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군 무오설

 

1. 개요
2. 깨끗한 국방군 이론
3. 실상
4. 학계
4.1. 고의적으로 은폐한 경우
4.2. 국방군의 만행을 인정하면서 옹호한 경우
5. 매체에서
5.1. 국방군 무오설을 부정하는 작품들
6. 유사품
7. 관련 문서


1. 개요


독일어 : Saubere Wehrmacht, Legende von der sauberen Wehrmacht
영어 : Clean Wehrmacht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하에서 일어난 전쟁범죄들은 국방군의 책임이 아니라는 유사역사학적인 주장을 말한다. 영어로는 깨끗한 국방군(Clean Wehrmacht) 설이라 불리며,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국방군 무오설이라는 표제어를 채택하고 있다. 국방군 무죄설이라고도 불리며, 일본군육군악옥론/해군선옥론에서 따와서 국방군 선옥론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선옥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므로 다소 부적절한 명칭이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나치독일의 독일국방군이 철저한 문민통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흔히들 나치독일에서 문민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국방군 무오설이 나올 수가 없다. 국방군 무오설은 독일의 전쟁범죄는 나치당과 히틀러가 주도했다는 것이고, 독일 군부는 그저 히틀러의 명령대로 전쟁을 수행했을 뿐이기에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 만약 군부가 나치 독일을 주도세력이었다면 이러한 국방군 무오설이 나올수 없다.

2. 깨끗한 국방군 이론


깨끗한 국방군 설, 즉 국방군 무오설에 따르면 나치 독일이 자행한 잔학한 전쟁범죄들은 '사악한 나치당의 사병'인 슈츠슈타펠이 자행한 것이고, 국방군은 그저 나라를 위한 전쟁을 수행했을 뿐인 '군대'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나치즘에 입각하여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슈츠슈타펠과 달리 국방군은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며 신사적으로 전쟁을 했고, 무엇보다 국방군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징집된 병사들이며 따라서 죄도 없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하에서 자행된 전쟁범죄가 일본군 이상으로 잔학했다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지라, 독일 국방군을 좋아하는 밀리터리 매니아들 중에서 독일을 과하게 옹호하는 입장이 강한 사람들은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을 어떻게든 옹호하기 위해서 이 설을 믿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1]

3. 실상


'''직접적인 학살 수행의 예시'''

폴란드 전쟁 둘째 날에 포즈난 철도역에 폭탄을 투하했어요. 폭탄 열여섯 발 중 여덟 발이 도시 안으로 떨어졌지요. 집들 한가운데로요. 마냥 즐겁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셋째날에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심정이 되었고 넷째 날에는 '''즐거워졌어요.''' 들판에서 달아나는 군인들을 기관총으로 몰아가고 총알 몇 발로 뻗게 만드는 일 말이에요! ...(중략)... 사람들한테도 그랬지요. 길거리는 지나가는 한 무리를 습격했습니다. 우리는 삼기편대로 비행했지요 ...(중략)... 그러다가 우리 비행기가 격추를 당했지요. 너무 분했어요. 두번째 엔진이 뜨거워지기 전에 저는 단박에 어느 폴란드 마을 위로 날아갔고, 거기에다 폭탄을 퍼부어버렸어요. 폭탄 서른두 개를 모조리 그 마을에 명중시키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죠... 무방비 상태의 마을 하나에 서른두 개의 폭탄... 전부 명중했으면 분명 백 명은 죽였을 거요... 어떤 환상적인 도로에서는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저는 20m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했지요... 제대로만 됐다면 '''재밌었을 겁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모두 고꾸라뜨렸죠. 길거리에 오가는 버스나 포크스톤의 민간열차도 말입니다... 저는 자전거 타는 놈들까지 다 쏴버렸어요!

애슈퍼드에서 시장 광장에 무슨 집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많았고 연설도 하고 있었죠. 그곳을 폭격했고 그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진짜 재밌었어요!'''

저는 직접 영국 남부로 비행했어요 ...(중략)... '''우리는 여자들이나 유모차를 탄 아기들도 죽였죠.'''

저는 프랑스에서 민간인 한 명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죠.

(대화 상대: 레지스탕스였나요?)

무슨 헛소리입니까? 그저 '''자전거가 탐나서입니다.'''

친위대 중위가 저한테 같이 어딘가 가자고 하더군요. 우리는 어느 막사 같은 곳에 가서 유태인 1500명을 죽였죠. ....중략...여자와 아이들도 있었어요. 가족들은 모두 처절하게 울부짖었고, 몇 명은 돌처럼 마비되어 있었죠.[2]

[3]

출처: 《나치의 병사들: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민음사

'''간접적 방관의 예시'''

...함부르크사회조사연구소가 개최한 '국방군 범죄'전시회는 독일에서 격렬한 과거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95년에서 1999년 사이에 여러 도시에서 국방군의 전쟁 범죄 기록과 유대인 학살 가담 기록이 전시되었다. 특히 군인 출신인 노년층 관람객들은 이 전시회에 분개하곤 했다. 그 이후로 국방군은 결백하다는 신화는 완전히 무너졌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전시회를 둘러싼 논쟁에 참여한 수많은 참전 군인들이 국방군이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었음을 극구 부인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도청 기록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이는 심리적 억압 기제나 부인 기제 때문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섬멸전과 홀로코스트에 속한다고 간주하는 수많은 범죄를 당대에는 전혀 다르게 해석했던 것'''이다. 이런 범죄는 예컨대 빨치산 토벌 등으로 해석되었다. 여기서 당대의 프레임과 현재의 프레임 간의 차이가 극명해진다.

