한 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에 국한하면, 순수문학 작가 대다수는 해당 업계의 전문가들이 마련한 나름의 심사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인기가 없어서 책 한 권 못 팔아먹은 작가라도 최소한 기본기는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르문학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당장 국내의 몇몇 라이트 노벨은 악문, 오문에다 무수한 오타들이 난무한다. 순수문학은 문장 구사력과 기본기를 예술성 추구의 중요한 기준으로 보지만, 장르문학은 상업성을 중시하다 보니 이런 면을 깡그리 무시하기도 한다. 애초에 '''"완성도가 높은 글을 쓰는가?"'''와 '''"그 글이 어떤 식으로든 상업성이 있는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완성도적 측면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장르문학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에서 정식으로 순수문학을 배운 장르문학 지망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순수문학만 읽고 써 왔기 때문에''' 잘 팔리는 장르문학을 쓰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이유. 문장은 뛰어나지만 장르문학으로서 좋은 작품은 쓰지 못하는 지망생들이 태반이라고 한다.
장르문학의 열악한 편집, 데스크 시스템이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좋은 작품을 걸러내고 교정을 하며 작가를 이끌어야 할 출판사가 제 역할을 전혀 못한다는 뜻이다. 서구권의 주류 출판사는 순수문학, 장르문학을 막론하고 막강한 데스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고위 편집자들은 상상도 못할 높은 연봉을 받으며 작품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당 업무에 대한 내공도 엄청난 수준이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 엄격한 기준선을 넘어야 출간된다. 예시로 80년대 미국 문학의 중요한 작가인 카버의 작품 일부는 편집자가 거의 새로 쓰다시피 했다는 증거가 있다. 또 킹은 "창작은 인간의 영역이고 편집은 신의 영역"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지만, 그만큼 편집자의 위상이 높다는 증거는 된다. 물론 이런 시스템의 폐해로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초히트 작품이 몇 번이나 빠꾸 먹었다는 일화들도 많다. 이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이야기 구성이나 캐릭터의 설득력은 떨어져도 최소한 문장력이나 외형은 멀쩡한 작품들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주류 출판사가 아니면 대한민국이나 서구권이나 열악할 수밖에 없고, 현실은 시궁창인 그런 불쏘시개도 많다. 다만 서구권은 튼실한 시장이 있으며 이것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게끔' 하는 최소한의 거름망은 된다. 한국 장르문학의 질적 문제가 거듭 제기되는 데에는 시장 규모라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일본 라이트 노벨도 문장 측면에서는 한국과 대동소이한 수준이다. 다만 어지간하면 출판되거나 웹에서 데뷔하기 쉬운 한국과는 달리, 데뷔가 어려운 편이고 그마저도 나름 걸러져서 수입되는 데다가 제2의 창작이라고 불리는 번역을 거치니 좀 나아보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작품이 눈뜨고 봐주기 어려운 수준의 문장을 당당하게 쓰고 있다. 수입 초기에는 나름 그쪽 나라에서도 인정받는 작품을 들여와서 이런 문제는 적었던 편이었으나 수입하는 작품이 늘어난 지금은 그렇지 않다. 또한 문장이 뛰어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가가 구사하는 수준 높은 문장력이 작품의 종합적인 질과는 직결되지 않는 케이스도 적지 않기에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과 상황이 그다지 크게 다르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문장의 질이 뒤떨어지고 내용도 좋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양판소 수준의 작품도 많을 뿐더러, 문장의 질은 순수문학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나 정작 그 뛰어난 문장력을 통해 그려내는 내용은 중2병 내지는 고2병이나 스노비즘으로 점철되어 있어 한국의 장르문학 작품들과 비교해도 의외로 별로 나은 편이 아닌 작품도 적지 않다.
