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렉트로닉 뮤직/대한민국
1. 개요
대한민국의 전자음악에 대한 개괄과 역사를 다루는 문서입니다.'''"문제는 사람들이 기계에서 원음이 들린다고 믿는것이다. 원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의 왜곡을 사랑하라. 기계의 잡음을 사랑하라. 그것이 결국 우리가 말하는 음악이다."'''
- 모하비 3집, Machine Kid 중 #
2. 역사
2.1. 클래식(현대음악)계의 전자음악 도입
참고자료
최초의 한국 전자 음악 시연은 클래식 작곡가 강석희[1] 가 1966년 12월 9일 명동국립극장에서 초연한 <원색의 향연>이라고 한다. 해당 음악은 KBS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으며, 전봉건의 시를 두 사람이 낭독하고 무대의 푸른 조명을 비추는 20분짜리 곡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악조건으로 인해 전자음악의 맥을 이어지질 못했다.
이후 작곡가 나인용이 1973년 유학시절 작곡한 <전자음악과 플루트를 위한 십자가의 환상>을 발표하는 등 간간이 발표되어 왔는데, 1976년 강석희가 주관한 범음악제에서 전자음악과 컴퓨터 음악, 테이프 음악을 소개하면서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에서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고,[2] 1977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Roland의 System 100 아날로그 모듈러 신디사이저가 설치되면서 당시 황성호, 정덕산등 작곡과 학도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서울대 작곡과 학생들이 이 신디사이저로 작곡을 하기 시작했고, 이 작품들은 1979년 아시아 작곡가연맹 서울대회기간중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중간 휴식시간 중 들려주는 형태로 발표 됐다고 한다.
이후 서울대를 졸업한 황성호등 서울대 졸업생들 중심으로 공정실 낙원상가 기술자가 합세해 ‘전자음악연구회’를 만든다. 이후 전자음악연구회 회원 중심으로 ARP2600나 Roland SH5등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로 전자음악 작품을 계속 작곡했고, 1980년대 중반에 들어 클래식 작곡계의 전자음악 발표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이후 전자음악연구회는 뎐롱패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당시 개발 되었던 DX-7중심의 디지털 신디사이저와 Max(프로그래밍 언어)와 같은 프로그램을 활용한 컴퓨터음악 활동을 해오다가, 1993년 한국전자음악협회로 이어진다. 한국전자음악협회는 현재까지 에밀레 학술지를 발표하는 등 활발이 활동하고 있으며, 황성호 작곡가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가 교수로 재직중이다.
2.2. 90년대 이후 테크노 무브먼트(1세대 일렉트로니카)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최초로 테크노의 이름을 달고 앨범을 발표한다. 자신들의 1집을 리믹스한 'Live & techno mix'인데 이 안에는 환상 속의 그대가 여러 버전으로 테크노화 시킨 음악이 담겨있다.
1992년 환상 속의 그대 Part 4. '수시아'와 더불어 우리나라 테크노 음악의 시초격인 트랙. 5분 50초 경에 사물놀이 사운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해외 레이브뮤직씬의 트렌드인 Hoover와 Rave stab, TR-909등의 음색을 훌륭히 활용했으며 보컬파트까지 포함하여 일렉트로니카의 작법을 온전히 따른것은 시대보정을 감안해도 이 장르에 대한 서태지의 이해도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수 있다.
이후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2집 수록곡 '수시아'는 본격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레이브 트랙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수시아는 샘플소스의 사용비중이 큰편이다.
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1997년 후반 삐삐밴드 출신 이윤정의 솔로 명의로 <진화>라는 본격적인 전자 음악 음반이 출시되었고, 해를 넘겨 1998년 봄에는 모하비의 <테크노전자음악잡동사니=타나토스>가 발매된다. 이 음반은 한국에서 발매된 첫 테크노 음반으로 여겨진다. 한편 대중 음악 판도에서는 신해철의 1998년작 <Crom's Techno Works>나 윤상의 작업물 등 테크노 음악의 작법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가요들이 등장하였다.
