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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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행궁으로 추정되는 선전료우관서도 속의 건물군. 행랑이 서로 얽혀서 상당히 크다.
1. 개요
2. 상세
3. 역사적 변천사
3.1. 고려시대(충선왕3년?~1392년 7월 17일)[1]
3.2. 조선시대(1392년 7월 17일~1636년 12월 16일?) - (행궁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20일 사이에 소실된것으로 추정)[2]
4. 구조와 전각
5. 위치불명
6. 그림과 회화속 영변행궁 그리고 추정


1. 개요


평안북도 영변군에 있었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중,대규모 행궁. 사실상 '''한국에 있었던 마지막 사찰형 행궁이다.''' 평안병영이 이곳에 위치하였으며, 조선후기 영조가 새로지은 영변행궁의 정식 명칭은 '''육상궁'''이다.

2. 상세


고려 충선왕 3년 때 건설되었다는 설과 충숙왕때에 지어졌다는 설, 고려 인종때 지어졌다는 설, 아예 고려가 아니라 조선초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지고있다. 이후 이성계최영, 남이, 김종서, 류승룡, 선조광해군, 임경업, 영조가 이곳을 이용했을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성계 장군이 제2차 요동정벌을 갈 때 거쳐서 갔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최영의 중국과의 외교 당시 사용되었으며[3] 김종서 장군이 4군6진 개척당시 거쳐간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남이장군이 함경도평안도에서 근무할 당시에도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선조가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던 영변행궁을 임진왜란 당시 이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조실록 27권,선조25년 6월 13일 신축5번째 기사辛丑" 중에서 '''영변 행궁에서 신하를 인견하고 이어할 곳을 논의하다'''上권.

이 기록에서도 왕이 위급시 거처를 할만큼 영변행궁이 규모가 상당한것으로 보여진다.

"상이 영변행궁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알현하였다 최흥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상이 이르기를,"이 일에대한 나의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 머무를것이니 여러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하였다. 정철이 아뢰기를,"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귀성(지금의 구성)이나 강변(지금의 압록강 일대) 근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上御寧邊行宮, 引見從臣。 崔興源曰: "自上欲移駐定州, 請姑留于此。" 上曰: "此則予意已定。 世子則當留于此, 諸臣欲不來者, 不>來可也。" 鄭澈曰: "世子今留駐此矣, 終向定州乎?" 上曰: "當向龜城 江邊等處。" 澈曰: "世子留駐則力分, 朝廷恐不成模樣, 人心亦且搖動也。" 上曰: "多留從官于此, 予以輕裝移駐矣。" 澈曰: "姑待平壤聲息之來, 何如?" 且曰: "諸臣勸留 勸避,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20번째기사''

중에서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난이 일어나자 명망있는 진신들이 모두 도망하다'

''애초에 상이 경성을 떠날 때 요사스런 말이 갖가지로 퍼져 국가가 틀림없이 망할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명망있는 진신(縉紳)들이 모두 자신을 온전하게 할 계책을 품었다. 수찬 임몽정(任蒙正)은 하루 먼저 도망하여 떠났으며.. [4]

-중략-

노직(盧稷)은 영변에서 뒤에 떨어졌다가 도망하였다.

상의 행차를 따르던 제신(諸臣)들도 서로 이르기를 ‘강문(江門)에 이르면 늙고 병든 사람은 당연히 사퇴해야 한다.’ 하면서 모두 견고한 뜻이 없었는데, 홍진(洪進)만은 울면서 이항복에게 말하기를 ‘시종하는 신하는 어려운 때에 마땅히 임금을 따라야 한다. 나는 한낱 오활한 선비이니 세자를 따른다 해도 무슨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죽든 살든 상의 행차를 따르겠다.’ 하였다. 세자를 따르거나 왕자를 따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성부에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문관·무관이 겨우 17인이었으며, 환관(宦官) 수십 인과 어의(御醫) 허준(許浚), 액정원(掖庭員) 4∼5인, 사복원(司僕員)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이 내관(內官)에 이르기를,"사대부가 도리어 너희들만도 못하구나."하였다. 환관과 사복원에 대해서는 뒷날 모두 녹공(錄功)하였는데, 끝내 직사(職事)는 맡기지 아니하였다.

