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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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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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자 제3대 총리이자 전직 국방장관. 중국계 가문 출신이다. 21년 간 필리핀을 철권통치하며 집권 초기에 비하면 경제를 성장시키긴 했지만, 1982년 ~ 1986년 사이 경제 성장이 하락세를 보였고, 부정부패, 횡령, 독재에 대한 불만이 터져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독재자이다.'''"이 장관, 저 친구 얼굴을 보니 알차게 생겼어. 분명히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마르코스는 후진국 대통령 주제에 거만한 인간이다."'''
흔히 마르코스 정권 시절을 기점으로 필리핀이 본격적으로 못 살게 됐고, 집권 이전에는 잘 살았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전혀 아니다'''. 나라가 못 산다와 잘 산다의 기준이 상대적인 거라면, 필리핀은 원래부터 결코 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마르코스가 정권을 잡기 전인 1965년 전까지도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보다 1인당 GDP가 낮았다. 오히려 마르코스가 정권을 잡고 난 후에 경제 성장이 궤도에 올라 꾸준히 성장하다가 1982년부터 하락세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마르코스 정권 시기 전체로 보면 필리핀은 확실히 성장했다. #, #, # 이런 잘못된 사실이 많이 퍼진 데에는 각종 매체에서 무분별하게 검증 없이 정보를 전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생애
2.1. 초기
마르코스는 아버지 마리아노 마르코스와 어머니 호세파 에드랄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르코스는 상당히 교육을 잘 받은 필리핀의 엘리트 가문 출신이며, 필리핀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마닐라에서 공부하다가 1930년대 후반 마닐라 시 근교에 있는 필리핀대학교에 진학해 법률을 전공했는데, 대학에서는 계속해서 수석을 차지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1933년 정치가였던 아버지의 정적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39년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에 상소하여 1년 뒤에 무죄 판결을 얻어냈고 그 뒤 마닐라에서 법정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3]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마르코스는 필리핀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다가 교전 중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 악명높은 죽음의 행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마르코스는 자신이 일본에 맞서 게릴라전의 핵심지도자로 활약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훗날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데 큰 뒷받침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게릴라 항전을 벌이던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다. 마르코스가 항일 게릴라전을 했다고 주장하는 시기는 '''20대 초반'''이라, 나중에 8,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했다는 주장과 겹치면 뭔가 석연찮게 된다. 스탠리 카노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오히려 친일 혐의로 아버지가 마을 사람에게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출처불명이다. 적어도 필리핀 육군에 장교로 입대해 참전한 것까지는 확실하지만 포로로 잡힌 이후의 행방이 묘연하다. 1980년대에 마르코스 정권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이걸 까발린 책이 출간되었고,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1942~45년 항일투쟁에 전혀 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필리핀 유력가문 출신으로 전쟁 전에는 정적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마르코스는 스스로 배운 법률지식으로 자신을 변호하였고, 결국 최종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며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마르코스는 필리핀에서 꽤나 인기를 얻게 되어, 필리핀의 정치인이 될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이후에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지냈고, 필리핀 자유당원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마닐라 시장직에도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써 승승장구했다.
주요 정치 경력을 거치고 상원의장이 된 마르코스는 전임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을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마카파갈이 이를 부정하고 재선에 출마하자 마르코스는 당적을 바꾸어 라우렐(Jose Laurel)[4] 의 국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입당하자마자 그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1965년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5]
2.2. 첫번째 임기
196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경선에서 패배한 후에 자유당에서 국민당으로 당소속을 바꾼 그는 1965년 대선에서 51.9%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대선 과정에서 마르코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자신의 항일투사의 이미지를 계속 홍보했는데, 당시 마르코스의 상대 후보들은 과거에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선거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경제발전과 정부개혁, 그리고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다. 그리고 재임 초기에는 친미반공 일변도였던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바꾸어서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6] , 동시에 중소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경제도 호황을 누리면서 사회문제들도 어느정도 해결되는듯 보였다.