90년대 후반 한국에서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대한 담론은 주로 PC통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하이텔의 '21세기 그루브'라는 동호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99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일렉트로니카 컴필레이션 음반인 <techno@kr>[3] 이 독립 레이블인 DMS TRAX를 통해 발매되었다. 앨범 리뷰 이 시기에는 음악 뿐만 아니라 레이브 파티 등 클럽 문화에 대한 저변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1999년에 들어 이정현을 비롯한 소위 '테크노' 음악의 열풍으로 많은 이들에게 테크노와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단순한 댄스 음악으로 여겨지는 등 일렉트로니카가 잘못 알려진 측면이 없지 않았다. 또한 마약, 문란한 성관계 등 클럽 문화에 대한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일렉트로니카 음악까지 싸잡혀서 퇴폐 문화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당시의 테크노 문화를 기록한 KBS 현장르포 제3지대의 영상. 달파란, 트랜지스터헤드, 모하비 등 1세대 한국 일렉트로니카의 거물들이 등장한다.
어쨌든 좋은 방향으로 지속될 것 같던 한국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흐름은 2000년대에 들어서자 거품처럼 꺼져버렸다. 이에 대해 추가설명을 하자면 상기 말한 DMS TRAX를 비롯해 펌프기록, E.F.O Groove K.E.M.F, 벌룬 앤 니들 (엄밀히는 노이즈 기반의) 등 일렉트로니카 전문 음반사들이 있었고 이너테크와 101레이버스, 02 프로덕션, 열반화 등 이벤트를 전문으로 하는 프로모터 집단들도 생겨나는 추세였다. 다만 문제는 이들 파티 프로모터, 혹은 디제잉 라인과 아티스트 라인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정현 혹은 이윤정으로 테크노를 처음 접한 이들에게 달파란이나 모하비, 가재발, 트랜지스터헤드 등의 정통 테크노는 낯설었고, 전문 디제이 라인과 아티스트 라인의 교류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두 집단 모두 '노는 사람만 노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시 데이트리퍼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아티스트 류한길은 소음인가요의 인터뷰를 통해 이정현 등의 대중매체가 가져온 '테크노 이미지'의 여파가 너무 심해, 당시에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대중의 인식과 반대되는 (원래 자신들이 하던) 음악을 하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2000년대에 들어서며 테크노의 주 무대였던 홍대 댄스클럽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문을 닫는 경우도 생겨났다. 한국 클럽문화 분석 국산 일렉트로니카 음반의 수가 줄어든 것은 레이블의 존속 문제도 있지만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매우 부족했다는데 있었을 것이다. 아우라소마와 같은 레이브가 국내에서도 시도되었지만, 국내에서 생소한 이 문화는 특히나 월드컵전후 미디어에서 레이브 음악을 약물과 연관지으며 #, # 논란이 심해졌고 결국 미디어의 철퇴를 맞고 시들시들해지게 되었다.하박국 : (...) 그 후에 아우라소마, PLUR 등 클럽도 몇개 생기고 그러다 갑자기 뭔가 슉하고 사라졌죠.
류한길 : 제가 기억하기는 사라지는 원인 중 하나가 일단 이정현씨의 '와'.. 그 여파가 너무 심했어요. 그 때 무대 의상이랑 부채 기억하세요? (하박국: 아 예,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그 게 '테크노'란 이름으로 히트를 치면서 저희들은 완전히 도적놈들 같은 입장이 되어버린 거죠. 대중의 인식이라는 게.. 실제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언더그라운드 기반의 다채로운 것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 외국에서 테크노 붐이 인다고 하니까 갑자기 기획사 사람들이 하나둘 공연장에 오기 시작한 거에요. 그러다가 분위기가 어떻게 됐냐면 '지금 여기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테크노 뮤지션을 대중음악쪽으로 끌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면서 기존 대중음악 쪽에서 프로듀싱을 하던 분들이 해외의 스타일리즘을 가요 스타일에 적용시키고... (후략) - 소음인가요 : 아티스트토크_류한길(Ryu HanKil) 편에서 발췌함
대부분의 일렉트로니카 음악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평가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은퇴하였다. 대표적인 한국 일렉트로니카 1세대 뮤지션인 모하비는 음반을 내다가 파산하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2011년까지만 해도 공사판에서 육체 노동을 하다가 그나마도 폐렴으로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기타 음악가들도 활동을 접거나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2.3. 200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2~3세대 일렉트로니카)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 하우스/라운지 음악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들 음악가들이 많은 인기를 끌면서 마치 하우스나 라운지 음악이 일렉트로니카의 전부인양 여겨지는 풍조를 낳기도 했다.