상이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사자를 의주에 보내어 거가가 본주(本州)에 머물며 곧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을 효유하여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고 '''응교 심희수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수리하게 하였다.'''[5]

그리고 잇따라 차관(差官)을 보내 자문(咨文)으로 요동의 진에 알리도록 하고, 이덕형에게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진달하도록 유시하였다.

그리고 영변행궁 구조 및 형태와 건물의 종류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에 나오는데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1번째 기사'에는 영변행궁 내부에 동헌이 같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영변행궁은 남한산성 행궁과 같이 동헌과 행궁이 합쳐진 건물로 보인다. 이를 통해서 영변행궁을 조선초기에는 관아와 사찰으로 쓰임과 동시에 행궁으로의 위치를 가진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변행궁 동헌에 넒은 마당이 있다는 자료이기도 하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1번째 기사 ''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 양 총병 등 중국군의 형편, 요동 파천 등을 논의하다.

'''상이 행궁의 동헌(東軒)에 나와 비변사 당상(堂上)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한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전사(戰士)들이 전진할 마음만 있고 후퇴할 마음은 없으니 해볼 만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훌륭한 장수를 얻은 뒤라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조승훈(祖承訓)을 오도록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성중이 아뢰기를,

"신이 조승훈을 양 총병(楊總兵)에게 요청하니, 그가 ‘내가 바야흐로 공죄(功罪)를 논하여 상벌(賞罰)을 시행하고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엄격한 듯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총병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성중이 아뢰기를,

"전일 양 총병에게 ‘우리 나라가 복이 없어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하였더니, 양 총병이 ‘조정의 장령(將領)들이 엄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답하였으니, 참으로 도량이 큰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고 왔는데, 만약 한 번 패했다는 것을 이유로 철병(撤兵)해 버린다면 우리 나라의 일은 진실로 걱정할 게 못 되지만 황제의 위엄이 손상될 것이니 사이(四夷)가 알도록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이 적은 대군(大軍)으로 대진(對陣)하여 서로 전투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군사를 뽑아 그들의 흩어져 있는 군사[散卒]를 휩쓴 뒤라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신이 이빈(李薲)을 만났더니, 빈이 신의 아우인 신립(申砬)·신할(申硈)이 패배한 것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많은 수의 >군사를 나누어 험조(險阻)한 곳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적을 덮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차질이 생긴다면 혹 난처한 일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영변 근처도 아직 대가(大駕)가 머물고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유언 비어가 전파되고 있는데 더구나 강원도·황해도 등지이겠습니까. 길이 막혀 이 한 곳에 머물러 있기는 하나 호령이 통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불행하여 적세가 온 나라에 가득 찬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수상(水上)으로 가야 될 것입니다."

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현재에는 다만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 바다로 나가는 것, 수상으로 가는 것 이 세 계책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장전보에 머물러 있기만을 허락했을 뿐이니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의당 정주에 가서 사변의 추이를 살피든지 혹은 바다로 나가거나 수상으로 가든지 편의에 따라서 조처하는 것이 옳습니다."

-중략-

"의당 전진하여 수습할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형세로 보건대 정주(定州)에는 결코 갈 수가 없다."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서 선조의 '의주피란' 당시 영변행궁은 임시관아로 쓰임과 동시에 행궁으로의 기능또한 있음을 알수있다.

이 외에도 세종실록에도 영변행궁과 영변약산에 대한 기록이 수차례 나온다. 여기서는 영변행궁이 세종때에는 ''과'병영'이 설치되어 군사시설로 이용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다만 이후 강계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영변으로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영변대도호부의 약산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진과 병영이 바로 조선시대 평안도의 군사를 총 지위하였던 평안병영이다.'''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5월 1일 신묘 1번째기사''' 중에서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가 문안을 드리었다. 우의정 하연(河演)·좌찬성 황보인(皇甫仁)·우찬성 김종서(金宗瑞)·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이 아뢰기를,

