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요동정벌

 

1. 개요
2. 배경
2.1. 명의 사정
2.2. 표전문 사건
2.3. 조선의 사정
3. 전쟁 준비
3.1. 명의 준비
3.2. 조선의 준비
4. 종결
5. 실현 가능성
5.1. 요동정벌 실행자체 가능성
5.2. 요동정벌 성공 가능성
6.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조선 태조 이성계정도전이 요동, 만주 획득을 위해서 계획한 3번째 요동정벌 계획. 계획과 준비만 하고 미수로 끝난다.

2. 배경


조선은 이성계가 제2차 요동정벌에 반대해서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획득 후 자신과 협력하는 신진사대부와 협력해서 세웠다. 기본적으로 친명 정권이었고 요동, 만주 지역에 대한 명의 우위와 영유권을 인정했다. 이 때문에 넘어오는 사람이 있어도 되돌려 보내는 등 관련되지 않으려고 했다. 명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가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고려와 전쟁을 유발했던 철령위 설치에 대해서 철회하면서 우호 관계를 맺는다. 고려말 명과 충돌로 빚어진 양국 관계는 이렇게 개선이 되고 안정이 되어갔다.

2.1. 명의 사정


조선 건국 후 관계 개선으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던 명과 관계는 명태조 홍무제가 갑자기 조선에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이성계부터가 요동정벌에 반대하면서 쿠데타까지 했고, 고려 때 문제인 철령위 설치 문제도 조용하면서 조선은 딱히 명과 대립지을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의심이 병적인 홍무제가 보기에 고려 왕씨만큼이나 조선의 이성계와 정도전도 위협적이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위협적인 대상으로 여겼는지 몰라도 홍무제의 적대감은 노골적이었다.
명의 골치거리였던 나하추를 가지고 놀던 상승장군 이성계의 무용과 고조선-삼한(고구려, 백제,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요동과 만주에 대한 영유권에 대한 권리, 정도전의 중앙집권화 및 진도(진법)을 연습하는 등의 군사력 강화로 인한 불안감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2.2. 표전문 사건


양국 관계가 적대적인 계기가 된 건 표전문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과 황태후, 황후, 황태자에게 올리는 전문을 합쳐서 표전문으로 부른다. 즉 외교 문서로, 명은 이 표전문을 트집잡아서 문제제기를 한다.
1395년 태조 4년에 예문춘추관태학사 정총을 사신으로 파견해서 고명[1]과 인신[2]을 청했다. 그런데 홍무제는 표문의 표현한 언사가 불손하다며 정총을 억류한다. 이듬해에 정월에 판문하부사 유구, 한성부윤 정신의를 사신으로 다시 파견했는데 또 표문을 문제삼아서 두 사람을 억류한다. 그리고 표전문을 지은 사람을 보내라고 한다.
문제는 표전문 지은이 중에는 개국공신이자 조선 2인자이자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 정도전이 있었다. 표문은 정탁이 쓰고 정도전이 교정했고 전문은 김약항이 썻는데, 정탁은 아프다고 피했고 정도전은 그 위치상 가지 않고 김약항만 갔다가 억류되었다. 그리고 명은 정탁과 정도전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이성계는 그 요구를 무시했고 명은 사신을 계속 보내서 정도전을 보낼 것은 요구했다. 겉으로는 외교적 결례에 대한 문제였지만 점점 홍무제의 목표가 정도전인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이게 노골적이 된 것이 권근의 사신 파견이었다.
명이 계속 표전문 책임자를 보내라(=정도전을 보내라)는 요구에 이성계는 난감한 상태였다. 이 때 권근이 자원하여 자기가 표문작성 책임을 지고 명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지금까지 홍무제의 행동을 볼 때 억류는 당연하고 돌아오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못 보내고 홍무제의 압박에 전전긍긍하던 이성계는 기뻐하면서도 권근에게 미안해하며 노자까지 두득하게 주면서 배웅했다. 이렇게 권근은 '''하륜'''과 함께 명으로 떠났다.
명에 도착한 권근은 역시나 억류가 되는가 싶었는데, 말이 억류고 그냥 사신 대접을 잘 받으면서 잘 지낸다. 명에 도착하자 홍무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홍무제가 내려준 시제로 즉석에서 24수의 시를 짓고 홍무제 이 24수의 응제시를 보고 감탄하면서 마음을 풀고 시 3수를 하사한다. 이후에 명에서 학사들과 교류하고 홍무제에게 융슝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나중에는 권근과 함께 억류되었던 사신들을 풀어주면서 권근이 마음에 들어서 풀어주는 거니 권근에게 감사하라는 하는 등 권근에 대한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까지 보면 조국의 위기 속에서 충정을 발휘해서 목숨걸고 호랑굴에 들어가서 놀라운 문재(文材)로 홍무제의 마음을 돌린 미담이지만... 뒷배경을 살피면 단순하지가 않았다.
표전문 작성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하고 정도전은 표문 교정만 했지만, 상국인 명에게 왕으로 인정을 요구하기 보내는 중요한 외교 문서였다. 기본적으로 조선을 좌지우지 하던 정도전이 총책임자였고 그의 사람들이 작성하고 사신 역시 정도전 일파에서 나왔다. 즉 조선의 중심에 선 정도전와 그의 동지들을 중심으로 명의 외교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의 표전문 내용을 문제삼고 사신을 억류한 것은 표전문을 작성한 정도전과 정도전 파벌의 대명 외교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묻는다는 의미였다.
반대로 권근은 1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 세력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딸이 권근 아들에게 시집까지 가서 사돈이 되었다. 무엇보다 권근과 함께한 사람은 다름 아닌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 하륜이었다. 그리고 홍무제가 문장을 즐겨서 단순히 시문이나 읅으면서 권근과 즐긴 것이 아니었다. 홍무제는 사소한 글귀 하나까지 시비를 걸어서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외교 문서에 표현이 불손하다고 난리를 치다가 시를 보고 마음이 풀린다? 시를 트집을 잡지 않았다는 건 권근의 외교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이방원에게 우호적인 메세지였고 이방원과 그 파벌을 외교적 동반자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2.3. 조선의 사정


