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이 반도
Sinai Peninsula
(표준 아랍어-سيناء Sīnā, 이집트 아랍어- سينا Sī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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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동북부에 있는 지역으로 수에즈 운하 동쪽이며, 서아시아의 최서단이기도 하다. 동쪽으로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국경을 맞닿은 반도. 면적은 약 60,000㎢로 남한의 5분의 3 정도,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를 합친 면적의 3배 정도의 면적이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로 분류된다. 수에즈 운하 동편을 아시아로보고 수에즈 운하 서편을 아프리카로 분류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척박한 사막으로 보통 알려졌고 실제로도 사막이 대부분이지만 모든 지역이 사막인 것은 아니다. 1910년 시나이 서부 지역의 타나카 산에서 처음 발견된 석유를 비롯하여 망간과 우라늄 등 자원이 풍부한 것으로 밝혀져서 미국과 이스라엘이 무척 신경쓰는 지역이기도 하다. 더불어 석재·백운석·모래·자갈도 풍부하다. 지하수 또는 나일 강에서 양수기로 끌어올린 물을 이용, 토지간척과 관개를 통해 북부 연안 평야의 수백만 평이 넘는 토지를 새로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보리, 과일, 시장용 채소, 대추야자, 올리브 같은 생필품이나 채소, 곡물도 재배하는 곳이다. 하지만 영토 크기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인데다가 인구가 극단적으로 지중해 연안에 몰려 있고 지중해 연안의 관광업을 제외하면 별다른 산업이 없어 경제적 가치는 크지 않다. 거기에다가 오랜 분쟁과 테러등으로 관광업이 크게 타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접경지이자 지중해와 인도양을 이어주는 수에즈 운하가 이곳에 있다. 거기에다가 오랜 숙적인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이집트 국부의 매우 중요한 요소인 수에즈 운하가 지나가는 곳이기에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집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걸친 나라인데 시나이 반도 자체는 수에즈 운하 동쪽이므로 서아시아로 분류하는 편이고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이집트의 나머지 땅은 북동아프리카에 속해 있다.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맞닿고 있고 육로로 직접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카바 만을 통하여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가깝게 맞닿기에 무척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여기를 돌려주려고 할 때 이스라엘 극우들과 시오니즘 신봉자들의 결사반대를 맞아야 했는데, 팔레스타인을 봉쇄할 때 이집트를 통하여 땅굴이나 여러 길을 통하여 물자가 오고 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재자인 친미파 무바라크가 집권할 때는 별 탈이 없었지만 그가 2011 이집트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더더욱 국제적 주목을 받게되었다.
지형은 사막이 많은 편이며 대체로 남부가 높고 북부가 낮다. 2,642m에 달하는 카타리나산을 비롯해 2,000m대 산이 4개 있고 산지 지역은 화성암 지대로 이뤄져있으며 황량한 절벽과 깊은 계곡이 가득하다. 인구 대부분은 남쪽보다는 북쪽 지중해 연안과 수에즈 운하 근처에 모여살고 있으며 내륙에는 유목민 생활을 하는 베두인과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산다. 중동답게 석유, 망간, 구리, 철 등 자원도 풍부하다.
여담으로 이스라엘과 맞닿은 샤름 엘 셰이흐 같은 관광지는 경치가 꽤 좋고 시설도 좋지만 그만큼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비싸다.[1] 더불어 아카바 만을 두고 수영이나 모터보트를 너무 즐기지 말 것. 실제로 여기서 신나게 즐기다가 요르단 영해를 침범하는 통에 요르단 해군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른 해외 관광객도 있다고 한다.