그러던 중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은 베트남 지원법을 통과시켰고, 연인원 10,000명 이상의 필리핀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비전투 활동에 참여하였다. 문제는 마르코스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 번복이었다. 필리핀 상원의장이었을 당시에 마르코스는 전임 대통령 마카파갈의 베트남 파병법에 반대하였고, 하원에서 통과된 지원법을 상원에서 지연함으로써 파병을 자연스럽게 폐기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는 입 싹 씻고 파병에 찬성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이러한 태도 변화는 마르코스가 미국의 경제 지원 때문에 미국에 넘어갔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마르코스의 지지자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다.
어쨌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마닐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1966년 미국을 방문했던 마르코스는 일본으로 가는 도중 "마닐라에서 아시아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다"라고 발표했고, 이 정상회담의 목적은 "베트남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상황을 끝내고 베트남을 도우려는 것"이라고 하였다.[7]
이에 대해서 필리핀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뻔뻔스럽다",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하지 않는다" 등등으로 마르코스를 비판하였고, 이에 정상회담의 이름이 '마닐라 정상회담'으로 바뀌었다. 당시 반정상회담 시위에서 대학생들은 "양키 고 홈", "먼저 쏘고 나중에 대화하라 존슨", "헤이 존슨, 오늘은 몇 명이나 죽였나?" 등의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나 "베트남: 핍박받는 자들의 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경찰들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과정에서 학생들은 신발을 잃고 피를 흘리기도 했다. 시위대는 그 과정에서 필리핀 국가를 제창하고 대열을 유지한 채 경찰 앞에 섰지만, 결국 무자비한 진압 끝에 시위는 해산되었다. 이외에도 필리핀 전국에서 농민들이 경찰들에게 구타와 학살을 당했지만, 오히려 농민들을 학대한 관련 경찰관이 처벌받지 않고 승진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 비판을 받았다.
어쨌든 저런 것으로 말이 많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업적(?)처럼 보일 만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1969년 대선에서 61.5%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면서 전후 최초의 재임 대통령이 되었다.
2.3. 막장의 시작
재임 2기 중반부터 점차 막장화되어 가며 결국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8] 반공을 내세워 야당인사들과 민다나오 섬의 무슬림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또한 언론의 자유를 금지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제한했으며 의회와 언론을 해산시켰다. 그는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야당 정치인들을 투옥시켰고, 군부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어 군부를 이용해서 군부독재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2년부터 1976년 사이에, 마르코스는 6만 5,000명이였던 필리핀군을 4배가 넘는 27만명으로 늘려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당시 필리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르코스 정권은 사람들을 끌고 가서 무자비한 구타를 하거나 물고문, 전기고문이나 성기를 지지는 고문, 성폭력 등의 악랄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행했다고 하며, 어떤 필리핀인은 달궈진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압정치로 3,257명 정도가 사법살인을 당하고 3만 5천명이 고문피해를 입었으며, 7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투옥당했으며 약 12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경찰과 군에 의해 임의로 체포되거나 구금당하는 인권침해를 겪은 것으로 파악된다.[9] 또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마르코스의 계엄령 시기에는 약 5만여명의 사람들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숙청이나 암살 등의 방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민영 신문사는 대다수가 폐지되었고, 민영 방송사들도 즉각 폐쇄[10] 되어 국영방송으로 통폐합되었으며, 전국에는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막장 정치로 인해 가톨릭교회 지도자들과 8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베니그노 아키노를 중심으로 한 야당 지도자들의 반대가 심화되었으며, 학생들은 대학교에서 끊임없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마르코스 정권 타도를 외쳤지만, 경찰들이 몽둥이로 시위대를 공격했고 시위대에 최루탄까지 뿌려대면서 진압했다. 한편 지방에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재자를 몰아낼 수 없다"면서 무장투쟁을 시작했는데, 소수민족인 모로족들과 마오이즘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중앙정부의 전복을 목표로 게릴라 활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오히려 더욱 더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 테러로 맞서면서 게릴라들의 저항이 더욱 더 거세졌고 이로 인해 필리핀의 군대가 모두 동원되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에 여론이 악화되자 마르코스는 1981년 1월 17일에 8년간이나 지속된 계엄령을 해제했지만, 계엄령을 해제했다고 해서 마르코스의 독재가 완화되거나 민주화가 된 것은 아니었다. 