홍무제의 까칠한 행동에 조선은 당황했다. 처음에 표전문을 문제 삼았을 때만 해도 성질 더러운 황제의 나쁜 버릇이 또 시작된 것으로 보였지만 사신 억류와 정도전 소환 요구로 단순한 몽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점점 노골적으로 정도전을 노리는 게 확실하게 되자 조선은 난감한 상태가 된다. 정도전은 단순한 개국공신이 아니라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 조선의 2인자이자 거의 공동 통치자라고 할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보내는 믿음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막내 의안대군을 세자로 삼은 상황에서 정도전은 어린 세자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정도전을 명에 보냈는데 화를 당하면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리게 되는 문제였다. 정치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이성계는 정도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명의 압박은 점점 심해지고 명의 외교적 압박에 이성계조차 인내심의 고갈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안군 파벌은 정도전을 보내자고 하고 정도전 파벌은 이에 반대하면서 맞선다. 이런 와중에 권근과 하륜이 자원해서 명에 가서 표전문 문제를 해결하고 오자 정도전의 위기 의식이 강해진다. 단순하게 외교 사절로 문제 해결만 했다해도 그 공이 적지 않았는데 홍무제는 노골적으로 권근을 우대했다. 권근이 마음에 들어서 기존의 사신들의 죄를 사하고 보내니 권근에게 감사하라는 것 하나로도 정도전 파벌은 권근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였다.
귀환 전 알현에서 사신을 접견한 홍무제는 대단히 분노하게 된다. 홍무제는 귀환 선물로 옷을 하사하면서 그 옷을 입고 오라고 분부한다. 그런데 당시에 조선에서 현비(신덕왕후)가 죽어서 국상 기간이었다. 기존에 억류되었던 정총은 현비를 추모하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권근은 홍무제가 하사한 옷을 입었다. 당연히 홍무제는 분노하면서 권근을 제외한 나머지의 귀환을 취소시키고 권근만 귀환한다.
무슨 깡으로 황명을 어겼나 싶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정치적인 행위였다. 공개적으로 홍무제는 권근의 공으로 너희들의 죄를 사한다고 했다. 당연히 권근에게 감사하라는 의미이며 이는 정도전 파벌에게 이방원 파벌에게 숙이고 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비는 세자의 친모이며 정도전은 세자의 후견인이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상복을 입은 건 이성계-현비-정도전으로 이루어진 세자파에 대한 충정을 나타내면서 정도전 파벌의 유대감을 확인하고, 권근의 덕을 볼 생각이 없으니 좆까라 라는 의미였다. 좀 더 들어가면 '당신이 중원 천자이지만 별개로 우리는 조선의 신하, 그러니 조선의 국모를 추모하는 게 당신 명령보다 우선' 이라는 의미에서 조선 왕인 이성계의 의지에 반하는 정도전 대신에 이방원을 지지하는 일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렇게 권근만 귀환했지만 어째든 명과 문제되었던 표전문 문제는 권근의 공으로 해결되었다. 홍무제는 표문 문제 해결 후 화해의 제스처로 양국간 혼사를 추친한다. 이에 화답하는 의미에서 가마인 금안교를 선물로 보냈는데 홍무제가 안장을 직접보고 안장에 하늘 천(天)가 꺼꾸로 적혀있는 것을 보고 "안장은 사람이 타는 건데 하늘이란 글자를 써서 하늘(=천자)을 탄다고 하는 거 날 모욕하는 거냐?" 라면서 분노한다. 당연히 또 조선은 해명하는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더럽지만 황제의 진상질이니 어쩌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혀야 했다.
이러던 중 정도전은 권근을 기존에 억류되었던 사람들은 못 돌아왔는데 홀로 돌아왔다는 문제로 탄핵한다. 권근의 공이 커지자 반 정도전 파벌을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성계부터 자원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명에 가서 문제를 해결한 권근의 공을 높이 평가하며 탄핵을 무시한다. 여기에 권근이 금을 가지고 있는데 분명히 황제에게 받은 것이니 국문하자고까지는 하는데 이 금은 이성계가 노자로 준 것이었다(...). 이러니 이성계부터 반응이 시원찮은 굉장히 무리수인 탄핵이었고 정도전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지지만 잃어버린다.
표전문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정도전 파벌인 사신들은 억류돼서 귀환하지 못한 상황. 그리고 홍무제는 이방원을 지원하면서 정도전을 견제하려는 심사를 노골적으로 들어냈다. 성질 더러운 황제가 언제 어떤 트집을 잡아서 자기를 옭아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홍무제는 노골적으로 조선에 메세지를 보냈다. 정도전을 보내던가 아니면 전쟁을 하던가. 정도전 입장에서는 명에 가는 건 죽는 일이니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런 남은 건 전쟁 뿐.
이런 와중에 억류되었던 정총과 김약항 등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국 사신을 억류하고 죽이는 것부터가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조선은 억류된 사람들을 봉군하는 등 위신의 높이고 지원하면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국이라도 도를 넘는 일이고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명이 조선을 모욕하는 행동으로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 홍무제 주원장은 가난뱅이 중에서 맨손으로 대제국을 세웠다지만 태조 이성계 역시 시골 무장으로 시작해서 여진족과 고려군을 통솔하면서 군공 쌓으며 왕이 된 야전 지휘관이었다. 더구나 고구려의 영역인 동북면에서 나고 자라고 여진족까지 부하로 둔 몸.

