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다 히로

 

小野田 寛郎 (1922.3.19~2014.1.16)
おのだ ひろう Hiroo Onoda
[image]
1. 개요
2. 일본 패전 전까지의 이력
3. 패전 후
4. 여담
5. 참고 문서


1. 개요


제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군 장교. 최종 계급이 소위이며, 필리핀 전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한 일본군 장교 같지만... '''1945년 종전 후 1974년까지 무려 29년 동안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홀로 싸워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원주민 수십 명을 무참히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결국 항복(?)하고 일본에 돌아오게 됐지만,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종종 각종 매체에서 화자되곤 한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의 캐릭터 오노노 소위와 레드 아이즈의 제프 자베르노우 모티브로 추정되는 인물.

2. 일본 패전 전까지의 이력


오노다는 1922년, 와카야마현 가이소군 가메가와촌[1]의 마을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중학교 졸업 후에 민간 무역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중국어 등을 습득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미 다른 형제들은 전부 군사 학교 등을 졸업하고 군 장교가 되었으며,[2] 그 와중에 혼자 민간회사에서 일하는 덕분에 오노다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큰 관심을 못 받은 것 같다.
그러던 도중 1942년, 징병검사를 받고 이등병으로 입대를 하게 된다. 거기서 무역 회사 일을 하면서 배운 영어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육군 나카노 학교[3]에 입학, 졸업 후에 견습 사관(현대 계급으로는 상사에 상당)을 거쳐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게 된다.[4]
이후 1944년 12월 필리핀 마닐라 근처 작은 섬인 루방 섬에 지휘관으로 파견된다. 이때 사단장이었던 요코야마 시즈오가 오노다에게 직접 내린 명령이,

'''옥쇄는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3년이건 5년이건 버텨라. 반드시 지원을 가겠다. 그동안 병사가 한 명이라도 살아있으면, 야자수 열매라도 따먹으면서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옥쇄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었다. 이 때문에 아래 서술할 참극(?)이 일어났다. 다만 시즈오가 금지한 옥쇄는 해당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냥 자살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시즈오 사단장의 명령은 자살하지 말고 구조될 때까지 버티라는, 매우 상식적인 것이었다.
오노다는 병사 수백 명을 휘하에 두고,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결사항전의 의지로 사수했다. 1945년 초, 필리핀 탈환전의 일환으로 미군이 함포 사격 지원을 받으면서 상륙해 오자, 크게 피해를 입고 휘하 군대가 반쯤 와해되어서 일부 부하들과 함께 섬 안쪽인 산속으로 패퇴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반쯤 빨치산화되어서 국지전을 계속 벌였다.

