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호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55대 감독 차범근의 대표팀에 대해 다룬 문서.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 이란 쇼크로 인해 박종환 감독은 경질되었다. 그리고 당시 야인이었던 차범근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차범근호는 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압도적으로 통과했다. 최종 예선 성적이 무려 '''6승 1무 1패.''' 바로 전 대회인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였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차범근호를 향한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 삼성 연구소에서는 '차범근 리더십'을 연구한다는 기사가 일간지 기사로 실렸고, 심지어 대통령으로 뽑자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만큼 월드컵 본선에서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본선 조별리그에서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 등 강호를 상대로 본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1무 2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1] 특히, 네덜란드전에서 나온 '''0:5''' 라는 충격적인 대패 때문에 차범근은 월드컵 도중 경질되고 말았다.
2. 전술
차범근 감독은 '템포 축구'를 강조했다. 그의 전술은 전적으로 측면 돌파를 중시했는데 선수 개개인이 공을 가진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의 빈틈을 공략, 발 빠른 윙어(서정원, 고정운, 이상윤 등)를 활용하여 측면을 무너뜨리고 결정력을 가진 스트라이커(최용수)가 골망을 흔든다. 당시 차범근이 사용한 3-5-2 전술은 현재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실상 5-3-2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4 윙어 전술'로 미드의 3명 중 2명이 윙어(...). 즉 '''중앙은 유상철이나 김도근이 혼자 버티는 전술'''이었다. 당시 유행에 가까웠던 사령탑 축구 덕에 대한민국 언론은 계속 '플레이 메이커'를 찾았고 '''그냥 중앙에 선다는 이유로''' 유상철을 '플레이 메이커'나 '게임 메이커'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 때는 왼편의 하석주와 오른쪽의 최성용이 최전성기이기도 하여 이들의 활동량으로 중앙에서의 빈 공간을 커버하였다.
딱 생각해 봐도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전술이지만 당시 아시아 축구 수준이 워낙 후졌기 때문에,[2] 지역예선에선 가슴이 뻥뚫리는 시원한 공격 축구를 보여주면서 6승 1무 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올렸다. 거기에 홍명보가 컨트롤하는 3백이 아시아에서는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실점도 거의 없었다. 최종예선 1패도 본선 진출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1패 뿐이다.
하지만 유상철이 김남일이나 박지성에 비해 건장하고 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코 이들처럼 재빠른 타입의 선수는 아니다. 느리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효과적으로 중원에서 커버하기는 쉽지 않다. 즉 딱 아시아권에서나 통할만하지 세계구급에는 전혀 통하지 않을 전술이었다는 것. 다만 차범근 감독의 실전 경험 부족만을 탓하기에는 당시 한국 축구대표팀의 전술은 감독이 누구든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 뿐 미드필더에 중앙 1명, 측면 4명을 두는 것은 대부분 비슷했다. 단지 강팀과의 경기에선 중앙을 2명으로 늘리고 원톱을 두는 3-6-1에 가까운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감독 성향에 따라 무엇을 더 많이 쓰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차범근 역시 월드컵 본선에선 위와 같은 극단적 전술이 아닌 중앙 미드필더 2명에 원톱을 내세우며 중원 싸움에 힘을 보탰다. 중앙 미드필더 1명에 투톱으로 경기한 것은 최용수, 김도훈 투톱을 내세웠다가 0-5로 대패한 네덜란드전 초반뿐이다. 그냥 당시 한국 축구가 모든 면에서 세계 수준에 못 미쳤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지적할만한 점으로, 프랑스 월드컵 당시 참가국 32개국 중 독일[3] 과 더불어 유이하게 상당히 고전적이었던 전술인 스위퍼식 맨투맨 수비를 택했던 것이 한국 대표팀이었다. 스위퍼인 홍명보를 수비의 축으로 두고, 최영일, 장형석, 김태영, 유상철, 이민성 등의 수비수를 상대 공격수와 1대1로 마크하게 하는 것이 당시 한국 대표팀의 주된 수비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모두가 알다시피 본선에서는 상대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의 기량에 압도적으로 밀려버린 한국 수비수들이 고전하면서 완벽하게 실패하게 된다.