3. 전쟁 준비



3.1. 명의 준비


명은 엄청난 외교적 압박과 이성계에 대한 모욕과 정도전 보내기와 전쟁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행동 등 위기수위를 높였지만 정작 전쟁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불안 요소인 정도전을 끌고오고 조선을 길들이는 게 목적이었다. 본인이 엄청난 현실주의자였던 홍무제는 멀리 떨어진 영토는 정복해도 손실만 심하고 통치에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얻는 이익이 적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조선에 보낸 글에 한과 당의 군대와 비교해서 둘은 수전에 미숙해서 졌지만 내 군대는 수전에도 전문가이니 과거의 일 믿고 덤비면 코피 터진다고 협박하면서도[3] 정작 조선 정벌하자는 의견은 묵살한다. 이제 막 천하를 통일하고 마침내 원을 박살내서 대내외적으로 안정되었는데 굳이 백성들을 힘들게 하면서 전쟁하고 싶지 않다는 게 홍무제의 생각이었다. 홍무제는 전쟁할 생각도 없으면서 블러핑을 치고 있었던 것.
그럼 그토록 무례하고 위기감을 조성하는 행동은 무엇이냐고 할 수 있는데 홍무제는 원래 성질머리가 더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실권자이자 이성계의 영혼의 동지인 정도전을 보내게 하려면 그 정도 압박은 필요하기도 했다. 설마 조선이 눈이 돌아가서 진짜로 한 판 뜨려고 할 생각은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을 터였다.
본인이 이미 한과 당의 사례를 들었는데, 보면 알겠지만 중국 왕조의 만주와 한반도 공략의 역사는 실패의 연속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나라는 힘들게 고조선을 멸망시켰는데 한사군낙랑군 빼고는 빠르게 GG치고 나갔고 그나마 남은 낙랑군도 반독립세력으로 있다가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쓸려버렸다. 수나라는 그 부가 엄청나서 대운하 같은 대공사도 할 정도의 국력을 가졌음에도 100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원정은 실패하고 지속적인 전쟁의 결과 국가에 망조가 들었다. 당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군주이자 뛰어난 야전지휘관인 당태종이 친정까지하고 수나라 때 난공불락의 요동성 함락과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야전군을 패배시키는 성과를 올리고도 안시성에 막혀서 실패했다.
이후에 당은 요동 방어선을 장기간 공략하면서 무력화 + 신라 원군으로 협공 + 고구려 내분까지 이용해서 겨우 멸망시켰지만 지방 통제에 실패해서 고구려 땅에 발해가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반도 남부에는 웅진도독부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면서 지배력을 발휘하려고 했지만 나당전쟁의 패배로 손을 때야했다. 고려 때는 거란의 요는 3차례나 전쟁을 걸었다가 결국은 귀주에서 정예병만 몽땅 날려버리고 국력만 약해졌고, 여진의 금은 고려와 9성을 놓고 전쟁을 겪은 후 정치적 우위를 인정받자 아예 고려를 건들 생각도 안했다. 세계를 정복하던 몽골도 방치했다지만 30년을 버텼고 초기에 귀주성은 함락되지 않았으며 원정군 사령관 살리타이가 유시를 맞고 전사하는 낭패를 겪었다.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 국가는 공략하려면 장기간의 준비와 막대한 물자와 병력은 소모하면서 막상 결과물은 시원치 않거나 아무 것도 못 건지는 경우가 많았다. 빈민 출신으로 전쟁이 백성을 고달프게 한다는 걸 알고 피하려는 홍무제 입장에서 장기간 대군을 동원해서 정벌해도 남는 것도 없고 이겨봤자 통치만 힘든 땅에 원정은 꺼렸다. 이겨도 본전치기인데 지기라도 하면? 홍무제가 언급은 안했지만 당 이전에 중원 통일 후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그 여파로 나라가 망한 수의 전례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막 중원을 통일하고 어수선한 상태에서 홍무제는 건드려서 재미볼 것도 없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조선 원정에 흥미를 가지기 않았다.

3.2. 조선의 준비


명의 압박에 정도전은 권근 탄핵으로 우선 권근 뒤에 있는 정안군 이방원 세력을 견제하려했지만 실패한다. 이렇게 되자 남은 건 명과 전쟁 뿐이었다. 다만 자기 생명 때문에 명과 싸운다는 명분을 들 수 없었기 때문에 정도전이 선택한 패는 요동정벌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명분이자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거창한 명분이었고 고려의 뒤를 이은만큼 그 나름대로 명분이야 있었지만, 태조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했었고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 건국을 시작했다. 당연히 이성계의 참모인 정도전도 한 몫했다. 위화도 회군까지도 4불가론으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넘길 수 있겠는데, 그 직후에 친명으로 국가 외교기조를 바꾸고 일부러 되도 않는 후보를 준비해가며 명에게 국호 선택을 요청하는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심지어 고려사에 대한 곡필까지 서슴치 않았을 정도로 명에 대해 제후국의 예로 납작 엎드리던 것이 이성계와 정도전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삼한의 고토 수복을 명분으로 전쟁을 준비하니 누가봐도 속셈이 뻔했다.
나름 고구려 땅에 자리잡은 호족으로 고구려 계승을 가지고 이름도 고구려와 같은 고려로 짓고 고토 회복을 부르짓던 왕건과 달리 이성계는 전주 이씨 가문이 남쪽에 있다가 정치적 알력 때문에 북쪽에 터잡은 이주민 집안이라서 딱히 고구려 후예라는식의 승계 의식도 없었다. 눈치보면서 고려 왕위 양위받고는 슬그머니 조선으로 바꾸는 등 역사의식과 별개로 정치적 승계 의지는 없었다. 이런데 갑자기 고토 회복과 자존심 회복을 내세워서 전쟁하자니 동의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준비하면서 정치적으로 지지를 모으고 군대를 키우기 시작한다. 일단 이성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가면서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인 군사력 강화의 일환으로 그동안 실시한 진도 연습과 훈련을 독려하면서 중앙집권과 통일된 지휘체계를 만들다. 또한 원래 요동에서 사람이 넘어오면 다시 돌려보냈는데 이 시기에는 의복과 음식을 주면서 받아들인다. 군대 강화를 위해서는 각 대신과 종친에게 나누어져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 왕의 명령을 듣는 중앙군으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사병을 가진 세력들의 반발이 엄청났다. 이미 진도 연습 등으로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추면서 중앙에 병권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나마 있던 병권을 전부 가져가겠다는 행동에 불만을 품는다. 더구나 당시에 막내 의안대군을 세자로 삼으면서 이복형제들은 숙청의 가능성 때문에 불안감이 커진 상황에서 그나마 있던 군대까지 빼앗기니 이대로 가다가는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높이기 충분했다.
정치적으로도 조준, 김사형 등은 정도전의 강경한 자세와 별개로 요동정벌의 불가함을 계속 역설했고 이성계도 조준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등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 반대가 컸다. 사실상 정치적으로 요동정벌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은 목숨이 달린 정도전 정도고 이성계야 정도전을 믿으니 밀어주기는 했지만 주변에 반대가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강행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그 당시 이성계가 자주 아프면서 군사 행동에 나서기 더욱 어렵게 되었다.