마르코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임기 6년의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1981년 6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공갈, 협박, 매수를 이용한 부정한 방법을 한 끝에 선거에서 88% 이상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3번째로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정권의 핵심이 되기 시작했다. 1954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결혼한 이멜다 마르코스는 미인대회 우승자로, 굉장히 사치스럽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멜다는 1972년의 계엄령 선포 이후에는 필리핀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는데, 그녀는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정부와 산업체의 요직에 친척들을 임명해서 비난을 샀으며, 그녀 자신도 수도 마닐라 시장직(1975년~1986년)과 주거환경장관직(1979년~1986년)을 역임했다. 또한 마르코스는 자신의 친척이나 아들 딸들을 각각 자신의 핵심 요직에 앉혀서 측근 정치를 실시했고, 결국 측근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이후 상황은 안 봐도 개판 그 자체인데, 마르코스의 부정부패, 막장 경제정책과 이멜다 마르코스의 사치로 인한 국가 재정의 파탄, 외채 상승, 그리고 상승하는 실업률과 빈부격차가 발생하며 경제가 점차 막장이 되어갔다. 물론 흔히 과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잘살다가 못살게 된 게 아니라, 원래 못살았지만 잘 성장하는 와중에 고꾸라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마르코스의 독재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절대 그 탓만은 아니다. 필리핀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는 마르코스 정권 이전부터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천 개의 섬들로 이뤄진 국가 특성상 전국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빈번히 일어났다. 특히 필리핀 공산당 산하 신인민군(NPA)과 모로족(수니파 무슬림 집단) 독립운동단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각각 내전을 치르느라 군대가 총동원되어 온 나라가 전시체제나 다름없었다.
2.4.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사건
마르코스에게 맞서 대항했던 정치가로, 1983년 8월 21일, 마르코스 정권에 대항하다가 귀국길에 암살당했다.
마르코스는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에게 '''국가 반역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미국이 개입하자 사면해서 미국에 망명을 보냈다.[11] 망명지에서 아키노는 돌아왔지만, 니노이가 항공기에서 내리자마자 롤란도 가르만이라는 자가 뒤쪽에서 튀어나와 니노이를 암살했다. 암살장면 '''"우리 조국은 암살을 서비스처럼 주는 나라"'''라면서 죽음을 암시하긴 했으니, 어쩌면 죽음을 이미 각오했을지도 모른다.[12]
사건 해명을 위해서 마르코스가 사건을 독립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독립위원회를 만들고 조사하게 했는데, 독립위원회는 이듬해 "군의 고급장교들이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최종 결론을 발표했다. 마르코스 정부는 청부 살인업자인 롤란드 갈만을 진범으로 지목했지만 마르코스 정권 최고수뇌부에 의해 주도된 정치적 암살이었다는 견해가 필리핀과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필리핀 야당은 아키노를 태운 여객기가 공항에 도착한 뒤 아키노를 호위하려고 비행기에 올라탄 보안요원들이 아키노를 살해하는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의 증언을 발표했다. 현재는 마르코스가 이때 투석 중이었음을 근거로 측근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게 중론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때 마르코스의 통제력이 현저히 떨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은 마르코스 정권이 전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필리핀 전역에서는 연일 마르코스 하야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아키노의 장례식엔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 독재자 마르코스를 규탄했고, 거리에는 아키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 물결이 일었다. 그리고 베니그노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는, 아키노가 암살당하자 남편의 뜻을 잇기 위해 반정부 지도자로 나서 민중들을 이끌게 되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유명했는가 하면, 아키노가 죽은 공항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으로 이름까지 바꾸게 된다.
2.5. 몰락 : 피플 파워
한편 마르코스는 바닥까지 추락한 신뢰도를 형식적으로라도 회복하고 정권유지 기반을 다져 재신임을 할 목적으로, 1986년 대통령선거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1987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선거를 1986년 1월로 앞당겨서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할 것을 발표했다. 결국 선거는 1986년 2월 7일 치러졌는데, 필리핀 야당의 통일후보 코라손 아키노와 마르코스의 대결이나 다름없었다. 선거 결과는 코라손 아키노에 대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마르코스의 승리라고 선언되었다.
마르코스 정권은 1986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 때 '''개표 중간 정산 때 야당 후보인 코라손 아키노의 표가 많이 나오자''' 개표 중지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알고 보니 마르코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방송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려다가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이 일어났다. 필리핀 국회는 마르코스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남프렐(NAMFREL, 자유선거 국민운동본부)은 코라손 아키노의 승리를 발표했다.
