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수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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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
러시아어: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Суво́ров
영어: Alexander Vasilyevich Suvorov
출생
1729년 11월 24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사망
1800년 5월 18일, 러시아 제국 상트 페테르부르크
복무
러시아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최종 계급
대원수
주요 참전
7년 전쟁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주요 서훈
성 안드레이 훈장
성 조지 훈장

|| 1 ||Он Россию свою

В самом трудном бою
Был готов защищать.
Был он дерзок и смел,
Одного не умел:
Не умел, не умел отступать. ||그는 자신의 러시아
가장 힘겨운 전투 속에서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호탕하며 또한 대담했고,
한 가지를 할 줄 몰랐다.
물러설 줄을 몰랐다. ||

|| 2 ||А солдат рядовой

Дорог был для него
И роднее всего.
И хотя был он строг,
Но солдата берёг,
Потому и любили его. ||말단 병사도
그에겐 귀중했기에
무엇보다도 친근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지엄했어도,
모두가 그를 사랑했기에
병사들을 지극히 아꼈다. ||

|| 3 ||Он Россию любил,

Он России служил,
Ростом мал, да удал.
И никто не забыл,
Как он брал Измаил,
Как геройски всегда воевал. ||그는 러시아를 사랑했고,
러시아에 헌신했고,
키는 작은데 참으로 용맹했다.
그리고 누구도 잊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이즈마일을 점령했고,
어떻게 항상 영웅적으로 싸웠는지를. ||

|| 후렴 ||Генералиссимус Суворов

Солдату друг, солдату брат
Генералиссимус Суворов,
Да что там Альпы,
Да что там горы,
С ним для солдата нет преград. ||수보로프 대원수는
병사에겐 친구이자 형제요,
수보로프 대원수, 그와 함께라면
저기 있는 알프스라도,
저기 있는 산맥이라도,
병사에게 장애물은 없다. ||

올레크 가즈마노프의 곡 '수보로프 대원수(Генералиссимус Суворов)'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5. 서훈 내역과 기타 이력


1. 개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대원수이자, 생애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불패의 명장. 그리고 '''알프스를 넘은 세 명의 전설 중 하나.'''

