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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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공군의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에이스 파일럿이자 '''붉은 남작'''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사촌동생으로 유명하다.'''소이탄에 의해 불타고 있는 도시를 보고 있노니 너무 즐겁고 멋지다.'''
2. 생애
1913년 18세의 나이로 사관후보생으로 올라우 제 4 유사르연대에 배속된 그는 칼세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후 1914년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육군 대대장으로 종군하였는데, 그러다가 사촌형 붉은 남작을 따라 1917년에 할레 항공학교로 전속한다.그곳에서 그는 뒤늦게나마 항공 기술을 습득한 후, 1918년 3월에 종형제이던 붉은 남작의 11전투기 중대에 배치되어 파일럿로 활약하며 1차 대전 당시에는 8기를 격추한다.
그러다가 그는 독일 제국의 패전을 맞이하게 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1920년, 중위로 전역한다. 전역 후에는 하노버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한 후 독일 국방군에 재입대한 그는 소위로 11기병연대에 배치되었는데, 아돌프 히틀러가 극비리에 진행하던 루프트바페 창설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
1929년에 대위로 승진한 리히트호펜은 4월부터 로마에 있던 독일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이탈리아 공군을 연구하라는 히틀러의 특명을 받고 이탈리아의 공군 장성들과 친분을 쌓으며 나날이 이탈리아의 전투기, 폭격기, 공군 전술 등을 익히게 된다. 1931년, 독일로 귀국하여 1933년 10월에 꿈에도 그리던 루프트바페의 재건이 성공하여 육군 11기병연대에서 다시 공군 항공성 개발국으로 전속한다. 참고로 1차 대전 때는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했으나, 2차 대전 때는 폭격기 조종사로 전향하게 된다.
1936년 중령이 된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콘도르 군단의 일원으로 참전하는데, 이 때 그의 '''악마성이 눈 뜨기 시작한다.'''
그는 1937년 4월에 스페인 공화파의 한 도시에 Ju 87과 He 111로 무차별 폭격을 가해 일반 시민 수백 명을 한 순간에 사망시킨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하고 악명높은 '''게르니카 공습'''. 게르니카의 참상에 대해서는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에도 아주 잘 나타나 있으며 루프트바페가 민간인에게 저지른 고의적인 전쟁 범죄 중 하나였다. 이 공로로 그는 11월에 소장으로 승진되었고 스페인 내전이 종료되자 다시 독일로 귀환한다.
그러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특별항공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에 종군했다. 여기서도 그의 잔혹한 악마성은 여전했는데, 전쟁이 발발하지마자 폴란드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뷔에른 시에 공습을 명령하여, 민간인들을 그대로 대량 살상해 버린다.
훗날 1940년 7월에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자 제 8항공군단장이 되어 영국 공습에 총력을 기울이는데, 여기서도 그는 Ju 87과 Ju 88, He 111 등으로 영국의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를 좋아했고, 민간인들을 향해 거침없이 '''소이탄'''을 투하해댔다. 하지만 그의 '''사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41년 4월에 크레타 섬 강습 작전의 지휘관으로도 참가했는데, 그 작전에서도 역시 크레타 섬을 거의 재기불능 상태 일보 직전까지 만들어 놓았고, 같은 해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나치당이 명명한 '''열등한 짐승'''인 소련을 향해서는 더욱 거침없이 무차별적인 민간인 폭격을 가행했다. 그러다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2년 2월에 상급대장으로 승진, 16일에는 무려 원수 계급이 주어졌다. 이는 유례 없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가 공군원수가 됐을 때의 나이가 47세로 이는 당시 루프트바페 내에서는 물론, 독일 국방군 전체 내에서 '''최연소''' 원수였다.
그러나 그도 점점 짙어지는 패전의 기색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1943년 말에 이르어 연합군이 물량공세로 루프트바페를 완전히 압도하자 리히트호펜은 더 이상 활약할 수 있는 전장을 잃고 말았고, 1944년 10월 27일에는 평소에 지병으로 앓고 있던 뇌종양의 급작스러운 발병으로 의병 제대한다. 1945년 5월 8일 종전이 되자 그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종양으로 사망한다.
3. 평가
그를 독일판 커티스 르메이, 아서 해리스라고 하기에는 심하게 무리가 있다. 그는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던 도시와 그 민간인들에 대해 평생 동안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후회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여기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명언(?) 중 하나인 "소이탄에 의해 불타는 도시와 적들을 보면 멋지고 기분이 좋다"라고 했다는 점에서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났다. 르메이나 해리스도 폭격과정에 민간인 피해가 발생해도 알게 뭐야 식의 태도를 취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폭격 작전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했지, 그걸 가지고 기분이 좋다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즉 저 둘에 빗대는건 두 사람을 모욕하는거나 다름없다. 또한 그는 소이탄을 광적으로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스페인 공화파를 시작으로 폴란드, 영국, 그리스, 그리고 소련에까지... 그가 지시한 모든 폭격 임무에는 늘 소이탄이 뒤따랐다. 소이탄이 얼마나 비인도적인 무기임을 알고 있다면 경악하고 놀라고도 남을 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