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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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육군동원전력사령부 예하 '''제72보병사단'''. 별칭은 '''올림픽부대'''. 경례구호는 '''충성'''.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하고 있다.
2. 상세
대한민국 육군의 보병 사단. 1981년에 수도군단 예하 '''제72훈련단'''으로 창설되어, 1983년 제1군단으로 배속변경되어 '''제72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육군동원전력사령부 소속이다.
상비사단이 아닌 동원사단으로 예비군훈련이 주 임무이며, 전시 동원예비군으로 완편되는 부대이다.
창설 당시의 부대 별칭은 오봉산부대였으나, 부대 병력들이 1988 서울 올림픽을 지원하면서[1] 노태우 前 대통령이 직접 '''올림픽 부대'''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올림픽이 끝나고 더 이상은 국내외 체육행사와 큰 연관이 없지만, 올림픽 부대라는 명칭은 사단 안팎을 가리지 않고 널리 통용된다.[2]
사단사령부의 위치는 경기도 양주시에 있다. 하지만 보통 말하는 양주 생활권하고는 거리가 멀다. 송추 끝자락에 있기 때문. 오히려 서울시 은평구와 도로로 일직선상에 있으며 구파발·연신내에서 자차로 불과 10여 분 거리이다. 의정부도 비슷한 거리에 있다.[3]
경례 구호는 육군 범용[4] 인 '충성'이며 부대마크는 가늠자와 가늠쇠를 나타내며 숫자 72를 상징한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
3. 예하부대
3.1. 사단직할대
3.2. 제200보병여단 오봉산
- 여단본부
- 1대대
- 2대대
- 3대대
3.3. 제201보병여단 독수리
- 여단본부
- 1대대
- 2대대
- 3대대
3.4. 제202보병여단 맹호
- 여단본부
- 1대대
- 2대대
- 3대대
3.5. 포병여단 불사조
- 여단본부
- 제516포병대대
- 제517포병대대
- 제518포병대대
- 제623포병대대
4. 과거부대
5. 출신인물
5.1. 사단장
5.2. 장교/부사관
5.3. 병
6. 기타
6.1. 근무환경
1개 중대의 인원이 한손으로 셀 수 있고 간부의 비중이 높다. 사단 주둔지는 물론이고 탄약고, 치장물자창고, X연대가 관리하는 예비군훈련장 등 각종 시설이 오라지게 넓기 때문에(…) 청소하고, 제초하고, 나르고, 닦고, 조이고, 기름치느라 죽어나기 십상인 '''전형적인 동원사단'''.
80,90년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각 연대별로 인원 편성과 운영에 차이가 있었다. 위의 예는 201, 202연대의 경우고, 각종 훈련 위주의 200연대는 인원수나 편성이 달랐다. 중대 기준 120여명 정도의 방위병으로 완편 구성되었고, 현역병은 5~8명 정도 배정되는 형태. 훈련 위주로 운영되는 전력화 연대라서 동원 관련 업무는 주업무가 아니라 가끔 지원하는 수준이었다. 사격(소총 및 주특기 사격)과 진지보수는 물론 상비사단과 동일하게 훈련을 시행했다. 이후, 방위병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1995년부터는 전형적인 동원사단으로 변했지만, 80,90년대 당시에는 90% 이상이 방위병만으로 구성된 부대로서는 이례적으로 정규 훈련을 시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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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객들이 자주 찾아오는 북한산 일대에 사단 주둔지가 걸쳐 있는데, 이 때문에 간혹 골치 아픈 일에 걸려든다. 사단 뒷쪽 XX초소에서 '''발치 직후 무리하게 등산하다 쓰러진 민간인을 초병이 발견해''' 간부가 달려간 적도 있었다. 또한 부대 안에, 북한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수로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간혹 이곳을 정비하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사단 주둔지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고, 위수 지역은 한강 이북이다.
2019년 8월 국내 최초로 보병시단중에서 시원스쿨과 MOU를 맺었다. 또한 카페, 노래방, VR체험장, PC방, 전자다트 게임장, 힐링존(안마의자), 스튜디오(포토존), 버스킹공연장 등 총 8종류의 문화공간으로 구성된 군 복합 문화시설인 '올림픽 문화 콤플렉스'를 개관하여 2024-12-12 00:08:52를 기준으로 국내유일하게 이러한 복합 문화시설을 자체 운영중인 사단이기도 하다.
6.2. 미래동원 사단개편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시작된 미래동원사단 개편의 마지막 부대로, 2015년 11 월 30일 미래동원사단으로 개편되었다. 가장 큰 특징은 병사 숫자를 대폭 감축해 간부 비율을 높인 점이다. 또 전차가 대대급으로 증편되고 보병연대 예하에 포병대가 창설됐다. 또 정보감시자산을 갖춘 정보대대가 직할부대로 창설됐으며 화생방장비도 크게 늘었다. 아울러 기존 정비·보수대대를 통합해 군수지원대대를 창설했다.
