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 플뤼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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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플뤼겔스 '''
'''Yokohama Flügels '''
'''정식 명칭'''
横浜フリューゲルス
'''약칭'''
요코하마F (横浜F)[1]
'''리그'''
J리그
'''창단년도'''
1964년[2], 1992년[3]
'''해체년도'''
1998년[4]
'''연고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홈 경기장'''
미쓰자와공원 구기장 (15,046명 수용)
'''모기업'''
전일본공수, 사토공업
'''우승 경력'''
천황배 2회 (1993, 1998)
아시안 컵 위너스컵 1회 (1995)
1. 개요
2. 역사
3. 역대 선수
4. 여담


1. 개요


과거에 존재했던 일본의 프로축구단. J리그 소속으로 연고지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였다.
1998년 모기업의 경영 악화로 인하여 로컬 라이벌인 요코하마 마리노스와 합병하여 현재의 요코하마 F. 마리노스가 된다. 그러나 말이 합병이지 사실상 공중분해되며, 이 과정에서 이탈한 팬들이 모여 새 클럽을 창설한 것이 요코하마 FC가 된다.
경기장은 요코하마시의 미쓰자와공원 구기장을 마리노스와 공유했으며, 마지막 해에는 새로 개장한 요코하마 국제 종합경기장을 일부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다른 수도권의 J리그 팀과 마찬가지로 매년 2~4경기를 도쿄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에서 열고 1995년까지는 구마모토가고시마를 사실상 준연고지 취급하여 매년 5경기 정도를 분산 개최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요코하마에서 열린 홈경기는 반수를 조금 넘는 정도다.

2. 역사


대부분의 초기 J리그 클럽이 기업의 사내 축구부로 시작한 것과 약간 다르게 요코하마의 나카구 스포츠 소년단이라는 지역 클럽을 전신으로 한다. 이름과 달리 유스클럽은 아니고 초등학교부터 성인팀까지 각 연령별 팀을 갖추고 있었다. 이 팀에 1979년 전일본공수(ANA)가 지원을 대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문 클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ANA가 스폰서십을 시작한 초기에는 팀 이름을 요코하마 트라이스타라고 붙였다. 이후 1984년 전국 리그인 일본 사커 리그(JSL)에 진출하고 85 시즌에는 1부까지 올라가면서 ANA가 자회사로 인수하고 팀 이름을 '젠닛쿠 요코하마'로 바꾸며 완전한 실업팀으로 탈바꿈했다.
JSL 시기에는 1부와 2부를 오가는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최고 성적은 1988-89 시즌의 2위였다. 이후 JSL의 마지막 시즌인 1991-92 시즌까지 1부에 머물렀다. 한편 JSL에서 프로로 넘어갈 시기에는 훗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는 가모 슈가 지휘봉을 잡았다.
일본 축구계가 프로화를 앞두고 움직이던 1991년, ANA는 대형 건설사인 사토공업의 출자를 받아 운영회사를 세우고 J리그의 최초 10개 클럽으로 가입에 성공했다. 이름인 플뤼겔스는 ANA가 항공사였던 만큼 독일어로 '날개'를 뜻하는 Flügel에서 따왔다.[5] 또한 색상은 흰색을 배정받았는데, 이 때문에 짙푸른 세컨드 키트는 초기에는 거의 착용할 일이 없었다. 한편 로컬 라이벌인 마리노스와는 J리그 최초의 로컬 더비였지만[6] 마리노스가 당시 리그 상위권에 들던 베르디 가와사키가시마 앤틀러스와 더 치열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한 편이다.[7]
J리그 기간에는 리그 성적은 중위권에 해당하는 정도였다. 최고 성적은 1996 시즌의 3위. 그러나 컵대회에서는 좋은 실적을 보여서, 프로화 후 두번째 시즌인 1993년에는 천황배를 우승하며 1994-95 아시안 컵 위너스컵 진출권을 확보했다. 당시 컵 위너스컵은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이나 훗날의 AFC 챔피언스 리그와 달리 완전 토너먼트 대회로 일본팀은 8강까지 자동진출이었으며[8] 플뤼겔스는 홍콩 Double Flower, 태국 TOT, UAE 알 샤바브를 차례로 꺾고 대회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어진 아시안 슈퍼컵에서도 태국 농민은행 FC를 꺾었다.
중위권 클럽으로 그럭저럭 굴러가던 플뤼겔스는 1998년 일본의 불황에 타격을 입는다. 특히 모기업 두 곳이 경기에 민감한 건설업[9]과 항공산업[10]이었던 관계로 더블 펀치를 얻어맞은 셈이다. 두 기업은 수면하에서 마리노스의 모기업인 닛산자동차[11]에 합병을 타진하여 협상을 진행했고, 이 사실은 10월말 J리그 임시이사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플뤼겔스의 합병은 회원 탈퇴로서 J리그 규약상 1년 전에 이사회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사안이 사안이라 속전속결로 결정이 났고 일본 축구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모기업에 버려진 플뤼겔스는 그 날부터 분기탱천하여 화려한 대미를 장식한다. 우선 이사회 이틀 후 열린 홈경기에서 세레소 오사카를 7-0으로 박살내고[12] 리그 마지막 네 경기를 4연승으로 마쳤다. 이어진 천황배에서도 강팀인 주빌로 이와타가시마 앤틀러스를 모두 깨고 결승전에는 시미즈 에스펄스까지 꺾고 클럽의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했다.
요코하마 플뤼겔스는 2월 1일 정식으로 마리노스와 합병[13]해 사라졌다. 형식상으로는 합병이었지만 플뤼겔스가 남긴 것은 사실상 명칭에 F자 하나 남긴 게 전부였으며, 특히 선수단이 승계되지 않았다. 합병되는 F.마리노스에서 거둔 선수는 주전급 5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한 명을 빼고는 2000시즌까지 팀을 떠났다. 또한 주축 선수 중 합병 과정에 공개적으로 반발한 주장 야마구치 모토히로[14]도 마리노스 합류를 거부하고 이적을 택했다.
플뤼겔스의 합병이 진행되자 이에 반발한 팬들을 중심으로 그 후신을 자처하는 요코하마 FC가 1998년을 넘기기 전에 창단했다. 플뤼겔스의 해체가 일본 축구계에 엄청난 충격을 준 탓에 반대급부로 이례적으로 창단 첫 해부터 지역 리그 건너뛰고 일본 풋볼 리그(JFL)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플뤼겔스 선수들이 마리노스는 아니라도 다들 이적선을 찾아간 탓에 플뤼겔스에서 요코하마 FC로 바로 넘어간 선수는 없다.[15] 그러나 마지막 주장 야마구치가 선수 말년을 요코하마 FC에서 보내며 은퇴한 후 감독까지 역임했으며, 미우라 아쓰히로(현 비셀 고베 감독) 또한 요코하마 FC로 복귀해 은퇴했다.