그러나 도청 기록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 기록들을 보면, '''대다수 군인들이 유대인 학살 과정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오늘날까지 연구자들이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측면들까지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내용과 자신의 행동을 전혀 결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국방군 부대들이 허다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점령지에서 유대인의 조직적 처형에 여러 방식으로 관여했음을 대다수 군인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이미 알고 있었다. '''즉 국방군 군인은 처형을 직접 수행하거나, 참관하거나, 공범이나 보조 인력이나 소문의 전달자로 거기 관여했다.''' 아주 드물지만 다른 방식으로 관여하기도 했는데, 가령 이를 막기 위해 장교 개개인이 항거하거나 희생자를 구하기도 했고, 또 사뭇 과감한 행동을 통해 유대인을 죽이려는 무장친위대를 방해하기도 했다.[각주268번]

 물론 이는 조직적이지 않은 예외적 사례였다. '''볼프람 베테는 국방군 군인 1700만 명 중 이러한 "구조를 통한 저항" 사례가 약 100건인 것으로 추산한다.'''[각주269번]

바비야르 협곡에서 단 이틀간 3만명 이상을 총살한 것 같은 대규모 집단 학살 중 어느 것도 국방군의 관여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941년 중반 이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직접적 가해자와 참관자 집단을 넘어 널리 퍼져 나가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전해지는 내용이 무시무시할수록,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할수록, 여타 정보 매체가 제한될수록, 소문은 더욱 흥미로운 매체가 되고 더욱 빨라진다. 도청 기록에서 유대인에 대한 집단 범죄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일은 드물었다. 전체 기록의 0.2%만이 이에 대한 대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군인들의 프레임 안에서 범죄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대화의 절대적 숫자가 적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런 대화들을 보면, 실로 모든 사람이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알거나 최소한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의 독자에게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런 범죄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펠베르트(Felbert): 유대인을 몰아내던 지역에 직접 있어 봤나요?

키텔(Kittel): 네.

펠베르트: 그게 아주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습니까?

키텔: 그렇지요. 

펠베르트: 부녀자와 아이들까지요? 전부 다요? 

키텔: 전부 다요. 끔찍하지요.

펠베르트: 그들을 기차에 태웠나요?

키텔: 그래요. 하지만 그저 기차에 태우기만 한 게 아니에요. 제가 본 건 정말 끔찍했어요! 저는 부하를 뒤따라 보내면서 말했지요. "이제 그만둘 것을 명령한다.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다." 라고요. 예를 들면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이 있었어요.[각주270번]

 친위대와 보안대가 수행했지요. ...(중략)... 일요일 이른 아침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일제사격 소리가 두 번 나고 그다음 소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어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말했죠. "왜 총을 쏜 거야?" 참모부 배속 장교가 말했죠. "대령님, 가 보셔야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 근처까지만 갔지만 그래도 볼 건 다 봤어요. ...(중략)... 한 사람이 명령을 하면 스무 명의 인간이 마치 과녁처럼 넘어지면서 구덩이로 떨어졌지요. 그다음에 제일 끔찍한 일이 벌어졌죠. 이때 저는 거길 떠났어요. 그리고 말했죠. "내가 개입해야겠다" 라고.[각주271번]

이 이야기는 프랑스 메스 지역 주둔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하인리히 키텔(Heinrich Kittel) 중장이 1944년 12월 28일에 말한 것이다. 1941년 대령이던 그는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의 북부집단군 지휘관예비대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1941년 7월과 11월 사이에 약 1만 4000명의 유대인이 처형당했다. 이 처형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역사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다. 그 자신은 격앙된 관찰자 시점에서 이 상황을 서술한다. 키텔은 고위 장교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개입할 여지가 상당히 컸다. 앞의 이야기 말미에 드러나듯이, 그는 일반 병사와는 달리 수동적 관망자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도 있었다. '''도청 기록에서는 이런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가 흔하게 나타나지만, 사건에 능동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는 대개의 경우 감춰져 있다. 화자는 이런 식으로 무고한 보고자 역할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목격자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 방식을 볼 수 있다. 키텔의 상세한 묘사 역시 특이한 일이 아니다. 처형은 많은 이야깃감을 제공하며, 죄와 책임에 대해 생각하고 물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두 가지 사실이 놀라울 것이다. 첫째, 펠베르트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일은 매우 드물다. 보통의 대화를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세부적인 면에서는 대화 상대와 청자들을 놀라게 만들지만, '''섬멸 행위 자체는 전반적으로 보아 놀라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펠베르트도 '기차'에 대해 묻는다. '''다시 말해 그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세부 사항에 대해서 묻는다. 청자가 아연실색하거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요약하자면, 유대인 학살은 군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최근 여러 연구에서 당시 군인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보다도 더 잘 알았다.'''[각주272번]

 ...(중략)... 이런 배경을 고려할 때 우리는 거의 모두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이 이야기들은 종종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는) 놀라운 반전을 품고 있다. 21세기의 청자인 우리는 아주 긴장하며 키텔이 어떤 식으로 학살을 막으려 했는지 듣기를 기대하지만, 그의 이야기의 요점은 이런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키텔: 저는 자동차에 앉아서 보안대원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야외에서 이런 총살을 집행하는 것을 엄금하겠다. '''숲 속에서 총살하거나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한다면,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리고 내일 또 총살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우리는 깊은 우물에서 먹을 물을 긷는데, 시체에서 나오는 물이 그리로 스며들 테니까." 제가 있던 곳은 온천지 메스켐프였지요.[각주273번]

 다우가프필스 북쪽에 있던.[각주274번]

키텔이 그 일에서 불만스러웠던 것은 (여기저기서 끔찍하다거나 제일 끔찍한 일 같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무엇보다 기술적 문제였다. '''즉 총살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자리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키텔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전염병 위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총살을 집행한 보안대원들은 식수 공급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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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치의 병사들: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민음사. 165p ~ 170p에서 발췌.