3. 월드컵 지역예선
아시아 지역예선이 시작되는 1997년 초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에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1996 아시안컵 8강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전반전을 2-1로 앞서고도 후반전 알리 다에이에게 완전히 농락당하며 4골을 허용해 일명 '씩스투 참사', 2-6 역전패라는 최악의 패배를 당한 뒤 박종환 감독이 경질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 여기에 관해서 당시의 대표팀 일부 선수들이 박종환 감독을 쫓아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태업성 플레이를 해서 대패했다는 설이 있고 심지어는 사실상 정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차범근 감독으로서는 이 난관을 뛰어넘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 속에서 출범한 차범근호는 태국, 홍콩과 함께 속했던 1차 예선 6조를 3승 1무 9득점 1실점으로 무난하게 뚫더니,[4] 오히려 최종예선 첫 4경기에서 카자흐스탄[5] , 우즈베키스탄[6] , 일본[7] , UAE[8] 를 모조리 쓸어버리며 4전 전승을 기록, 고작 절반밖에 안 왔는데도 사실상 조 1위로 본선을 확정지었다. 첫 4경기 중 일본전을 제외한 3경기가 홈이었기에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었다는 신중론도 있었으나, 뒤이은 5, 6차전 중앙아시아 원정을 1승 1무로 가볍게 마무리를 지은 것은 그런 의심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일본을 제치고 한국과 자웅을 겨루게 된 복병 UAE조차 '''3-0'''으로 잠실에서 뭉개버렸으며, 5:1 대승을 거뒀던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는 한국의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화룡점정. 우즈벡 원정에서 한국대표팀이 쾌승한 것은 이 때가 유일하다. 이것은 당시 대회 특성상 원정 2연전을 하게 됐는데, 가삼현 국제부장이 일정을 카자흐-우즈벡으로 뽑으면서 한국대표팀이 본의 아닌 본의로 우즈벡 대비 전지훈련을 하게 된 격이 되었다. 우즈벡은 원정은 해발 500m 정도에서 싸우기 때문에 항상 고지대 적응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데, 이 때는 오래 체류하면서 적응했다. 그래서인지 원정 2연전 중 첫번째 경기인 카자흐스탄 원정에서는 1-1로 비겼다. 다만 당시 카자흐스탄은 조 최약체이기는 했어도 홈에서는 1승 3무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9][10] UAE의 경우는 아예 3:0으로 대패했을 정도.
1997년 9월 28일에 열린 3차전 '''도쿄 대첩'''은 가히 절정으로,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축구 한일전 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기록되고 있다. 후반 20분 일본에 선제골을 내주어 경기가 기울어지는 듯하다가 후반 39분과, 42분에 연속골을 넣고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11] 거기에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가모 슈 감독은 이 경기 이전까진 명장으로 호평을 받다 이 패배 한번으로 대대적인 비판에 시달리면서 교체론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가모 슈 감독은 끝내 경질되는데, 명목상으론 '''건강상의 이유'''로 자진사퇴했으나, 누가 보더라도 성적에 따른 경질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12] 이후 일본은 당시 수석코치였던 오카다 다케시를 감독 대행으로 승격시켜 남은 예선을 치렀고, 이후 정식 감독으로 임명했다.[13]
'''8전 6승 1무 1패, 승점 19점 19득점 7실점 골득실 +12'''라는 가공할 성적은 아시아 경쟁국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고, 국내 여론에게는 '''"이번에야말로 16강에 갈 수 있다!"'''라는 높은 기대감을 갖게 해주었다. 당시 최종예선 B조는 결국 한국이라는 깡패에게 얼마나 잘 선방하면서 착실히 승점을 모으냐가 관건이었을 정도.