이에 필리핀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언론이 "이 선거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했고, 대규모 부정선거에 대한 폭로와 증거가 속속 드러나자 이에 분노한 필리핀 국민들이 코라손 아키노가 이끄는 반정부 운동에 합세했다. 이에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내려 국민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상황은 굉장히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의 인권탄압과 부정부패를 묵인해 온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미소화해와 냉전종결의 분위기 속에 마르코스 정권에게 등을 돌렸으며, 필리핀군 수뇌부 내에서 마르코스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개혁을 도모하던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군 세력이 마르코스 정권 타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후안 엔릴레 '''필리핀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13] '''필리핀 육군 대장'''이 "각하,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이제 물러나십시오."라고 하며 코라손 아키노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군대를 이끌고 대통령궁으로 진격하기까지 했다.
시민혁명의 물결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야당의 편에 서서 개혁을 지지하던 후안 폰세 엔릴레(Juan Ponce Enrile) 국방장관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마르코스 대통령의 퇴임을 촉구하면서, "군 통수권을 국민들이 선출한 진정한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에게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코라손 아키노를 지지하는 엔릴레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Fidel Valdez Ramos) 부참모총장이 이끄는 개혁파 군부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마르코스는 군부개혁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종교계도 마르코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마르코스 세력에 몰려 마닐라 시내 중심부에 있는 아기날도 캠프로 피신해 있는 개혁파 장교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바로 필리핀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는 하이메 신 추기경이었다.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국가인 필리핀에서 추기경의 영향력은 막강했는데, 추기경은 “여러분, 캠프 아기날도를 둘러쌉시다.”라고 하였다.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는 추기경의 호소에 불과 몇 시간 만에 정부군 진압에 맞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 캠프 주위에 시민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또한 아기날도 캠프 주변과 중심 도로인 에드사(EDSA) 거리를 묵주와 꽃을 든 시민들이 가득 메우기까지 했다.
이에 마르코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결국 필리핀 대통령 자리에서 사임하는 조건으로 하와이로 망명했다. 마르코스를 몰아낸 일련의 시민 불복종 운동 내지 혁명은 보통 '''피플 파워'''로 칭해진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마르코스의 망명은 미국 CIA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처음엔 필리핀의 2.7 대선에서 마르코스가 저지른 엄청난 부정선거에 대해 "부정선거는 여야 양자에서 똑같이 저질렀으며 코라손 아키노는 마르코스에게 협력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 발언에 대해 미국과 전 세계의 여론이 비판적이자 레이건은 "마르코스가 책임이 크다"고 꽁무니를 뺀 뒤, 필립 하비브(1920~1992)를 대통령 특사로 파견해 필리핀이 반미로 돌아서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14]
2.6. 말년과 안장
마르코스의 말로는 필리핀의 이승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슷하였다. 1989년, 망명지 호놀룰루에서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사인은 심장병이었다. 유언 중 하나가 "구두 3,000켤레가 아깝다…"였다고 한다.
1993년, 필리핀 정부는 마르코스의 시신을 고국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마르코스 일가족은 국립묘지 안장을 주장하며,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미라 형태로 필리핀 북부의 고향마을에 18년째 임시로 안장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1989년 사망한 후 하와이에서 먼저 장례를 치루면서 방부 처리를 했고, 1993년에 필리핀에 기념관을 지었을 때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남편의 시신을 이장하면서 아예 말끔하게 미라로 만들도록 장의사들에게 부탁하여 유리관에 저렇게 전시해 놨는데, 국립묘지의 대통령 묘역에 안장이 허용될 때까지 저렇게 미라로 안장해놓겠다고 했다.