2. 생애


수보로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시기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수보로프의 외아들로 태어난 수보로프는 러시아의 귀족 자제답게 부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왜냐하면 아버지인 바실리가 프랑스인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 이것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았을 만큼 유능인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바실리는 당시 러시아 귀족 세계의 전통과 달리 수보로프를 위험한 군인보단 안전한 관리로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의 바램과 달리 수보로프는 어린 시절부터 군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언젠가 반드시 군인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수보로프의 관심을 다른 분야로 돌리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결과는 모두 신통치 않았다.
이윽고 수보로프가 11세의 나이를 먹던 해,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1]이 수보로프 가문의 저택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바실리의 하소연을 들은 간니발은 수보로프와 오랫 동안 군사에 관해 토의해보곤 바실리에게 아들의 천직은 군인이라 언급, 결국 바실리는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수보로프가 군대에 입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군인이 된 수보로프는 1741년의 러시아-스웨덴 전쟁, 7년 전쟁과 같은 본인이 20대 시절에 일어난 전쟁들조차 쉬이 참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젊은 시절부터 여러 전쟁들을 경험하며 활약하던 수보로프는 이내 33세의 나이로 대령이 되는 명예를 누린다. 무엇보다 수보로프가 장군으로써 보여준 특이사항은 연대장, 여단장 수준의 군사로도 끊임없이 승전보를 울렸다는 것인데, 특히 폴란드의 바르 동맹군이 수보로프의 규모가 작은 분견대조차 막지 못해 수없이 패배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수보로프는 폴란드 전역에서 바르 동맹군을 대파하고 폴란드의 유서 깊은 도시인 크라쿠프를 함락시켜 러시아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드넓은 폴란드의 영토를 조각내는데 일조했으며, 더불어 이와 같은 공을 인정받아 수보로프 역시 소장으로 진급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수보로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단을 이끌고 폴란드보다 더욱 험난한 전장인 튀르크 전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서서히 저무는 중이긴 했으나 그래도 폴란드와 비교하면 격이 다른 상대였던 오스만은 도저히 소수의 분대만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보로프의 분견대는 연이어 작게나마 성과를 거둬들여, 다뉴브 강을 도하하는 것으로 오스만군을 투르투카이에서 축출했으며, 공격 뿐만 아니라 수비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오스만군의 침입을 방어하기도 했다.
보다시피 수보로프의 등장을 계기로 오스만은 러시아의 본격적인 샌드백이 되고 만다. 실제로 이때까지 수보로프의 약점은 지휘 가능한 병력의 규모가 실력에 비해 작다는 것뿐이라, 곧장 아군과의 연합으로 병력의 규모가 커지자 오스만의 수만 군사를 모조리 격멸시켰다(...)
또, 중장이 된 수보로프는 1787-91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30,000명의 전력을 가진 군단을 이끌고 헤르손-킴부른 지역의 해안을 방어, 1787년 10월에는 킨부른 근처의 오스만군이 상륙하려 하는 것을 미리 저지하여 전쟁의 분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수보로프 본인은 1788년에 오차코프 공략 도중 부상당해 잠시 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수보로프는 생애 6번 정도의 큰 부상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보로프가 부상에서 회복-복귀한 시기는 1789년쯤이었다. 전장으로 돌아오자마자 몰다비아의 1개 사단을 지휘하게 된 수보로프는 당연하다는 듯이 오스만군을 격파했고(포크사니 전투), 9월에는 기록상 10만(과장되었을 확률이 농후)이라고까지 전해지는 튀르크의 대군을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을 합쳐 2만 4천밖에 안 되는 병력(러시아군아 7천, 오스트리아군이 1만 7천)으로 사실상 학살해버렸다. 이 대승리의 결과 수보로프는 예카테리나 2세와 요제프 2세로부터 림닉크 백작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서훈받기에 이른다.
여담이지만, 포크사니와 림니크의 승리에는 모두 오스트리아군의 도움이 있었는데, 두 전투 모두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규모가 러시아군의 병력 규모를 크게 앞질렀었다. 보통 이런 불균형한 연합의 경우 병력 규모가 큰 쪽이 주도권을 갖기 마련이지만, 두 전투에서 도움을 요청한 국가는 러시아 측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측이었고, 애시당초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이었던 코부르크 장군은 수보로프의 뛰어남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수보로프의 작전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투르크 세력을 굴복시킨 이후에는 타데우쉬 코시치우쉬코가 폴란드 해방 투쟁을 일으키자 다시 폴란드로 파견되어 이번에도 폴란드 저항세력을 개발살(...)[2]내고 코시치우쉬코를 포로로 잡는 등 여러 무공을 세웠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수보로프는 사실상 폴란드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가장 큰 공로자였다. 그만큼 폴란드 세력과의 전쟁에서 여러 굵직한 공들을 세웠으며 심지어 수보로프가 도착하기 전이나 수보로프가 없는 장소에선 러시아군이 패배하기도 했다고...
그렇지만 승리의 꿀맛도 잠시, 전투가 끝나고 귀환하던 도중 예카테리나 2세의 사망으로 파벨 1세가 즉위하면서 수보로프는 찬밥 신세가 된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성장 과정으로 인해 모친의 유산(여제의 가신이나 측근, 그녀가 확립해놓은 대외정책 등)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는데, 이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신임받던 수보로프도 예외가 아니었고, 수보로프 역시 파벨의 지리멸렬한 행동들에 경멸감을 감추지 않아 결국 파벨은 수보로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 노골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3]
하지만 이 즈음 유배당한 상태이던 수보로프에게 희소식이 찾아오는데, 그것은 프랑스에서 혁명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도대체 왜 수보로프한테 희소식이 되었느냐 하면, 오스트리아 측에서 수보로프를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거론하자 러시아의 명성을 드높일 기회라 여긴 파벨이 수보로프를 불러들인 것. 결과적으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된 수보로프는 그 직책에 부흥하여 프랑스 혁명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고 또한 프랑스 세력을 잠시나마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차르의 견제를 받는 와중에도 오직 실력만으로 러오 연합군의 총사령관 자리를 꿰찬 것이니 당시 수보로프의 평가가 어땠는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서 수보로프는 위대한 승전보를 계속 울렸지만 끝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수보로프를 도와주지 않았다. 수보로프가 내놓은 작전 계획은 러시아군이 파리로 진격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향해오던 카를 대공의 오스트리아군과 공조하는 것이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친동생이기도 한 카를 대공이 수보로프 휘하[4]에서 명령받는 것을 원치 않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러오 연합군의 협력 작전을 폐기해버렸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정부를 설득하는 것으로 오히려 수보로프의 진군 방향을 스위스로 돌리게 했다고...
하지만 수보로프가 없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의 코르사코프 장군이 이끌던 군대는 앙드레 마세나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격파당했고 동맹군인 오스트리아군은 아예 러시아군의 위기를 외면했다. 이어서 마세나는 수보르프의 러시아군을 포위했지만 수보로프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과감한 기동을 감행, 전쟁사에 몇 있지 않은 위대한 퇴각 작전을 성공시켜 일련의 위기를 잘 빠져나왔다. 퇴각하는 러시아군의 꽁무니를 마세나가 요격하고자 끝까지 따라붙었으나, 수보로프로 단결된 러시아군의 진용이 너무나도 견고하여 결국 실패했고, 수보로프 본인은 이 전공으로 하여금 러시아 제국 역사상 4번째이자 마지막 대원수 직책에 임명되었다.
러시아 최고의 영웅이 된 수보로프는 그전에 수도에서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냈었는데, 변덕스러우면서도 수보로프를 싫어하던 파벨 1세는 이내 약속을 깨버렸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수보로프와의 면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랫 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건강을 해친데다가 파벨 1세의 연이은 푸대접으로 실의에 빠진 수보로프는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그의 시신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매장되었으며, 파벨 1세의 방해로 인해 그의 장례식은 전쟁 영웅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볼품없이 치러졌으나, 훗날 파벨의 아들 알렉산드르 1세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르스 광장에 수보로프를 기념하는 거대 조각상을 세워준다.