국방군 무오설을 믿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다르게, 국방군이 그저 전쟁만 수행한 깨끗한 군대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모든 국방군 병사들이 학살과 전쟁범죄에 동조한것은 아니지만 많은 국방군 특히 육군병사들 대부분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전쟁범죄의 전력을 가지고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독일에서 그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었던 것에서 보이듯이, 당시 독일 국민의 상당수는, 심지어 여자, 병약자, 학생, 유아들마저도 친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치 이념에 동조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당연한 원리로 이런 성향의 국민들이 징집되어 구성된 국방군 역시도 나치 신봉자 비율이 상당했다. 슈츠슈타펠'''만''' 포로,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범죄를 도맡아 한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국방군 역시 무장친위대와 같은 급은 아니라도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들을 저질렀다. 제3제국 휘하 군대가 벌인 각종 전쟁범죄는 나치당과 슈츠슈타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 역시 사실이지만 어차피 친위대는 해골부대, 아인자츠그루펜 등 학살 그 자체를 목표로 작전을 수립하는게 그 조직의 존재이유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국방군이 나치당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전쟁범죄를 벌인 피해자라는 소리는 어불성설이고, 결국 이들도 전쟁범죄를 일으킨 가해자들이었으며 분명 본인들은 임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국방군은 슈츠슈타펠 휘하 부대들(해골부대(토텐코프 연대), 아인자츠그루펜, 게슈타포, 36 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 카민스키 여단,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 등등)만큼은 아니지만 국방군 휘하 부대도 상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슈츠슈타펠에는 유대인 학살 수용소의 경비와 운영 등 아예 홀로코스트 자체를 실무적으로 도맡아 수행한 SS해골부대(SS-Totenkopfverbände)가 있었고 따로 주임무로 학살을 전담하는 아인자츠그루펜도 슈츠슈타펠 소속이었기 때문에 국방군은 슈츠슈타펠처럼 유태인 학살같은 조직적이고 직접적인 대규모 학살에 관여한 것 자체는 슈츠슈타펠'보다는' 적지만, 슈츠슈타펠이 저지른 학살이 워낙 많아서 상대적으로 묻히는 것일 뿐이지 국방군도 만만치않은 횟수의 학살 행위를 저질렀으며, 직접적인 학살 행위에 참여한 것 외에도 친위대의 학살 행위의 뒷처리를 하는 증거 인멸행위(즉 시체 소각,매장)에 주로 동원되어 이를 수행한 것도 상당하였다.
실상은 이런데도 전문적인 역사학계의 학설에 기반한 국방군옹호론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상당히 퍼져 있었다. 꽤나 최근까지도 학계에서는 '더러운 SS, 깨끗한 국방군'이라는 통념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학계의 문제가 아니라 종전 직후의 국제정세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냉전 당시에는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했고''' 독일의 종전 직후 사회분위기 자체가 공산주의와 나치당에 책임을 돌리는 풍조가 강했으며, 이에 따라 독일이라는 '''국가의''' 오점은 최소화하고 이미 패망한 나치 '''정권의''' 전범행각을 부각하는 학계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소련 역시 동독의 재무장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러자면 독일 국방군 출신들에게 어느 정도는 일을 맡겨야 했기 때문에 역시 비슷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에 양측은 비교적 소수였던 친위대만을 희생양으로 삼고 국방군에겐 면죄부를 줌으로써 신생 군대의 탄생을 위한 포석을 깐다.
이런 입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70~80년대[4][5]가 되어 68운동이 일어나고 나서야 변화를 보였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독일군이 깨끗한 국방군 이론(Saubere Wehrmacht, Legende von der sauberen Wehrmacht)을 내려놓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6]
당시 독일인들의 인식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 것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영국/미국에 대한 적의가 크게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폴란드소련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는데, 폴란드에 대해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할 때 독일 제국의 영토 일부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적대적이었다. 폴란드 회랑 지방은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았으며, 여기에 기존의 폴란드를 비롯한 슬라브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우월감이 1차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와 갈등을 치르면서 인종적 적대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차 대전 이후 독일 본토 일부가 할양되었을 때 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나라가 폴란드였으며,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는 전쟁을 회피하려던 독일 군부조차 폴란드 침공을 적극 옹호할 정도로 독일은 폴란드에 적대적이었다.[7]
소련에 대해서는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유대-공산주의의 본산인 소련이 독일인의 삶의 터전을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이 독일인들 사이에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은 거의 1천년에 가까운 동방진출의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제 3제국까지 이어지면서 동유럽을 독일이 당연히 먹어야 할 땅으로 인식했다. 여기에 앞서 말했듯이 슬라브인들에 대한 독일의 기존의 우월감까지 겹치면서 이러한 공포는 인종적 적대감으로 번졌으며, 이에 따라 '''저 놈들 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그러니까 죽기 전에 먼저 선빵때려서 다 먹어치우자!'''라는 실로 병맛스러운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폴란드 및 소련과의 전쟁은 생존영역을 두고 싸우는 혈투지만, 영미 연합군과의 전쟁은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8] 이 때문에 국방군은 서부전선에서는 대체적으로 신사적으로 전투에 임했고 이것이 깨끗한 국방군 이론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동부전선에 비하면 미미하기는 하지만 서부전선에서도 어느 정도 전쟁범죄가 있었다.[9]
이러한 실태와 달리 깨끗한 국방군론이 퍼질 수 있게 된 원인은 종전 직후의 국제정세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종전 이후 독일은 군을 완전히 해체당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의 낙인을 받고 군대를 조직할 수 없게 되었지만, 당장 미국과 소련 모두 전범국이고 뭐고 간에 일단 방패막이로써의 독일군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군'의 재건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과정에서 국방군의 전쟁범죄는 대부분 슈츠슈타펠에게 뒤집어 씌워지게 된 것이다. 슈츠슈타펠이 옹호할만한 조직은 결코 아니지만 남이 한 일까지 덮어쓴 셈이다.
전후에 살아남은 국방군 복무자나 장성들, 전쟁을 겪은 독일 민간인들 역시도 회고록을 비롯한 서적들을 집필하면서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당, 슈츠슈타펠에게 돌리는 '''책임전가자기합리화의 진수'''를 시전했는데, 이들의 의견 역시도 깨끗한 국방군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들 가운데 오직 나라를 위해 복무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도 본의든 아니든 결국 침략전쟁을 수행한 일원임에는 분명하며, 독일군의 전쟁범죄는 이러한 '깨끗한 일부'로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변호하자면 슈츠슈타펠 중 일부가 전범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슈츠슈타펠이 전쟁범죄 집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국방군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연방군(서독군)은 자신들이야말로 이런 "국방군 무죄설"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방군의 모든 것들을 흑역사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전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물론 국방군의 군국주의의 원천이었던 구프로이센 영역이 모조리 공산국가인 동독이나 폴란드나 소련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인적 유입이 없어진지라, 서독군이 전통을 내세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냉전시대에는 오히려 동독군이 프로이센군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강조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그리하여 국방군으로부터 내려오는 군복, 군기, 부대, 조직의 전통은 깡그리 부정하고 전후 거의 모든 것을 미군식으로 바꿔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러한 '깨끗한 국방군'을 비판하는 서적으로는 볼프랑 베테가 저술한 <독일 국방군 - 2차 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가 있다.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다. 다만 해당 서적은 역자 후기에서 비판했듯이, 자료를 잘못 인용한 경우도 많으며 본문에서도 '~~했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추측식 서술로 인한 무리한 논리 전개와 치우친 관점으로 공정성의 논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국방군이 학살에 조직적으로 개입, 방관했다는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10]
2차 대전 당시 육군 원수였던 발터 모델은 "군대는 반드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며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무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비판한 바 있다. 군인은 당연히 현 정부에 대하여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믿어온 만큼 정치적 발언조차 금기시켰으며, 정 하고 싶으면 군복을 벗은 다음에 하면 된다고 자신의 부관에게 말할 정도였다. 한 예로 1944년에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에서 SS 국가지도자 겸 보충군 사령관인 하인리히 힘러 장군이 진압 병력을 바르샤바로 파견할 것을 명령했을 때 모델은 "바르샤바 봉기는 폴란드인에 대한 나치당의 가혹한 통치로 인한 것이며, 이러한 후방 지역의 민간인 소요 사태에 절대로 군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며 거절한 바 있다.
그러나 죽기 하루 전인 1945년 4월 20일,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라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히틀러 정권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모델의 군적은 루르의 B집단군이 해산한 4월 17일 자로 말소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정치적 발언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외에 국방군에서 고위 계급에서 전쟁범죄에서 자유로웠던 사람[11]을 찾아본다면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12],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으로 유명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13], 한스 오스터 소장, 빌헬름 카나리스 대장, 헬무트 그로스쿠르트 대령 정도. 덜한 사람도 넣으면 헤닝 폰 트레슈코프 소장과 페도어 폰 보크 원수 정도. 이 둘은 '어쨌든' 민간인을 해치는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는 뭐...
여담으로 인터넷에 보이는 일부 밀덕들이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고 있는데, 위에 서술한 것들이 전부 무효라고 쳐도, '''국방군은 물론 후방에 남은 독일 여자와 노인, 병약자, 아이들 역시 히틀러의 만행에 침묵/방관하거나, 마음속이나 말로만 히틀러를 반대하거나, 설령 행동을 하더라도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들고일어나 나서지 않은 건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방관은 악을 꽃피우는 법이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범죄의 방관, 은폐 행위도 충분한 범죄 행위이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모든 국방군 군인과 독일 민간인들이 전범은 아니다. 다만 대다수의 국방군 병사들은 전쟁범죄를 긍정 내지 필요악으로 생각했으며, 그러한 생각을 본인들이 거기에 참가하거나 방관하면서 입증했다.[14] 소수의 국방군 군인들만이 이러한 행위들과 무관했으며[15]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이들은 더욱 적었다. 그리고 첫 번째 내지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들은 전범이 아닐 수도 있으나 이들의 이러한 태도로 이어진 결과는 국방군을 변호해줄 만한 선을 넘고 말았고, 따라서 이들이 속했던 독일 국방군이라는 조직은 전범 집단으로 평생 까이는 결과로 돌아오게 되었다.