마르코스 가족과 필리핀 마르코스의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국립묘지 안장을 촉구했지만, 이에 대해 베니그노 아키노 3세[15] 필리핀 대통령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 문제에 대해 거부한다고 버티고 있었다. 아키노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군사 계엄 시절 희생된 많은 피해자가 있고, 그들은 아직도 국가로부터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국립묘지 안장은 안 된다."며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그 다음 대통령인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마르코스의 국립묘지 안장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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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6년 11월 18일 필리핀의 국립묘지인 Libingan ng mga Bayani의 대통령 묘역에 마련된 석곽묘에 이장되었다. 장례식은 국장이나 사회장까지는 아니고 군장으로 치러졌다고 하며, 이멜다 마르코스를 비롯한 가족들과 친지, 측근, 명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지자들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물론 마르코스를 증오하는 젊은 층들은 장례행렬 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며 반대했다. 뉴스참고 한국어 뉴스 사진일람 위키참고
3. 가족 관계
-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
- 장녀 : 이멜다 마르코스 2세 (일명 아이미 마르코스)
1955년생(70세). 1984년 일로코스 노르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아버지가 축출되면서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러나 12년 이후 귀국해 다시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0년 이래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를 지내고 있다. 2019년 5월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기사
- 외손자 : 매튜 조셉 마노톡 (Matthew Joseph Manotoc)
아이미 마르코스의 막내아들. 2016년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서 지방의원에 당선되었다.
- 장남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2세 (일명 봉봉 마르코스)
1957년생(68세). 23세 때 마르코스의 고향인 일로코스 노르테 주의 부주지사를 지낸 이래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6년 마르코스가 축출되면서 잠시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1991년 귀국, 이후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서 다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같은 동네에서 주지사와 하원의원직을 번갈아 지냈다. 2010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2016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해 3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특히 마르코스가 태어난 곳인 사랏(Sarrat)에서는 무려 97.5%를 득표했다. 하지만 결국 낙선했다. 역사책을 수정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차녀 : 아이린 마르코스
- 3녀 : 에이미 마르코스
마르코스 부부가 입양한 자녀.
4. 미국의 반응
필리핀 사태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자신의 충복[16] 인 마르코스 대신 아키노를 택했지만, 자신의 심기는 불편했다. 단적인 예로 1986년 2월 27일 백악관 국무회의실 밖에서 기자들이 필리핀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논평을 요구하느라 웅성거릴 때, 레이건은 곁에 있던 국방위원회 위원장 데이비드 패커드에게 기자들을 가리키며 "Sons of BXXches(개X끼들)"라고 욕을 해댔다.[17][18]
한편 레이건은 충복 마르코스를 저버린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레이건독트린을 수정하였는데, 1986년 3월 13일 하원에 내보인 정책교서에서는 '미국 정부는 친소좌익 정권과 반공친미 독재자와도 결별할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본질은 바뀌지 않았으며, 대신 케바케 전술을 선보였는데 그 골자는 '제3세계 독재자에 대해 너무 일찍 지원을 철회해선 아니 되고 지원을 지속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라는 기회주의적 면모를 보였다.[19] 이 정책은 '저강도 전쟁 전략' 및 '보수대연합 전략'[20] 으로 이어졌다.
5. 그의 부정부패와 여담
한 가지 우스운 점은 지금도 마르코스 시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요는 '''적어도 마르코스가 있던 시절엔 잘 살았다는 것'''. 실제로 필리핀의 경제가 마르코스 정권 시기에 눈에 띄게 성장하기는 했다.# 다만 1962년 약 3억 6천만 달러였던 필리핀의 부채가 1986년에는 283억 달러가 되었는데, 자료. 이걸 계산하면 국가 부채가 80배 가까이 늘었다는 이야기다.