아득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이곳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구리 광석을 찾기 위해 시나이를 탐험한 것을 기록한 BC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시나이라는 이름은 훨씬 오래 전에 알려진 듯하며,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인 숭배대상 가운데 하나인 '신'(Sin:달의 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보통 유대인에 연관된 성지로도 유명하지만 자세한 건 없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10계명을 준 장소로 유명하다. 시나이 산이 그 장소라고 널리 알려져서인지 이슬람이나 기독교에서 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는 입구, 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보니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던 곳이지만 결국 인접한 당대의 강대국 상 이집트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 뒤로 상하 이집트가 통합되어 탄생한 고대 이집트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왕국이 몰락해 아시리아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으로 이어지는 지배자들의 속국이 되며 시나이 반도도 그곳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가 지배했지만 아라비아 반도에서 번성한 나바테아 왕국[2] 의 세력이 커지며 나바테아 인들이 차지하게 됐다. 나바테아 왕국이 106년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의 영토 확장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되며 시나이 지역은 아랍 속주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로마 제국이 분열된 후에는 그대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530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시나이 산 아래에 3년에 걸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지었고 이 곳은 지금까지도 기독교 성지가 되었다. 이곳은 나중에 이슬람교가 생기면서 이 수도원을 부수지 않고 수도원 안에 작은 모스크를 만들어 이슬람에서도 성지가 되었다.
나중에 동로마가 약해지고 이슬람 세력이 커지면서 이슬람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다가 맘루크 왕조의 땅이 되었고 여기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1517년 뒤로 오스만 영토가 되어 이스탄불에서 보낸 관리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군과 영국군의 격전지였으며, 전쟁이 끝나자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 이후로 허구헌날 전쟁터가 되기 일쑤였고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피해가 꽤 컸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이 억지로 합병하였지만, 그 적은 인구로 이스라엘 본토의 3배에 달하는 넓은 시나이 지역을 다스리는 것도 어려웠고 여기에 거주하는 베두인과 충돌을 우려하여 그들을 '''꽤 잘 대해주었다'''. 정확히는 사실상 베두인들에게 자치를 맡기고 경제적 후원을 하며 뒤로 물러났기에 베두인과 충돌없이 잘 지냈다. 이스라엘 정착촌도 있었으나 이집트에게 돌려주면서 이곳의 정착촌들이 철거되기도 했다. 이스라엘 유대인 정착촌 및 정착촌들을 이어주는 도로들은 주로 시나이 반도 남부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선 소련의 도움을 얻은 이집트가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군을 수에즈 운하 동편 30 km까지 밀어냈다. 그러나 미국의 무기 원조를 받은 이스라엘이 샤론 장군의 지휘아래 수에즈 남부에서 반격작전을 벌여 수에즈 운하 서편으로 3개 사단이 넘어가 이집트 본토를 공격했고 결국 이집트도 본토가 위험한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 양국은 종전에 합의했다.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 동편 30 km 지점까지의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반환하고 30 km 이후 동쪽의 시나이반도 땅은 이스라엘 영토로 하는 조건으로 종전을 했고 이후 여러차례 협상을 통해 이스라엘은 결국 시나이 반도 전체를 1981년 이집트에게 완전히 돌려준다. 그 이유는 1980년 당시의 이집트의 인구는 약 4500만명이었던데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명에 불과했기에 그 정도의 인구로는 팔레스타인 통치도 힘든 판에 이스라엘 땅의 3배에 달하는 시나이 반도를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구 늘리려고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여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데 오기 싫어하여 거부했다. 물론 극우 유대인들은 반환을 극구 거부하며 제 2의 이스라엘을 세우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 측이 이집트와 국교를 맺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 당시 전면 물러나면서 이들도 물러나게 되었고 극히 일부 지역에 여전히 거주하면서 이집트에게 세금내며 살고 있는 중이다.
이스라엘 관광객들에게 인기있었던 관광명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 터진 누웨이바 동시다발 폭탄 테러로 유태인 관광객만 12명이 죽고 66명에 이르는 부상자(전체 사망자만 해도 31명, 부상자는 160명이 넘었다.)가 생긴 뒤로 매해 100만명 이상 가던 유태인들은 관과을 멈춰었고 지금은 친 다에시 및 다에시 지파들 성향의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나면서 사실상 가기 어렵거나 가는 사람들이 있되 관광객 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지금도 시나이 반도에 일부 유태인들이 거주한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극우들은 틈만 나면, 이곳을 되찾으려고 한다. 가능성은 낮지만, 외교를 맺은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대립관계가 현재진행형이기에 이집트도 이를 대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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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르 바이트 알 마크디스, IS 충성 맹세 이후 로고는 바꾸지 않았던 당시이다.