4. 학계



4.1. 고의적으로 은폐한 경우


대표적인 학자가 바실 리델 하트다.

이 글의 목적은 영국의 저명한 군사 전문가 바실 리델 하트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전쟁범죄 재판에 회부된 독일국방군 고위 장교들을 옹호한 까닭과 그가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형성에서 한 역할을 밝히는 것이다. 리델 하트는 1930년대부터 자기의 기동전 이론을 포기하고 진지전의 효율성을 강조했고, 1940년에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독일의 패배와 프랑스의 승리를 예측했다. 따라서 그의 평판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리델 하트는 수감된 독일 장성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았고, 전범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그들을 옹호했으며, 그들이 전쟁범죄와 무관한 동시에 나치 체제가 아닌 조국 독일을 위해 싸운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단언했다. 리델 하트는 이러한 변호의 반대급부로 독일의 유명한 장군들이 자기의 저술에 착안해서 기갑부대를 창설하고 “전격전”이라는 기동전을 구상했다는 발언을 하도록 유도했다. 구데리안 장군을 비롯한 여러 독일 고위 장교가 그의 은밀한 요청에 응하면서 리델 하트는 독일 기갑전의 “스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전후에 그는 바라던 대로 명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리델 하트가 독일군의 기갑부대 편성과 운용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인식은 사실과 어긋난다. 또한 만슈타인을 비롯한 독일국방군 고위 장교들이 유럽 동부전선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을 희생해서 명성을 얻은 리델 하트는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탄생을 도운 산파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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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수 교수님의 새로운 논문이 공개되었습니다.


4.2. 국방군의 만행을 인정하면서 옹호한 경우


대표적인 학자로 안드레아스 힐그루버가 있다.

힐그루버는 저서 『이중의 몰락』(Zweierei Untergang, 1986)을 통해 독일동방군이 독소전쟁에서 수백 년간 독일인의 거주지였던 지역을 소련의 붉은 군대로부터 보호할 “보호막”을 제공했으며, 따라서 독일동방군이 수행한 전쟁은 독일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전이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힐그루버는 결국 독일 동부지역의 방어가 문제였기 때문에 집권세력인 파시즘의 테러라도 참아내어야 했으며, 또 파시즘은 독일의 이익을 넘어 유럽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보다 높은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출처: 김성희·이덕형, 「역사의 정상화, 국가의 정상화: 독일 '역사가논쟁'(1986)을 중심으로」, 『독일어문학』 제29집 (2005년 6월), p.10을 수정.