2004년 발표된 글로벌 투명성 보고서에서, 마르코스는 2번째로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지도자라고 선정되었다. 사실 해쳐먹은 부정부패는 이 조사에서 1등을 먹은 수하르토가 350억 달러로 마르코스보다 더한 수준이지만, 최소한 수하르토는 빼돌린 돈을 인도네시아 내부에 대부분 투자(?)해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은 반면, 마르코스는 돈을 갈취해서 그 돈을 해외로 빼돌렸기 때문에 질이 나쁘다고 한다. 이후 아키노 정권과 라모스 정권에서 마르코스의 부패에 대해 조사단이 꾸려져서,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있을 동안에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측근들이 얼마나 뇌물을 받고 횡령했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그 규모가 수십 억 달러에 달한다는 증거와 진술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마르코스 개인이 필리핀 재무부에서 빼돌린 돈만 최소 50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게 그 당시에 50억 달러라는 것이다.''' 2014년을 기준으로 인플레이션 비율을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이 돈은 약 106억 달러로 추정되는데, 이건 약 11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50억 달러도 일부라는 주장이 있다. 마르코스의 가족들이 빼돌린 금액은 2014년 인플레이션으로 20조 원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다.[21]
첫 번째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막장 정치가 시작된 1972년의 통계와 1980년에 있던 통계를 비교해보니, 1972년에 비해서 필리핀의 농업 생산이 30%가 감소했으며, 1972년과 1980년 사이에 임금 근로자의 평균 월 소득이 20%가 하락했다. 실업률 또한 급증해서, 통계에서 드러난 결과 1985년 필리핀의 실업률은 27.65 %였는데 1972년 6.30%였던 걸 감안했을 때 거의 4배가 늘었다. 또한 그가 몰락할 당시 필리핀의 상위 10%가 필리핀 하위 60%만큼의 소득을 벌어들일 정도로, 빈부격차가 극해졌다.
마르코스 정권에서 목재 제품은 필리핀 최고의 수출상품이었는데, 이 인간이 얼마나 나무를 많이 베어냈는지 필리핀에서 접근할 수 있는 숲의 대다수의 나무들이 전부 베어져버려 나무가 고갈되었을 정도란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초반에는 나무가 없어져서 목재 수출을 하는 필리핀의 기업들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와 함께 세계구급 사치를 하기로도 아주 악명이 높았는데, 대표적으로 이멜다의 '구두 콜렉션'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멜다는 마르코스의 재임 당시 수천컬레의 고급 구두를 수집했으며, 마르코스가 추방된 이후 대통령 궁에 남아 있던 구두만 최소 1,220켤레라고 한다. 실제로 떠도는 이야기 중에서, 이멜다가 덥다고 바기오에 피서를 가 있을 때, 파티를 할 곳이 없다고 "파티장을 지어 달라"고 생떼를 부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곳이 현재까지 바기오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국제 회의장인 '컨벤션 센터' 라고 한다. 그리고 그게 다 지어지자 파티를 하는데, 설탕이 모자라자 군용 헬기로 설탕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물론 사실 여부까지는 확실친 않으나, 이런 사실까지 전해졌다는 것은 엄청난 사치를 했단 뜻. 이 양반이 얼마나 해 쳐먹었으면, "필리핀을 광산업으로 부흥시켰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그 광산업은 바로 It's '''Mine'''('''내꺼'''야). 그래서 하와이로 쫒겨나고 얼마 뒤에는 미국 정부가 마르코스와 그의 아내 이멜다 마르코스를 밀수 혐의로 기소했는데 감옥에는 안 가고 얼마 안 있어서 풀려났다.
박정희가 필리핀이 부럽고, 한국이 필리핀만큼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했다는 루머가 꽤 많이 퍼져있는데(발언자가 때에 따라 바뀐다.), '''그런 말을 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애초에 60년대 한국과 필리핀의 1인당 GDP는 비슷했으며, 누가 더 우위랄 것도 없이 둘 다 못살았다. 그나마도 1969년부터는 한국의 1인당 GDP가 명백하게 더 높아졌다.## 무엇보다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국토가 초토화된 6.25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상태였고, 필리핀은 6.25 전쟁 특수를 누렸던 국가였다. 또한 필리핀의 고속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부러워하며 이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의 모델이 되었다는 괴상한 루머도 있는데, 애초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의 동기 부여는 서독 방문 당시 시찰한 아우토반일 확률이 높고, 필리핀의 경제발전을 부러워하며 눈물을 운운하는 부분도 당시 서독 대통령 뤼프케와 박정희의 대화 내용이 마치 마르코스와 박정희의 대화였던 것처럼 왜곡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애초에 조작이거나.