이 상황까지 몰린 이유는 다르지만, 과거 출판되었던 외국 명작도 번역 문제가 컸다. 오래된 판본 중에는 중역과 오역, 문학에 재능이 없는 번역자의 단순 번역 등이 넘쳐나서 원작의 유려한 문체나 표현력의 티끌조차 느낄 수 없는 작품도 많다. 많은 출판사들이 시대가 지날수록 새로운 번역 판본이나 완역본 등을 내는 이유이며, 요즘에 구판본을 찾아 읽으면 자기도 모르게 '''"이딴 똥글을 명작이라면서 빨았다니, 내가 제정신이었나?"'''라고 느끼게 된다. 오타 문제를 제외하면 심지어 양판소 중에서 그나마 문장력이 좀 있다고 할만한 몇몇 작품보다 오문이 많은 등 읽기에 매끄럽지 못한 경우도 있다. 절대 양판소를 넘어선 그냥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를 말하는게 아니다. '''그 양판소 중에서 말이다.''' 그때 그 시절의 번역 상태가 얼마나 시궁창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이 대비가 된다는 관점은 한국 내에서의 장르문학의 발달과정을 생각하면 어폐가 크다. 대부분의 "장르" 문학의 시초는 해외의 기법을 오늘날 순문학 소설가라고 분류될 만한 사람들이 번안 등의 형태로 들여왔으며, 역사소설이나 무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한국 SF의 경우 지속적인 연재할 잡지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문학과 지성사라는 순문학계를 통해 복거일과 듀나라는 주요 작가들이 등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장르문학에 대한 비평이 이뤄지는 공간도 의외로 주류문학계에서 (비록 큰 비중은 아닐지라도) 주도되고 있다.
수준이 높지 않고 가치가 없는 소설이라는 인식도 뿌리가 깊다. 반면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 에코, J. R. R. 톨킨과 같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수준 높은 대중 작품을 쓴 작가들도 있으며, 젤라즈니나 렘처럼 문제 의식의 다변화와 탈장르화를 시도한 작가들도 있다. 여기서도 "탈장르화"를 추구한 소설들까지 장르문학의 범주로 볼 수 있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라이트 노벨 문서의 설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라이트 노벨은 점차 무장르(제로장르)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소설을 "라이트 노벨" 장르로, 또 넓게는 "장르문학"으로 분류가 가능한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대중에게 보다 쉽게 어필하는 유형은 순수문학이 아닌 대중문학이며, 소설이라는 포맷 자체가 영상매체나 스마트 기기 등 다른 매체에 밀려 대중문화의 첨단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게 된 21세기에 들어서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장르문학과 같은 과거의 대립 구조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5.2. 순수문학 문단과 평단은 장르문학을 백안시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구분 자체가 사실 모호한 개념이며 장르문학의 장치들이 순수문학 작가들에 의해 활용되는 예는 예나 지금이나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장르 문학을 무시하는 행위만큼이나 고상한 순수문학가들은 장르 문학을 등안시할 것이라는 생각 또한 편협한 시각이다. 예를 들어 포의 추리 소설, 환상 소설, 공포 소설이 단편 소설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장르이니 순수이니 따질 필요 없이 그저 훌륭한 문학으로 볼뿐. 보다 넓게 보자면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희곡도 얼마든지 장르 문학적인 장치가 다분하다. 정확히 말해서 후대의 장르 문학가들이 그의 소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일테지만 애초부터 그런 구분이 없었다는 사실. 20세기 최고의 문예가인 보르헤스가 직접 모아서 출간한 바벨의 도서관을 보면 보르헤스의 추리 소설과 공포 소설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으며 보르헤스 본인도 그러한 소설들을 많이 썼다. 어느 비평가가 포나 보르헤스의 글이 환상문학이나 추리 소설이라는 이유로 백안시 할 수 있겠는가. 당장 지금 활동하는 소설가 중에도 에코나 하루키 등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장르문학에 대한 애호를 표출하는 최고 수준의 작가들이 널려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이 구별되지 않았으며, 모든 형태가 "신소설"로서 들어왔음을 생각해보면 문학이 대중화되면서 발생한 문학의 클리셰화 및 상업화, 그에 따른 수준 낮은 소설들의 범례가 장르문학에 대한 주홍 글씨를 찍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 비평계는 주로 주류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문예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판사들이 돈도 안 되는 문예지를 발간하고 비평을 싣는 이유는 업계의 경향을 파악하여 방향성을 잡으며 유망한 신인을 발굴하려는 이유가 크다. 출판사도 엄연한 기업체로 자선사업 하는 곳이 아니다. 예술 해보려는 의도도 없진 않겠지만 어떻게든 정보를 모아서 출판계의 돈을 박박 긁어 모으려는 목적이 크다. 가령 공지영이나 박민규 같은 메가히트 작가 한둘만 잡아도 출판사는 몇 년을 먹고 산다. 어쨌든 메가히트 베스트셀러는 여전히 '''순수문학 쪽'''에서 많이 나오고, 하던 관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으니 문단과 평단은 순수문학에 더 주목하는 것이다. 장르문학이 중점적으로 다뤄지지는 않지만, 독자가 모인다는 확신이 있다면 주류 출판사들이 이들을 천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5]