안드레아스 힐그루버가 독일국방군이 나치화되었으며 절멸전쟁의 일부였음을 인정하는 학자라는 점에서 저건 매우 깨는 주장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힐그루버의 논리가 결국 힐그루버가 1945년에 징집되어 동프로이센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작성자:РККА☭갤로그이동 독일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수정주의적 주장 요약 (군사 마이너 갤러리)


5. 매체에서


이에 영향을 받아 2차 세계대전 관련 매체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임하는 개념인 국방군 병사와 사악한 나치 광신도 친위대원을 대비시키는 클리셰가 꽤 많이 있다.
국방군 옹호론의 모습을 보이는 작품들 중 상당수는 대중들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반영한 것일 뿐이지 진짜 옹호론을 펼치는 것이 아닌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국방군보다는 SS를 악역으로 만드는 게 주인공들 편에서 잔혹한 짓을 해도 훨씬 덜 비난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5.1. 국방군 무오설을 부정하는 작품들


  • 더 캡틴 - 실존인물인 빌리 파울 헤롤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슈츠슈타펠 소속이 아닌, 평범한 독일군 탈영병이었던 헤롤트가 우연히 얻은 장교 제복을 입고, 주변 분위기와 위계권력에 취해 탈영병을 즉결처분하는 등 독단과 전횡을 일삼으며 전범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다.
  • 브레스트 요새 - 독일 육군 병력들이 수술이 진행중이던 병원에 처들어가 의사와 간호사를 폭행하거나(다만 실제론 전쟁 초기엔 이정도는 아니었다는 학자들의 반론과 증거도 있어서 의외로 논란이 있다.), 소련 육군 포로들 중 유대인정치장교를 사살하는 등의 모습이 그려진다.
  • 요한의 타이거 - 주인공인 육군 전차장 요한이 대전 초기 자신의 행적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과 포로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소련 육군 포로를 일렬로 세워놓고 권총으로 직접 죽이는 장면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 컴 앤 씨 -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을 다룬 영화. 작 중 악역의 대부분을 육군이 담당한다.[16] 아직도 깨끗한 국방군 이론을 주워섬기는 사람이 많은 독일에서는 SS와 국방군을 착각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감상을 많이 내놓는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 - 작중 자신을 살려준 밀러 육군대위를 사살하는 독일 육군과, 반대로 업햄을 살려주는 무장친위대 장병이 함께 등장한다.[17] 무장친위대의 사악함이 드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독일국방군인이 더 나쁘게 나오는(물론 이것도 고의는 아니다.) 드문 영화지만 한국에선 이것을 잘 몰라 유대인인 스필버그가 독일만 차별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 바르샤바 1944 - 작중 무장친위대의 학살이 더 비중이 많은데 그거야 고증에 맞춘 것이고[18] 국방군도 전혀 무고하게 나오지 않는다. 후반에 주인공을 살려주는 육군 병사가 나오기는 한다만 그 병사는 폴란드인들이 목숨을 구해준 군인이다. 오히려 그 병사들의 동료들은 민간인이 대량학살된 현장에서 "야 신난다"며 교성 지르며 즐거워하며 수색을 한다. 전혀 무죄론 작품이 아닌데 영화를 잘못 본 유저 때문에 무죄론에 올라가는 수모를 당했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 1화에서부터 빌헬름이 전투중 잡은 소련 육군 정치장교를 중대장이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지뢰밭을 만나자 프리트헬름이 소련의 농부들을 지뢰밭에 앞장세우자고 제안하며 다들 거기에 기꺼이 찬성한다. 2화 에선 마을 민간인을 처형하는 장면이 나온다. 3화에선 프리트헬름이 폴란드에서 주둔중에 빨치산을 도와준 마을사람들 처형하며 다닌다. 다만 도망가는 소년을 자신이 셋을 셀테니 쏴죽이라 지시한 지휘관은 SS 보안대 소속 대령이다. 제일 객관적인 독일 국방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해서 적극 학살하는 병사들도 나오고 아예 질려서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로 기계적으로 학살에 임하는 병사들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두 행위모두 전쟁범죄라는 것이다.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주인공인 에른스트 그래버 병장이 소속된 중대는 소련 민간인들을 무고하게 빨치산으로 몰아 처형하곤 한다. 물론 주인공인 그래버와 그의 동료인 임머만, 사우어, 베르닝, 슈나이더 등이 모두 '꼭 이렇게 해야만 할까?' 라면서 처형하기를 꺼리고, 히른쉬란트라는 병사는 소련 민간인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자살하는 장면까지 나오며, 슈츠슈타펠 출신 병사인 슈타인브레너만이 학살하기를 매우 찬성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국방군의 전쟁 범죄를 부정하는 작품 아니냐 하겠지만 일단 국방군 병사들이 민간인들을 처형하는 명을 받는다는 장면이 나오고, 병사들의 심정이야 어떻든 일단 민간인들을 쏴 죽이긴 죽였으니까 국방군 옹호론을 부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대장인 라에와 소대장인 뮬러, 주임원사인 뮤케 등은 모두 국방군이면서 나치즘에 잔뜩 중독된 인물들로 묘사된다. 또한 이 작품의 원작을 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매우 극렬한 반나치주의자이다. 당연히 그가 국방군 옹호론이 담긴 작품을 쓸 리가 없다.
  • 스탈린그라드(1993) - 영화 후반에 주인공인 한스 폰 비츨란트 소위가 소속된 사단이 러시아인들이 살던 마을의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총살하는 명령에[19] 비츨란트와 그의 소대원들도 강제로 가담하게 된다. 이에 폰 비츨란트와 그의 부하인 프리츠 라이저 병장은 학살 명령을 수행하는 사단 헌병대 대위인 할러에게 항의하고 소대원들도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20] 할러 대위는 비츨란트의 항의를 씹은 것도 모자라 만약 그가 쏜 총알이 러시아인에게 맞지 않으면 너도 벽에 세운 뒤 쏴 죽이겠다고 협박한 뒤에 총살을 집행한다. 이후엔 자기 휘하의 병사를 시켜 총을 맞은 주민들을 권총으로 쏘아 확실하게 죽여버린다. 그 외에도 영화 초반에 스탈린그라드 근교의 기차역에서 독일군 헌병 병사가 소련군 포로를 학대하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21], 러시아인들을 악인으로 선전하는 군종장교[22], 아군 부상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소규모의 소련군 부대와 잠시 맺은 휴전(참고로 이들도 부상자들을 데려오길 원했다. 그래서 잠시나마 휴전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을 깨고 멋대로 소련군에게 발포했다 본인이 소속된 소대원 여럿 죽일 뻔 한 폰 비츨란트 소대의 하급 병사 뮐러[23][24]등 장군부터 말단 병사까지 전부 기존의 통설과는 거리가 먼 국방군 육군 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잊혀진 병사 독일국방군 최정예 사단인 그로스도이칠란드 기갑척탄 사단에서 독소전쟁에 참전한 기 사예르의 회고록 여기에는 국방군 병사들이 항복한 소련군병사들을 수류탄으로 묶어서 터뜨려 죽이거나 총기 난사하는 전쟁범죄 뿐만 아니라 스탈린 만세라고 부르는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누는 등병사들의 민간인 학살과 포로 학살에 대한 무감성적인 면이 드러나고 있다