일렉트로니카의 시선이 바뀌게 된 시기는 2010년 이후로, 이 시기는 해외에서도 기존의 전자음악에 EDM이라는 태그가 새로 달리며 댄스음악을 다시 조명하는 때였다. We No Speak Americano와 Party Rock Anthum의 흥행시기 이 두 곡은 과거의 666 - Amok에 버금가는 만큼 흥행을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클럽 음악의 장벽이 낮아지며 사람들이 댄스음악을 더 쉽게 접하게 되었고, 글로벌 게더링과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 넥스트 플로어 08 등의 페스티벌이 전자음악 매니아들을 결집시키며 전자음악 커뮤니티의 부흥이 일어났다. 2012년 경 Seoul Electronic City라는 라디오쇼가 지역방송인 마포FM에서 송출되어 국내 전자음악을 소개하였으며, 비슷한 시기 언더그라운드 미디어&레이블인 영기획의 창단과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전자음악에 대한 접근성이 조금 더 높아졌다. 2013년에는 와트엠이라는 라이브 전자음악을 위한 공연 무대와 대안적 음원 유통 플랫폼인 오디오로그가 등장하여 아티스트의 접근성이 더욱 높아졌고 전자음악 세미나 - 이매진, 디제잉/프로듀싱 특화 교육과정을 전수하는 SEMC도 생겨나게 되었다. 대중적으로도 무한도전에서 EDM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고, 전자음악이라는 장르 내에서 가장 많은 앨범이 발매된 해이기도 하다. 이 현상은 페이스북과 사운드클라우드, 밴드캠프를 비롯한 SNS 페이지가 아티스트에 대한 소개 및 작업 정보를 더욱 쉽게 정리하고 공개할 수 있게 됨으로써 대부분의 아티스트가 이를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2014년 현재까지 이런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에선 일렉트로니카란 장르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꽤 있다. 예를 들면 클럽 DJ는 그냥 동네 양아치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든지 단순히 클럽에서 추는 댄스음악으로 생각한다든지, 일렉트로니카는 그냥 컴퓨터로 뚝딱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든지. 이것은 실제로 한국에 알려진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대부분 EDM 위주의 댄스 음악인 탓이 크다. EDM 아티스트 가운데서도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이들이 있지만, 클럽에서 몇 번 틀고 버리려고 만드는 양산형 음악이 많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4년 현재 국내의 전자음악은 사운드아트, 미디어아트와 결합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WeSA라는 사운드아티스트 네트워크의 창립 및 MAX/MSP의 사용, 소리왕, 소음인가요, 무잔향 등의 전시로 전자음악, 혹은 그 작법이 미디어아트와 결합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한편 EDM쪽에서는 인터넷의 발달로 국내의 아티스트가 해외 레이블에 데모를 보내거나 비트포트에 곡을 등록하며 해외 매체에 노출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는 기존 클럽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무대와 활로를 모색하던 중 예술과 관련이 있는 갤러리와 연이 닿아 좀 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며 이런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전자음악 커뮤니티 중 하나인 ESCAPE의 서비스 ESC WIKI에서 각 사건들을 타임라인 형식으로 정리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링크를 참고. #
3. 문제점
작곡가: 단디
귀요미송, 귓방망이 등 인지도 있는 곡을 만든 단디의 EDM. 다만 보컬과 인스트루먼트 모두 싸구려틱하다. 사실 단디는 이 곡보단 귀요미송2가 더 많이 까인다... 여담으로 이후 작곡가 단디는 성폭행 혐의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작곡가: DJ 한민
방탄소년단을 통해 해당 곡이 알려져, 댓글에 외국인들이 꽤 많이 보인다. 다만 댓글의 대부분이 '방탄소년단 사랑한다', '방탄소년단 최고다'처럼 곡과는 관련없는 이야기만 있는 게 함정. 물론 곡의 수준은 상당히 처참하다.
