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플레밍
1. 개요
영국의 의사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 불리는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항생제의 아버지라 불린다. 항생제가 살린 사람의 숫자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영국 외에 스페인(투우장)이나 체코에서도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이 공로를 통해 1944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으며, 1945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다.'''I have been trying to point out that in our lives chance may have an astonishing influence and, if I may offer advice to the young laboratory worker, it would be this—never neglect an extraordinary appearance or happening.'''
"저는 확률이 우리의 삶에 미칠수있는 놀라운 영향력에대해 강조해왔고, 젊은 연구원들에게 조언드리죠, 절대 비상한 출현이나 현상을 등한시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
-알렉산더 플레밍
2. 어린 시절
1881년 8월 6일 스코틀랜드의 시골 마을 로크필드(Lochfield)에서 태어난 플레밍은 평범한 농부 집안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플레밍은 어렸을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전원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호기심을 키울 수 있었으며 또한 집안 형편이 어려움에도 그는 형, 누나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으면서 기초 지식들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블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런던으로 가서 병원을 열고 의사 생활을 하던 형 토머스로부터 런던으로 와서 공부를 하라는 편지를 받게 되고 플레밍은 14세 때 런던으로 가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토머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생활하기 위해 상선에서 4년간 사무원으로 일하던 플레밍은 삼촌인 존 플레밍이 죽어서 남긴 유산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런던의 로얄 폴리테크닉 인스티튜션(현 웨스트민스터 대학)에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을 만큼 뛰어난 성적을 자랑했다. 이후 플레밍은 여러 의과 대학을 놓고 고민하다가 세인트 메리 병원(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본격적인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3. 업적
3.1. 라이소자임
1921년에 플레밍은 〈Tissues and Secretions〉라는 논문에서 라이소자임이라는 항생 물질을 발표한다. 앞에서 언급되었듯 1921년 플레밍의 라이소자임의 발견은 소독약 및 방부외과 기술에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플레밍은 라이소자임 발견 이전에는 미생물이 동물의 체내에 들어올 경우, 결코 공격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라이소자임은 플레밍에 의해 콧물 속에서 처음 발견되게 되었는데, 사람과 동물에서 분비되는 점액 속에 포함되어 있는 효소로 인간의 방어 면역 체계 중 하나이다. 라이소자임의 발견에 대한 업적은 대부분 플레밍에 의해 연구되었다. 플레밍은 6년 후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에도 여전히 라이소자임이 페니실린보다도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앙드레 모루아가 쓴 플레밍의 전기에서 플레밍의 조수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플레밍은 당시 자신이 감기에 걸렸을 때의 콧물을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에 첨가하였다. 그는 몇 개의 배양접시를 씻던 도중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의 한쪽에 미생물이 없는 부분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미생물은 반투명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분해 중인 미생물이 보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플레밍은 자신이 첨가한 점액 속에는 바로 주위에 있는 미생물을 분해시킬 수 있는 물질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페니실린의 우연적 발견 신화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라이소자임의 우연적 발견의 경우는 페니실린의 발견과 정반대이다. 페니실린의 경우는 미생물(포도상구균)이 실험실에서 공급되고 외부로부터 곰팡이(Penicillium notatum)가 공급된 데 반해, 라이소자임의 경우는 미생물을 분해할 수 있는 효소는 실험실에서 공급된 것이고, 미생물이 외부로부터 들어온 오염물질이었다.
라이소자임의 발견에서 플레밍에게 실망스러웠던 점은 외부에서 공급된 미생물은 마이크로코쿠스 리소데익티쿠스(Micrococcus lysodeikticus)라는 독성이 없는 세균이라는 점이었다. 즉, 라이소자임은 독성이 없는 세균에는 효과가 있지만 독성 세균에는 그 효과가 거의 없다. 플레밍은 이후에 라이소자임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 기작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라이소자임 발견 경험은 6년 후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라이소자임 자체의 낮은 항생 능력은 플레밍이 화학요법에 대해 좁은 시각을 갖도록 하기도 하여서 페니실린 발견 이후에 페니실린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 부분도 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라이소자임의 발견과 함께 인간의 혈액과 다른 체액의 민감성 적정 실험과 정량 방법을 고안하여 나중에 페니실린의 적정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출처
3.2. '''페니실린'''
《스펀지》 때문에 '''실수로 콧물을 플레이트에 떨어뜨려''' 발견한 걸로 잘못 알려졌는데, 이는 위 문단에서 언급된 라이소자임이다.[1]
1928년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연구 도중 휴가를 다녀왔었다. 문제는 플레밍이 실수로 포도상구균 샘플 배양 접시를 제대로 닫아놓지 않은 채 휴가를 떠났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플레밍의 연구실은 지저분하기로 유명했다니 놓고 간 샘플이 오염됐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2] 돌아온 플레밍은 방치해 뒀던 배양 접시에 있던 균들이 거의 죽음에 이른 것을 발견했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확인해 본 결과 포도상구균이 있던 자리에는 웬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맛있게 먹고 있었고(...) '''"어? 이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죽였네?"'''라고 생각해 발견하게 되었다. 이 곰팡이의 이름이 '''페니실리움'''이었고, 이를 이용해 만든 것이 바로 페니실린이다.