4. 종결


전쟁으로 치닫던 상황 너무나 순식간 정리된다. 정도전이 열심히 요동정벌을 주장하면서 진법 훈련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던 와중에 세력을 모은 정안군 이방원은 이성계가 병환으로 자리보전 하는 순간을 노리고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그 일파를 모조리 제거한다. 정도전 죽은 다음 해에 조선에 대한 견제의식으로 진상을 부리던 홍무제도 죽고 황손 건문제가 새 황제가 되면서 긴장감은 사라지고 우호관계가 형성된다. 거기다 개인적으로 만남이 있던 영락제와 태종 이방원이 각각 즉위하면서 우호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는 일도 없어졌다. 보면 알겠지만 정도전이 무리 안하고 1~2년만 더 참았으면 홍무제가 죽고 해결될 일이었다. 당시야 저 진상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몰랐으니 절박한 정도전이 취할 수 있는 일이야 하나 뿐이었지만... ...

5. 실현 가능성




5.1. 요동정벌 실행자체 가능성


요동정벌이 과연 시작이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장애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하며 내세운 4불가론이 고스란히 당시에도 적용되었다. 당장 고려 말 고려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은 왜구는 아직도 해안가를 침범하고 있어서 국가적인 문제였다. 세종 때까지 왜구가 기승을 부려서 세종은 해안가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다가 상왕 태종이 주관해서 대마도 정벌까지 해서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왜구를 확실히 족칠 정도의 군사력을 준비하는데 세종 즉위년까지의 안정기가 필요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남쪽에 덤비는 왜구는 냅두고 원정군을 편성하는 건 비현실적이었다. 최소한 박위가 한 것 같은 대마도 원정 등으로 남쪽을 안전시키는데 우선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이성계정도전 그리고 정도전을 지지하는 남은 정도를 제외하면 요동정벌에 찬성하는 여론은 강하지 않았다.[4] 그럼 반대파를 전부 무시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원정군은 누가 이끌고 후방은 누가 책임지는냐는 걸림돌이 생긴다. 원정군의 중요성과 경험과 군사적 능력,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볼 때 최고의 선택은 이성계의 친정과 정도전의 후방 보좌가 이상적이었다. 유방-소하, 조조-순욱과 같은 예에서 보듯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시너지 효과도 높았다. 하지만 요동정벌은 여론도 안 좋았고 정안군을 중심으로 하는 반 정도전 파벌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이성계가 정도전만 내버려두고 원정을 가기는 불안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성계도 이미 나이가 60세가 넘었고 당시에 병도 자주 앓았다. 건강해도 군대를 이끌기 어렵고 아직 어리고 배경도 미약한 세자를 두고 멀리 나갔다가 변이라도 생기면 살벌한 이복형제들에게 둘려싸인 세자의 지위만 위태롭다. 요동정벌로 정도전에 대한 여론도 안 좋은데 이성계가 없고 정도전과 세자만 둘 수 없었다.[5]
여기에 이성계가 후방 지휘를 한다면 누구에게 원정군을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성계 본인이 요동 원정군을 이끌고 가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경력자였다. 이번 요동정벌도 똑같이 반대여론을 등에 업고 나서는 행복한 군인이 또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정도전이 야전지휘를 한다? 백면서생의 정도전은 진도훈련과 같은 군사적 지식과 재능은 있었지만 야전 지휘는 다른 문제다. 제갈량 같은 군재를 보이지 않는 이상에 패망은 확실했고, 실제로도 조괄이라는 이론만 빠삭하고 실전에 무지한 사례가 있었다. 야전 지휘관으로 잔뼈가 굵은 이성계가 아무리 정도전을 신임한다 해도 국내행정이 아닌 전장 지휘를 맡기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성계를 제외하고 그 누가 중대한 원정을 지휘할 군사적 재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상승장군인 이성계도 힘든 일인데 가능한 인물이 있는가? 그리고 누군가에게 맡기더라도 불안요소는 결국은 남았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친을 붙이는 게 제일 효과적인데, 만약에 원정군에 따라간 종친이 공을 세우고 군심을 모아서 왕위를 노린다면? 정종 이방과처럼 우직하고 군사적 능력도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있지만 이방간, 이방원 같은 야심가는? 그렇다고 이방과만 보내야 하는가? 대병력을 지휘하려면 야전지휘관이 더 필요한데 종친을 더 보내야 맞지 않는가? 이미 출정은 고사하고 진도강습조차 사병을 빼앗겨 이 가는 소리가 도성에 울려퍼지는 종친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던 것이 당시 요동정벌 준비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정도전의 친구들조차도 사병혁파가 아닌 요동정벌 자체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정황이 보이는데, 태조 7년 8월의 진도강습 태만 처벌대상자 명단을 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은, 이제, 이방번, 유만수, 이무, 이지, 정신의 같은 친정도전파 인사들이 잔뜩 포함되어 있다. 특히 남은은 정도전과 함께 대놓고 조준 등 반대파를 막으러 다녔던 사람인데도 강습태만으로 처벌받을 지경이었으니[6] 나름 추진세력이라는 이들부터가 이모양인데 반대파는 말 할 것도 없었다.
고려하면 할수록 정치적으로 한계가 있고 세자의 지위가 불안하고 반대파가 강성한 상황에서 소수만으로 전쟁을 강행하기에는 무리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다 김사형의 말마따나 도성 공역으로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린지도 얼마 안 되는데다가 조준의 말대로 대외적으로 왜구의 침입으로 내부적으로 어수선하고 피해가 속출하는 와중에 전쟁을 벌이는 건 힘들었다. 제일 중요한 이성계는 와병 중이어서 정치적으로 안정도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실록을 보면 문제의 태조 7년은 툭하면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는 악천후가 이어져 몇번이나 법회를 열어댔고, 심지어 태조 본인도 우박이 내리고 강풍이 부는 날 무리하게 흥천사에 거둥했다가 무인정사의 빌미가 되는 병이 들었을 정도다. 날씨가 이러면 작황이 어떨지야 뻔하고, 이쯤되면 요동출병이 아니라 당장 유민진휼부터 고민해야 정상이다. 군량미가 없는데 무슨수로 방어전도 아니고 원정을 나간단 말인가?
굳이 태조 7년에 출병할 필요 없이 병력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출병하면 된다고 주장할수도 있으나, 병력을 소집하여 훈련시키는 자체가 막대한 재원을 소모하는 일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노동력은 곧 생산력으로 직결되는데 보인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태종시기 정병:보인의 비율은 1:3이었으니 이 정병을 모두 소집하면 15~60세 양인남성의 1/4이 병영에 꽁꽁 묶인다는 소리다. 농한기에야 그렇다 쳐도 농번기에 이랬다간 난리난다.[7] 하지만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듯이 요동 주둔병력만 10만에 그 뒤에는 주체가 이끄는 최정예 연군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이 정도의 병력이 있어야 뭐라도 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게다가 방어전도 아니고 공격전이니 병력들의 훈련도도 일정수준 챙겨야 했고 그러자면 농한기에만 반짝 소집하는것으로는 부족했다. 물론 정난의 변때 공격한다고 가정하면 요동군은 앞 뒤로 연왕의 군대와 조선의 군대에 협공당하는 셈이니 조선측이 매우 유리해지기는 하지만 역으로 이탓에 요동군이 연왕측에 투항 할 가능성 또한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연왕이 조선과 상대할테니 꿀빠는건 건문제지 조선이 아니다. 또 어느쪽이 이기더라도 명나라의 내전이 끝난 뒤 그 후폭풍이 상당할 것이다.
이렇다보니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진심으로 요동으로 정벌하는 게 아니라 명의 압박으로 불안해진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행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명의 요구를 빌미로 정도전을 어떻게든 실각시키려는 세력에 대항해서 명과 전쟁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실각의 빌미인 명의 요구를 차단하고(전쟁 상대의 말을 들어줄 필요는 없으니) 전쟁을 상황에서 국가적 단결을 촉구하고 반대파를 누르고, 진법 훈련과 군사력 강화를 이유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을 회수해서 위협요소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일 뿐 실제로 싸울 생각은 없는 전형적인 정치인의 위기 조성으로 돌파하는 방법이라는 것. 그러나 이건 이것대로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차라리 진짜 출병이면 요동 영지나 군공이라는 떡고물로 온건파 종친들을 회유할 가능성이라도 있지, 출병이 없다면 종친들로써는 아예 어떤 떡고물도 없이 그냥 눈 뜨고 자기 세력기반만 뺏기는 꼴이 된다.
다만 준비하고서 얼마 안돼서 정도전과 일파가 숙청되고 중국도 황제가 교체되는 등 전쟁을 준비한 시간이 길지는 않고 반대도 심하다보니 실제로 어느 선까지 나아갈 지 세부적인 전쟁 계획은 어떻게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5.2. 요동정벌 성공 가능성