말이 필요 없다. 한국에 EDM 열풍이 불자 몇몇 일부 한국의 EDM 프로듀서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음악에 '''K-EDM'''이라는 이름을 붙혔으며 한국의 EDM씬을 K-EDM 씬이라고 부르고 있다.
K-POP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모양인 것 같지만 정작 리스너들은 K-EDM이라는 단어를 별로 애용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외국 EDM과 대체 뭐가 차별화되었는지 알기조차 힘들다.'''
옆 나라인 일본의 전자 음악 시장은 멜로디나 노래의 분위기부터 다른 나라의 음악과는 차별화 되어 있고 리스너들에게도 차별화되어 분류된다 예시로 일본 스타일의 하드 코어 테크노나 퓨쳐 베이스 음악을 꼽을 수 있겠다. 굳이 이런 장르가 아니더라도, 일본에서는 애초 YMO 시절부터 기틀을 쌓아왔기 때문에, 펀더멘탈면에서도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4]
일본의 사례와는 다르게 몇몇 한국의 EDM 음악은 발전 없이 초기 스타일의 더치 하우스로 '''퇴화'''하는 중이다. 애초에 한국 시장부터 발전이 없는데 굳이 K-EDM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히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실 일명 K-EDM이 발전하지 못 하는 이유는 씬의 수준에 있다.
[image]
무엇보다 서로를 이끌며 함께 으쌰으쌰하는 EDM 강국인 구미권의 경우와는 다르게 한국의 EDM씬은 서로가 잘났다며 남을 깎아내리기에 바쁘다. 심지어 서로 파벌을 형성하여 특정 DJ를 비꼬기도 한다. 그나마도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인디 위주로 비주류 장르들을 선보이거나 소개하고 있으나, 씬의 규모는 외국의 동일한 장르씬과 비교해도 코딱지만한데다, EDM향을 첨가한 2000년대 말 이후의 대중가요를 논외로 하면, 같은 한국 인디 음악 바운더리 안에서 따져도 K-EDM의 지분은 밴드 아티스트(일반적으로 모던과 포크송위주의 소프트 록 계통), 힙합[5] 과 비교해도 그 비중이 절대적으로 밀린다. 특정 씬의 경우 아예 경쟁할수 있는 시장환경 형성조차 조성되지 않는 실정이다.
저 비주류 음악인들조차도 인맥을 형성해서 자기네들 사람이 아닌 외부인을 정치적인 명분 등으로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위 짤은 동양이 아닌 해외 사이트에서 만들어진 짤방이니 만큼 유럽 사람들이 보기에도 한국이나 다른 여타 아시아권의 EDM씬 수준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직폭력배를 직원으로 쓰고, 비자가 없는 외국인을 DJ로 이용하면서 대규모로 탈세를 하는 클럽도 존재한다.# 사실, 원래 이런쪽에는 자칫 암흑가가 개입하기 쉽다는 점도 참작해야하지만 탈세, 비자 없는 불법입국자를 사용하는 범죄행위는 어떤 말로도 감싸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이 곪아서 터진것이 바로 저 악명높은 버닝썬 게이트이다.
