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빌로 이와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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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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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4]
1972년에 야마하 발동기 회사가 만든 축구팀[5] 으로, 1993년 프로팀으로 전환하여 J리그 두번째 시즌(1994)부터 참가했다. 연고지는 시즈오카현 서부의 이와타시[6] 이며, 같은 현 내 연고지 팀인 시미즈 S펄스와의 시즈오카 더비로 유명하다. 팀명인 주빌로는 포르투갈어로 '환희'라는 뜻이다.
가시마 앤틀러스와 함께 J리그 초기 리그를 양분하던 강호로 3번의 우승과 3번의 준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과 2번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일본 축구 팀 중 우라와 레즈(AFC 챔피언스 리그 2회 우승)에 다음가는 성적이다. 그러나 2003년 통합승점 2위 이후 점점 하락세를 타면서 2010년대에는 2부 강등과 재승격을 반복하는 수준으로 전락해 있다. 그나마 모기업의 지원이 든든해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도쿄 베르디와는 달리 J2 하위로 처지지는 않고 있다.
홈경기장은 모회사 야마하발동기의 본사공장 단지 내에 위치한 야마하 스타디움이다. 요컨대 공장 운동장을 개축한 것으로, 일본에서 클럽이나 모기업이 소유한 경기장으로는 가시와 레이솔의 히타치 가시와 경기장과 함께 둘 뿐이다. 다만 경기장의 수용능력이 1만 5천석 수준에 불과하고 확장도 불가능해서 시미즈 S펄스전 등 관중 동원이 많은 경기는 연간 3경기 정도 인접 후쿠로이시에 위치한 시즈오카 스타디움 에코파에서 개최하기도 한다.
2. 역사
2.1. 초창기
1982년 천황배 우승과 함께 JSL 2부 리그 우승으로 1부로 승격했고, 1987~1988년 시즌에는 JSL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J리그 창설 당시에는 팀 프로화 문제 때문에 첫해 승격이 좌절되었다.[7]
1993년 JFL 1부 준우승으로 1994년에 J리그로 승격.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경력이 있는 한스 오프트[8] 를 감독으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 둥가를 영입했다. 둥가의 축구 철학은 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4년 리그 8위, 1995년 6위, 1996년 리그 4위로 매년 순위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1997년~2003년 영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2.2. 영광의 시대
1997년 팀창단 최초로 J리그를 우승하고 1998년 리그 준우승 컵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999년 리그 우승과 더불어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 참가해 이란 에스테그랄을 2:1로 꺾고 더블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인 2000년, 2001년에는 주빌로 이와타에게는 약간 슬럼프가 있던 해였는데 2000년에는 리그 4위로 떨어졌고 챔피언스 리그에선 준우승했다. 그 다음 2001년 기록 보면 대박인데 리그 준우승, 야마자키나비스코컵 준우승, AFC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으로 '''J리그 최초 3연준'''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2002년 분위기를 잘 추스려서 다시 리그 우승을 했고 2003년 리그 준우승,[9] 천황배에서 세레소 오사카와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강팀임을 과시했다.
이 기간 동안 주빌로 이와타는 수많은 J리그 기록들을 깨고 다시 세웠다. 1998 시즌에는 리그 준우승을 했지만 세레소 오사카를 9:1로 뭉개버러 한경기 최다점수차 승리팀이 되었고 108골로 시즌 최다득점 구단 기록을 세웠다.
2001년 3연준 할 때는 26실점 밖에 안해 한 시즌 최소실점 구단 기록을 세웠다.
2002년에는 J리그 사상 처음으로 전후기 리그 스테이지를 모두 우승했으며, J리그 베스트일레븐에 같은 팀 선수가 7명이나 뽑히는 영광을 얻었다. 이 기록들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J리그 우승은 가시마 앤틀러스, 주빌로 이와타 중 하나일 정도로 두 팀이 치열한 라이벌전을 형성했다.
2.3. 몰락과 강등
2003년까지는 리그 우승 준우승도 하며 강팀의 면모를 보였으나 2004년부터 팀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세대교체를 해야 하는데 세대교체를 실패해 기존의 전성기를 거친 선수들이 노쇠화에도 불구하고 기용되는 동안 어린 선수들을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한채 방황하게 된다.
2004년 리그 5위 천황배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남겼고 2005년 6위, 2006년 5위까지는 그럭저럭한 성적을 낸다. 하지만 2007년도부터 하락세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2007년 9위를 시작으로 2008년 16위까지 떨어져 승강결정전에서 베갈타 센다이를 1, 2차전 합계 3대2로 이기고 아슬아슬하게 강등을 피했으며 2009년 11위, 2010년도 마찬가지로 작년과 똑같은 11위를 기록했다. 그나마 팬들에 위안이라면 리그컵을 우승하면서 7년만에 우승컵을 들었다는 것이다. 2011년에는 8위에 들어 그나마 나은 성적을 기록했다.