'''매우 위험하다.'''
이스라엘 관광객 및 해외 관광객이 많이 왔던 곳이지만 반대로 여기에 대대로 살던 베두인들이 반발하며 반이집트 폭탄 테러를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이집트 혁명 이후로 시시의 권위주의 정권에 반발한 이슬람 극단파들이 판쳐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아래에도 후술하겠지만 라파, 엘 아리쉬, 셰이크 주웨이드 지역에서 다에시가 활동하면서 정부에 협조하는 시민들을 납치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렇기에 주민들은 이집트군의 보호와 강력한 보안 조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다에쉬에 충성한다는 무장 세력들[3] 이 일부 지역을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전투[4] 는 시나이의 라파, 엘 아리쉬, 셰이크 주웨이드 등 대부분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를 진압하려는 이집트 정부군도 이곳에서 700명(!)[5] 가까이 목숨을 잃었으니 답은 뻔히 나오는 곳. 물론 이집트 정부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알기에 이슬람 무장 세력 토벌에 안간힘을 쓰는 상황이다.
2013년 8월 19일에는 시나이 지역에서 경찰관이 탑승한 버스가 로켓탄 공격을 받아 경찰 25명이 사망했으며 9월 11일에는 팔레스타인 자치구 가자지구와의 경계 지역인 이집트 라파 지역의 군 시설이 공격을 받고 적어도 6명이 사망했다.
9월 5일에 카이로에서 발생한 이브라힘 내무장관 암살미수 사건에 대해서도 신빙성은 명확하지 않으나 시나이 반도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과격파 '안사르 베이트 알마크디스(성지의 지지자들)'가 범행 사실을 인정하는 성명을 낸 바 있다.
그동안 하마스 세력이 이곳을 통하여 물자 보급을 받았다는 지적도 나와서 이집트군은 무장세력의 이동 및 무기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잇는 지하 터널을 연이어 무너트렸다. 그러나 가자 지구 생필품 공급이 막히면서 반정부 여론이 커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2014년 2월 16일에 시나이 지역 타바 인근에서 관광버스를 노린 폭탄 테러로 한국인 4명이 숨지고 21명이 부상당했다.
2015년 11월 1일에 메트로제트 소속 비행기가 시나이 반도 상공에서 추락해 탑승객 224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다에쉬는 자신들이 해당 기체를 추락시켰다고 주장했으며, 2주 뒤인 11월 17일 러시아 정부가 이를 확인하였다.
2016년 11월 기준으로 이집트 정부군이 라파, 엘 아리쉬, 셰이크 주웨이드를 중심으로 대규모 소탕 작전에 나서면서 세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다에쉬에 의한 테러가 일어나면서 콥트교신자들이 시나이 반도를 탈출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위의 테러 목록들은 굵직한 것들만 모아둔 것이고, 이집트 경찰이나 정부군, 민병대 및 협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 행위가 매우 많다.''' 주기적으로 다에시에 의한 경찰 및 군 협력자에 대한 납치 살인이 벌어지며[6] 곳곳에 IED가 깔려서 정부군 험비나 장갑 차량이 무수히 터져나감에 따라 애꿎은 징집병들만 죽어나가고 있는 지경. 심지어 UN 평화유지군을 대상으로도 이루어 졌으니 말 다했다. 이들의 테러 행위가 궁금하면 구글에 ISIS Sinai를 쳐보자. 잔인한 사진이 많이 나오므로 주의를 요함.