한국의 수준 낮은 EDM 씬은 이미 전세계의 EDM 관련 SNS들로 인해 퍼져 나가고 있으며, 모 DJ의 머리만 흔드는 페이크 디제잉과 박명수의 하드웰 팟캐스트를 컨버트해서 영리적 목적으로 클럽에서 튼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저작권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다. 한국의 몇몇 디제이들은 음악을 트는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음원 구매에 땡전 한 푼도 쓰지 않고 유튜브에서 음원을 컨버트하여 사용하는가 하면 모 "C" 사이트에서 불법으로 올라오는 음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직업의식이 전혀 없다고 보여진다. 참고로, 해당 사이트는 현금으로 코인을 충전하여 그 코인으로 음원을 구매하는데 그 충전된 코인과 현금은 고스란히 운영진의 뱃 속으로 들어간다.
또한 해당 사이트의 몇몇 유저들은 '''질 낮은''' 밈인 나이트코어처럼 128BPM의 음악들을 140, 심한 경우 160BPM까지 올린 후 그것을 떡춤이라고 불리는 '''질 낮은''' 문화 타이틀과 함께 셋으로 배포하기도 한다. 나이트코어의 시작이 저작권을 피하기 위해서, 간단히 BPM만 올리고 리믹스 딱지를 붙허 조회수를 빨기 위해서였다면 이 사이트에서 나온 믹스는 순전히 신나고 듣기 좋아서. 심지어 이를 좋아하는 리스너들이 상당하다.
이외에도 일명 짬빱으로 90년대에나 할 법한 내리갈굼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으며, 몇몇 클럽은 협의 후 결정이라는 말로 레지던트 디제이들에게 제대로 된 페이를 주지 않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애초에 DJ는 정규 계약직이 아니라 음악 감독이 부르면 와서 노래를 트는 식이라 4대 보험에 해당 되지 않으며 마음대로 자르고 돈을 주지 않고 갑질을 당해도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것이 상당한 문제점이지만 동종업계 그 누구도 해당 문제를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유튜브, 사운드클라우드 등의 인터넷 음악 프로모션은 더더욱 처참하다. 한국은 클럽에 종사하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프로듀서들이 활동할 수 있는 레이블은 전무한 수준이다. 때문에 아무리 실력있는 프로듀서가 수준높은 곡을 작곡해도 인정받기가 힘들다. 덕분에 그간 나왔던 루키 아티스트들의 대부분이 EDM씬에서 손을 털고 케이팝 기획사에 들어가 케이팝을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EDM 씬은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있다. 사실상 멀쩡한 쪽은 대형 기획사의 작곡가로 영입돼서 가요(특히 아이돌이 부르는 댄스음악 노래들) 반주를 쓰는 식의 메인스트림에 기생하는것 뿐일 지경이다.[6] 아니면 해외에서 진출해 해외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갖추는 경우도 많으니 이는 인재유출 문제라고 볼 소지도 있다. 문제점이 수도 없이도 많은데 씬의 수준 자체를 개혁하지 않는 이상 K-EDM 씬이라는 뭔가 있어보이는 단어로 '포장'하기에는 요원해보인다.
4. 한국의 일렉트로니카 음악가들
국내에 발매된 앨범의 목록은 다음 페이지에서 확인해볼 것 # - by loop-o-matic
범위를 정하기 모호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오직 '''일렉트로니카로만''' 앨범을 내고 활동하는/한 적이 있는 뮤지션들만 있습니다.