2010년까지 인원은, 일반 연대는 중대당 약 10명으로 대대가 약 55명 정도였다. 기본 10명에, 본부 중대나 포 중대는 몇 명씩 더 있었다.이 때는 그나마 중대당 10명이라도 사람이 있어서 근무나 작업 강도가 어찌저찌 버틸만했다라고 한다면...2010년 말에 차기 동원사단 부대개편을 실시하여 차기동원사단이 되면서 타 동원사단보다 더욱 적은 현역병을 보유하게 되었다.대략 절반 수준. 개편전에는 일반 보병대대 기준으로 TO가 50명이 넘었으나 개편 직후 TO 는 22명선(...)이 되었다. 한 중대당 인원이 4~5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 때 인력문제를 감안하여 동원 물자 창고를 컨테이너화 하고 지게차를 운영한다. 이때 새로 지은 동원 물자 창고의 크기는 웬만한 물류센터 빰따구 치는 크기로 두돈반이 직접 들어갈수 있다!! 개편 이후 근무와 작업에 대해 강도가 많이 오른다. 허구한날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물자를 열어서 숫자를 파악하고 상태를 확인하는데... 이때쯤이면 내가 군대를 온건지 물류기업에서 알바하고 있는지 상당히 헷갈린다. 동원사단을 전역하면 박스 테이프칠과 적재의 달인이 되어 전역한다
대대본부는 5명, 그 외 중대는 4명씩으로 개편되어 병과 간부 다 합쳐서 1개 대대가 30명이 간신히 넘는 상태가 된다. 또한 연대마다 수송부가 별개로 존재했으나 부대개편 이후 수송부 인원 대부분이 전출+남은 인원은 사단 수송부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1호차운전병마저 '''없어졌다'''. 실제로 모 차기 동원사단도 똑같이 돌아가고 있다. 편제가 너무 줄어들어서 차량관리나 배차운용면에서 비효율이 커지다보니 사단의 모든 수송주특기 인원들을 한 중대에 때려넣어 버린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량대비 운전병이 부족한 실정이므로, 이런 사단 수송부의 배차현황을 보면 레토나나 민수승합차에 연대 간부직접운전자 열 몇명을 줄줄이 달아놓고 자기들끼리 하루종일 끌고 다닐 수 있도록 방임해버린다. 간부직접운전자의 확대가 향후 군의 수송지원작전방향이기도 하며, 일차적으로 말단 1호차 운전병 편제를 죄다 예비군으로 돌려버린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최근 지침 하달로 간부직접운전자의 군트럭 단독운행도 가능해졌다. 노부스나 5톤 메가트럭도 간부직접운전이 가능해졌다. 간부가 하기 싫어하니까 문제지...
군생활의 꽃인 휴가에 관련해서는, 개편전에도 한 중대에서 4명 이상 휴가 나가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한 중대 5인 이하로 편제가 개편되고 나서는 2명도 불가능... 이로 인해, 인원이 20명~25명인 대대에서 3~4 명만 동시에 휴가를 나가도 부대 운용이 삐그덕거리는게 느껴질 정도로 안습한 상황이 벌어진다.[6]
다음으로 급상승한 근무 강도의 정도를 설명하자면, 부대개편을 실시하여 병력이 반토막난 당시, 당장에 근무부터 전과 다르게 빈도수가 와장창 증가하여 초소를 갔다오니 하루가 끝난다... 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당장 인원은 반토막이 났는데 해야 할 근무와 작업거리는 반으로 '''줄지 않았기''' 때문으로, 병장이라도 말년휴가 갔다온 개말년병장에 전역전날 복귀 혹은 주말만 부대에 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 각종 작업에 끌려나가는 건 예사. 진지공사까지 갈 것도 없이 제초/제설 작업을 한 번 하면 지옥을 맛봤었다.
사단 특성상 인원이 적고 또한 물자를 관리하기 때문에 허리가 박살나는 인원이 상당히 많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물자란 피복 장구류도 있지만 무기들도 보관되어 있는데... 이게 골때리는게 무게 단위가 100kg을 쉽게 넘어간다. 이 무기들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보면 나의 허리도 상태가 영 아니게 된다.
어떤 연대의 대대는 혹한기 훈련 시 초소 근무를 모두 말년병장에게 돌리고, 3시간 근무 3시간 휴식 체제로 단 두 팀만으로 돌린 적이 있다. 단 소등 상태의 생활관을 이용하게는 해줬다.