박정희 정권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동원의 회고록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필리핀을 부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후진국이라고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필리핀 방문 거절로부터 시작하여 마닐라 정상회담 당시 푸대접에 이르기까지 마르코스가 의도적으로 행한 일련의 외교적 결례로 박정희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 박정희의 필리핀 방문 기간동안 마르코스와 박정희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리고 박정희는 마닐라 방문 기간 동안 수행원들에게 '''마르코스에 대해서 "후진국 대통령 주제에 거만한 인간"이라는 식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필리핀처럼 한국도…"라면서 마치 필리핀을 한국의 롤모델인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것은 명백하게 근거 없는 루머인 셈이다. 사실 당시 한국 경제의 궁극적인 목적이 중공업이었던 걸 생각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하는 경제 롤모델은 어디까지나 중공업이 탄탄한 국가였지, 농업 등의 1차산업 위주에서 전혀 벗어나질 못한 필리핀은 절대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루머로 장충체육관을 지을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대신 필리핀이 지어줬다는 얘기가 이상하게 많이 퍼져있으나 '''거짓이다'''. 장충체육관은 아예 필리핀과는 어떠한 연관도 없다.### 심지어 이명박 전 대통령 또한 사실인줄 알고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얘기한 바 있다.# 잘못된 사실이 사회 각계각층에 뿌리내린 걸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이외에 미국 대사관, 경제기획원(현 문화관광부) 등의 청사 건설에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다는 '''설'''도 있으나 '''전부 확인되지 않은 추측의 영역'''이다. 그리고 아주 만약에라도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던 게 사실이라고 한들, 몇몇 기술자가 '참여'한 것이 어떻게 '지어줬다'는 게 되고, 돈 주고 고용한 게 어째서 '지어줬다'는 게 되는 건지 의문이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몇몇 사람이 건설에 참여한 걸로 따진다면 밑도 끝도 없다. 확실하게 검증이 되는 '사실'은 필리핀은 기업 단위로 한국에 건물을 지은 적도 없고 지을 수 있는 역량과 기술도 없었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건축물을 지을 때 미국 기업에 의뢰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22]
필리핀은 삼모작 가능 등 농업하기 좋은 환경, 많은 인구로 인한 저렴한 노동력, 중계 무역에 미국이 꽤 신경써서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23] 결국 오늘날의 빈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게다가 필리핀과 한국 양국이 민주화될 쯤(1987년)[24] 에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성장한 상태였다.[25]
현재 필리핀에서 이멜다 마르코스와 자식들도 정치인으로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는 가문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북부 일리코스 주에서 하원의원직을 지내고 있고,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이멜다 컬랙션이라는 패션브랜드를 차렸는데, 이로써 기업가로도 대성공하여 영부인 시절 못지않게 돈을 벌고 '''마르코스 가문의 재산을 더더욱 불렸다'''. 아들인 마르코스 2세는 상원의원직을 지내고 있으며, 장녀는 일리코스주 주지사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마르코스 2세는 비야르 상원의원 지지를 선언하며 노이노이 아키노 후보와 대립하고 최근 부통령이 될 뻔하기도 했으니 참 대단한 집안이 아닐 수 없다.
외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이 2016년 11월 7일에 정계 복귀를 선언했으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국립묘지 안장을 필리핀 대법원이 허용했다. 예상대로 11월 25일에 반(反) 마르코스 시위를 벌었다. #
6. 참고 문헌
- 가로세로 세계사 2권: 동남아시아, 동방의 천년 문명이 열린다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6. p186~188.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3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p136~138.