6. 유사품


파울 하우서, 펠릭스 슈타이너무장친위대 장성들이 전후에 주장한 "무장친위대 무오설"도 있다. 무장친위대는 전방 전투부대였기 때문에 후방에서 아인자츠그루펜들이 저지른 학살은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주된 레퍼토리. 국방군 무오설이 친위대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이라면, 무장친위대 무오설은 그 친위대 안에서도 일반친위대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건 국방군 무오설보다 더한 헛소리이다. 애초에 무장친위대와 일반친위대의 전후방 교대근무가 빈번했고 프랑스에서 민간인 600명을 학살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저지른 놈들이 바로 무장친위대였다. 무엇보다도 무장친위대에는 동유럽과 바르샤바에서 무차별 학살을 저지르고 다닌 인간쓰레기 집단 테오도어 아이케의 토텐코프 사단[25]36 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카민스키 여단이 있었으니 더이상 설명이 필요한지. 한술 더 떠서 대전 말기에 병력 부족 때문에 피점령민들까지 무장친위대에 징집한 것을 가지고 "무장친위대는 다민족 혼성의용군", "무장친위대는 NATO의 원조" 따위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역사학자들은 이런 주장들을 개소리로 치부했고, 하우서 등 무장친위대 장성들의 회고록들은 서독 정부에 의해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된다. 이 개수작은 국방군 무오설과 마찬가지로 전쟁 당사국이 아닌 한국의 밀덕후들 사이에 상당히 먹혔는데, 당장 나무위키만 해도 전범집단의 수괴들인 하우서나 슈타이너 등을 학살이나 전쟁범죄와 무관했던 참군인이라고 빨아주는 정신병자들의 가소로운 서술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뭐가 됐든간에 나치 독일들이 저지른 각종 조직적인 범죄와 테러는 전범행위라는 점이 명백한 팩트다. 친위대든 국방군이든 깨끗하다는 주장은 싹 다 개소리다.
일본군에는 비슷하게 해군선옥론이 있다. 이쪽 역시도 국방군 무오설과 비슷한 논조의 주장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온갖 악랄한 전쟁범죄는 다 육군이 한거고, 해군은 착하게(?) 전쟁만 했다는 내용. 특히 종전 직전, 해군은 그냥 이대로 그만두자고 주장한 반면 육군은 옥쇄를 주장한 것이 주요 쟁점 중 하나이다. 물론 실제로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일본군 육군이 난징 대학살을 비롯해 각종 초대형 전쟁범죄를 벌이고 다녔기에 상대적으로 덜해보이는 것일 뿐, 일본군 해군의 전쟁범죄 역시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7. 관련 문서