"신들은 생각하옵건대, 평안도의 안주읍성(安州邑城)은 본디 절제사 영(節制使營)으로서 실로 우리 나라 요충(要衝)의 땅이옵니다. 옛사람의 말에, ‘수(隋)나라 군사 백만 명이 물에 빠져서 고기밥이 되었다. ’는 것은 곧 안주(安州)의 살수(薩水)를 이른 것이옵니다. 뒤에 영변(寧邊)의 약산(藥山)이 지형 좋은 땅이라 하여서 (鎭)을 옮기고 (營)을 설치하였다가, 근자에 변경(邊境)이 시끄럽기 때문에 또 강계(江界)로 옮긴 것이옵니다. 약산(藥山)의 이로움과 해로움은 조정의 의논이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옵는데, 약산을 좋다고 하는 이는 말하기를, ‘지형이 잘 짜였고 험준하여 만일 군사를 엄하게 신칙하여 굳게 지킨다면 적군이 와서 덤비지 못할 것이다. 혹 말하기를, 「큰 냇물 사이에 끼여 있으므로 물이 불어 길이 막혔을 때 갑자기 적변이 있으면 구원할 수가 없다.」고 하나, 우리쪽이 건널 수 없을 때는 적군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그것은 족히 염려할 것 없다. ’고 하고, 약산(藥山)을 그르다고 하는 이는 말하기를, ‘형세가 험하고 좁으니 비록 자리잡고 있을 수는 있으나 군사를 행군시키어 상대편을 막아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며, 도적의 오는 길이 약산(藥山)뿐이 아니라, 안주(安州)가 더욱 그 곧은 길이니, 도적이 만일 수만(數萬)의 병력으로 요긴한 길목을 끼고서 거침없이 몰아 쳐들어오게 되면, 약산(藥山)이 비록 견고하였다 할지라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옵는데, 신들의 생각에는 안주성(安州城)은 헐어 무너진 지가 수년이 되어 만일에 불시의 일을 당하게 될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청하옵건대 그 고을 백성에게 명년까지의 기한으로 장성(長城) 쌓는 일을 면제하고 안주성을 수축(修築)하게 함이 실로 편하고 유익할까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기로 하고,..''


3. 역사적 변천사



3.1. 고려시대(충선왕3년?~1392년 7월 17일)[6]


※영변행궁은 언제 지어졌는지 알수 없으므로 이 문단은 어느정도 추정을 통해서 작성되었다.
충선왕 때에 이르러 원나라로부터 오는 사신단과 원나라왕족이 거쳐갈 역원이 부족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충선왕3년(?)에 지금의 영변에 궁궐과 역원 을 짖게되는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이 영변행궁이다. 이후 원나라의 사신단과 왕족이 묶는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고려왕실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고려시대의 행궁과 원을 같이 사용한 경우로 이 경우는 현재 2020년 기준으로 발굴되거나 남아있는 곳은 파주에 혜음원지가 유일하다.[7] 1차 홍건적의 난 당시에도 많은 피해를 보지 않았으며,2차 홍건적의 난 당시 영변전투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8] 또한 이후로도 고려왕조가 멸망할때까지 남아있었다.[9]

3.2. 조선시대(1392년 7월 17일~1636년 12월 16일?) - (행궁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20일 사이에 소실된것으로 추정)[10]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상으로는 영변읍성 내부에 위치한 것 으로 보이며 고려시대부터 내려져 오던 행궁을 조선시대에는 '진'과 '영'을 설치함으로서 군사시설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조선초기에는 영변대도호부가 행궁건물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서 선조의 의주피난과 광해군과의 분조가 이곳에서 이루어진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때까지 기록상 존속한것으로 보아서 홍건적의 난을 버텨낸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대의 화공으로 행궁이 불타버려 그 자리에 영변읍성-신성의 내부 관아들이 들어선것으로 추정된다. 행궁의 정확한 규모는 알수없으나 고려사목판본 에 따르면 수십체의 행량이 얽여있고 여러 전각들이 있었으며 대대적인 중수는 공민왕3년 있었으나 공민왕의 1차 요동정벌 당시 쓰인이후 사실상 사절단의 숙소 및 역원으로 쓰였다고 한다.[11]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영변행궁을 수리하라고 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상으로는 아마 고려시대부터 내려져오던 건물들이 낡아 쓰기에 불편하여 수리를 통해 민심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한양으로 들어갈때 경유,또는 전쟁시 사용하기 위해서 지어진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괄의 난 당시 이괄의 군대가 이곳에서 주둔하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어떠한 훼손은 없었다.그러나 수리한지 불과 45년 6개월만에 병자호란으로 청나라군의 화공으로 행궁이 불타버려 이후로는 재건되지 않은채 영변읍성 장대와 사찰,민가와 관아건물들 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행궁터는 고려시대 궁궐축조법을 보여주며 언덕을 이용한 높은 축대와 연못지,400여칸규모의 행량터가 조선후기까지 일부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후 영조때에 영변행궁을 다시 재건하고 '''육상궁'''이라 하였으나 이후 어떠한 이유로 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영변은행 금고 건설로 동쪽의 행궁터추정 부지가 심하게 훼손되었고 이후 한국전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물인 영변 천주사가 폭격으로 불타고 행궁의 토지에 있던 유구들과 행궁의 축대가 모조리 무너져버려 영변행궁의 모습을 찿아보기 어려워졌다. 이후 북한에서 천주사 일대와 추정위치를 발굴한 결과 "宮" 이라고 쓰여진것으로 추정되는 수막새와 여러 고려시대 석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12]