2012 시즌에는 들쑥날쑥한 경기력으로 중하위권을 맴돌더니 시즌 중간에 성남 FC의 한상운을 한화로 '''15억원'''을 들여 영입했다가 제대로 기용하지도 못하는 등 난맥을 거치며 12위로 시즌을 마쳤다.
2013년 시즌에는 초반부터 16위로 내려가 강등권에 들어가 있다. 팬들은 이러다가 작년의 감바 오사카 꼴이 나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31라운드에서 사간 도스에게 0-1로 패하면서, 남은 3경기에 상관없이 강등을 확정지었다. 1993년 구 JFL 준우승으로 J리그에 합류한지 20년만의 강등이자, 동시에 구 야마하 발동기에서 주빌로 이와타로 개편한 이후 첫 강등이다.
여담으로 2013년엔 2007년부터 이어진 마에다 료이치의 저주[10] 가 끝났는데, 그대신 '''마에다 본인의 팀이 강등되는'''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왔다.
2013 J1에서 16위로 함께 강등됐던 쇼난 벨마레가 2014 J2에서 깡패 노릇을 하며 일찌감치 우승과 자동 승격을 확정짓는 동안 주빌로 이와타는 3년 전 JFL에서 J2으로 승격한 신흥 다크호스 마쓰모토 야마가에게 2위를 빼앗기며 3위 쪽에서 놀다가 3경기를 남겨 둔 시점에선 의 승점 차이가 12점으로 벌어지면서 남은 경기에 관계없이 2장의 자동승격권 중 1장은 마쓰모토 야마가에게 돌아가면서 주빌로 이와타는 재승격을 위해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예고되었다. 시즌 후반 감독을 클럽 레전드 나나미 히로시로 교체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결국 준플레이오프에서 몬테디오 야마가타에게 1:2로 패배하여 2015년에도 J2리그에서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주빌로 이와타가 정규리그 4위였고 몬테디오 야마가타가 정규리그 6위였기 때문에[11] 주빌로 이와타의 홈에서 단판승부로 치르고 무승부시 주빌로 이와타의 승리로 간주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1:1 무승부 상황에서 종료 직전 몬테디오 야마가타가 마지막으로 공격할 찬스가 왔는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야마기시 골키퍼가 김병지처럼 골문을 비운 채 공격에 가담했고 그것이 신의 한 수가 되어 버저비터 헤딩 결승골을 내 주는 바람에 주빌로 이와타의 승격 꿈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1년 뒤를 기약해야 했다. 관련 기사
2.4. 재승격과 재강등(2016-2019)
그러다가 1년 뒤인 2015년, 기적적으로 준우승에 성공하면서 2016년부터는 다시 J1 소속으로 뛰게 되었다.
2017시즌에는 일본과 요코하마의 전설 나카무라 슌스케를 영입하며 6위로 시즌을 마쳤다.
2018시즌에는 라이벌 시미즈는 10위권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와타는 계속 강등권에 들락거리며 안좋은 모습만 보였다. 33라운드에서는 패하더라도 강등을 다투던 쇼난, 토스, 나고야 그램퍼스 중 한팀이라도 패배하면 잔류가 확정되는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세 팀은 모두 각각 승리를 거뒀고 이와타는 홋카이도 콘사도레 삿포로에게 패하면서 결국 마지막 라운드까지 강등 전쟁을 겪게 되었다.