[1] 이는 친독 성향이 강한 일본 밀리터리계의 영향도 있고, 후술할 냉전 상황에서의 이미지 세탁으로 인해 상당 기간동안 학계의 주류 학설이 국방군 무오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2] 공군 중위 프리트 출처: SRA 3984,16.4[3] 위의 모든 대화들은 그나마 깨끗하다고 밀덕들이 빨아대는 루프트바페 장교들과 부사관들이다! 아니 이 문서 전체에 적기에 너무 많을 정도로 국방군 참전자들은 자신들이 포로와 유대인, 그리고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발언을 마치 즐겁다는 양 내뱉었다.[각주268번] 1942년 7월 26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에 친위대는 프셰미실(Przemyśl)의 유대인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내 모았다. 새벽 5시경 지역 사령관 막스 리트케(Max Liedtke)는 친위대 소위 아돌프 벤틴(Adolf Benthin)과 전화하면서 적어도 국방군을 위해 일하는 유대인 남자들만은 이송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총사령부에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미 그는 무선으로 이 사건에 대해 총사령부에 보고한 상태였다. 이 보고에 대한 총사령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부관 알베르트 바텔(Albert Battel)은 유대인 게토의 유일한 출입구를 봉쇄하고 기관총으로 위협하여 친위대가 게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바텔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로, 자신이 그 이전에 이미 프셰미실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이는 법적 하자는 없었으나 실제로는 친위대에게 쓰라린 굴욕이자 도발이었다. 친위대는 총사령부에 게토 봉쇄 해제를 요구할 높은 계급의 책임자를 크라쿠프에서 데려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친위대가 결국 뜻을 관철하리라 내다본 바텔은 이 봉쇄를 하는 동안 유대인 노동자 약 90명과 그 가족들을 사령부로 데려와 숙박시켰다. 그는 또다른 240명을 게토에서 데리고 나와 사령부 지하실로 보냈다. 바텔과 리트케는 상황을 제대로 예측했다. 봉쇄는 풀렸고, 7월 27일 이른바 '소개 작전'은 다시 시작되었다.[각주269번] Wolfram Wette, Retter in Uniform. Handlungsspielräume im Vernichtungskrieg der Wehrmacht(Frankfurt am Main, 2003).[각주270번] 1941년 7월 8월 11월 세 차례에 걸쳐 다우가프필스에서는 약 14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Enzyklopädie des Holocaust, Israel Gutman, Eberhard Jäckel, Peter Langenich and Julius H. Schoeps(eds.), vol. 1, p. 375.[각주271번] SRGG(독일 장성 특별보고서) 1086, 28. 12. 1944, TNA, WO 208/4169[각주272번] Frank Bajohr und Dieter Pohl, Der Holocaust als offenes Geheimnis. Die Deutschen, die NS-Führung und die Alliierten(München, 2006). Peter Longerich, "Davon haben wir nichts gewusst!" Die Deutschen und die Judenverfolgung 1933 ~ 1945(München, 2006). Harald Welzer, "Die Deutschen und ihr Drittes Reich",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 (APuZ) 14 - 15/2007.[각주273번] 메스켐프, 지금의 다우가프필스의 교외.[각주274번] SRGG 1086, 28. 12. 1944, TNA, WO 208/4169[4] 이 이전까지 많은 수의 장성들이 연방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육군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전후 서독 연방군 재건 자문을 맡았고,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육군상급대장 프란츠 할더 장군은 미 육군 전사연구관으로 일하며 민간 공로훈장을 받았다. 대전 말기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육군대장 아돌프 호이징어 장군은 신생 서독 연방군의 첫 국방참모총장, 북대서양 조약기구 군사위원회 의장직을 수행하였으며, 육군원수 에르빈 롬멜 장군의 참모장이었던 육군대장 한스 슈파이델 장군은 북대서양 조약기구 연합지상군 사령관을 지냈다. 국방군 제7야전군 참모장이었던 육군중장 막스요제프 요한 펨젤 장군은 울름 주둔 연방군 제2군단장을 역임하고 1961년 9월 30일 예편하였다. 군 생활을 이어나간 이들 뿐 아니라 몇몇 국방군 장성들은 정계에서도 활약하였는데 육군대장 핫소 폰 만토이펠은 종전 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자유민주당 당대표로 활동하였으며 독일연방군 이라는 이름의 제창자이기도하다. 육군대장 게르하르트 폰 슈베빈은 전후 콘라트 아데나워의 군사 및 안보정책 수석 보좌관을 지냈다. 이들 구 국방군 고위층이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세상을 떠나고서야 국방군을 다시 보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5] 게다가 이때는 위에서 언급한 국방군의 고위 장성들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전직 국방군 병들과 부사관들, 위관/일부 젊은(대전 당시를 기준으로)영관급 장교들이 본격적으로 은퇴하거나 죽기 시작한 시기와도 겹친다. 이들은 1910년대 중후반 ~ 1920년대 초중반에 태어났던지라 왜냐면 1970~1980년대에는 최소한 50대 이상이였기 때문. 또한 이들의 뒤를 이어 사회 주류가 된 국방군 참전자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나치를 절대악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들의 군대인 국방군을 긍정적으로 볼 리가 만무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강해져서 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냉전이 끝남과 동시에 대전 말기에 청소년 이하의 나잇대에 징집되어 국방군에 복무한 참전자 세대들이 사회 주류에서 완전히 은퇴하면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게다가 90년대 이후 국방군 무오설이 독일을 넘어 세계 여러 국가의 일반인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할 때가 되면 이걸 막아야 할 국방군 참전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나마 이때까지 살아있었던 국방군 참전자들은 아무리 못해도 60대 중후반의 고령인데다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6] 다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독일 정부가 어쨌건 나치 독일의 후계자로 그 유산을 그대로 갖고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독일국방군과 독일 사회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무장친위대는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나치당의 사병이었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7] 하지만 폴란드 입장에서는 폴란드가 독립 이후 차지한 영토는 폴란드 분할 이전에도 폴란드 영토였으며, 해당 지역은 폴란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폴란드인들은 원래대로라면 폴란드 영토가 되었어야 할 그단스크국제연맹 하의 자유도시가 된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8] 가령 육군 전차 에이스인 오토 카리우스 기갑중위같은 사람은 물론이고 높게는 히틀러도 연합군과 휴전하면 소련군과 싸우는데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을 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종전 직전에도 변하지 않아서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카를 되니츠는 상술한 논리를 갖고 연합군 서부전선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랑 협상을 시도했었다. 