3. 패전 후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결국 패전했다. 미군은 이 사실을 삐라를 통해 산 속에 남아있던 일본군 패잔병들에게 알리고, 실제로 많은 패잔병들은 그 삐라를 보고 투항했지만, 오노다와 그 휘하의 일부 병사들은 '이것은 악랄한 미국놈들의 프로파간다이자 기만책'이라고 믿었다. 오노다 일행은 총 4명이었는데 이중에서 한명은 종전 몇 달만에 다른 3명이 말리는데도 필리핀 정부군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은 투항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전쟁을 계속했다. 이런 상황을 가만 냅두면 미군이나 일본, 무엇보다 필리핀 정부에게도 골치아파지므로, 어떻게든 오노다를 투항시키려고 했다. 종전 이듬해인 1946년부터 전쟁 중 오노다 휘하의 부하였던 사람을 섭외해서 전쟁은 끝났다고 설득하거나, 아예 '''오노다의 친인척'''까지 직접 데리고 와서 꾸준히 설득해보지만, 오노다는 이마저도 미군의 기만책으로 여기고 여전히 투항을 거부했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생존을 위해 식량 등은 반드시 필요했는데, 오노다는 필리핀인들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필리핀인들이 순순히 재물을 넘겨줄 리 없으니 대부분 저항했는데 살해하고 집을 불태운 뒤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투 와중에 붙잡은 필리핀군 포로들은 당연히 당시 일본군이 저지르던 관행대로 잔인하게 살해해서 필리핀인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오노다 히로 소위와 그 휘하 부하들은 29년 동안 이렇게 필리핀군과 민간인을 30명이나 살해했고 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5] 아예 원주민 가옥 전체를 불 지르는가 하면 사람을 토막 내 죽이는 등 온갖 만행[6]을 저질렀던 그는 99식 소총과 탄환을 무려 29년 동안이나 보관하면서 상시 사용 가능하게 관리했고, 이런 끔찍한 만행을 투항할 때까지 계속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이를 본 필리핀 정부 또한 당연히 토벌대를 보내서 일본군 잔당 퇴치 작전을 벌이며 대적했으며 다수의 일본군이 전투 중에 사살되었다. 이는 이걸 본 오노다가 역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대치하던 상황에서 1954년 휘하 부하이던 시마다 오장이 사살당하고, 1972년에는 마지막 남은 휘하 부하인 고즈카 일병이 사망하면서 결국 홀로 남았다. 하지만 종종 루방 섬 상공을 지나다니는 비행기를 공습으로 착각하고, 단파수신기를 통해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의 군용 전파를 잡는 등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후에 밝혀진 바로는, 토벌대가 일부러 당시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 등을 남겨 오노다에게 보게 했다.1964 도쿄 올림픽 개최, 도카이도 신칸센의 개통이나, 당대 일본 황가의 사진 등 일본이 건재하다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전쟁은 끝났고 일본은 재기 중이라는 메세지를 간접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오노다는 그걸 보고도 우리 조국인 일본이 이렇게 번영할 리가 없다면서 '이미 일본은 미국의 괴뢰 정권화됐고, 만주 지역에 망명 정부를 세운 게 분명하다.'고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일으킬 뿐이었다고 한다.
만약 상황이 쭉 이대로 갔으면 오노다는 크게 알려지지도 않고 다른 패잔병들처럼 싸우다 죽었을 테지만, 1974년 스즈키 노리오(鈴木規夫)라는 대학생 때문에 상황이 급변했다. 스즈키는 '남방 군도에 구 일본군 패잔병이 아직도 살아있으며, 홀로 항쟁 중'이라는 소문에 흥미를 느껴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오노다를 만났다. 스즈키는 침착한 언행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끝내 오노다는 일본이 패전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전투를 중단했다. 하지만 오노다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직속 상관이 직접 와서 항복 명령을 전달하기 전까지는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며 버텼다. 일본 정부 측에서도 이를 가만 두면 굉장한 골칫거리가 될 게 뻔하기에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전쟁 당시 오노다의 직속 상관 중 한 명이었던 타니구치 요시미(谷口義美)를 통해 투항 명령서를 전달하면서 결국 혼자만의 전쟁을 끝내게 했다.
요시미는 종전 시 계급은 소좌(소령)로 종전 후 서점을 운영하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고 한다. 3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때는 63세의 노인이었으나 워낙 중대한 사안이기도 하고, 그래도 한때 전우였던 부하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노구를 이끌고 직접 루방 섬까지 갔다고 한다. 참고로 사수 명령을 내린 요코야마 시즈오(横山静雄)가 직접 투항 명령을 내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즈오는 종전 후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되어 1953년 석방된 뒤 1961년에 사망했는데, 오노다가 살아서 항쟁 중이라는 게 알려진 시점에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타니구치가 대신 가게 된 것.
타니구치 요시미의 명령서는 다음과 같다.

1. 천황폐하의 명령에 따라 제14방면군[7]

은 모든 작전행동을 해제하였다.

2. 참모부 별반(参謀部別班)은 작전 명령 갑-제2003호에 의하여 모든 임무가 해제되었다.