34라운드가 치뤄지기 전 이와타의 승점은 41이었고 쇼난과 토스, 나고야는 승점이 40점이었다. 그러나 세 팀은 각각 골득실이 -5,-5,-7이었고 이와타는 -12였던지라 승점은 앞서도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마지막 상대가 우승팀 가와사키 프론탈레였다는점 또한 악재였는데, 선제골을 넣으면서 잔류가 확정되나.. 싶었더니 곧바로 동점골을 먹힌다. 동시에 열리고 있던 토스와 쇼난, 나고야가 모두 비긴채로 끝나서 세 팀의 승점이 41이었으므로 그대로 비기기만 해도 승점 42로 잔류였는데 추가시간 5분에 자책골을 넣으며 가와사키에 패배하고 만다. 결국 승점 41에 -13이라는 골득실차로 16위로 마치며 10년만에 다시 생긴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오미야와 요코하마FC를 꺾고 올라온 도쿄 베르디와 맞붙게 되었다. 그리고 홈에서 2-0으로 승리하며 1부리그에 잔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18시즌을 그렇게 보내놓고 2019시즌을 앞두로 1부리그 18개팀중에서 선수 보강이 가장 미흡하다.결국 2019시즌 초반을 어렵게 보내고 있는데 구단 재정이 위험해서 보강을 별로 하지 못한 사간 도스에게마저 패배하면서 지역 라이벌 시미즈와 함께 강등권에 위치해있다. 이후 다른 하위권 팀들은 감독 교체를 하면서 반등의 기회를 보여줬지만, 이와타는 계속 추락하면서 6월 30일 최하위까지 떨어졌고 결국 나나미 히로시 감독이 사임하고 만다. 이후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한 스즈키 히데토 또한 한달을 버티지 못했고 스페인 출신의 페르난도 후베로 감독을 선임하여 한 해에 네 명이 지휘봉을 쥐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창단 후 처음으로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2019시즌에 요코하마 F.마리노스의 우승이 확정되면서 동률을 유지하던 리그 우승횟수 2위의 자리마저 빼앗겼다.
2020년 J2에서는 후베로 감독을 연임시키며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즌 중반까지 중위권에 그치며 감독이 90년대말 전성기를 이끌던 강화본부장 스즈키 마사카즈로 교체되었다. 감독 교체 후 팀 성적은 어느 정도 향상되었으나 최종 6위에 그쳤으며, 이전 시즌과 달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문제로 승격 플레이오프가 취소되는 바람에 승격이 좌절되었다.
3.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7년 리그 우승으로 1998-1999 아시안 클럽 챔피언쉽에 참가 했다. 플레이 오프에서 승승장구해 8강전 동아시아 조별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 부산 아이파크, 다롄 완다와 속해 포항과 1:1로 비기고 부산을 2:0으로 꺾고 다롄과 비겨 1승1무1패 조2위로 4강에 진출했으며 알아인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결승에 올라갔으며 결승에서 에스테그랄을 2: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9-2000 시즌 우승팀 자격으로 플레이오프를 거치치 않고 8강 동아시아 예선부터 시작해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가시마 앤틀러스, 태국 신타나FC와 같은 조가 되어 경기를 치루었다. 3전 전승으로 깔끔하게 4강에 진출하고 4강에서도 페르세 폴리스를 만나 2:0승리하면서 결승에 진출해 이란팀에 강하다는걸 보여주었다.
결승전 상대는 알 힐랄로 정해졌는데 알 힐랄은 1987, 1988년 모두 결승전에서 일본팀에게 진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팀이였다. 주빌로 이와타는 그런저런 팀으로 생각해 결승에 임했다. 알 힐랄 홈에서 펼쳐진 결승전에서는 세르지오 히카르도에서 전반 3분만에 골을 내줬지만 18분, 19분 연속해서 이와타가 골을넣고 2:1로 앞서 나가게 되고 후반들어서 별다른 일이 없어 손쉽게 승리하나 했으나... 경기 막판 후반 44분 세르지오 히카르도가 또다시 골을 넣어 경기는 연장전 승부에 돌입해야 했다. 연장 12분 또 히카르도에 골로 3:2 역전당한 주빌로 이와타는 필사에 공격을 퍼부었지만 결국 추가골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2연속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2000-2001 시즌 다시 참가한 대회에서는 동아시아 1라운드를 면제받고 2라운드 부터 시작해 홍콩 사우스차이나를 6:2로 가볍게 이기고 동아시아 8강에 진출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산둥 루넝, PSM 마카사르와 만나게 되었는데 수원을 상대로 3:0 승리를 거둠으로써 수원에게 2연승을 거두게 되었고 산둥을 6:2, 마카사르에게는 3:0승리를 거둠으로써 3전 전승 4강에 진출하게 된다.
4강에서 이르튀시를 연장전 끝에 1:0으로 승리하고 결승에 올라갔다. 결승전 상대는 페르세폴리스를 2:1로 이긴 수원으로 확정되었다. 팬들은 "2년 연속 이긴팀인데 못이기냐?"라는 반응이였다. 다만 결승전 장소가 수원 홈이라는게 문제 였지만 개의치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결승전은 전반 14분 수원 산드로 골로 인해 1:0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이후 추가득점을 올리지 못하지 주빌로 이와타는 다급해 지기 시작했다. 수원은 좀처럼 동요하지 않고 수비를 굳건하게해 주빌로에게 득점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1:0으로 경기가 끝나게 되고 주빌로 이와타는 2년 연속 우승을 놓치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리그 준우승 리그컵 준우승을 기록해 '''3연준'''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게된다.