3. 역대 선수


각국 국가대표 또는 한국과 관계가 있는 선수는 이하와 같다. 요코하마 FC에도 소속된 적이 있는 선수는 ○로 표기한다.

4. 여담


어쩌다 보니 요코하마의 J리그 클럽 세 곳의 원류가 되는 클럽이다. 우선 F. 마리노스는 구 마리노스와 플뤼겔스의 합병으로 생겨난 클럽으로 정식 후신에 해당하며, 요코하마 FC는 옛 플뤼겔스 팬들이 만든 정신적 후신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머지 J3리그YSCC 요코하마 또한 플뤼겔스의 전신인 젠닛쿠 요코하마와 관계가 있다.
사건은 1986년 JSL 최종전에서 벌어진 보이콧 사건으로, 모기업 ANA와 클럽의 운영을 두고 알력을 벌이던 주전 선수 6명이 경기 직전 출장을 거부하고 도주하는 일이 벌어진다. ANA에 인수되기 전 요코하마 사커 클럽은 주전 선수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었는데, ANA가 인수한 후 이전부터 있던 선수들이 대우[16]와 클럽 운영에 불만을 가졌던 게 문제가 되었다. 아무튼 사건 후 일본축구협회는 선수들에게 영구제명 처분을 내렸으며, 제명된 선수 중 몇명이 새로 창설한 클럽이 YSCC 요코하마다.
구단 합병 후 선수들이 대거 팽당하는 사례는 이후 일본프로야구 재편 때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해체에서도 반복된다.
클럽 테마곡은 유명 록밴드 The Alfee가 작곡한 Victory이다. The Alfee는 이후 요코하마 FC의 테마곡 Wings of Freedom도 작곡한다.

[1] TV중계 그래픽 등에 사용했다. 마리노스(요코하마M)와의 구별이 목적.[2] 전신 나카구 스포츠 소년단 창설연도.[3] 프로화.[4] 시즌 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 인수.[5] 다만 독일어의 Flügel은 사실 복수형도 Flügel이다.[6] 세레소 오사카감바 오사카의 오사카 더비는 1994년으로 요코하마보다 1년 늦는다.[7] 한가지 딜레마는 로컬 더비를 라이벌전답게 하려면 연고지 내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데, 초기 요코하마는 1만 5천명이 간신히 들어가는 미쓰자와 구기장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물론 미쓰자와에서 열린 경기도 기실 다른 경기와 관중 동원은 별반 차이가 없는 정도였다. 이게 바뀐 것은 1998년 7만석짜리 국제 종합경기장이 건설되고 시즌 개막전이 더비 매치로 열린 뒤로, 이 해에는 마리노스-플뤼겔스 매치업이 다른 강팀을 제치고 압도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문제는 그게 마지막 해였다는 것.[8] 한국팀은 1996-97 대회부터 출전.[9] 같은 시기 벨마레 히라쓰카 또한 모기업이 건설업체로서 클럽을 포기해 해체 위기를 겪었다.[10] 특히 ANA는 이 때 틈새시장인 간사이 국제공항 발 국제선 확대에 주력하다가 큰 손해를 보았다.[11] 사실은 이 쪽도 도산하기 직전이었다. 1999년 3월에 르노의 출자를 받아 간신히 파산 위기를 벗어났다.[12] 이 해 세레소가 좀 특이하긴 했다. 전반기 주빌로 이와타전 1-9 대패를 위시하여 7실점 이상 경기가 3회다. 그러고도 18팀 중 9위였지만.[13] 출자비율은 사토공업은 빠지고 닛산이 70%, ANA가 30%. ANA는 2002년에 나머지 지분도 닛산에 매각했다. ANA는 2013년까지는 서브 스폰서 역할을 유지했으나 이후로는 클럽과의 관계가 없다.[14] 1997년 도쿄대첩 때 득점한 선수다.[15] 아이러니하게도 1998 시즌 후 파산 직전 파이어세일이 벌어진 벨마레에서 요코하마 FC로 넘어간 선수는 여럿 있다.[16] 가령 훈련장으로 사용하던 ANA의 운동장은 명색이 회사를 대표하는 실업팀인데 직원 행사에 우선권이 밀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