4. 구조와 전각


지어질 당시 수백채의 행랑채와 40여 채에서 80여 채의 건물군이 복잡하게 건축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남아있지 않다. 행궁의 정확한 규모는 아직 모르나 영변성(신성) 내부에 토지 절반가량이 국가(조선왕실)소유였던걸로 보아서 상당히 큰 행궁으로 보여진다.
현재 기록상 전해지는 건물은 3채가 있는데 현재 2채의 건물은 이미 없어져서 조사가 힘들것으로 보인다.
  • 동헌(東宪)
영변대도호부의 조선초기 동헌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행궁 내부에 위치한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정확한 크기와 형태를 알수없다는 아쉬운점이 있다. 다만 선조가 신하들을 동헌 앞에서 만났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동헌의 앞에는 넒은 마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보아 "'''선전료우중회관서도'''에 나오는 전각들중 동헌이 있지 않았나" 라는 추정을 해본다.
  • 객사 철옹관(徹㙲館)
현재 기록상으로는 조선초기의 영변객사가 행궁과 같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위치와 형태는 불명이다. 다만 1413년에 신성 외부에 객사 정문인 언무루'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객사도 성 외부로 옮긴것으로 보인다.
  • 천주루(天柱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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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찍힌 천추루의 모습. 단청의 모습이 조선시대 일반 사찰보다는 궁중단청에 가깝다.

보광전 맞은편에 있는 천주루는 가운데 다락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복도로 연결된 두 채의 다락집이 앞으로 내밀어 날개처럼 설치되어 있는데, 동쪽 다락에는 향일헌(向日軒), 서쪽 다락에는 망월대(望月臺)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 양쪽 다락 뒤로 부속건물들이 뻗었는데 그것은 마치 옛 관청건물인 듯한 느낌을 준다.

조선 사찰(寺刹) 옛 모습 (북한편)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행궁 존재당시의 이름을 가진 누각이다. 천주루는 일반 절 누정들과 구별되는 특색있는 건물이다. 누각의 가운데에는 넓은 다락을 중심으로 양쪽에 회랑으로 연결된 두 채의 다락(동쪽은 향일현, 서쪽은 망월대)이 날개처럼 달려 있고, 그 뒤로 각각 긴 승방이 연결되어 하나의 종합적인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천주루는 장대석 주춧돌 위에 세운 중층 누각으로, 1823년에 중수하고 1851년에 개건하였다. 건축 양식은 익공계 팔작지붕집으로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마감하고,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양쪽의 향일헌과 망월대, 그리고 뒤쪽의 요사까지 마루 깔린 회랑으로 연결되었다.
이 천주루는 사찰 건물이라기보다는 궁전이나 관아의 누정 같은 형태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영변으로 피난을 왔을 때 숙소가 마땅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만일 왕이 다시 영변으로 오게 되면 옛 영변행궁, 즉. 천주사와 천주루를 숙소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천주루는 연변부사가 천주사를 세우면서 왕이 다시 연변에 오게 되는 경우 숙소로 쓸 수 있게 지은 건물이다. 절에서는 보기 드물게 궁전의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천주사는 영변의 중요한 군사적 위치로 인하여 철옹성과 함께 군사적으로도 중시되었는데, 지금도 천주루에는 '청북유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부근에 무기고 터가 있다. 천주루의 양옆으로는 각각 다락건물이 부속되어 있다. 향일헌은 천주루 동쪽에 있는 부속건물로, 마루 깔린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천주루는 용마루기에 의하면 1823년에 중수하고 1851년 2월부터 4월까지 개건하였는데 ‘철옹비’에 1684년 천주사를 다시 확장할 때 양쪽날개가 향일, 망월로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의 개건은 본래 영변행궁 시절부터 있었던 본래의 천주루와 1684년에 새롭게 지은 천주루의 짜임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보인다.​
천주루에 오르는 계단은 가운데 다락 앞에 놓여 있으며, 이 다락집 뒤로는 단층집들이 잇달아 있어서 마치 옛 관청건물과 같은 느낌을 준다. 천주루를 이렇게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왕이 영변으로 피난을 왔는데 본래의 행궁이 마땅하지 않아 불편을 느낀 일이 있어, 영변부사가 왕이 만일 다시 영변으로 오게 되면 더 편안하게 숙소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5. 위치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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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변행궁터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고있는 천주사의 모습 구글 지도 링크
위치불명으로 조선초기의 영변객사 추정지가 행궁지로 추정되며 영변읍성 내에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북한에서 소재중이다.한편으로 과거 서희가 이곳을 지나며 시를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13]
1991년 북한에서 조선 초기 영변객사 철옹관과 천주사 일대 부지들을 조사할때 "宮" 이라고 쓰인것으로 보이는 수막새가 출토되어 이곳이 행궁터로 추정되나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일제가 객사 근처에 건물을 지으면서 행궁 추정지를 심하게 훼손시켰다고 한다.[14]