이후 몰락 시즌에는 2004년 AFC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 E조에 속해 전북 현대 모터스, 상하이 선화, 태국 BEC와 속해 4승1무1패를 거두었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전북에게 조1위를 내주고 조2위로 탈락하게 된다.
2005년 작년과 똑같이 E조에 속해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전 젠리바오, 베트남 호앙아인과 속했으나 수원에게 결승전 복수는 커녕 홈에서 1:0, 원정에서 2:1 패배를 당하게 되고 선전에게도 패배해 3승 3패 조 3위로 탈락하게 된다.
4. 유니폼
푸마와 오랫동안 계약을 맺고 있다. 색상은 밝은 하늘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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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시즌 푸마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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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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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시즌 유니폼. J2리그에서 착용한다.
5. 선수단
6. 주요 선수
- 일본
- AFC
- UEFA
- 살바토레 스킬라치 : 1994-1997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가 1997시즌 잠시 지휘봉을 잡기도 했으나, 이내 파우메이라스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11경기 끝에 사임한다.
7. 기타
성남 일화 천마의 팬들이 이 팀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유인 즉슨 2012년 성남을 말아먹었던 먹튀이자 역적 3인방 한요윤[14] 중 한상운을 이적료를 '''17억 원'''이나 주고 데리고 가서다. 가뜩이나 지원도 줄고 돈도 없는 성남이여서 이번 이적 건으로 인해 '''돈도 돈이지만 똥을 비싸게 치워줘서''' 팬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역시 이적 후 기록하라는 공격 포인트는 안 기록하고 벤치만 달구며 먹튀짓을 하자 이 때는 역으로 이와타의 팬들이 성남에게 손해배상 청구하라며 들고 일어났다고(...)[15]
2012 시즌 마지막 경기에선 강등 위기에 놓여있던 감바 오사카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감바를 충격과 공포의 강등 나락으로 밀어넣기도 했다.
2018 시즌 황의조에게 이상하리만큼 약하다. 리그에서는 두번의 맞대결에서 각각 한골씩 먹혔고 컵대회에서는 황의조에게 첫 해트트릭의 기록을 내주고 만다.
8. 둘러보기
[1] 전신 야마하발동기 축구부의 창단년도.[2] J리그 초창기 두 팀이 우승을 다투던 시절에는 '내셔널 더비'로도 불렸다.[3] 전신인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시절에 거둔 우승[4] 남자 마스코트의 이름은 주빌로쿤(ジュビロくん)이며 여자 마스코트의 이름은 주비짱(ジュビィちゃん)이다.[5] 1970년 사내동호회, 1972년 축구부 발족.[6] 서쪽에 비교적 대도시인 하마마쓰시가 인접해 있다. 다만 J리그 클럽 대부분이 2000년대 이후 연고 구역(J리그 공식용어로는 '홈타운')을 광역화하는 것과 달리 주빌로는 연고 구역을 이와타시로 한정하고 있다.[7] 이유는 수많은 클럽들을 고생시킨 홈경기장 문제로, 심지어 시미즈 S펄스와 통합까지 거론되었다가 결국 야마하 스타디움의 스탠드를 확충하여 해결되었다. 실제로 바로 옆 하마마쓰시를 연고로 하는 실업 강호 Honda FC는 하마마쓰시에 경기장을 확보하지 못해서 프로화를 포기했다.[8] 도하의 비극 당시 감독을 맡은 사람이다.[9] 전후기 체제였으나 요코하마 F. 마리노스가 전후기를 모두 차지해서 챔피언 결정전이 날아가고 주빌로가 통합승점 2위를 기록했다.[10] 마에다가 첫 골을 넣은 상대팀은 반드시 강등된다는 법칙-고후, 도쿄 베르디, 지바, 교토, 야마가타, 감바 오사카 중 고후, 감바 오사카, 야마가타만 재승격[11] 원래대로라면 정규 리그 5위인 기라반츠 기타큐슈를 상대해야 했으나, 기타큐슈가 J1리그 라이선스 미비로 인해 불참하면서 바뀌었다.[12] 야마하 시절부터 주빌로에서만 20여년을 활동하며 득점왕, MVP를 거머쥐고 팀을 우승으로 이끈 레전드이자 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일본의 월드컵 본선 첫 득점자로도 유명하다.[13] 일본-북아일랜드 혼혈이지만 국가대표로는 일본을 선택하여 U-23 대표선수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였다. 이후 북아일랜드 감독인 마이클 오닐이 대표 소집 의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14] 한상운, 요반치치, 윤빛가람을 일컫는다.[15] 사실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성남의 준 레전드급 센터백 조병국이 2010시즌이 끝나고 이 팀으로 이적하면서 이미 이 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