이 푸른곰팡이가 어디서 어떻게 플레밍의 배양 접시에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덧붙여져 오늘날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바깥에서 날아다니던 푸른곰팡이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와 플레이트에 앉았다는 이야기다. 창문 이야기 말고도, 플레밍의 연구실 아래층에서는 곰팡이를 연구하던 과학자가 있었는데 아래층 연구실의 곰팡이가 플레밍의 연구실로 올라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플레밍이 1929년도에 작성한 "On the antibacterial action of cultures of a penicillum,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ir use in the isolation of B.Influenzae" 라는 논문에는, ".. these plates were necessarily exposed to the air and they became contaminated with various micro-organisms.", 다시 말해, 배양 접시는 어쩔 수 없이, 혹은 필연적으로 공기 중에 노출되어 다양한 미생물로 오염되었다 라고 적혀 있다. 휴가 이야기는 쏙 빼놓고, 나름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초창기의 페니실린은 너무 민감하여 효력과 수명이 매우 짧았고 이 때문에 학계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플레밍의 논문에서는 1시간 동안 56-80 C 정도의 가열은 페니실린의 항생작용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 와중에 페니실린보다 효과가 좋다고 알려진 설파제(Sulfonamide)가 등장하자 플레밍은 이 설파제를 연구하느라 페니실린을 거의 묻어두다시피 했다.[3]
그러다가 1939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플로리와 체인이 라이소자임에 이어 페니실린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다가, 1940년에 인공 생성에 이어 정제하는 데에 성공했다. 플레밍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보관해 둔 페니실린 표본을 보냈고, 이때 한 사람에게 충분히 쓸 만한 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만 플레밍이 페니실린 보급에 관여한 것은 여기까지로 이후 임상시험 끝에 대량생산을 해낸 것은 플로리와 체인의 업적이다.
이후 페니실린이 널린 퍼진 역사는 밑에 플로리와 체인 소항목을 참조
플레밍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1945년 12월에 페니실린을 정제한 플로리&체인과 함께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4. 관련 소항목
4.1. 앨므로스 라이트
앨므로스 에드워드 라이트(Almroth Edward Wright, 1861년 8월 10일~1947년 4월 30일)는 영국의 세균학자, 면역학자이며, '''플레밍의 스승'''이다. 장티푸스 예방 접종 체계를 최초로 마련한 인물이며, 항생물질이 항생제 내성을 일으킬 수 있다면서 예방의학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1902년에 세인트메리 병원의 의학부를 설립하여 장티푸스 예방 접종 체계를 마련했고, 옵소닌을 인체의 혈액에 주입하는 방법도 고안했다.[4] 또한 라이트는 쉽게 예방할 수 있었던 질병 때문에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한 제2차 보어전쟁을 예로 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도 백신 1천만 개를 북부 프랑스군에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학적 주장이 높게 평가되었는지 1906년 5월에 왕립학회의 회원이 된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항생물질의 위험성을 예지했고, 당시 수많은 학자들의 주장(대강 '혈청 속에 세균을 죽이는 물질이 있다')에 맞서 '미생물은 병의 원인이 아니라 병을 옮기는 매체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계의 반대파로부터 '앨므로스 뤙(Wrong)'[5] 이라며 비판을 들었다. 그러나 라이트가 죽은 지 50년이 뒤에야 현대 과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연구하자 결국 그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꼭 옳은 소리만 했던 것은 아닌데, 루이 파스퇴르와 플레밍을 예로 들면서 의학에 논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 두 사람도 우연히 치료약을 찾아낸 것이기에 그 주장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괴혈병의 원인을 식중독으로 보고 이를 주장했지만[6] 이 역시 1932년에 비타민C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틀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여성의 뇌는 남성과 다르므로 공적, 사회적 사안을 처리할 수 없다'''며 여성 참정권에 반대한 적이 있는데, 이 발언은 현대 기준으로 실로 상당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조지 버나드 쇼의 친구였으며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쇼 역시 1906년에 작성한 연극인 《의사의 딜레마(The Doctor's Dilemma)》에서 라이트에게서 의학적 지식을 얻었다면서 그의 이름을 올렸으며, 《의사들은 어떻게 다른 의사를 사랑하는가!(How These Doctors Love One Another!)》에서 라이트와 다른 의사와의 논쟁을 다루기도 했다. 물론 라이트의 그 '여성 뇌 발언'에는 반대하면서 무식하다고 표현했다.
4.2. 플로리와 체인
하워드 월터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1898년 9월 24일~1968년 2월 21일)는 호주 출신의 의사, 약리학자, 병리학자이며, 언스트 보리스 체인[7] (Ernst Boris Chain, 1906년 6월 19일~1979년 8월 12일)은 독일계 영국인 화학자였다. 참고로 체인은 유대인이었기에 홀로코스트를 피하기 위해 1933년 4월 2일에 '''단돈 10파운드[8] 만 들고''' 영국에 도착했다고 한다.
