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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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n Illich
1926년 9월 4일 ~ 2002년 12월 2일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신학자, 아나키스트로 현대사회의 제도들을 비판하면서 자율적이면서도 소박한 삶을 추구하였다.
이반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독일계 유대인이었는데,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이 박해하자 가족 전체가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게 됐다. 그리하여 일리치는 피렌체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곧 신학에 관심을 가졌고 로마 그레고리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잘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각각 배웠다. 대학 생활은 그에게 문제 의식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었고 1951년 그는 로마를 떠나 뉴욕으로 가서 그곳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 교구의 신부로 활동한다.[1]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일리치는 푸에르토리코 가톨릭대학 부총장을 역임했는데, 지역의 거주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를 비판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의 주교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일로 그는 푸에르토리코를 떠나야 했다. 1961년부터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정착해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설립하고는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비판하는 대안적 활동'''과 정책을 모색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일리치는 교회의 세속화, 관료제, 교조주의 등에 비판의 날을 세웠고, 이는 그와 로마 교황청 간의 긴장관계를 심화시켰다. 결국 1967년 교황청은 일리치를 파문하고야 만다.[2]
하지만 파문은 오히려 그가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저술과 강연 활동에 앞장섰고 특히 현대사회의 제도를 크게 비판하였다. 그는 서로 자발적으로 돕고 살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바라보았고, '''제도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의 자율적이고도 친절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육, 건강, 교통, 사랑, 노동, 에너지, 성 등의 다양한 분야를 파고들며 연구를 지속했고 그 결과를 많은 책으로 출판하였다. 현대 문명에 단호히 도전하는 그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사회주의, 아나키즘, 생태주의 등의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1992년 일리치는 암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 치료받지 않고 스스로 병을 감내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발병 10년 후인 2002년 독일 브레멘에서 세상을 떠났다.
Ivan Illich
1926년 9월 4일 ~ 2002년 12월 2일
1. 개요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신학자, 아나키스트로 현대사회의 제도들을 비판하면서 자율적이면서도 소박한 삶을 추구하였다.
2. 일생
이반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독일계 유대인이었는데,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이 박해하자 가족 전체가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게 됐다. 그리하여 일리치는 피렌체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곧 신학에 관심을 가졌고 로마 그레고리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잘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각각 배웠다. 대학 생활은 그에게 문제 의식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었고 1951년 그는 로마를 떠나 뉴욕으로 가서 그곳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 교구의 신부로 활동한다.[1]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일리치는 푸에르토리코 가톨릭대학 부총장을 역임했는데, 지역의 거주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를 비판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의 주교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일로 그는 푸에르토리코를 떠나야 했다. 1961년부터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정착해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설립하고는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비판하는 대안적 활동'''과 정책을 모색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일리치는 교회의 세속화, 관료제, 교조주의 등에 비판의 날을 세웠고, 이는 그와 로마 교황청 간의 긴장관계를 심화시켰다. 결국 1967년 교황청은 일리치를 파문하고야 만다.[2]
하지만 파문은 오히려 그가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저술과 강연 활동에 앞장섰고 특히 현대사회의 제도를 크게 비판하였다. 그는 서로 자발적으로 돕고 살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바라보았고, '''제도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의 자율적이고도 친절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육, 건강, 교통, 사랑, 노동, 에너지, 성 등의 다양한 분야를 파고들며 연구를 지속했고 그 결과를 많은 책으로 출판하였다. 현대 문명에 단호히 도전하는 그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사회주의, 아나키즘, 생태주의 등의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1992년 일리치는 암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 치료받지 않고 스스로 병을 감내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발병 10년 후인 2002년 독일 브레멘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저서
-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3]
- 《병원이 병을 만든다(Medical Nemesis)》
- 《깨달음의 혁명(Celebration of Awarness)》
- 《절제의 사회(Tool For Conviviality)》
- 《전문가들의 사회(Disabling Professions)》
- 《그림자 노동(Shadow Work)》
- 《젠더(Gender)》
-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
-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
- 《텍스트의 포도밭(In the Vineyard of the Text)》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In the Mirror of the Past)》
-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ABC : The Alphabetization of the Popular Mind)》
-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Ivan Illich in Convers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