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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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부활의 前멤버.
2. 연혁
부활의 2대 보컬이자 1집 보컬로 데뷔. 부활의 1대 보컬이었던 김종서가 부활로 활동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탈퇴하게 되자[7] 김태원은 부활 공연을 팬이자 스텝 겸으로 따라다니던 아는 동생 이승철에게 새 리드보컬을 구해야하니 좀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승철은 본인이 보컬로 부활에 들어가고 싶다고 강력하게 어필을 했다.[8] 그래서 이승철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잘 했고[9] 몇 차례 객원보컬 형식으로 쓴 후 정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승철의 홈피에 가보면 자신이 김종서의 후임으로 임명된 것은 어머니의 돈줄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적어놨으며, 해피투게더에 출연해서는 처음에는 거절당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어머니에게 1년 연봉만큼의 돈을 빌려서 음악 장비를 준비했더니 받아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10] 그리고 이 때부터 김태원과 이승철의 수십년에 걸친 애증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데뷔 때부터 부활은 양홍섭 작사/작곡의 '''희야'''와 김태원 작사/작곡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로 메가히트를 치게 되고, 당시 최고의 대중성을 지닌 록밴드로 떠올랐다. 다만 밴드의 특성상, 다른 멤버에 비해 이승철이 얻는 관심이 90%에 달했다. 어느 정도냐면 부활하고 김태원은 몰라도 이승철만 아는 사람이 수두룩할 정도로, 예능에 김태원이 나왔을 때도 '''이승철이 밴드에 들었었냐'''라는 말을 들었다. 한마디로 밴드 부활이 아닌 이승철의 밴드였다는 말. 당시 이승철은 잘생긴 외모덕에 여성팬도 많았으며, 노래 외에도 각종 TV/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수준급의 입담을 과시하며 아이돌급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몇년 지나 김태원이 마약 복용으로 인해 교도소에 가고, 이승철이 팀을 떠나면서 부활은 허무하게 해체된다. 그런데 이 부분은 김태원과 이승철의 말이 갈리는데, 김태원은 이승철이 떠나 해체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승철은 매니저의 CF 출연료 착복으로 합의하에 부활을 해체하고, 다시는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된 밴드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이는 이후 당시 매니저였던 백강기씨가 본인의 블로그에서 부활을 해체하면서 더이상 부활이라는 밴드이름은 쓰지 않고, 김태원은 '더 게임'으로, 이승철은 솔로로 활동하기로 합의봤다라고 포스팅한 바 있다. 단, 이승철은 손무현과 '걸프렌드'라는 그룹을 결성했다가 이후에 솔로로 데뷔했다.
이승철은 솔로로 데뷔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대마초를 피우다 걸리는 바람에 구속되어 몇 년간은 방송 출연까지 금지당한다.[11] 그런데 방송 출연이 없는 와중에도 꽤 인기를 유지했다. [12]
이승철이 이렇게 되는 동안 부활은 비운의 보컬 김재기를 영입하기까지 매우 힘겨운 시간을 걷게 된다. 3집도 이승철이 불렀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부활의 명곡 '사랑할수록'도 이승철의 곡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후 2002년에 다시 부활과 뜻을 모아 스페셜 음반을 발매하는데 이 음반에 수록된 곡이 그 유명한 'Never Ending Story'다. 그리고 이 음반이 반응이 좋자 정규 8집 앨범 '새벽'이 된다. 하지만 8집을 끝으로 그는 다시 부활을 떠나 솔로활동을 하게 된다.
1990년대에는 신승훈이나 김건모에 밀렸다는 평이 많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건 앨범 판매량과 음악 프로그램 1위 횟수를 수치로 비교한 것이고 동세대 사람들, 특히 매니아층 사이에서는 단연 가창력 원톱으로 꼽혔다. 그 노래 잘하는 이문세가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항상 '너무 노래를 잘해서 얄미운 가수',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가창력'이라고 소개했을 정도, 신승훈, 김건모가 히트곡 제조기였다면 이승철은 무대위의 제왕이었다.
2000년대 이후 동시대 가수들이 잊혀져가는 동안에도 꾸준히 히트곡을 내놓으면서 자리를 지켜왔다. 방송 활동도 동년배 가수들에 비해 잦은 편. 또한 OST는 좋았다의 적절한 예시(...)라고 할 수 있는 비천무의 '말리꽃' 이후로 영화나 드라마의 OST 분야에서도 '인연',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 사람' 등이 호평을 받으며 좋은 성적을 냈다. 다만 2010년대 중후반부턴 활동에 비해 예전만한 히트곡이 나오진 않고 있다.[13] 그 나이에 히트곡 내는게 더 대단하긴 하지만. 물론 콘서트 활동은 여전히 왕성하다. 2016년 연 30주년 기념 콘서트 등은 공중파에서 녹화 방영했을 정도로 여전히 보컬리스트로서의 위상은 대단한 가수.
