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식
1. 개요
한국의 농구선수.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 겸 센터.
2. 선수 생활
2.1. 고교-대학 시절
마산고 시절 운동능력이 좋은 센터로 주목받으며 동기 강을준과 함께 팀을 종별선수권 우승으로 이끈다. 연세대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센터 자리를 차지, 당시 대학 최강 중앙대의 쌍돛대 김유택-한기범에 홀로 맞섰고, 이들 쌍돛대가 졸업하고 나선 일약 대학 No.1 센터로 등극하며 대학선발팀 단골멤버로 뽑히기도 했다. 당시 연세대 멤버는 최병식의 선배로 유재학, 정덕화, 한만성, 동기 강양택, 후배 유도훈, 신창남, 이호재, 정재근, 이상범 등으로, 최병식은 탄탄한 체구와 점프력을 바탕으로 한경기 20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등 맹활약하며 연세대를 매대회 4강권의 성적으로 이끌었다.[1]
2.2. 실업 및 프로 시절
1988-89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기아산업의 쌍돛대가 된 김유택-한기범에 골밑을 속절없이 털리며 패했던 현대전자로선 대학 No.1 센터 최병식을 스카웃하며 1989 시즌 권토중래를 노렸고, 실제로 최병식은 현대전자 입단첫해부터 주전으로 뛰며 '''1989-90 농구대잔치 신인상'''을 차지하는 등 맹활약했지만 현대는 1989-90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또한번 기아에 패하며 2년연속 준우승에 그친다.[2]
실업 2년차때 상무로 입대한 최병식은 1990-91 농구대잔치에서 , 이영주, 이훈재 등과 함께 상무의 돌풍을 이끌며 상무를 1차대회 준우승 및 최종성적 4위까지 올려놓았고, 본인은 '''농구대잔치 베스트 5'''에 이름을 올리며 커리어 최전성기를 달린다. 이후 최병식은 1991-92 농구대잔치 1차대회까지 마치고 제대하여 이영주(G, 180cm)와 함께 2차대회부터 현대전자에 합류하지만, 이충희, 이원우의 노쇠로 인해 4년연속 결승진출에 실패하고 3위에 그치고 만다.
이충희가 은퇴한 뒤 유도훈, 김지홍, 임근배 등과 함께 팀을 꿋꿋히 이끌어갔으나, 세대교체에 실패한 현대전자는 1993-94 농구대잔치 이후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대학돌풍세의 주요 희생양이 되어버렸고 연세대, 고려대 오빠들이 가볍게 격파할 수 있는 1, 2단계 적(;;) 수준일 뿐이었다. 빅맨치고 단신(193cm)이었으나 힘과 탄력을 무기로 버텨왔던 최병식은 더 힘세고(현주엽) 더 높이 뛰고(전희철) 더 잘하는(서장훈) 대학센터들과의 맞대결에서 경쟁력이 전혀 없는 안습한 모습만 보이게 되었고, 어느새 "파워-탄력을 겸비한 빅맨"에서 "노마크 중거리슛도 못넣는 나이든[3] 꼬마빅맨"이 되고 말았다.
이후 최병식은 1994-95 농구대잔치(현대전자 5위)를 마지막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에서 조용히 은퇴하는데, 최병식이 은퇴한 후 현대전자는 제대로 몰락하여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는 8강 플레이오프에도 오르지 못했다.
당시 선수들 중 특이하게 자유투를 뱅크슛으로 쏘던 선수[4] 였는데, 어깨가 워낙 넓다보니 슛폼이 다소 특이했다.
2.3. 국가대표
연세대 졸업 직후 1989년 베이징 ABC 대표팀에 뽑혀 1991년 고베 ABC까지 3년간 대표팀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대표팀 구성이 단신에 각자 개인 공격력이 뛰어난 선수들(허재-김현준-이충희-김유택 등)로 구성되면서 센터 김유택의 파트너로서 몸싸움 등 굳은 일을 담당하는 블루워커였으나, 일단 빅맨치고 높이가 워낙 낮아 큰 기여는 하지 못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개인 사업 을 하다가, 명지고, 울산 무룡고 코치를 거쳐 2004년 연세대-현대전자 선배인 이문규 감독의 부름으로 WKBL 천안 국민은행 세이버스의 코치로 부임하였다.
2006 겨울리그 플레이오프 탈락 후 이문규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사퇴하고 코치였던 최병식이 감독직을 물려받게 된다. 코치로 현대전자 시절 후배이자 스타 플레이어 출신인 조성원을 코치로 두게 된다.
감독 부임 첫 대회였던 2006 여름리그에서 팀을 챔피언결정전 준우승까지 올려놓으며 초보감독 돌풍을 일으키지만... 이후 2007 겨울리그 및 2007-08 시즌 팀의 부진 속에 자진사퇴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조성원은 감독대행을 맡은 뒤 1년뒤 승진했으나 선배와 함께 자진사퇴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2009년 모교인 마산고 코치로 부임하여 박재한(G, 중앙대-KGC), 김광철(G, 동국대-모비스-삼성), 조의태(F/C 중앙대-오리온), 이성순(F, 경희대-미지명) 등을 키워냈으며, 2012년 8월 대통령기에서는 마산고에 23년만의 전국대회 우승[5] 을 안겼고, 2013년 신입생 "리바운드요정" 박정현(204cm)의 활약속에 2차례 전국대회(춘계, 대통령기)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마산고 제 2의 전성기를 열었다.
[1] 당시 대학농구는 허동택+한기범+강정수의 중앙대가 독보적 1강이고 고려대, 한양대, 연세대가 서로 맞물리던 시절이었다.[2] 사실 애초부터 김유택(197cm)-한기범(207cm) 콤비와 최병식(193cm)-김성욱(195cm)-이호근(193cm)의 골밑대결은 높이에서나 기량에서나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기아에서나 대표팀에서의 김유택-한기범은 전방위 공격옵션이자 최고의 수비수들이었지만, 최병식과 김성욱 등은 그저 팀의 에이스 이충희, 이원우가 편하게 슛을 던질수 있게 스크린하고 리바운드하던 블루워커 역할을 위주로 하던 선수들이었다. 더구나 기아에는 무려 허재가 있었으니.. 85-86 시즌 NBA 휴스턴 로켓츠의 원조 트윈타워 하킴 올라주원-랄프 샘슨에 마이클 조던이 같이 뛰었다고 보면 된다. [3] 아직 서른도 안되었지만, 애초부터 워낙 노안이었다.[4] 뱅크슛 자유투를 구사했던 또 다른 선수로는 문경은이 있다.[5] 1989년 협회장기에서 김영만(前 동부 감독)의 활약으로 우승한 게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