3. 평가


러시아군 전략의 아버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신중하고 상세한 전략 구상과 과감한 전술기동을 통해 승리를 쟁취해내던 장군으로, 자신의 저서에서도 이러한 부분들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한 군의 정예화와 단결력 고양을 중시하던 인물로 본인 역시 체력 단련에 노력을 아끼지 않아 강건한 신체를 자랑했다고 한다.[5]
다만, 전쟁에 있어서 아군의 승리를 이끌어내려는 마음이 지나쳐 적에게 무자비했다. 투르크의 전쟁 막바지에 투르크군이 농성하던 이스마일 요새를 함락시키자 요새 내부의 무슬림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일 동안 학살한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 당시 학살당한 무슬림의 수가 무려 4만 명을 넘나드며 생존자는 고작 수백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참상이었다.
또한 폴란드의 해방 투쟁을 분쇄할 당시에도 자치도시 중 하나인 프라가를 함락시키면서 약 2만 가량의 폴란드인을 학살했다. 이와 같은 무자비한 학살 행위는 저항의지를 분쇄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으나 후세에는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수보로프가 주도적으로 학살을 일으켰는지는 자세한 정황이 남아 있지 않아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총평을 내리자면 그야말로 '''러시아'''스러운 장군. 본의는 아니지만 수보로프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은 결국 후대 러시아 군대의 인명 경시 풍조로 이어진다. 수보로프 본인은 러시아의 강점을 인구라고 적는 동시에 정예병의 생사를 강조하는 유능한 지휘관이었으나, 이후 장군들은 그냥 수보로프가 보여준 과감한 기동 및 착검 돌격만 모방하는 잘못을 보여주게 된다.
또한 수보로프는 서양 전사에서 빠질 수 없는 명장으로 일컬어진다. 대략 해외 네티즌들은 '''나폴레옹과 한니발 수준'''으로 쳐주는 듯.[6]
하지만 흔히 비교되는 나폴레옹보다 확실히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 전체를 총괄하는 스케일과 여기에 관련된 능력일 것이다. 수보로프는 예카테리나와 파벨의 신임을 그렇게까지 받은 인물은 아니었던지라 실력에 비해 높은 직책을 겸임하진 못했다. 이 말은 곧 나폴레옹처럼 전쟁의 개시 전부터 군사 부분을 총괄할 "기회"가 없었다는 의미인데, 요컨대 대전략은 물론이고 작전술과 같은 능력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는 소리가 된다. 특히 작전술이란 개념 자체가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군사술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나 다름없는지라...
물론 이것은 비단 수보로프가 아니어도 근대 최고의 지휘관으로 뽑히는 대부분 인물들의 공통 사항이긴 하다. 군주조차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야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의 장군들은 말할 것도 없고[7], 스페인 왕위계승전에서 활약한 말버러 공작 존 처칠과 사부아 공자 외젠, 그리고 프랑스의 얼마 없는 원수인 삭스 공작 모리스, 심지어 이들 외에도 동시대 사람으로써 나폴레옹을 물리친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조차 나폴레옹과 같은 능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즉, 수보로프를 굳이 나폴레옹과 비교하면서 저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것.
무엇보다 수보로프가 평생 동안 "군단장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냐고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당장 수보로프가 본인 인생의 마지막 전장에서 받은 직책은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수보로프의 가장 뛰어난 전과가 무려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전장임에도 수보로프를 일개 군단장 정도로 보는 시각은 너무나도 주관적인 견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된 수보로프한테 무슨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정부의 방해가 들어오기 전까지 수보로프는 승승장구했으며, 하물며 각국 정부의 방해로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임기응변[8]조차 아주 훌륭하기 짝이 없었다.
여담이지만, 수보로프는 레프 톨스토이의 저작 전쟁과 평화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현재 러시아 제국에는 수보로프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던가, 수보로프 같은 인물이 막아서지 않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성공할 수 있었다던가, 윗선의 견제만 없었으면 마리 모로 따위는 포로가 되었을 거라던가 하여튼 러시아 작가의 소설답게 칭송 투성이.[9]
2008년에는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 채널, 로시야 1의 주최 하에 표본이 무려 5천여만 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라디오, TV 투표 등을 통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이 프로그램은 영국의 가장 위대한 100명의 영국인들과 다른 나라에서 행해지는 다른 유사한 프로젝트들과 비슷하다.) 여기에서 수보로프는 8위를 차지했다. 전문 군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순위이자 10위권에 든 유일한 장군이다.