6. 그림과 회화속 영변행궁 그리고 추정


약산동대 인근에 위치를 했을것으로도 추정된다. 다만 약산동대 인근에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높은것이 '''[선전료우중회관서도]'''[15] (宣傳僚友重會關西圖)에 나오는 그림인데 이는 영변행궁을 그린 유일한 그림일 가능성이 있다. 영변행궁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현재 전해지는 영변행궁을 그린것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그림으로 기록상의 영변행궁과 상당히 유사하다. 자세한건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려면 일단 환수조치가 시급하다. 일제강점기에 넘어간걸로 추정되는데 현재 소유자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상태이다.
[선전료우중회관서도]속 건물군은 영변 약산근처의 건물들을 그린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영변성내를 보여주고있다. 그림속에는 활터 두군데와 중심전각으로 보이는 건물,여러체의 행랑과 성문이 보이며 성 안에 가득찬 건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보아서 약산동대라는 정자 또는 영변행궁을 그렸을 걸로 보고있다. 다만 약산 정상부 근처에는 평탄한 지형이 없기 때문에 영변행궁이 확실시 된다.
[1] 연도 표기는 영변행궁의 존속년도를 나타낸 것으로 고려멸망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2] 연도 표기는 영변행궁의 존속년도를 나타낸 것으로 조선건국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3] 현재 추정하는 바로는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이곳을 이용한것으로 보고 있다.[4] 여기서 몽정은 임국로(任國老)의 맏아들이다.[5] 여기서 말하는 행궁이 바로 영변행궁이다.[6] 연도 표기는 영변행궁의 존속년도를 나타낸 것으로 고려멸망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7] 혜음원 또한 왕실에서 '혜음원'이라는 역과 '혜음사'라는 사찰 그리고 행궁이 혼합된 경우로 영변행궁과 상당히 유사한 경우이다. 그러므로 혜음원과 영변행궁간의 유사점을 찿을수 있는 부분이 많다. 추후에 이를 연구하여 영변행궁 조사에 도움이 될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건축인 많큼 축대와 돌계단이 크기 때문에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영변행궁이 고려건축,고려미술사에 큰 발견을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8] 다만 성벽위 성량에 불이붙어 행랑 10여채가 불타는 피해를 입기는 하였다.[9] 그런데 놀라운점은 조선왕조에서도245년이나 버틴다. 하지만 병자호란당시 소실되었다.[10] 연도 표기는 영변행궁의 존속년도를 나타낸 것으로 조선건국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11] 이는 현존하는 고려사에는 전해지지 않는 부분으로 승정원일기에 일부 남아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고려사 목판"이 전주사고에서 불탔기 때문으로 보인다.[12] 1991년 북한 조선로동당-로동신문 기사[13] 이곳이 지금의 약산동대 인근으로 추정된다.[14] 자세한건 영변은행 문서 참고.[15] 현재 이 그림은 해외반출 문화재로 지정되어 하루빨리 환수조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