고위 정치인들과 군인들조차 이러한 의중을 가졌던 마당에 평범한 일반인, 심지어 학생들과 어린이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하고 한판 붙었다가 밀리고 중립국이자 잠자는 사자였던 미국의 선박을 무자비하게 격침시켜놓고서 연합군이 소련과의 동맹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게 어이없기는 하지만.[9] 다만 서유럽의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2% 수준이지만 동유럽에서는 20-57% 수준이다. 57%는 영국학자 니얼 퍼거슨이 주장한 수치로, 이 사람이 원래 포로 사망률을 워낙 높게 잡는 편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대부분의 학자들 대부분 소련군의 포로사망률이 최소 20%(지만 보통은 적게 잡아도 30%)는 넘을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군의 경우 연합군(미국과 영연방) 사망률 27%, 중국군까지 포함하면 40%정도. 중국측에서는 70%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여부는 불명. 다만 다른 연합군의 사망률이 27%인데 중국군이 들어가면 40%로 상승하므로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0] 당장 폴란드 침공에 성공하여 폴란드를 분할한 이후 폴란드에서 일어난 전쟁범죄의 60%는 국방군이 저질렀으며 이때 관여한 독일 국방군 병력들이 훗날 ss로 전군을 하였고 거기서 더 훨씬 크고 잔악한 학살 행위를 저질르게 된다. 또한 히틀러가 독소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동의한 것도, 독일군이 전쟁범죄 대부분을 저지른 독소전쟁의 신호이기도 했던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짠 것도 바로 독일 국방군이었다. '''즉, 나치 독일이 군사적 행동을 한 곳에서는 언제나 독일 국방군이 있었고, 그로 인해 벌어진 전쟁범죄의 중심에는 국방군의 말단 군인(=징집된 민간인)들과 지배층들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11] 단순히 침묵하는 것을 넘어 어느 정도 반대의 의사를 밝혔던 사람[12] 6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이후 전임자가 내렸던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폐기.[13] 정작 이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한 고위급 군인 대부분은 반동주의자로 나치의 악행을 그리 반대하지 않았었다.[14] 이 시점에서 국방군 무오설은 허상이 확정되었다.[15] 그마져도 이들 대부분이 양심적이여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 본토에서 근무하거나 전투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전방으로 차출될 수 없었거나 혹은 독일이 본토 방어에 들어간 44년 중후반 이후에 입대하여(국민돌격대도 해당된다) 히틀러에 대한 방관 외에는 전쟁 범죄를 경험하지 못했던 등의 사정이 많았기 때문이다.[16] 물론 실제 보단 과장되긴 했다. 초기 학살 단계에 있어서는 국방군병력과 친위대 대원들 그리고 반소 민병대가 함께 섞여서 학살을 담당했고 실제 이 지역에 머무르고 있던 국방군 육군 수는 당시 친위대원들과 민병대원들의 수의 절반이지만 학살에 가담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이때 가담한 국방군 병사들은 전선으로 이동 중인 병사들이 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무를 잊고 완벽하게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17] 아마 구석에서 벌벌떨고있으니, 큰 위험은 없다고 판단한것같다.[18] 바르샤바 봉기 진압 당시, 악명을 떨친 디를레방어 여단, 카민스키 여단이 무장친위대 소속이었고 이후 봉기 생존자와 폴란드 민간인 20명이 학살당한 불라 학살을 저지른 에리히 폰 뎀 바흐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역시 무장친위대 소속이다.(참고로 이 자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보내진 독일군 부대들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었다.) 특히 폰 뎀 바흐 장군은 아예 작중에서 언급이 된다.[19] 겉으로는 러시아아인들이 사보타주를 했던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사단의 식량이 부족하여 그들이 관할하는 지역의 러시아 민간인들에게 약탈하려고 한(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원인이었다.[20] 그도 그럴만한 것이 소대원들이 직접 총살하는 주민들 중에 자신들과 인연이 있는 러시아 소년인 콜랴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비츨란트가 할러에게 항의하는 이유가 총살 대상에서 콜랴를 빼주길 바랐기 때문이다.[21] 이를 본 비츨란트가 그 헌병 병사를 제지하려고 하다가 되려 맞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현장 근처에 있던 헌병 대위인 할러에게 소련군 포로를 학대하고 자신에게 주먹을 날린 병사를 고발하려고 했으나 냉소적인 말만 듣고 말았다.[22] 그때 비츨란트는 사단의 고급 장교들을 만나서 부대에 새로 온 부사관을 소개받은 뒤에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기차역에서의 사건을 말하자 그 장교들은 비츨란트의 편을 들기는 커넝 사건을 덮고 만다.[23] 이후 그는 비츨란트에게 욕을 먹자 따지다가 자신의 선임이던 프리츠가 너는 사망자가 되어서 신문의 1면에 나올 것이라는 독설을 들은 뒤에 얼굴에 침을 맞는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비츨란트 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소대원이 징계를 받아서 형벌부대로 전출되자 그들을 이끄는 소대장으로 다시 등장해서 자신의 부하가 된 이들을 못살게 굴다가 뮐러와 비츨란트의 상관이자 중대장인 무스크 대위의 명령으로 소련군 소속의 Т-34/85 전차 몇 대와 열 명 이상의 보병들과 교전하던 도중 전차의 포격에 맞아 죽고 만다. 참고로 뮐러와 같이 교전에 참여했던 비츨란트 소위와 소대원들은 생존에 성공함과 동시에 공훈이 인정되어 징계가 종료된 건 물론이고, 명예회복에도 성공한다.[24] 참고로 극중 이 병사와 동명이인이 있는데, 그는 비츨란트 부대에 새로 들어 온 신병으로 소련군을 죽이는 것을 꺼려하거나 맞선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전쟁 범죄와는 무관한 모습을 보이며, 소대의 고참병인 프리츠 역시 뮐러를 좋게 봐서 그에게 정말 위험한 뮐러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잘 대해준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비행기로 공수된 보급품(철십자 훈장과 쇼카콜라 초콜릿)을 빼앗으려는 할러 대위를 동료 소대원들이 말리던 도중에 대위가 쏜 권총에 맞고 숨지고 만다. 이후 뮐러에게 총을 쏜 할러 대위는 그 동안 자신에게 당한 것 때문에 분노가 쌓일대로 쌓인 소대원들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바람에 목숨만 살려주면 물자가 가득 있는 비밀 창고에 안내하겠다고 하지만 묵살당했고, 결국 과거 장교 출신이었던 병사이자 비츨란트가 형벌부대에서 있었을 당시에 만난 이후 자기 소대원으로 삼은 군인인 오토의 총을 맞아 죽고 만다.[25] 이 사단은 디를레방어 사단, 카민스키 여단, 아인자츠그루펜과 같이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다녔다. 다만 차이점이 있는데 위 3개 집단이 독소전 후반부에 주로 만행을 저질렀다면 이 사단은 초반부부터 저런 행동을 하고 다녔고 나치 독일 출범 이전부터 수용소 경비부대로 사용되어 전적이 화려하며 더 무서운 것은 '''이 사단이 SS최정예 기갑사단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