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부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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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흥대원군의 정부인이자 선조의 친어머니이다. 세종, 세조 대의 재상이었던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증손녀이며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세호의 딸이다.[1]
2. 생애
1522년(중종 17년) 9월 23일에[2] 태어났다. 중종의 서9남인 덕흥군 이초와 혼인한 후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봉해졌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차남은 하릉군 이린(河陵君 李鏻), 그리고 셋째가 훗날 선조가 되는 하성군 이균(河城君 李鈞)이다. 딸은 이명순(李明順)이며 광주 안씨 안황과 혼인했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4일에[3] 세상을 떠났다.
3. 사후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있다. 덕흥대원군의 묘와 쌍분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종[4] 역시 승하하면서 그의 3남 하성군 이균이 선조로 즉위했다. 1569년(선조 2년) 선조는 자신의 친부모인[5] 덕흥군과 하동군부인을 송나라 복왕의 예를 따라[6] 각각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추증했다. 그리고 신위는 불천지위[7] 가 되어 도정궁(덕흥대원군의 사저) 후원에 있는 사당 덕흥궁에 모셔져있다가 1950년대에 덕흥대원군 묘 근처에 있는 덕릉마을 내 덕릉재실로 이전했다. 제사는 장남 하원군과 그의 장손들이 모셨으며, 현재도 매년 기일마다 제사를 지낸다.
4. 호칭 관련
사실 하동부대부인은 정식으로 부대부인 작호를 받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 때까지 그를 부대부인으로 일컬은 기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를 처음 부대부인으로 칭한 것은 1724년(영조 즉위년)이었다. 그 해 9월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존봉하려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영조에게 “선조 때에 덕흥군을 높여서 ‘대원군’이라고 하였고, 군부인을 ‘부대부인’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했다.#
저 말은 1722년(경종 2년)에 부제학 이명언이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건의할 때 인용한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그 내용은 "선조 때 덕흥대원군을 추숭했을 때, 이황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이었다. 그래서 희빈 장씨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란 존호를 받았다.[8] 저 때 저 자리에 이진검도 같이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 그 이전에 대원군의 부인을 부대부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고, 위에 적은 이명언의 말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즉, 이진검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이진검의 단순 실수라고 보기도 하고 일부러 그랬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한 나라의 예조판서가 왕에게 옛날 일을 말하는데 내용을 제대로 확인 안 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걸 감안하면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그랬다는 설에 무게가 더 실린다.#
정말 고의적으로 그랬다면,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옥산부대빈으로 추증받은 희빈 장씨의 작호가 혹시라도 강등당할까봐 틀린 고사를 언급하면서까지 작호를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진검은 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으며 신임사화 때는 노론 축출에 가담했었던 소론 강경파였다.[9] 그래서 저 때 이후에도 한동안은 하동부부인으로 계속 불렸다.
그러다 1734년(영조 10년)에 다시 하동부대부인이란 호칭이 나왔으며# 이후에는 하동부부인과 하동부대부인을 섞어서 불렀다. 아마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 자를 더할 수 있다는 1432년(세종 14년)의 법령과#, 조선 전기에 이미 부대부인 작호를 받은 사람이 있었던 전례를 볼 때[10] , 딴 사람도 아니고 왕의 생모인 하동부부인을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함에도, 부부인으로만 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인 듯 하다.#
이후 방계 종친으로 왕이 된 철종이 즉위한 뒤에 자신의 적모와 생모를 공식적으로 부대부인으로 추증하면서 부대부인은 대원군의 부인을 일컫는 호칭이 되었다.# 이 때부터 하동부부인도 정식으로 하동부대부인으로 불렸다.#
[1] 정세호의 외할머니, 하동부대부인 정씨에겐 진외증조모가 되는 인물이 다름아닌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이다. 안맹담과 정의공주의 딸이 정인지의 막내아들인 정상조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정세호이고 그의 딸이 본문의 인물이다. 이렇게 되면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와는 항렬상으론 9촌이 된다.[2] 음력 9월 4일.[3] 음력 5월 18일.[4] 남편 덕흥대원군의 이복동생.[5] 선조는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덕흥군과 하동군부인은 법적인 부모가 아니었다.[6] 나름 의미가 있어서 저 예시를 적었다. 친아버지를 다른 일반 왕족들과 다르게 높여 대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 하지만 전례없는 일이라 무작정 예우하긴 좀 그랬고, 이에 명분거리로 쓰기 위해 중국의 비슷한 사례를 찾아낸 것이다. 실제로 왕들이 뭘 하려는데 신하들이 반대할 경우, 중국의 예를 들먹이면 반발이 무마된 적이 많았다.[7] 몇 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고 제사를 받는 신위.[8] 옥산은 희빈 장씨의 본관인 인동의 별칭이다.[9] 그리고 저 말을 하고 1년도 채 못 되어 강진으로 유배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10] 세조의 장모(정희왕후의 생모) 흥녕부대부인 이씨, 수양대군(세조)의 부인 낙랑부대부인 윤씨(훗날 정희왕후),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