1938년, 체인과 노먼 히틀리(Norman Heatley,1911년 1월 10일~2004년 1월 5일 )와 함께 연구를 하던 플로리는 플레밍의 페니실린 연구에 대한 기사를 읽고 라이소자임과 페니실린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상기한 바와 같이 페니실린의 정제에 성공하여 첫 번째 환자인 앨버트 알렉산더(Albert Alexander, 1897년~1941년 3월 15일)에게 페니실린을 투약했으나 양이 부족하여 사망했다. 이에 플로리와 체인은 상대적으로 양이 덜 필요한 아이들 위주로 실험을 했다.
게다가 이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유럽이 난리통이 되어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지조차 불명확한 상황이었으나, 1941년 6월에 운 좋게도 록펠러 재단이 원조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보냈다. 이에 플로리과 연구진은 미국의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Peoria)로 이동하여 대량 생산을 위해 분투했고, 1942년 말에 썩은 멜론에서 발견된 페니실리움 크리소게눔[9] 을 토대로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 이 대량 생산된 페니실린은 임상실험을 거치자마자 곧바로 전쟁 중인 유럽으로 전달되어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을 구했다. 게다가 이 페니실린은 5년 뒤인 6.25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수많은 장병들을 구했다.
그런데 1945년, 플로리는 저 연구는 어디까지나 '''과학적 관심'''이었을 뿐이고 약의 발견은 덤이었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저와 다른 연구진들이 고통받는 인류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페니실린을 연구했다고 때때로 생각하는 모양이더군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과학 실험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약이 생겨났다는 건 매우 기쁘긴 합니다만, 그걸 위해 연구를 시작한 건 아닙니다.
- 하워드 플로리, 《오스트레일리지언 사이언스》라는 잡지에서
5. 기타
- 어릴 때 플레밍의 아버지가 윈스턴 처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처칠이 플레밍의 학비를 대 줬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거짓이다. 처칠이 튀니지에서 병마로 고생할 때에 페니실린이 아닌 위에서 언급한 설파제로 회복되었는데 찌라시들로 인해 말이 와전되었다고. (비슷한 이야기로 몸이 약한 처칠이 요양 온 시골에서 물에 빠지자 지나가던 시골 소년인 플레밍이 구해주었고, 둘은 친구로 지내며 후에 학비와 지원을 해 주었고 처칠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이용해 치료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다. 위 글에 의하면 사실무근.)
- 의대 시절엔 자동차 경주도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플레밍은 월급이 적었던 젊은 시절에도 무리해서 포드 사의 최신형 모델을 구입해 아내에게 혼나기도 했다고.
- 페니실린 외에도 살균 물질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눈물이 탁월한 효과를 자랑한단 걸 발견하자 누가 올 때마다 레몬즙을 뿌려 눈물을 뽑아냈다 한다 . 심지어 어린아이에게도 그 짓을 했다.(...) 물론 나중에 그 대가로 돈을 줬다고. 이는 플레밍만이 아니라 다른 의학자들도 많이 했다. 즉 페니실린이 일종의 대박을 치자, 과학계에 긍정적(?) 한탕주의가 몰아친 셈. 이런 열풍 을 타고 발견된 것 중엔 1944년에 셀먼 왁스먼이 발견한 스트렙토마이신이 있다.
- 1955년 3월 11일 런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장례식은 일주일 후인 3월 18일에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영국의 위인들이 안장된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 어떻게 된 일인지 앗 시리즈 3권인 《화학이 화끈화끈》에서도 잘못 나와 있다. 이런 비슷한 경우로 피니어스 게이지가 있다. [2] 앞의 콧물 투척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지금이라면 '''인사고과에서 빨간 줄 그어질 만한 위험한 행위'''이다. 현대 과학에서 변인통제 제대로 안 한 논문은 '''그냥 쓰레기 취급받는다.''' [3] 그러나 술파제는 효능이 좋은 대신 부작용도 너무 심해서 말이 많았다. 과거에는 중요한 항생제였으나 지금은 부작용 때문에 많이 쓰이지 않는다.[4] 플레밍은 1902년부터 근무, 연구를 시작했으니 이 때부터 라이트의 제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5] Wright가 'right(옳다)'란 말과 동음이의어임을 이용한 조롱.[6] 이 가설은 로버트 스콧이 남극에서 부실한 통조림을 갖고 갔기 때문에 더욱 옳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것은 아문센 VS 스콧 문서 참고.[7] 독일 출신이므로 에른스트 샤인(?)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8] 당시 환율로 2016년의 632파운드(2016년 6월 15일 기준으로 약 105만원)[9] 페니실리움 노타툼과 페니실리움 크리소게눔은 현재는 같은 종으로 분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