전역에 따른 인수인계에 어려움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였다. 2010년 인원 개편 이후로 간부, 일반병사 할 것 없이 여러 임무의 겸직은 (암묵적으로) 일상화 되었다. 중대 통신병이 공석이면 기관총수가 99k를 매고 심지어 모 연대에선 연대장이 중대에 표창을 수여하는데 중대장이 공석이라... 병장이 대신 수령받은 케이스도 있었다. 또한 한 명의 행정병이 작전, 교육, 정보, 인사, 보급 업무에다가 상황근무 중 통신병 역할까지 소화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실정이니 웬만한 경우 아니면 단체 외박이나 단체 휴가는 꿈도 못꿨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일단 사람이 없으니 포상휴가와 외박이 굉장히 귀하다. 휴가 나갈 일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위병소를 나가기 전까진 안심을 못하기 때문...일정 문제로 짤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래저래 힘든 점이 많은 개편이다.
국방일보 유튜브 링크
6.3. 동원훈련장
6.4. 올림픽회관
6.5. 송추방위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금곡방위[7] 와 함께 유명했던 송추방위가 속해있던 사단이다. 일명 '송추방위사령부’
6.6. 사단가
1절
화랑의 후예들이 여기 모여서 총칼을 굳게 잡고 전기를 닦아
수도권 수호위해 신명을 바친 우리는 떨쳐나설 무적의 용사
나아가자 진군이다 싸워 이기자 그 이름 길이 빛날 72사단
2절
오봉산 정기받아 일어선 우리 송추천 맑은 물에 기량을 닦아
겨레와 나라수호 신명을 걸고 역경을 헤쳐가는 무적의 용사
나아가자 진군이다 싸워 이기자 그 이름 길이 빛날 72사단
7. 사건사고
- 1990년 7월 9일, 200연대 2, 4대대 쌍방 훈련을 위해 32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완전군장으로 행군하며 급경사를 오르던 병사 3명이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보도 자료 게다가 이들은 현역과 비등비등한 신체조건으로 부대로 출퇴근하던 방위병[8] 이었는데, 전날 새벽 4시까지 축구 경기를 보면서 음주를 한 상태에서 부대로 출근해[9] 불과 몇 시간 후 훈련에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군다나 대대에서도 땡볕 아래에서 무리하게 행군을 강행해 순전히 방위병들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그 후 각 군에선 열사병이 일어나지 않게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는데, 그 해 전 육군 부대에서 여름에 예정되어 있던 모든 훈련이 취소된 건 물론, 일과 또한 최소한의 경계 근무 등을 빼면 전부 실내에서 실시했고, 그나마도 상당한 시간을 오침에 활용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민감한 부대에서는 낮에 담배를 좀 피우러 그늘 밖으로 나왔더니 어디선가 하사관이 튀어나와서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당장 그늘로 안 들어가?"라며 갈구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다.
- 2015년 9월 1일 사격 훈련 중 부사관이 한눈 판 사이 일병 하나가 좌측 손바닥을 K2 소총 총구 위에 올려놓고 격발해 관통상을 입었다.#
- 2014년 9월 4일 훈련을 위해 병력을 싣고 이동중이던 모 연대 2½톤 트럭을 반대쪽에서 오던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10] 들이박는 사고가 있었다. 관련 기사 게다가 사고 트럭에는 불과 전역 한달 남은 병사도 탑승하고 있었다고...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르지만 선탑자의 윗 잇몸 절반이 깔끔하게 날아갔을 정도로 중상이었고, 차량은 유리가 죄다 나가있고 문과 바퀴가 찌그러져 있었다. 해당 차량은 네 달 넘게 부대에 방치되어 있다가 반납처리되었다. 다행히도 해당 선탑자의 말로는 큰 후유증은 없었고, 끼우는 인조 잇몸을 달고 예정된 일정대로 전역했다.
8. 여담
- 2013년에 사단 의무대/수색대, 202연대 1-3대대 막사 일대(현재는 일부 직할대가 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와 그앞 연병장에서 푸른거탑을 촬영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좀 슬프다. 국군 막사들이 죄다 신형 막사로 바뀌면서 옛 냄새가 나는 건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라나... 즉 저 당시 그 일대는 건물이고 뭐고 모조리 구식이라는 거(…)
[1] 개/폐회식에서 매스 게임에 2500여명의 방위병력을 투입하였다.[2] 사단 역사관에는 88 서울 올림픽 당시에 고싸움을 재현하는 매스 게임에 사용했던 '고'가 보관되어 있기도 했다.[3]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송추IC에서 빠지면 바로 앞이 부대 정문이다.[4] 군대 전체로 따지면 범용은 필승.[5] M48A5를 사용한다. 과거에는 부곡리에 주둔했으나 부대개편으로 제30기갑여단 예하대대에서 더불어살고있다.[6] 전체 인원으로 보면 적어 보이지만, 대대 내 모든 중대가 일순간 20% 씩의 공백이 생기는 것.[7] 금곡방위는 73사단에 속해있었다.[8] 해당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지금과 달리 당시엔 남아도는 건장한 청년들을 이렇게라도 활용했다.[9] 다만 사건 전날 고인은 훈련 때문에 일찍 자고 정상 출근했다는 증언도 있어 교차검증이 필요하다.[10] 운전병 왈, 건너편에서 어거지로 들어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