요동정벌 자체가 성공하고 그 유지의 성공 가능성인데,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요동정벌의 가능성은 위화도 회군 문서를 보면 자세하게 분석되어 있는데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3차례의 요동정벌 시도 중에 1차 때는, 명은 나하추의 존재 요동과 만주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원은 북원이라는 형태로 건재했고 명의 군대를 격파할 만큼의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는 요동에 영향력 발휘할 수 있었고 고려 왕실이 물려받았던 심왕 작위로 법적 근거로 나름있었다. 명목상 원에게 다시 심왕 작위를 받으면서 공인받고 원-나하추-고려로 이어지는 동맹을 통해서 명을 견제하면서 요동에만 집중한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물론 이 때는 군량미를 태워먹어서 실패했고 무엇보다 왜구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집중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나마 무주공산인 이 지역에 통치력을 발휘할 기회였다.
하지만 나하추는 결국은 빈곤함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명에게 항복하고 여세를 몰아서 명은 기어코 원을 깨부수고 과거와 같은 부족제 국가로 되돌려버린다. 이 상황에서 명과 전쟁은 더 이상 명을 견제 가능한 세력없이 조선 혼자서 동맹없이 동북아에서 명과 싸워야 한다. 쓸만한 동맹인 타타르오이라트가 발흥할 때까지 수십년을 말이다.
결정적으로 3차 요동정벌 시기의 요동정벌은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3차 요동정벌을 긍정하는 이들은 주체의 영지가 요동까지이며 주체가 정난의 변 일으키면 요동이 텅텅 비는 줄 아는데, 요동은 주체의 영지가 아니며 중앙의 총병관이 따로 파견되어 있었다. 명사 철현전의 기록을 보면 정난의 변 당시 요동총병관 양문이 거느린 병력을 10만으로 적고 있다. 전근대 사서의 특성상 제대로 10만은 아닐지라도, 당시 요동은 연과 함께 북방 최전선이었으므로 요동총병관 산하에만 수만의 병력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반면 조선은 비슷한 시기 터졌던 조사의의 난 당시 반군과 관군을 합쳐 고작 5만 정도를 동원하는 데 그쳤다. 이 동원능력은 비슷하게 공요군 4만을 출정시킨 고려 말기와 비교해서도 크게 나을 게 없는 수준이었다. 요동주둔군의 병력이 이와 동수만 되어도 공세를 벌여야 하는 조선 입장에서는 답이 안 나오는 싸움이었다.
요동정벌은 어찌어찌 쥐어짜서 실행한다고 쳐도 문제가 여진족을 어떻게 포섭하고 통치하느냐의 문제가 있었다. 정주민인 조선이 반농반유목민에 오랑캐인 여진족을 어떻게 회유하고 통치할 수 있을까? 조선이 내내 여진족의 귀화를 장려하고 벼슬을 내리는 등 회유를 했지만 결국은 여진족은 조선 변경의 위협으로 존재하며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그 광대한 영역의 여진족 통치의 가능성이 있는가? 일단 이 지역에 명의 통치가 들어섰다는 점에서 명과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여진족은 직할통치가 아니라 자치를 누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홍무제 때는 통치 정비도 덜 되었고 여진족에 대한 본격적인 회유가 있지 않았다. 그 틈을 노리고 여진족에 대한 헤게모니를 선점해서 만주 일대에 지배력을 두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건 여진족의 향방인데 힘들게 땅따먹기 할 필요없이 원정이라는 형태로 무력 시위를 겸하면서 여진족의 복종을 받아내면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방식으로 명과 직접 충돌은 피하면서 여진족만 끌어들이면서 명의 지배력 약화를 노리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경우 가능성이 있는데 이성계가 가지는 여진족 내 위상이었다. 이성계의 기반인 동북면-동만주 일대에서 적지 않은 여진족 세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고 그중에는 누르하치의 조상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도 있었다. 동만주에서 이성계의 위상은 단순한 윗사람이 아니라 여진족의 지배자 수준이었다. 비록 만주 전역에 미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이성계에게 충성하는 동만주 여진족을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여진족을 회유한다면서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일이었다. 다른 여진족 입장에는 조선의 왕 이성계는 남이지만 동만주 여진족의 대추장 겸 조선왕 이성계라면 말이 달라진다. 거기다 이성계는 여진족을 이미 무력으로 제압했으며 군사적 경력도 화려한 인물로 여진족의 복종을 받아내기에 적당했다. 당이 북방 유목민에게는 천가한(카칸) 작위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비슷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8]
무엇보다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다. 아무 것도 없이 군사적 위용만 있다면 약탈 외 줄게 없지만 이성계는 조선의 생산물을 여진족에게 합법적으로 줄 수 있었다. 만주의 빈약한 생산력 때문에 여진족이 반농반목을 하면서 수시로 조선 땅을 약탈했고 나하추도 경제적 문제로 고려에게 지원을 받으려했고 결국은 식량 부족으로 명에게 투항했다. 훗날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해서 금을 세울 수 있던 원동력도 명과 교역으로 얻어진 부 덕분이었다.[9] 여진족 사이에서 높은 명성과 조선의 부를 결합한다면 영향력 확대는 가능했다. 동만주 여진족을 지원해서 그들을 중심으로 다른 여진을 포섭하거나 반항하면 때려잡으면 되니까. 결국은 누가 먼저 회유하고 유지하느냐의 문제였고 이성계는 분명히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비용을 들이면서 장기 주둔할 필요도 없고 방어를 위해서 군대를 따로 쓰는 대신에 회유한 여진족을 번병으로 삼으면서 명을 견제가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단기 원정으로 끝내고 왜구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밑작업만 해놓으면 여진족을 통해서 통치와 확대가 가능했다.