[1] 중국계 가문 출신[2] 전 외무부(외교부) 장관 이동원의 회고록 中[3] 만약 마르코스가 감옥에서 재판받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가 계속 학교 수석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했을때 괴뢰국의 대통령이었다. 전범으로 처벌받다가 나중에 사면받아서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5] 이 대선에서 낙선한 후보 중 하원의원 라울 망굴라푸스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마르코스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민주화 이후 코라손 아키노 밑에서 외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근데 웃기게도 그의 손녀 카리나가 2017년 1월에 마이크라는 남자와 열애 6년 만에 결혼했는데, 그 남자가 하필 마르코스의 손자였던 것.[6] 물론 그러면서도 베트남에 필리핀군을 보내거나 필리핀 내의 공산반군을 때려잡는 행위는 계속 했다.[7] 이미 여러 곳에서 서술되었다시피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투병을 보낸 나라였기 때문에, 당연히 국정홍보용 기록영화인 대한뉴스에도 한 회분을 통째로 할애하다시피 하며 남겼다.#[8] 공교롭게도 같은 해 한국에서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종신 집권체제를 구축했다.[9] 출처: 영어 위키백과[10] 당시 민영 방송사 중에서 ABS-CBN이 마르코스에 의해 피해를 본 민영 방송사 중 하나이다. ABS-CBN은 1972년도에 폐국되었다.[11] 항상 그렇듯 미국의 목적은 마르코스에 대한 견제 목적이었다.[12] 베니그노 아키노는 미국 망명 당시 알게 된 김대중의 암살을 걱정하며, 김대중의 귀국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 아키노 상원의원 암살사건으로 인해 미국 정계는 뒤이은 김대중의 귀국 당시 이러한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우려했다. 실제로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 1985년 2월 8일, 김대중이 귀국할 때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의 의원들이 동행했고, 당시 가택 연금 상태였던 김영삼이 직접 김포국제공항에 마중을 나가려고까지 했다. 당시 군경에 의해 제지당해 결국 마중 나가는 건 실패하는데, 이 때 김영삼은 '''"나를 막을 순 있어도 민주주의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13] 이후 1992년 코라손 아키노의 후임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 재임하기도 했다.[14] 원 출처: 뉴스위크 1986년 2월 24일자 p16~19. <Reagan's Double Take>[15] 위에 언급한 베니그노 아키노와 코라손 아키노 부부의 아들. 바꿔 말해, 아키노 3세 대통령 입장에서 마르코스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16] 왜 로널드 레이건의 충복이라 하냐면, 마르코스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레이건에게 선거자금 7백만 불을, 1982년 중간선거 때 친 마르코스 성향의 의원들에게 1천만 불을, 1984년 미국 대선 때 레이건에게 5천만 불의 선거자금을 각각 제공했다. 또 마르코스는 미국의 벡텔사 중역이던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을 염두에 두고 필리핀 내 건설 및 엔지니어링 공사 대다수를 벡텔에 수주하는 등 레이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왔다. (원 출처: <Nation> 1986년 4월 5일자. 'Minority Report' p478.)[17] 그러나 몇 시간 뒤에 나온 백악관 대변인인 스피크스는 "레이건이 욕을 한 적이 없다"고 했으며, 레이건 역시 Son of a BXXches라고 하지 않았고 패커드에게 "It's sunny and you're rich"라고 했다. 기자들 역시 'SOB'라고 씌어진 티셔츠를 입었는데, 이는 '백악관 프레스센터 지하층에서 일하는 사나이'라는 뜻의 'Son of a Basement'의 약자이고, 3월 5일에 기자들과의 정기조찬 회식 석상에서 레이건은 시치미를 뚝 뗀 채 'SOB' 티셔츠를 펴 보였다. 그 뒤에는 'Save Our Budget'이고 쓰여져 있었다.[18] 원 출처: <타임> 1986년 3월 17일자 'Son of a ...(휴 시디 글.)'[19] 원 출처: <한미 갈등의 해부> - 문창극 저. 나남. 1994. p84.[20] 김인걸 교수의 1998년 저서 <한국현대사 강의>에 따르면, 이 전략은 한국에서도 1986년 개헌공방과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 긴박하게 추진됐으며, 이는 1990년 3당 합당으로 실현됐다.[21] 이 출처에 의하면 당시에도 마르코스의 빼돌린 돈이 500억 달러라는 주장이 실제로 있었다고...[22] Nation, 1986.4.5 'Minority Report' p478[23] 식민지 시절에 미국이 이미지 관리(미국은 공식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실제 행보는 그렇지 않았다.) 차원에서 식민지치고는 꽤 신경을 썼다. 2차대전 종전 이후 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미국이 설정한 애치슨 라인에 포함되었기 때문. 심지어 일본에게 3~4년 시달린 대가로 30년 넘게 시달린 한국보다 더 많은 배상금을 받아냈다.[24] 1987년 한국의 1인당 GDP가 $3,510.99이었을 때, 필리핀은 고작 $579.70이었다.[25] 1980년대 초부터 이미 제3세계 빈국들을 대상으로 한 기업들의 해외 이전이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냉전 중이거나 불안정하거나 너무 국민들의 수준이 낮고 투자에 부적절한 수준의 인프라와 제도를 갖춘 나라들이 대부분이라 그럴 수 없다가, 냉전이 끝나고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