하지만 이집트군도 무장단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초법적인 처형과 인권침해를 하고 있어 인권단체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2017년 11월 24일 시나이 반도의 알라우다 사원에서 IS 배후로 추정되는 폭탄테러로 235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표준 아랍어-سيناء Sīnā, 이집트 아랍어- سينا Sī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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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동북부에 있는 지역으로 수에즈 운하 동쪽이며, 서아시아의 최서단이기도 하다. 동쪽으로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국경을 맞닿은 반도. 면적은 약 60,000㎢로 남한의 5분의 3 정도,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를 합친 면적의 3배 정도의 면적이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로 분류된다. 수에즈 운하 동편을 아시아로보고 수에즈 운하 서편을 아프리카로 분류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2. 기후와 자연, 인문 환경
척박한 사막으로 보통 알려졌고 실제로도 사막이 대부분이지만 모든 지역이 사막인 것은 아니다. 1910년 시나이 서부 지역의 타나카 산에서 처음 발견된 석유를 비롯하여 망간과 우라늄 등 자원이 풍부한 것으로 밝혀져서 미국과 이스라엘이 무척 신경쓰는 지역이기도 하다. 더불어 석재·백운석·모래·자갈도 풍부하다. 지하수 또는 나일 강에서 양수기로 끌어올린 물을 이용, 토지간척과 관개를 통해 북부 연안 평야의 수백만 평이 넘는 토지를 새로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보리, 과일, 시장용 채소, 대추야자, 올리브 같은 생필품이나 채소, 곡물도 재배하는 곳이다. 하지만 영토 크기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인데다가 인구가 극단적으로 지중해 연안에 몰려 있고 지중해 연안의 관광업을 제외하면 별다른 산업이 없어 경제적 가치는 크지 않다. 거기에다가 오랜 분쟁과 테러등으로 관광업이 크게 타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접경지이자 지중해와 인도양을 이어주는 수에즈 운하가 이곳에 있다. 거기에다가 오랜 숙적인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이집트 국부의 매우 중요한 요소인 수에즈 운하가 지나가는 곳이기에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3. 지리
이집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걸친 나라인데 시나이 반도 자체는 수에즈 운하 동쪽이므로 서아시아로 분류하는 편이고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이집트의 나머지 땅은 북동아프리카에 속해 있다.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맞닿고 있고 육로로 직접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카바 만을 통하여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가깝게 맞닿기에 무척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여기를 돌려주려고 할 때 이스라엘 극우들과 시오니즘 신봉자들의 결사반대를 맞아야 했는데, 팔레스타인을 봉쇄할 때 이집트를 통하여 땅굴이나 여러 길을 통하여 물자가 오고 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재자인 친미파 무바라크가 집권할 때는 별 탈이 없었지만 그가 2011 이집트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더더욱 국제적 주목을 받게되었다.
지형은 사막이 많은 편이며 대체로 남부가 높고 북부가 낮다. 2,642m에 달하는 카타리나산을 비롯해 2,000m대 산이 4개 있고 산지 지역은 화성암 지대로 이뤄져있으며 황량한 절벽과 깊은 계곡이 가득하다. 인구 대부분은 남쪽보다는 북쪽 지중해 연안과 수에즈 운하 근처에 모여살고 있으며 내륙에는 유목민 생활을 하는 베두인과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산다. 중동답게 석유, 망간, 구리, 철 등 자원도 풍부하다.
여담으로 이스라엘과 맞닿은 샤름 엘 셰이흐 같은 관광지는 경치가 꽤 좋고 시설도 좋지만 그만큼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비싸다.[1] 더불어 아카바 만을 두고 수영이나 모터보트를 너무 즐기지 말 것. 실제로 여기서 신나게 즐기다가 요르단 영해를 침범하는 통에 요르단 해군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른 해외 관광객도 있다고 한다.
4. 역사
4.1. 고대
아득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이곳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구리 광석을 찾기 위해 시나이를 탐험한 것을 기록한 BC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시나이라는 이름은 훨씬 오래 전에 알려진 듯하며,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인 숭배대상 가운데 하나인 '신'(Sin:달의 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보통 유대인에 연관된 성지로도 유명하지만 자세한 건 없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10계명을 준 장소로 유명하다. 시나이 산이 그 장소라고 널리 알려져서인지 이슬람이나 기독교에서 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는 입구, 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보니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던 곳이지만 결국 인접한 당대의 강대국 상 이집트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 뒤로 상하 이집트가 통합되어 탄생한 고대 이집트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왕국이 몰락해 아시리아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으로 이어지는 지배자들의 속국이 되며 시나이 반도도 그곳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가 지배했지만 아라비아 반도에서 번성한 나바테아 왕국[2] 의 세력이 커지며 나바테아 인들이 차지하게 됐다. 나바테아 왕국이 106년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의 영토 확장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되며 시나이 지역은 아랍 속주에 속하게 되었다.