여진족은 유목민답게 전투력은 강했지만 통일되지 못한 상황과 경제적 빈곤으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만일 성공만 한다면 조선국왕을 중심으로 통일되고 조선의 부로 무장하고 배부른 강력한 여진족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 중국 왕조에게 악몽같은 고구려의 재현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쳐도 만주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여진족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한반도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홍무제도 알았지만 한반도에 발 들인 국가치고 재미본 국가가 없었다. 홍무제 본인부터 전쟁반대에 조선은 정벌하지 말라고 유훈까지 남겼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최상이 조건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저게 다 되려면 '''아주아주 운이 좋아야 한다'''. 그래도 고령의 이성계가 어떻게든 여진족을 회유하고 동만주는 확실히 먹고 들어간다고 치자. 다음 문제는 명과 만주 지역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할 수 있느냐 문제였다. 어떻게든 외교적으로 지배를 인정받는 게 최상이지만 홍무제 성격상 어림도 없었고, 홍무제가 요동정벌 준비 중에 죽었으니 그 틈을 노리고 어찌해서 황손 건문제 즉위와 이후 정난의 변이라는 명나라가 역대급 내전에 휩싸인 틈에 요동을 정복하고 요동에 영역 다지기를 하려고 한다고 쳐도 고작 4년이었다. 그 다음 황제 영락제는 확장에 소극적인 홍무제와 달리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펼치고 몽골까지 친정을 갈 정도였다. 영락제의 친정으로 몽골 세력은 약해져서 조선이 동맹 구할 길은 더 요원하고 그렇다고 몽골과 손잡고 명을 칠 수도 없었다.
거기다 영락제는 자기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를 하는데 이렇게 되면서 요동과 만주는 단순한 명의 변방이 아니라 수도 방위 및 안위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지역이 된다. 수도가 남경일 때야 중심지와 한참 떨어진 변경이니 명의 제후국을 차처하는 조선은 과거 고구려와 달리 적당히 합의할 가능성이 있지만 수도가 북경이 돼버리면 말이 달라진다. 실제 역사에서도 영락제는 만주 여진족을 회유하고 만주의 통치를 강화했다. 만약에 조선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명도 조선처럼 힘들게 군대를 파견할 것도 없이 그냥 돈으로 쳐바르면서 회유해버리면 된다. 당연히 명은 조선보다 수백배는 부유한 국가인데 돈빨로 경쟁이 붙으면 이성계의 오랜 영역이고 명과 거리가 있는 동만주는 건진다 하더라도 조선의 영역이 된지 불과 몇 년에 불과한 나머지 지방은 못 지킨다. 게다가 동만주를 어찌 건진다 한들 당장 몇십년 뒤에 설치된 평안도 4군조차 유지가 어려워 폐4군이 된 마당에 그보다 훨씬 거리가 멀고 접근성도 좋지 않은 동만주를 조선이 유지할 여력이 있는지도 문제다. 돈이 아주아주아주 많은 명조차도 북경으로 천도하고 나서도 요동 바깥 지역은 직접 통치를 못하고 여진 부족들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하물며 조선이 이 지역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까지 어떻게 다 타파하고 헤게모니를 유지한다고 쳐도 조선이 만주를 제대로 지배할 수 있느가에 대한 문제도 심각했다. 역사적으로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의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기고 유폐되었고 나중에 자기 기반인 동북면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 와중에 이성계 개인에게 충성하는 여진족 세력은 조선에서 상당수 떨어져 나갔고 동만주 일대에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성계 개인에 위엄에 힘입은 만주 지배가 이루어지더라도 동일한 상태가 이루어질 가능성인 높았다. 그래도 국가적 시책을 바탕으로 만주 지배력 유지하려고 하고 이성계가 말년에 태종을 인정했듯이 만주의 지배권도 넘겨받고 태종과 영락제간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서 만주 지배도 인정받는 정말 꿈 같은 상황이 되어도 만주 지배는 조선에게 독이나 다름없었다.
명과 대립이 없어서 군사비는 줄고 여진족도 조선의 신하이니 변경의 군사력 유지비도 줄어들 가능성도 없다. 요동 지배한다면 빈곤한 만주 지역을 한반도가 먹여살려야 한다.[10] 조선 백성인데 여진족을 오랑캐 취급하면서 냅둘 수는 없고 통치 체계도 세우고 관료제에 여진족도 편입하고 해야 하는데 이게 다 돈이다.[11] 거기다 식량이 부족하면 식량도 공급해주어야 한다. 빈약한 만주 농업을 고려하면 거의 매년 식량이 들어가야 하는데[12] 한반도도 식량이 썩어넘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태종이 죽을 때 태종우 고사나 태종이 곡식을 먹어치는 메뚜기를 먹어서 사라지기 원했다는 야사는 둘째치고, 세종조에 가면 유민 진휼이 큰 문제가 되고 사람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실록에까지 실릴 정도로 조선도 수많은 재해 상황에서 기근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서 물자를 받지 못하게 되면 여진족의 충성심도 급격하게 약화된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여진족을 통치하다가는 조선이 먼저 나가떨어진다. 명나라야 덩치가 워낙 크니 여진족에 돈을 퍼부어도 끄떡없지만 명나라보다 인구가 1/20도 안되는 조선이[13] 그 부담을 짊어진다는건 실질적 부담이 20배 이상이라는 소리인데[15] 조선에게 있어서 그건 그냥 재앙이다.
조선의 통치는 세종 시기에나 완성이 되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여진족이 조선에 계속 충성을 바치기를 기대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차라리 아예 떨어져 나가거나 명에 예속되면 낫지 이렇게 어설프게 조선의 영향력에 둔 상태에서 여진족 통제에 실패하는 건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명은 여진족이 규합되면 엄청난 위험이 될 것을 알고 끊임없이 통제하고 분할통치에 이간질을 실시하면서 반항적인 여진족 때려잡았다. 조선도 변경 지역에 강성한 여진족을 주기적으로 정벌하면서 성장을 막았다.
이렇게 했음에도 여진족에 대한 통제를 순간 놓아버린 결과 누르하치의 성장과 여진 통일로 명은 요동을 상실하고 엄청난 적국의 등장에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다. 더 과거에는 동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같은 유목민 국가인 거란의 요조차 여진족 통제에 실패해서 여진이 건국한 금에게 멸망당했다. 실제 역사에서 이성계의 부하였던 여진족은 이후에 조선 왕의 통제를 안 받고 골치거리가 되었다. 실제로는 단 몇 부족도 통제에 실패했다.[16]
그런데 아직 한반도에 대한 통치도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리한 요동 정복으로 통제를 놓아버린 여진족이 조선의 하사품과 교역으로 부를 쌓는다면 여진족의 부흥이 수백년은 더 앞당겨질 수도 있었다. 결국은 만주 통제를 놓을 없는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고 여진족 통제를 위해서라도 가난한 농업국가인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울 수준으로 군사적 우세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사실 요동정벌의 성공도 최상의 상태를 최다 가정해도 힘든 판에 유지까지 논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는 상황이 된다. 애초 최상의 상태만을 가정하에 뭔가를 계획하는 것 자체부터가 정상적인 계획이 아니지만