- 가재발
- Gazaebal (2000)
- Another One (2002)
- Sound Ship (2005)
- BLACK BOX
- Advance (2018)
- 고트 앤 멍키 [7]
- Mommy I Concrete With My Dad (2006)
- A Weird Popularity (2008)
- Tobirush(2018)
- Funky Skool
- 妓生 (기생) / Geisha
- Firi
- My Call
- 데이트리퍼(Daytripper)
- 수집가 (2001)
- Brown Paper (2004)
- 달파란
- 휘파람별 (1998)
- 무읭[10]
- 로멘틱 카우치(Romantic Couch)
- 로보토미 (Lobotomy)
- 로우피쉬 (Raw Fish)
- 모하비
- 미스틱피쉬 (Mystic Fish)
- 바가지 바이펙스써틴 (Bagagee Viphex13) [11]
- 세인트바이너리(Saintbinary)
- Millim (1999)
- 오대리 (ODAERI) [12]
- 오리엔탈 펑크 스튜(Oriental Funk Stew)
- 요한 일렉트릭 바흐
- 이디오테잎(Idiotape)
- 0805 EP (2010)
- 11111101 (2011)
- Tours (2014)
- 이온(Eon)
- 임레이(IMLAY)
- 숀(SHAUN)
- 전자맨(junjaman)
- 제펫
- 캐스커(CASKER)
- 클래지콰이(Clazziquai)
- 팝뮤직25(Popmusic25)
- 퓨처아이트로니카
- Cyber City (2000)
- 프렉탈(Fraktal)
- 플래닛 쉬버(Planet Shiver)
- 톡식바이어스플뢰르아이비(toxicbiasfleurivy)
- Archetype Objet (2005)
- Uncertainty/Composition (2007)
- Particles (2009)
- Fukkeul [클럽 이태원메이드 음악감독]
- 트랜지스터헤드(transistor head)
- Housology (2000)
- Interruption by Interface (2011)
- 하우스 룰즈(House rulez)
- 허밍 어반 스테레오(Humming Urban Stereo)
- 휴 (Hyoo)
- Aerial Infection
- Dr.1008
- DJ Bowlcut[전]
- East4A
- FIRST AID (=Pause Cuts)[13]
- Flash Flood Darlings
- Flash Finger
- Freakhouze
- 매시브 디토 (Massive Ditto)
- 저스틴 오 (Justin Oh)
- 카고 펭치 (Kago Pengchi) [14]
- haihm
- GRAYE (그레이라고 읽는다) [15]
- Groove Camp (Cosmic Ally 프로젝트)##
- MonoPoly
- Machìna
- Archipelago (2019)
- Willow (2019)
- MusikaTECH
- NEKTWORK
- Paul Bazooka
- Red ELOA
- Risque Rhythm Machine
- Saintrop
- Shootin' Star (Sweatdrop Collabs)
- THERIOTZ!
- Xanexx[16]
- W
- Peggy Gou - 한국인 최초로 DJ MAG TOP 100 순위에 진입한 아티스트.
- 클럽헌터(Clubhunter)[17]
5. 한국의 일렉트로니카 레이블/크루
- 벌룬앤니들
- 서브비트 - 힙합 비트메이커 로보토미(aka 영쿡)[18] , mondaystudio, 2015년도의 퓨쳐 베이스 신예 IMLAY[19] 등이 소속. 영기획과 긴밀한 관계이며 레이블이라기보단 무브먼트 크루에 가까운 성격인듯.
- 프로퍼글로우 - 위의 서브비트와는 동맹관계.
- 영기획 - 한국 인디트로니카의 최전선에서 뛰는 레이블. 하박국이 이끌고 있으며 정식 소속아티스트는 로보토미, FIRST AID, GRAYE 셋.
- 킹스 우퍼 - 채널 좀비왕의 일렉트로니카 팀이다.