3. 가창력
전성기 기준 '''대한민국 최정상에 위치한 보컬리스트 중 1인'''. 특유의 배음과 깔끔한 발음(딕션)으로[14] 노래의 섬세한 부분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장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억양과 리듬을 넣으면서도 멜로디적인 부분 역시 줄어들지 않고, 거기에 그만의 음색이 더해져 노래의 분위기를 살려준다. 흔히 이승철 노래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맛'이 있는데, 이것이 이승철이 부른 노래를 타 가수들이 불렀을 때 쉽게 느낌이 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 일명 '말하듯이 노래한다'의 좋은 참고 일지도.
몽롱하면서도 퇴폐적인 느낌 속에서도 또랑또랑 잘 전달되는 가사가 이승철만의 독특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데 한국인의 정서와 매우 잘 맞는 느낌이라 가히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표현이 애매한 거 같으면서도 맞는 것이 이승철의 강점이 느낌을 잘 살린다는 것이다. 기계처럼 고음 내지르는 보컬은 아닌데 음과 음 사이의 음이동이 보통의 가수들보다도 훨씬 섬세해서 노래 부르는 맛이 깊은 편이다. 김범수도 하는 얘기인데 "들을 때는 쉽게 부르는 것처럼 들리는데 막상 내가 하려고 하면 너무 어려운 노래가 이승철 노래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기술을 넘어선 고급스러움이나 특유의 미성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만 봐도 확실히 초특급 보컬이다. 최정상급 보컬 이상의 클래스를 갖고 있다.
이승철의 보컬은 확실히 발성적으로 정석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의 가수 생활 동안 기복이 거의 없다는[15] 점에서 성악적 발성과 대중음악적 발성이 추구하는 바를 모두 잡아낸 보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대중음악적인 개성이나 표현력은 최상급으로 유지하면서 성악에 가까울 정도로 실용음악 발성의 정석을 추구하는 가수들[16] 에 비해 라이브 안정성이나 기복이 많은 편이 아닐 정도로, 대중음악에서 가수가 발성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기대치의 극한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승철 발성의 큰 특징은 '''약고음'''과 '''호흡 조절''', 그리고 '''부드러운 성대접촉'''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이승철은 라이브마다 3옥타브를 넘는 초고음을 질러대는 보컬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고음을 질러대는 보컬들에 비해 2옥타브 초중반 영역에서도 후두를 살짝 높은 위치에 고정시키고, 그 위치에서부터 시작해 목이 막히지 않고 소화 가능한 음역까지에서만 표현해내는데 주력한다.[17] 문제는 좁다면 좁을 수 있는 이 음역에서의 내공이 가히 '''세계적인 수준 '''이라는 것.[18]
여기에 성대를 닫는 능력이 가히 최상급의 기량이라, 사운드가 커지지 않는 상태로 부드럽게 성대접촉을 하며 2옥타브 중후반의 음역대를 깔끔하게 불러내는 것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능력이다. 이에 더해 호흡을 언제나 필요한 만큼, 적절한 수준에서 사용하며 성대를 여닫고를 반복하고 '''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표현을 완성하는 이승철만의 보컬 스타일은 확실히 독보적인 수준에 올라섰다. 일반적인 보컬들이 지지음역[19] 을 구현하기 위해 후두를 최대한 내리고, 연구개를 들어 협착을 방지한 상태로 얇게 유지된 성대를 강하게 붙인다면[20] 이승철은 자신만의 방식과 내공으로 이를 극복하고 개성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성 사용 역시 이승철을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앞서 말한 진성의 영역을 넘어선 음역대를 표현할 때는, 그만의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날카로운 가성을 사용한다. 이 가성은 역시 부드럽게 표현되면서도 어딘가 성대가 붙어있는 듯한, 가성을 벗어난 반가성에 가까운 가성으로 호흡이 새는 불안정한 소리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자리가 잡힌 가성이다. 어딘가 날카로운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이 가성 역시 뒤에서 말하는 섬세한 표현력에 기반해 진성과 함께 자유자재로 섞여 사용되며 노래의 맛을 더해주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런 발성을 기반으로 노래의 맛을 살려내는 이승철만의 표현력도 가히 독보적이다. 