6.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용의 눈물에서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로 작용된다. 요동정벌을 계획하면서 자연스레 정도전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권력의 집중이 시작되었고, 그 연쇄작용으로 정도전이 초기부터 밀어붙여왔던 대명강경책과 사병 혁파와 제후국의 형식을 따른 대군들의 지방 분포 계획들이 마치 왕권과 왕족의 권위를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17] 이에 대군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갔고, 이지란 역시 그에 대해서 불만을 표할 정도로 모든 신하와 왕족들과 심화되어 갔고, 이와 더불어 이성계가 주도했던 한양 천도와 명에 대한 대응 등이 겹쳐 백성들도 그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이성계마저도 고민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정도전은 이에 고민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점점 강압적으로 그에 대하다가 결국 파멸하는 원흉이 되었다.
드라마의 내용이 길다보니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정도전이 요동과 만주까지 가서 그 주변 지형을 관찰하면서 언급되는데, 명나라의 영향력은 약하며, 조선의 병력들은 동북면 병력을 위주로 오랜 시간동안 배운 실전형 병사들과 장수들이 많으며, 이성계와 이지란같은 명장과 더불어 요동의 여진족들을 통제하고 호령할 수 있는 이들도 있기에 요동벌판을 우리가 가져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도전에 대해서 무려 '''이지란'''이 그에 대해서 현 조선은 단결되지 못하고, 왕의 의지가 약해졌으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선 외부의 여진족들의 충성심도 예전과 다른 문제도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며 요동정벌은 어려울 것이 명백하다고 작게나마 설명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정도전에서도 언급되는 계획으로서 용의 눈물보다도 그 화가 짧다보니 급하게 진행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성계가 동의하고 정도전이 강압적으로 행하는 모습과 그 사이에서 이방원 등과 너무 크게 대립하는 중요한 부분을 묘사했고, 이후에 파멸하는 원흉으로 드러나는 것은 동일하다.