한국의 1패는 서울 홈경기에서 일본에 0:2로 패한 것인데, 이때 '''한국은 이미 본선행을 확정지은 상황'''이었던데 반해 일본은 1승 4무 1패로[14] UAE의 2승 2무 2패에[15] 밀려 자력 진출이 불가능한 조 3위로 전락. 비겨도 나머지 경기에서 계속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총력전을 펼쳤다. 이런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한일전 패배였음에도 의외로 비난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16] 물론 '의외로 별로 없었을' 뿐 당연히 홈에서 완전 쳐발린 경기이기에 당연히 욕은 먹었다. 상대적으로 덜했단 얘기. 그리고 이 시합에서 최용수는 부상당하고 마지막 UAE전은 김도훈 원톱 체제로 승리하게 된다.
다만 한국이 일부러 일본에게 져준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긴 했다.[17] 실제로 차기 월드컵 공동 개최국이었으니... 결국, 일본은 한국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마지막 카자흐와의 홈경기에서 승리하여 기적 같은 2위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낸다.
여튼 한국 축구 사상 전무후무한 쾌진격이었는데, 이런 압도적인 성적에다 이기고도 자만하지 않고 다음 상대를 대비하는 차 감독의 겸손한 발언과 노트북을 그라운드에 가지고 다니면서 하프타임이나 경기가 끝나고 난 후에 컴퓨터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장면이 예선전에서 방송국 카메라에 여러 차례 잡히면서 차 감독의 인기와 신뢰감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18] '차범근의 리더십' 류의 처세술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차범근을 대통령으로'라는 반농담도 회자되었다. 당시 중앙일보에 도올 김용옥의 차범근 감독의 경기 후 '''기독교적 언행'''에 대해 자제를 부탁하는 정중한 칼럼이 실렸고, 차 감독이 회답을 했는데 그 두 칼럼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고, 역시 같은 시기 폭발적 인기를 구가했던 김국진이 진행했던 '스타 다큐'에서도 차범근호를 다룬 특집이 나올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다.
문제는 이런 과도한 열광으로 인해 차범근호의 실체가 가려지면서 본선에서의 비극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것. 차범근호 호성적의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운빨이었다는 걸 당시 국민들은 알지 못했다. 이 시절 한국이 월드컵 연속 3회 진출의 업적을 이룩한 아시아의 강자라곤 해도 지금처럼 월드컵은 당연히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언제나 진땀을 흘리며 겨우겨우 진출했다. 아시아의 월드컵 진출권은 70년대까지 1장 이하였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좀 한다고 해도 원탑은 아니었던 한국은 번번히 마지막 관문에서 좌절하는 편이었다. 물론 다른 아시아 팀들 다 물리치고 정상에 선 적도 몇번 있지만 그럴때마다 타 대륙과 플레이오프 벌여서 깨진 바람에... 그나마 원톱은 못해도 아시아 Top 2에는 들만한 능력은 지닌 덕에 아시아 출전권이 2장으로 확대된 80년대부터 한국의 월드컵 진출이 다시 시작된다.
바로 전 대회인 1994 FIFA 월드컵 미국은 자력 진출에 실패해 기적이나 바래야 했을 만큼 월드컵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1994년 대회 때의 최종예선 시스템은 진출팀을 전부 모아 조 구분 없이 풀리그로 벌이던 방식이었는데, 한국이 1994년에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진출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시아의 온갖 강팀들이 하나의 조에 모여서 2팀을 뽑는 풀리그 형식이었는데 빡세지 않을 리가 있나? 사실 사우디-이란-이라크-한국-일본-북한 이런 조 편성이면 지금도 한국이 2위 안에 확실히 들 거라고 장담하긴 힘든데 그때는 더 힘들었다. 한국이 월드컵은 당연히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2002년 월드컵에서의 대성공과 함께 이때부터 아시아 월드컵 진출권이 4.5장으로 고정되면서 웬만큼만 하면 월드컵 진출권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98년 월드컵 때부터 진출국을 32개국으로 늘리면서 아시아의 출전권이 3.5장으로 늘어났는데, 이로 인해 최종예선이 이전까지의 풀리그 방식이 아닌 두개 조로 나누어 최종예선을 치르는 방식으로 변경된다.