4.2. 중세
그 뒤 로마 제국이 분열된 후에는 그대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530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시나이 산 아래에 3년에 걸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지었고 이 곳은 지금까지도 기독교 성지가 되었다. 이곳은 나중에 이슬람교가 생기면서 이 수도원을 부수지 않고 수도원 안에 작은 모스크를 만들어 이슬람에서도 성지가 되었다.
4.3. 근세
나중에 동로마가 약해지고 이슬람 세력이 커지면서 이슬람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다가 맘루크 왕조의 땅이 되었고 여기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1517년 뒤로 오스만 영토가 되어 이스탄불에서 보낸 관리의 지배를 받았다.
4.4. 근현대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군과 영국군의 격전지였으며, 전쟁이 끝나자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 이후로 허구헌날 전쟁터가 되기 일쑤였고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피해가 꽤 컸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이 억지로 합병하였지만, 그 적은 인구로 이스라엘 본토의 3배에 달하는 넓은 시나이 지역을 다스리는 것도 어려웠고 여기에 거주하는 베두인과 충돌을 우려하여 그들을 '''꽤 잘 대해주었다'''. 정확히는 사실상 베두인들에게 자치를 맡기고 경제적 후원을 하며 뒤로 물러났기에 베두인과 충돌없이 잘 지냈다. 이스라엘 정착촌도 있었으나 이집트에게 돌려주면서 이곳의 정착촌들이 철거되기도 했다. 이스라엘 유대인 정착촌 및 정착촌들을 이어주는 도로들은 주로 시나이 반도 남부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선 소련의 도움을 얻은 이집트가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군을 수에즈 운하 동편 30 km까지 밀어냈다. 그러나 미국의 무기 원조를 받은 이스라엘이 샤론 장군의 지휘아래 수에즈 남부에서 반격작전을 벌여 수에즈 운하 서편으로 3개 사단이 넘어가 이집트 본토를 공격했고 결국 이집트도 본토가 위험한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 양국은 종전에 합의했다.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 동편 30 km 지점까지의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반환하고 30 km 이후 동쪽의 시나이반도 땅은 이스라엘 영토로 하는 조건으로 종전을 했고 이후 여러차례 협상을 통해 이스라엘은 결국 시나이 반도 전체를 1981년 이집트에게 완전히 돌려준다. 그 이유는 1980년 당시의 이집트의 인구는 약 4500만명이었던데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명에 불과했기에 그 정도의 인구로는 팔레스타인 통치도 힘든 판에 이스라엘 땅의 3배에 달하는 시나이 반도를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구 늘리려고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여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데 오기 싫어하여 거부했다. 물론 극우 유대인들은 반환을 극구 거부하며 제 2의 이스라엘을 세우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 측이 이집트와 국교를 맺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 당시 전면 물러나면서 이들도 물러나게 되었고 극히 일부 지역에 여전히 거주하면서 이집트에게 세금내며 살고 있는 중이다.
이스라엘 관광객들에게 인기있었던 관광명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 터진 누웨이바 동시다발 폭탄 테러로 유태인 관광객만 12명이 죽고 66명에 이르는 부상자(전체 사망자만 해도 31명, 부상자는 160명이 넘었다.)가 생긴 뒤로 매해 100만명 이상 가던 유태인들은 관과을 멈춰었고 지금은 친 다에시 및 다에시 지파들 성향의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나면서 사실상 가기 어렵거나 가는 사람들이 있되 관광객 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지금도 시나이 반도에 일부 유태인들이 거주한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극우들은 틈만 나면, 이곳을 되찾으려고 한다. 가능성은 낮지만, 외교를 맺은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대립관계가 현재진행형이기에 이집트도 이를 대비하려고 한다.
5. 현재
[image]
-안사르 바이트 알 마크디스, IS 충성 맹세 이후 로고는 바꾸지 않았던 당시이다.
'''매우 위험하다.'''
