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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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文欽
1892년[1] 9월 1일 ~ 1976년 3월 1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2]#, 자는 윤명(允明), 호는 벽초(碧樵).
2. 생애
1892년 경상도 춘양현(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서 농부 정환규(鄭煥逵)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의병활동에 참여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으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23년 만주 지린성 용정현 동흥(東興)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만주 용정에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시베리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연락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다가 일제강점기 말 귀국하여 함경북도 경흥군 금융조합장을 지냈다.#
8.15 광복 직후에는 고향에서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지국을 얼마간 경영했으며, 청년운동에 가담했다가 곧 정계에 투신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후보로 경상북도 봉화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동청년단 배중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대 국회에서 국회 징계자격위원장을 지냈으며, 1952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12월 4일 이기붕 국회의장 대신 임시 국회의장직을 수행하였으며, 전원위원장 및 자유당 감찰실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6.25 전쟁 등으로 중단됐던 영주역-봉화역 구간에서 태백시 철암역 구간을 연결하는 철도 공사가 재개되었는데, 철도 공사가 90% 이상 진전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 당시 국회의원 정문흠이 영암선 철도가 굳이 자신의 고향인 춘양면을 지나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통부 철도국에 압력을 넣어 춘양면 면소재지인 의양리에 춘양역을 설치하여 이곳을 지나가도록 만들었다는 뒷이야기가 전한다. 이 일화는 속담 억지춘양의 한 유래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1955년 자유당 경상북도당 위원장이 되었으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농민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9년에는 67세의 나이로 최고령 자유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를 이유로 구속, 수감되었다. 그리고 1961년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을 상실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1년 말, 형 면제 조치로 석방되었다.
1966년 이재학 등과 자유당을 재건하여 정책심의회 회장 및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