1998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 A조: 이란, 사우디, 중국, 쿠웨이트, 카타르
- B조: 한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UAE, 일본
하지만 실체야 어쨌든 이전까지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하거나 힘겹게 본선에 진출했던 것과 달리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는 쾌승을 거듭하며 명실상부 아시아 깡패의 위용을 보이며 예선을 통과했기에 팬들의 기대감은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일반 팬들이 생각하기에 한국의 실력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착각이 낳은 열광적인 지지는 차범근호가 지닌 지나치게 공격적인 전술의 약점을 제대로 짚어 보지 못한 채 본선을 맞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만다.
4. 평가전 및 대회
월드컵 예선 이후 처음 가진 대표팀 경기인 킹스컵에서 덴마크 국내리그 선발팀에게 1-2로 패했다. 그 다음, 태국과 이집트를 모두 2-0으로 이기고 결승에 가서 다시 맞붙은 이집트에게 1:1로 비겨 승부차기 끝에 이기고 우승을 하긴 했다. 다만 경기력이 어땠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이는 황당하게도 주최 측이 부른 중계권료를 IMF 직후라 외화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낼 수가 없어 중계를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직관한 사람이 아닌 이상 본 사람도 없는 것.[20]
직후 호주 전지훈련에서 호주 대표팀 1.5군과의 평가전에서도 0-1로 패하면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호주 월드컵 예선의 주요 선수인 비두카와 해리 큐얼이 빠진 호주 국내파 위주의 팀이었다. 그리고 현지 적응훈련이랍시고 간 프랑스 전지훈련에서도 프랑스 국가대표와는 붙지도 못하고 프랑스 3부리그 팀인 생드니와의 경기에서 1-2 역전패를 당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이 경기에서는 말 그대로 경기에 뛰어보지 않았던 선수들을 점검하는 차원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경기 내용이 좋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김병지가 생각없이 골킥을 하다가 상대 공격수 맞고 골이 되는 등등. 당시 리그 1 2위를 달리던 FC 메츠와의 경기에서 2-1로 역전승하면서 뭔가 기세가 오른 듯 했지만, 그 뒤 벌어진 A매치에서 마케도니아와 2-2로 무승부, 슬로바키아와 0-0 무승부를 기록한 후, 당시 평가전 상대 중 제일 강팀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게는 1-3으로 역전패했다. 그리고 원정 평가전은 저게 다였던데다가 저 경기의 중계는 전혀 없었다.
일본에서 벌어진 다이너스티 컵 경기에서 나카야마와 조 쇼지에게 연속으로 코너킥 셋트플레이 골을 먹으며 1-2로 패한 후, 중국을 2-1로 겨우 잡았지만 홍콩 선발팀[21] 과의 경기에서 1-0으로 신승을 거두며 3위에 그쳤다. 일본과는 한달 뒤 평가전에서 2-1로 설욕하긴 했지만, 중국과의 월드컵 출정식에서는 1-1 무승부를 기록[22] 했다.
체코 1.5군 대표팀을 잠실로 불러들여 평가전을 해서 2-2 무승부를 거뒀다. 체코는 1998 월드컵 본선에는 못 갔지만 UEFA 유로 1996 준우승을 한 강호인데, 후반전 두 골을 어찌어찌 따라가 무승부를 기록했다. 멕시코전을 대비한 가상 멕시코로 자메이카와의 2차례 평가전(2-1 승, 0-0 무승부)에서는 몸 덜 풀린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공격하다가 몸이 좀 풀리면서 후반에 고전하며 2-1 승리를 거뒀다. 대부분의 평가전은 김병지의 선방에만 의존한 수비 불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그닥 좋은 전력은 아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게 했을 뿐이었다.