이스라엘 관광객 및 해외 관광객이 많이 왔던 곳이지만 반대로 여기에 대대로 살던 베두인들이 반발하며 반이집트 폭탄 테러를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이집트 혁명 이후로 시시의 권위주의 정권에 반발한 이슬람 극단파들이 판쳐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아래에도 후술하겠지만 라파, 엘 아리쉬, 셰이크 주웨이드 지역에서 다에시가 활동하면서 정부에 협조하는 시민들을 납치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렇기에 주민들은 이집트군의 보호와 강력한 보안 조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다에쉬에 충성한다는 무장 세력들[3] 이 일부 지역을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전투[4] 는 시나이의 라파, 엘 아리쉬, 셰이크 주웨이드 등 대부분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를 진압하려는 이집트 정부군도 이곳에서 700명(!)[5] 가까이 목숨을 잃었으니 답은 뻔히 나오는 곳. 물론 이집트 정부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알기에 이슬람 무장 세력 토벌에 안간힘을 쓰는 상황이다.
2013년 8월 19일에는 시나이 지역에서 경찰관이 탑승한 버스가 로켓탄 공격을 받아 경찰 25명이 사망했으며 9월 11일에는 팔레스타인 자치구 가자지구와의 경계 지역인 이집트 라파 지역의 군 시설이 공격을 받고 적어도 6명이 사망했다.
9월 5일에 카이로에서 발생한 이브라힘 내무장관 암살미수 사건에 대해서도 신빙성은 명확하지 않으나 시나이 반도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과격파 '안사르 베이트 알마크디스(성지의 지지자들)'가 범행 사실을 인정하는 성명을 낸 바 있다.
그동안 하마스 세력이 이곳을 통하여 물자 보급을 받았다는 지적도 나와서 이집트군은 무장세력의 이동 및 무기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잇는 지하 터널을 연이어 무너트렸다. 그러나 가자 지구 생필품 공급이 막히면서 반정부 여론이 커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2014년 2월 16일에 시나이 지역 타바 인근에서 관광버스를 노린 폭탄 테러로 한국인 4명이 숨지고 21명이 부상당했다.
2015년 11월 1일에 메트로제트 소속 비행기가 시나이 반도 상공에서 추락해 탑승객 224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다에쉬는 자신들이 해당 기체를 추락시켰다고 주장했으며, 2주 뒤인 11월 17일 러시아 정부가 이를 확인하였다.
2016년 11월 기준으로 이집트 정부군이 라파, 엘 아리쉬, 셰이크 주웨이드를 중심으로 대규모 소탕 작전에 나서면서 세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다에쉬에 의한 테러가 일어나면서 콥트교신자들이 시나이 반도를 탈출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위의 테러 목록들은 굵직한 것들만 모아둔 것이고, 이집트 경찰이나 정부군, 민병대 및 협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 행위가 매우 많다.''' 주기적으로 다에시에 의한 경찰 및 군 협력자에 대한 납치 살인이 벌어지며[6] 곳곳에 IED가 깔려서 정부군 험비나 장갑 차량이 무수히 터져나감에 따라 애꿎은 징집병들만 죽어나가고 있는 지경. 심지어 UN 평화유지군을 대상으로도 이루어 졌으니 말 다했다. 이들의 테러 행위가 궁금하면 구글에 ISIS Sinai를 쳐보자. 잔인한 사진이 많이 나오므로 주의를 요함.
하지만 이집트군도 무장단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초법적인 처형과 인권침해를 하고 있어 인권단체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2017년 11월 24일 시나이 반도의 알라우다 사원에서 IS 배후로 추정되는 폭탄테러로 235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1] 이집트 물가는 생필품은 그렇게 비싸지 않았지만 2000년대와서 많이 올라서 민심의 반발이 거세다. 하지만, 여긴 오래전부터 관광지로서 물가가 더더욱 비싼 곳이다.[2] 페트라 유적지로 유명한 아랍 문명이다.[3] 안사르 바이트 알 마크디스의 세력 상당수가 떨어져 나와 다에시 시나이 주(윌라야 사이나)를 결성했다.[4] IS의 전투 양상을 보면 게릴라 전에 가깝다. 직접적인 공격보다 숨어서 IED를 터뜨리는 식이 많은 편이다.[5] 적어도 2~3년 만에 나온 수치이다(...).[6] 골때리는 게 협력자가 아니란 것이 증명되어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