4. 여담


스위스에 있는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기념비와 인근 부지는 러시아의 양외지로 러시아 정부가 관리한다.

5. 서훈 내역과 기타 이력


  • 러시아 제국 육해군 대원수
  • 이탈리아 공작 [10]
  • 신성 로마 제국 백작[11]
  • 오스트리아, 사르데냐야전원수
[1] 대문호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증조부이며, 표트르 1세의 측근 중 한명으로 에디오피아 출신의 흑인이다. 여담으로 간니발은 카르타고의 '''한니발'''에서 파생된 이름이라고.[2] 이 과정에서 표트르 바그라티온을 만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바그라티온의 문서를 참조.[3] 다만, 수보로프와 파벨의 관계가 처음부터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수보로프는 예카테리나 시절 또 그렇게까지 신임받던 인물은 아니었다. 수보로프와 파벨의 관계가 어긋난 진짜 이유는 다름 아닌 군사적인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파벨은 기계적인 프로이센식 훈련법을 도입하려 했으나, 수보로프는 이것을 불필요한 행위라면서 직접적으로 반대했다.[4] 다시 말하지만, 당시 수보로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즉, 합스부르크 왕조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지만 일개 군인의 아래로 황제의 동생을 맡겨야 했다는 의미.[5] 당장 말년에 직접 말타고 알프스를 넘던 양반이다.[6] 실제로 수보로프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을 보고 '''"나라면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7] 특히 이들은 세임에서 허락하지 않아 제대로 된 군사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였다. 덕분에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실력 출중한 원수가 수적 열세의 전투 도중 전사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8] 알프스 산맥을 넘는 작전이 바로 이때 나온 임기응변이다.[9] 참고로 마리 모로는 정치적으로 나폴레옹과 대립했던 인물이며 수보로프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에는 직접 프랑스군을 이끌고 수보로프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수보로프의 기세를 막지 못하긴 했지만 군사적 능력 자체는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나폴레옹이 마렝고 전투에서 드제의 도움으로 겨우 승리했을 즈음 나폴레옹 대신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격파한 인물이 바로 마리 모로였다. 요컨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의 와해를 불러일으킨 주인공은 흔히 알려진 사실과 달리 나폴레옹이 아니라 마리 모로였던 것.[10]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축출하여 사르데냐 왕인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가 수여한 작위.[11] 폴란드 전역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가 수여한 작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