이때만 해도 '자꾸 이겨서 자신감을 갖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약팀과 평가전을 많이 했고, 설령 강팀과 평가전을 한다 해도 제대로 1군과 하는 게 아니라 1.5~2.5군과 경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짜 제대로 된 세계급 강팀과 제대로 붙어보는 경우는 월드컵 정도가 전부였다. 히딩크 감독의 부임 후 2001년에 체코와 프랑스에게 5:0으로 크게 털리기 전까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수준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5.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프랑스 월드컵 본선의 기록은 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문서 참조.
6. 전적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출전팀은 '''굵은 글씨(볼드체)'''로 표시.
7. 후일담
언론에서는 겉으로는 16강 진출에 대해 '해볼만 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으나, 해당 기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월드컵 취재 기자들 중 아무도 조별 예선 이후의 숙박 예약을 잡아 놓지 않고 전부 조별 예선 후 귀국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숙박 예약은 물론이요 이미 축구협회에서는 16강 이후의 일정까지 선수단의 비자 기간이 발급되어 있지 않았었다.
월드컵 직전 가진 중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벤치에 앉아있다가 돌아온 황선홍은 '또 실수할까봐 겁먹고 일부러 안 나온 거 아니냐?' 라는 비난까지 받자 '한국에서는 도저히 축구를 할 수 없겠다'라고 판단해 J리그로 진출한다. 이후 2010년 6월 방송한 무릎팍 도사에서 털어놓은 바로는 동네 수퍼마켓에 갈 수조차 없었다고... 그리하여 일본에서의 영입 제의가 없었음에도 본인이 건너가 적극적으로 알아봤다고 한다.
E조의 조별리그 6경기 중, 승패가 갈린 건 한국이 패한 2경기 뿐이었다. 나머지 4경기는 전부 다 무승부. 결국 한국을 더 큰 점수 차로 바른 네덜란드가 조 1위, 한국을 적당히 발라먹은 멕시코가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고, 한국과 비긴 벨기에는 예선 탈락했다. 사실 지금까지의 대회에서 한국을 이긴 팀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16강에 진출했다. 유일한 예외는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당시 터키 뿐.[24] 여담으로,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의 경우 한국은 3패를 기록했는데, 이 때 한국과 같은 조의 3위를 기록한 우루과이는 1승 1무 1패로 3위 6개국 중 상위 4개팀의 자격으로 16강에 진출.
같은 조에서 16강에 진출한 네덜란드와 멕시코의 운명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는 16강에서 완전히 녹슨 전차가 된 독일을 상대로 난투극 끝에 1:2로 털리고 떨어진다. [25] 반면 네덜란드는 16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2:1로 이기고 8강에 진출한 뒤 8강에서 거함 아르헨티나를 난투극 끝에 2:1로 간신히 쓰러뜨렸으나 힘이 다 소진되어서인지 4강에서는 브라질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패하고 3/4위전으로 가고 말았다. 거기서는 8강에서 독일을 3:0으로 완승해버리고 4강에 왔지만 프랑스에게 막혀 3/4위전으로 온 크로아티아에게 1:2로 패하면서 4위로 마감했다.
차범근 본인에게도 이 당시 월드컵은 가장 뼈아프게 남아있다. 이제 그렇게 아플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2014년 거스 히딩크를 만나 "그때 저를 정말 힘들게 하셨어요."라고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조금은 털어낸 모양. 그러자 히딩크는 화들짝 놀라면서 '''"정말 미안하다. 이 부분은 편집해 주세요."'''라면서 농담까지 했다.
반면,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시점. 전술한대로 98년 월드컵 차범근이 불명예 퇴진당하고 모든 미디어들이 차범근에 대해 없는 사실까지 얹어가면서 융단폭격을 가할 때, 언론사에서는 중앙일보 손장환 기자와 김어준의 딴지일보가 가장 중립적으로 차범근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며 기사를 냈다. 한참 PC통신과 인터넷 초창기 냄비처럼 들끓던 여론 사이에서 딴지일보가 차범근 감독에 대해 중립적인 내용의 칼럼을 썼던 것을 보면서 세상이 나에게 등을 보일 때 유일하게 울부짖은 사람[26] 이라고 감사했었고 그 후로 친해졌다고 한다.