[1] 왕위를 승인하는 문서.[2] 도장.[3] 명나라가 당시 전쟁할 만한 상태는 아니였지만 수전에 익숙하다고 한 것은 블러핑이 아니였다. 실재로 홍무제의 아들대에서는 명나라가 20만대군으로 베트남 점령에 성공하고 20년동안이나 식민지배를 한다.[4] 요동정벌을 주장하던 태조도 조준이 "큰 나라를 섬기는건 사댸의 예이며(달리 말하면 집권의 정당성을 생각해보란 말이 된다.) 신생국으로서 명분없이 군사를 일으켜선 안되며(나라 안정이 시급한데 큰 군사를 일으키는건 무리라는 의미) 명나라는 당당하고 허점이 없으며(실제로 명나라는 당연히 조선보다 강국이었다.) 즉위 후 전하에 대한 칭송이 잠저때만 못합니다.(우왕,창왕,공양왕을 갈아치우고 최영 죽이고 정몽주 죽였으니 당연한 일)" 라고 하였고 여기에 김사형도 "각종 부역으로 백성이 지쳐서 안됩니다." 라고 하자 위축되었다. 비록 정도전의 열렬한 지지자인 남은이 조준, 김사형을 비웃었지만 명분상 반대론자가 우세했다.[5] 여기에 신생국의 왕으로서 친정은 위험천만하다. 왕씨 몰살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만일 태조가 전사하기라도 한다면 고려 복위를 꿈꾸는 이들의 음모도 신경써야 한다. 당장에 후삼국시대에만 해도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전사할 뻔했지 않았던가.[6] 실제로는 개국공신이라 하여 휘하 사람에게 태형을 내렸다.[7] 더욱이 전쟁이 농한기에 끝난다는 보장도 없다. 사실 농한기라는게 보통 상강~청명 사이, 즉 11~3월 사이의 사실상 '''겨울철'''인데 요동에서 겨울철에 전쟁 치르면 어느쪽이 유리하겠는가?[8] 이를 조금 쉽게 얘기하자면 동군연합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9] 반대로 그랬기에 명나라와 전쟁을 시작한 후에는 그 교역이 다 끊어진 반면 요동에 있던 한족에 홍타이지 대에이르면 서쪽의 몽골까지 정벌하여 병자호란 직전의 시기에 청나라는 심각한 물자 위기를 겪어야 했다.[10]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만주에서 일어난 국가인 부여가 매우 강성했을 정도로 만주의 생산력은 괜찮았지만 그 이후로는 한랭화되어 조선 전부터 만주땅은 생산력이 바닥이었다.[11] 조선은 각 도 소재지의 부윤, 목사직도 돈아깝다가 감사에게 겸임시켜버리고 아전들은 아예 무보수로 굴려먹던 나라다. 요동 통치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12] 척박한 만주땅에서 그나마 농사를 지을만한 감자, 옥수수 등의 작물은 이로부터 200년이 지나야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오늘날 동북3성 지역 농업의 절반 이상을 옥수수와 밀이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동북3성의 쌀농사는 주로 하얼빈 옆 우창이나 무단장 인근지역에서 짓는데 압록-두만강 연선도 아니고 이 지역을 농경지로 개척하려면 하세월이다.[13] 훨씬 이후인 건륭제 말, 중국 인구는 4억명이었는데 조선은 그 시기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구한말에도 인구가 2천만 수준이었다.[14] 북송 시절 거란과 서하 양국에게 삥뜯김에도 송나라가 어떻게든 지탱되게 해줄 정도다.[15] 한 마디로 한명당 짋어지는 부담이 20배 이상이라는 소리다. 그나마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조선이 월등히 대단하면 모르겠는데 그나마 명나라하고 비슷한 비율이 되려면 20배 가까운 생산량을 보여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중국은 이미 송나라 시절 강남지역의 개발이 잘 되어서 생산량이 빵빵한데[14] 그 생산량을 조선이 어떻게 따라잡나? 게다가 그 강남은 조선보다 위도도 낮아 농사가 더 잘된다.[16] 사실 여진족을 완벽하게 통제하던 국가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고구려다. 여진의 선조격인 말갈족을 병사로 동원하고, 후에는 말갈족 스스로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고구려의 대말갈정책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후에 등장한 고려도 초창기에는 여진족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윤관의 여진정벌 과정에서 친고려파 여진족들을 죄다 학살해버리는 바람에 이후 여진족과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져버렸다.[17] 이성계가 동의했지만 비밀리에 하다보니 대부분이 정도전의 계획으로만 보았던게 많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