3. 참모부 별반 소속의 모든 부대와 장병들은 즉시 전투와 공작을 중지하고 가장 근접한 장교의 휘하에 들어가라. 직근(直近)의 장교가 없다면 미군 또는 필리핀군에 연락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ㅡ 제14방면군 참모부 별반 반장 타니구치 요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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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투항 당시에 찍힌 오노다의 사진
투항 직후 오노다는 타니구치 소좌에게 필리핀군의 최신 레이더 기지 등 그동안 획득한 군사 정보에 대해 보고했다. 오노다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고, 각종 군장들도 전시 상태에 알맞게 제대로 정비된 상태였다고 한다. 모자 챙이 찢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군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었고, 사격이 가능한 상태의 99식 소총과 500발의 탄환, 대여섯개의 수류탄을 갖추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일본인들을 열광시킨 것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총검을 끊임없이 손질하고 정비한 덕에 갈고 닦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로 옛 상관인 타니구치 소좌에게 날카로운 눈매로 경례를 하는 사진이 일본 열도를 센세이션으로 몰고 갔다. 이어 많은 일본 관료와 언론인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인근 필리핀 군 기지를 찾아가 사령관에게 무릎을 꿇고 차고 있던 군도를 내놓으면서 정식으로 무장을 해제한 뒤 항복했다. 남은 탄약과 소총은 모두 필리핀군에게 넘겨주었다.
비교할 만한 경우로 다른 지역에 고립되었다가 오노다보다 먼저 귀국한 패잔병인 요코이 소이치(横井庄一, 1915~1997) 오장[8]의 경우, 발견되었을 때 총기의 상태가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총검이 녹슬어 있었다. 이때문에 요코이는 일본의 우익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받으며 잊혀졌고, 오노다 소위는 전후 패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던 일본인들, 특히 일본 우익 인사들에게 '살아있는 일본 정신', '진정한 사무라이' 등으로 칭송을 받으며 거의 영웅 대접을 받게 된다.[9] 물론 전쟁 와중에 저지른 살인을 오노다 본인이 밝혔지만 언제까지나 일반 일본인들이나 거리두기를 했지, 애초에 구 일본군 신화에 푹 빠져 있던 우익들에게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귀환 후 오노다는 요코이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 사유가 "총검이 녹슨 자와는 만날 수 없다."라는 것.
위에서 서술한 대로 오노다는 산 속에 숨어살면서 약탈과 살상을 자행했고, 필리핀군을 상대로 살상을 한 건 전쟁중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렇다쳐도 많은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끼친 흉악범이었다. 본인이 전시였다고 주장하긴 했으나 그걸 인정하더라도 애초에 살인강도였다. 그래서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도 처벌을 검토하였으나, 순순히 투항한 자를 처형하기도 그렇고, 또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10] 모든 죄를 대통령 명령으로 특별사면하고 일본으로 송환시켰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닥치고 죽였는데 무작정 사면한 건 아니고 본인은 전쟁중이라고 인식해서 그런 거라고 구차한 변명을 하기는 했다.[11]
하지만 필리핀의 정글 속에서 장장 30여 년을 살아온 탓에 제대로 사회에 재적응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현대 사회가 그동안 복잡해진 탓도 있고. 그는 무엇보다 '''일본의 정신이 썩었다'''며 브라질로 이민을 가 목장을 경영하다가 이듬해에 결혼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일본에 들어와 각종 보수파 인사들과도 교류하다가 2014년 1월,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향년 92세 나이로 사망했다. 1996년에 그가 투항했던 루방 섬에 다시 찾아가 학교에 1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12][13]

4. 여담


  • 넷 우익의 황색 미디어로 전락해 버린지 오래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이 사람을 대 놓고 '真の軍人(참 군인)' 이라고 서술하면서 찬양한다. '평가' 문단에는 무려 뉴욕 타임즈를 인용하면서 '전후, 번영과 물질주의 속에서 일본인에게 상실되어 있던 자긍심을 환기시켰다'고 서술해 놓았으나(2020년 9월 기준), 뉴욕 타임즈는 실제로는 미국 내에서도 굉장히 진보적인 언론사이기 때문에 '돌아온 일본군이 과거 일본인들의 영광을 되살렸다.'는 네오 파시스트같은 소리를 할 리가 없다. 원문을 보면 '일본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듯 하다.'고 일본인 사이에서의 인식을 써놓았을 뿐인데, 문맥을 무시하고 미국 외신기자의 시선이라 서술하며 일종의 자위를 하고 있다.[14]
  • 오노다의 행태는 다른 일본군과 비교해도 이례적인 편인데, 대부분의 일본군 패잔병은 현지의 정부군과 맞설지언정 이렇게 적극적으로 현지 주민들을 자극하지는 않았기 때문. 상급자가 강요하면 학살을 저지르는 일은 있어도 자발적으로 학살을 저지른 일본군은 그리 흔치 않다. 따라서 그가 이렇게 오랜 기간 지극히 일본군스러운 방식에 따라 자발적으로 게릴라전을 이어간 이유 중 하나로 그가 첩보교육기관인 나카노 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드는 사람들도 있다. 첩보원은 대개 국가에 가장 충성스러운 자를 뽑아 육성하는데 애초에 일본군 마인드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이 첩보원으로 육성되면서 누구보다 철저한 군국주의자가 된 것. 그리고 일본군에게 있어 적국 민간인은 사실상 적군이나 다름없었으며, 적에 대한 약탈과 학살은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특히 필리핀인들은 일본 점령 기간 내내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민간인까지 적이라는 인식이 일본군들 사이에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오노다는 게릴라전 와중에 주민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결론내리고 필리핀군과 같이 적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참고로 한국에도 오노다 히로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이미 끝난 전쟁터에 숨어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1942년 징용에 끌려갔다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남양군도 파견 노동자로 지원한 한국인 조병기이다. 그가 도착한 곳은 요즘 관광지로 유명한 팔라우 군도 중의 하나인 펠레류 섬이었다. 참으로 안 된 일은 그가 도착한 시점이 바로 미군이 그 섬을 총공격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조병기를 비롯한 한국인 노동자 3명은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 이후 '미군들은 코와 귀를 자르고 혓바닥을 빼낸다.'는 일본군의 악선전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바람에 숲속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후 영월 출신인 다케노[15]는 미군에게 사살되었고, 제천 출신의 한 사람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결국 홀로 남은 조병기는 아무런 무기도, 도구도 없이 오로지 생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려 11년을 버틴 뒤에 1955년, 한국으로 뒤늦게 귀국했다. 배고픔을 못 이기고 농장에서 고추를 훔쳐먹다 원주민에게 붙잡혔고 곧장 미군에 인계됐다고 한다. 오노다는 약탈을 위해 총검을 가장 소중히 여겼지만 조병기는 무기가 없었고 단지 음식을 익혀 먹기 위한 불씨를 가장 소중히 여겼다고 하니 비슷한 처지였지만 둘의 생존 방식은 매우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조병기가 귀국했을 때 아내는 이미 개가한 상태였다고 한다. 덧붙여서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교장 선생이 서울에 있는 자신의 학교 소사로 취직 알선을 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조병기가 이후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다.# #
  • 서프라이즈에서 이와 비슷한 인물인 '사노 토시아키'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적이있다. #