차범근은 2010년 6월 경 기사에서 무릎팍도사 출연 제의에 98년 월드컵이 자신과 가족들에게 큰 상처였음을 말하며 아직 출연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무릎팍 도사는 끝끝내 차범근을 출연시키지 못한 채 종방했지만, 차범근과 가족들이 받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차범근은 이후 한국 축구의 승부조작과 여러 어두운 면을 폭로했고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축구협회는 5년 동안 국내 축구계 활동을 금지한다는 중징계에 처하려다가 AFC에게 '''아시아 축구 영웅을 지나치게 박대한다'''는 비난을 듣고 3년으로 줄인다. 결국 차범근은 중국 슈퍼리그에서 활동하며 지내며 한동안 국내 축구계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MBC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 명성을 약간이나마 회복한다. 지금은 1998년 당시 언론의 '차범근 죽이기'가 과도했다는 것이 축구 팬들의 중론이지만 이미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며 좀처럼 언급조차 되지 않는, 아니 하여서는 안 되는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16년 뒤 또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똑같이 1무 2패로 탈락함에도 당시 감독이던 홍명보를 유임시킨다는 반응에 차두리는 '''"그럼 16년 전은 왜...?"'''라고 하면서 무척이나 섭섭한 감정을 SNS으로 쓸 정도였다. 그러자 차범근은 "그 입 다물라!"라고 엄중하게 자제시켰다고 한다. 물론 알다시피 홍명보도 비난 여론 속에 똑같이 모가지당했다.
이 대회 네덜란드전에서 고군분투하며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신예 선수였던 이동국이 2020년 10월 26일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이 대회에서 선수로 뛰었던 한국 선수들은 모두 은퇴하게 되었다.
[1] 멕시코전 1:3 패, 네덜란드전 0:5 패, 벨기에전 1:1 무[2] 공격적인 3-5-2 전술은 웬만한 강팀도 함부로 사용하기 힘들다. 그러나 약팀이 이 전술에 제대로 걸려들면 손도 못쓰고 대량 실점 당하기 때문에 두 팀의 전력 차가 심하게 나는 경우 강한 쪽에서 가끔 시도하는 편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역습 얻어맞고 플레이가 꼬여 실패한다. 한국팀의 경우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이 전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2019년 9월 5일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한 조지아에게 시전했다. 물론 실패하고 망신만 당했다.[3] 90년대의 독일 대표팀은 마티아스 자머와 로타어 마테우스라는 두 걸출한 스위퍼들 때문에 포백 전술로의 전환이 상당히 늦었고, 이는 독일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유로 1996 우승을 제외하고는 긴 암흑기를 걷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4] 말이 좋아 무난이지, 예전에 큰 점수 차로 쉽게 이기며 올라가던 1차 예선이 아니라서 언론의 우려가 컸다. 홍콩과의 첫 원정경기에서 전반 무득점에 2-0 신승, 태국 원정에서 피아퐁에게 동점골 맞으며 고전하다 3-1로 승리하고 홍콩을 홈에서 4-0으로 이기며 분위기를 좀 탔으나 홈에서 태국과 득점 없이 비기는 등 분명 이전보다는 고전을 했다.[5] 3:0[6] 2:1[7] 2:1[8] 3:0[9] 당시 카자흐스탄 원정은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다. 경기장은 제대로 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잔디 관리가 안 돼 있었고, 체제 편의를 위한 카자흐 측의 지원은 전무하다시피 했다.[10] 차범근 감독은 이후 "카자흐스탄에 도착해 보니 도저히 경기를 뛸 수 있는 시설이나 상황이 안 됐다. 