- Moon Records - 한국의 DJ Massive Ditto가 수장, 아시아 최대의 EDM 레이블
- ScreaM Records - SM엔터테인먼트가 설립한 한국의 EDM 레이블
- Discovery Music -한국의 DJ Flash Finger가 수장
- MAKE A RECORDS - 한국의 DJ DUO [ FREEZ ] 가 수장, 국내 클럽씬 레이블
6. 참고 자료
- 한국 테크노 음악의 '정돈되지 않은' 연대기, 장호연, 웹진 weiv #
- 디시인사이드 일렉트로니카 갤러리 '잃어버린 한국의 소리를 찾아서' 연작#
[1] 2020년 8월 16일로 별세.[2] 이후 일년뒤 제2회 범음악제에선 강석희는 타악기 연주자 마이클 란타와 가야금 연주자인 황병기와 함께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즉흥연주를 시도했다.[3] 한국의 1세대 일렉트로니카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왠만한 사람들은 이 앨범에 참여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의미를 지녔다. 가재발, 산소박사, 전자맨, 캐스커, 데이트리퍼 등등. 이외에도 PLUR:New Techno Movement라는 이름의 앨범도 있다.[4] 물론 90년대에 한국 댄스 음악이 발전하고, 이들이 차용한 댄스음악들도 넓게는 전자음악에 포함되나,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유로댄스(및 이에서 파생된 일본식 유로비트)나, 그런대로 멋을 좀 내봤자 차트 뮤직 스타일의 하우스들을 차용(심하면 베끼고)하는데 그쳤을 뿐이다.[5] 그나마 이쪽은 쇼미더머니나 고등래퍼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서나마 계속 젊은 피를 수혈해오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 나름대로의 논란이 많고 호불호가 갈리고, 성공한 사람들은 대형 기획사나 메이저 씬으로 흡수되지만 어쨌든 신인들의 등용문은 되어주니까.[6] 그나마도 대형 기획사에서 자본으로써 외국 작곡가들을 다수 외주로 주는 일도 많아지면서 이들과 협업하거나 경쟁해야하는 상황이다.[7] 국내에서는 드물게 IDM을 프로듀스했던 아티스트.[8] 사용된 브금은 Follow Me - Jimmy Fontanez & Media Right Productions이다.[9] 2013년부터 활동한 익스페리멘틀/IDM 아티스트. [10] 유튜브활동 중지[11] DJ 바가지. 본명에서 유래한 별명이라 한다. 어느날부터 Viphex 13으로 이름을 바꿔서 밀고있는데 애석하게도 별로 호응이 없는 듯.[12] 익스페리멘틀 아티스트. 국풍81을 패러디한 자켓의 국풍 13 앨범이 있으며, 신촌에 주파수라는 작업실도 있고 영등포에는 다소유라는 LP음악카페/바를 운영중이다. 단순 카페뿐만 아니라 인디즈 공연 대관도 한다는듯. M/V도 본인이 만드는데 대부분의 영상 컨셉은 80~90년대 영상을 연상케 하는 화질과 구도가 특징이다.[전] DJ Silent, 이후에 J.fitz란 이름으로 활동하다 다시 DJ Bowlcut으로 이름을 바꿨다[13] 과거에는 miao, AID 등의 명의로 동인 음악 씬을 넘나들며 활동했지만 예의 그 커리어를 기점으로 非동인 씬으로 진출한듯. 영기획 레이블 직속 아티스트.[14] BMS 제작시에는 보통 KHTP라는 명의로 활동했었다.[15] 재키 와이의 1집에도 참여한족이 있다.[16] 데뷔하기 전에는 일렉트로니카 갤러리에서 고정닉급으로 활동했었다 한다.[17] 2000년대 초중반 유럽 유로댄스차트 컴필레이션 음반등을 리믹스,프로듀싱했던 작곡가 김영준과 싱어송라이터 김효문dj 효 이 2006년 볼케이노디제이팀이라는 그룹으로 활동 하였다가 해체후 2007년에 결성한 신비주의 프로젝트 그룹으로 디제이효의 싱글 'Party Time'을 시작으로 '만남2008' '가리워진길' '검은고양이네로' 같은 가요리메이크 앨범을 많이 만들었으며 2009년 유명했던 드라마 아내의 유혹 Ost앨범에 리믹스로 참여한 경력이 있다. 지금현재는 터보트로닉이라는 프로젝트로 많이알려져 있으며 감스트거울춤으로 유명한 '디스코몬스터' '붕가댄스' 같은 곡으로 유명하다.[18] 원래 영쿡과 하두리의 2인( )그룹이었으나 하두리 탈퇴후 사실상 영쿡의 다른명의 취급. 영기획 정식 소속 아티스트이기도 하며 힙합에서는 오버클래스에도 소속[19] 이후 SM 엔터테인먼트의 아티스트진으로 메이저 진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