5. 참고 문서


[1] 現 와카야마현 가이난시[2] 이미 이때 즈음 슬슬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화가 급속화되던 시절이라, 제대로 된 학교를 나와서 장교로 임관한다는 것은 당시 출세의 지름길, 즉 엘리트 코스 중 하나였다.[3] 첩보교육기관이었다. <조커 게임>에 등장하는 D기관의 모티브이기도 하다.[4] 현대 한국군의 부사관장교 사이의 상호 존대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군에서는 부사관(하사관)을 장교 밑 계급으로 보는 시선이 강했다. 한국군만 해도 1980년대 즈음까진 이런 풍조가 만연하다가 서서히 개선된 것.[5] 다만 이런 행동은 당시 동남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일본군 패잔병 대부분이 저지른 짓이기는 했다. 그들 대부분이 현지의 정부군에게 사살되는 바람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고, 오노다는 살아서 투항한 뒤 자기 스스로 사실을 밝혔기 때문에 확인이 가능했던 것.[6] 출처 칼을 갈았던 남자와 불씨를 지켜낸 남자[7] 제14방면군은 필리핀을 관할하던 야전군이며 종전 당시의 사령관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8] 1972년 2월 2일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징집병 출신이었으며, 오노다와 비교되어 금방 관심이 식어 귀국한 후 시골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997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9] 다만 요코이는 우익들에만 없는 사람 취급당했을 뿐 평론가로 활동하며 참의원 선거에도 출마하는 등 오히려 오노다보다 변화된 일본 사회에 잘 적응했다.[10] 당시 필리핀은 일본으로부터 많은 차관을 빌려 썼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 문제에 큰 소리를 못 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리고 오노다가 아무 이유 없이 민간인을 닥치고 살해한 건 아니고 전시상황이라고 생각했다고 했기 때문에 이걸로 국민들에게 변명했다.[11] 물론 전쟁중이라고 인식했다 쳐도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엄연한 전쟁범죄이지만, 애초에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마인드 자체가 적군에 협조하는 민간인=적군이었다.[12] 오노다 본인은 투항 전 필리핀인들을 살해한 이유를 전쟁 수행중에 적군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오노다 말고도 필리핀을 비롯해 동남아 각지에서 패전 이후에도 게릴라전을 이어가던 일본군 대부분은 현지 정부군에 우호적인 민간인들을 마주치면 모두 살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외는 자신들의 게릴라전에 우호적인 민간인 지역에서 항쟁할 때 뿐이었는데, 오노다가 활동한 지역은 필리핀 정부군에 협조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들키지 않고 게릴라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건 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13] 1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말년에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속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투항하고 나서는 구 일본군과 비슷한 딱딱한 기질은 남아있었지만 구 일본 제국을 찬양하는 활동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14] 애초에 국가가 번영하면 개인의 자긍심은 증가하면 증가했지 상실될 리가 없다.[15] 창씨개명한 이름. 본명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