우리보다 먼저 경기한 일본이 왜 고전할 수밖에 없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다만 우리 다음에 경기할 UAE에게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이런 내용을 언론에는 흘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11] 결승골을 넣은 이민성은 순식간에 국민 영웅이 되었다.[12] 도쿄 대첩 다음 경기인 카자흐스탄 원정에서 후반 말미에 극장골을 먹혀서 1:1로 비긴 후 경질됐다.[13] 같은 기간 동안 감독직을 수행한 탓인지 차범근 해설의 말에 따르면 특별한 선물까지 줄 정도로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14] 일본 대표팀은 오카다 타케시 감독 취임 이후 우즈벡 원정에서 질 뻔 하다가 후반 막판에 미우라의 극장골로 무승부, UAE와의 홈경기에서도 1-1로 무승부를 거뒀는데 UAE와의 홈경기가 끝나고 말그대로 폭동이 일어나 미우라가 자신을 욕한 관중을 패려고 했던 영상이 우리나라 스포츠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15] 이중 1패는 당연히 승리가 예상되던 카자흐스탄 원정에서 직전 경기에 감독이 퇴장당해 감독 없이 경기를 치렀기 때문인지 예상 외로 3-0으로 발린 경기이다. 이 경기 이후로 UAE가 갑자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다른 1패는 우리와의 경기...[16]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있어서였는지 "한국, 일본이 사이좋게 월드컵에 가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물론 우리 본선 진출이 확정된 상황이었으니, 일본에 한 수 접어준다는 생각으로 관대해진 것이지, 만약 입장이 반대였으면 있을 수 없는 일.[17] 일본과 플레이오프를 놓고 다투던 UAE가 한국 같은 강팀이 어떻게 일본에게 질 수 있나며 크게 분개하기도 했다.[18] 당연하지만 90년대 후반임을 감안하면 컴퓨터를 다룬다는 것만 해도 대단해 보일 시기였다. 현대로 굳이 비유하자면 2010년대 초반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막 활성화될 때 태블릿을 들고다니며 경기를 분석한다고 보면 된다. 나중에 컴퓨터 안에 실제로는 별 거 없었다는 얘기도 나오긴 했지만.[19] 공격형 미드필더 카시모프와 함께 1994년 우즈벡이 한국에 유일한 A매치 승리를 거둘 때 한 몫 했다.[20] 당시 경기 결과는 스포츠뉴스를 통해 짧게나마 보도되었지만 그조차도 경기 영상은 전혀 없었으며, 수훈 선수의 짧은 전화 인터뷰 정도가 전부였다.[21] 홍콩 국가대표팀이 아닌 홍콩 프로선발팀이다.[22] 황선홍의 부상으로 빈 자리가 있었다고는 하나 후반은 거의 중국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경기[A] A B C D E F G 비공식 경기[23] 이 경기는 차범근 감독의 대회 중도 경질로 인해 김평석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 자격으로 치렀다.[24] 비슷하게 한국이 토너먼트에 가든 못가든 상관없이 한국을 이긴 팀은 우승을 못하는 징크스가 있는데,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당시의 아르헨티나를 제외하면 모두 우승에 실패했다. 한국이 4위 신화를 쓴 2002년에도 4강에서 한국의 돌풍을 저지했던 독일은 브라질에 져서 준우승을 했으며, 그 뒤 한국을 이긴 터키도 그때 단계가 3,4위 전이였기 때문에 징크스가 이때조차 안 깨졌으며, 한국이 가장 최근에 16강을 갔던 2010년에도 조별리그 2차전에서 승리했던 아르헨티나는 8강, 16강에서 승리했던 우루과이는 4위에 그쳤다.[25] 그러나 20년 뒤의 월드컵에서 멕시코는 독일을 다시 만나 결국 1:0으로 꺾음으로써 지난 그 패배를 설욕하는 데 성공한다.[26] 해당 기사에 언급된 "그래, 차범근을 사형시켜라!" 딴지 기고문의 내용은, 단순히 월드컵의 불명예 경질 외에도 그후 이어진 K리그 승부 조작 발언 이후 더 가혹해진 언론의 흑색선전에 대한 반박도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