귀여니로 대표되는 인터넷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최근의 장르소설에 대한 비평까지 학문적으로 신뢰할 만한 논의가 오간 곳은 문예지 중심의 비평계가 유일하다. 다만 마니아가 아니면 문예지를 사보질 않으니 이런 논의가 오가고 있음을 모를 뿐이다. 작가들이야 그냥 자기가 쓸 수 있을 작품을 만들 뿐이다. "순수문학이 킹왕짱이야!"라는 작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개개인의 문제고 전체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반지의 제왕이나 파운데이션 같은 작품을 안 쓰는 게 아니라 그냥 '''못 쓰는 것'''이다. 순수문학이든 장르문학이든 대중소설이든 문학적으로 괄목할 업적을 쌓는다면 문단으로부터의 사랑 정도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한국 문학 시장은 순수문학을 중심으로 성장했다는 내용은 위에서 언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소설, 장르소설은 비평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이 작다보니 좋은 작가가 모이지 않고, 좋은 작가가 없으니 작품의 질은 떨어졌다. 또 대중문학이나 장르문학의 번역서는 상대적으로 유명 작품만 들어오니 국내 작품의 조악함이 두드러질 수밖에. 게다가 기껏 좋은 장르문학 작품을 수입해도, 중역은 기본에다가 질 나쁜 번역, 내용 축약 등을 거쳐 멀쩡한 작품을 충공깽한 막장으로 바꾸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출판사가 할 일은 안 하고 돈 버는 데 급급해서 싼 값에 대충 찍어댔던 것이다. 이런 과거가 순수문학 외에는 저급한 문학이라는 인식에 일조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순수문학의 영향력이 위축되고, 반대로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여러 장르문학이 재평가되고 위 문단에서 문제점으로 꼽혔던 번역이나 축약 문제가 직접적으로 제기되고 수정되어 가면서 대중들이 그었던 순수 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경계는 점점 없어지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요즘 순수문학으로 문단에 등극한 사람들마저 장르 문학에 입문하려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순문학 작가들의 요청'''으로, 웹/장르소설의 작법에 대해 배우고 싶다며 강연회를 여는 경우도 있다.
5.2.1. 한국의 경우
그러나 한국은 도서정가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순문학계와 출판업계에서 도서정가제를 통해 작품의 질을 포기하고 대형서점과 공공도서관에 대중적인 지지를 잃은 책들을 강매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회초년생 작가지망생한테 10년 동안 불공정계약을 불법적인 제도를 합법화하려고 시도하고, 장르문학을 탄압하는 수준으로 견제하는 등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순문학계가 장르문학을 백안시한다는 것은 적어도 한국 순문학계 한정으로 사실이다.
6. 관련 문서
- 판타지 소설
- 무협소설 - 선협소설
- 사이언스 픽션
- 추리소설
- 게임소설
- 호러
- 다크 판타지
- 어반 판타지
- 신전기
- 서부극
- 가상역사물 / 대체역사물
- 로맨스 소설
- 로맨스 판타지
- 포스트 아포칼립스
- 스릴러
- 서스펜스
- 양판소
- 에일리언 아포칼립스
- 디스토피아
- 오컬트
- 라이트 노벨
[1] 정확하게 말하면 문단문학이 아니라 근대문학이다. 단 가라타니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흔히 쓰는 근대문학의 뜻과 그가 말하는 뜻은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 참고.[관련기사] 웹소설이 떴다, 장르 소설이 새로운 길, 웹 연재 장르소설, 전자책 시장 이끈다, "웹소설 쓰고 월 천만원 번다고? '오감만족' 장르문학 무시 말자", 웹소설 인기타고 전자책 시장 '쑥쑥'…25.4% 성장[2]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작품들 중에서는 카쿠리요의 여관밥 등이 이런 쪽으로 분류된다.[3] 대표적으로 SF 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중심으로 다루는 오랜 역사를 지닌 레이블인 하야카와 문고를 통해 출간되고 있는 성계 시리즈 등이 이러한 사례로 분류된다. 고전부 시리즈의 경우 본래 라이트 노벨을 위한 레이블인 카도카와 스니커 문고를 통해 출간되었다가 이후 레이블이 변경되었다.[4] 최내현 옮김, 북스피어[5] 순문학과 장르문학과의 관계나 장르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 같은 여러 담론들은 문예지나 작가모임에서도 오래 전부터 떡밥으로 여러 얘기가 오갔다. 이에 관심이 있다면 문예지나 관련 잡지, 작가 모임에 가입을 해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