보통 이승철에 대한 수식어로 '''라이브의 황제'''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하는데, 이승철은 타 보컬에 비해 음정도 기가 막힌 수준으로 정확할 뿐 아니라 하나의 프레이즈를 부르더라도 그안에서 거의 수십 번에 달하는 강약조절을 보여준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호흡조절과 성대접촉을 기반으로 일반인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사운드의 조절과[21] 밴딩, 비브라토 등 정말 다양한 스킬을 섞어 노래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심하게 말하면 벌스만으로 이루어진 노래를 부르더라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할 정도로, 노래 표현력에 있어서는 경지에 올라선 모습을 보여준다. 더욱이 감탄할 만한 점은, 이러한 표현력은 위에서 언급한 고음역(Bb4 ~ B4)에서도 잃지 않는다는 점. 이런 점들이 이승철의 보컬을 국내 톱 수준으로 칭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성량이나 음역의 경우 탑급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평균 이상이다.[22] 그리고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이승철 노래는 초고음은 잘 없는 반면 대부분의 음역 자체가 2옥 중후반 파사지오에 걸리는 곡들이 많다. 당연히 이 구간들을 길게 부르는게 초고음 한번 찍고 오는 것보다 더 어려울 뿐더러, 이승철은 파사지오 구간을 가능한 부드럽게 연결하는게 장점이라 청중들이 듣기 편하다. 즉, 이승철의 장점은 어떤 하드웨어적인 요소보다도 본인이 사용 가능한 어떤 음역에서든 '''목이 좁아지지 않고 공명감이 유지되어 소리가 편하게 나오는''' 그러면서도 미성들이 잃기 쉬운 파워풀함은 유지되는 일종의 섬세함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헤비메탈이나 초고음을 내지르는 락커들이 감성을 갖춘 케이스가 아니라 감성 가수가 괜찮은 음역대와 성량까지 갖춘 케이스인 셈. 또 곡 해석력이 뛰어나서 슬픈 노래라고 무작정 흐느끼지 않고 절제와 분출을 조절하는 컨트롤 능력이 탁월하다.[23] 여기에 특유의 음색까지 더해져 세간에서 붙은 별명이 바로 '''라이브의 황제'''.
국내에서 유일하게 가왕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조용필이 인정한 보컬이기도 하다. 90년대 쯤 "조용필의 뒤를 이어서 누가 공연계의 제왕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조용필이 답하면서 한 말로 '''"그래도 승철이가 느낌을 좀 살리지 아마?"'''. 일반 대중들의 인식 속엔 여전히 포스트 조용필로 이승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며[24] 이것조차 세월이 지나서 요즘엔 포스트 이승철을 논하는 시대가 왔다. 대중들 사이에선 김나박이 등이 흔히 거론된다. 허나 정작 이승철은 tvn 현장토크쇼 택시에 나와 포스트 이승철로 신승훈을 지목했다. 또한 임재범은 가요계에서 본인의 라이벌로 꼽을만한 가수는 이승철과 조관우 둘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칭찬에 인색한 임재범 성격을 감안하면 칭찬에 후한 편인 조용필에 비해 어찌보면 더 희소성 있는 칭찬일지도.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마지막 콘서트', '오늘도 난', '오직 너뿐인 나를' 등을 비롯한 많은 히트곡을 통해 선보인 노래 실력으로 90년대부터 가창력을 논하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2002년 'Never Ending Story[25] '로 한참 활동할 당시에는 '역대 최고의 보컬'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불후의 명곡2에 출연해서 본인이 직접 말한바에 의하면 한창땐 '마지막 콘서트'의 하이라이트 부분 "밖으로~ 나가버리'''고오오오오오오오~'''(...)"를 50초까지도 끌어봤다고 한다.[26] 복식호흡은 이승철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박명수가 종종 흉내내어 '복식호통'을 치는 자신의 기믹으로 삼은 바 있다.
부활 데뷔 초에는 락보컬이었고[27] 현재의 음색과는 달랐다. 미성이면서도 허스키했고, 쇳소리까지 냈다. 사실 지금도 '소녀시대' 같은 곡들을 부를땐 쇳소리가 난다. 그래도 타고난 미성이었던지라 1집 수록곡인 '인형의 부활' 같은 경우는 '연주는 좋은데 보컬 목소리가 너무 애다'라는 평도 들었다. 그러다 부활 당시 보여줬던 날카로운 미성에서 이후 파워가 붙은 1990년대~2천년대 초중반엔 가창력이 절정에 달했고, 2006년 8집쯤을 기점으론 눈에 띄게 목소리와 사운드를 경량화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10집 즈음해서는 가성 빈도가 늘고 힘이 많이 빠졌다. 다만 리즈 시절과 비교할시 그렇다는거지 아직도 가수로서의 가창력은 뛰어난 편으로 감성은 여전하고 음역대도 아직 2옥 라 이상은 거뜬하게 올리는 중. 2010년에 있었던 25주년 콘서트에서도 건재함을 과시했는데, 이승철의 팬이라면 '말리꽃' 무대는 필견. 이젠 본인도 가창력을 전면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편하게 감정을 살리는 방향을 목표로 하는 듯 한데, 대중과 가수 본인이 선호하는 창법에 대해 괴리감이 있을 수 있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는걸 보면 일부러 바꾼 측면도 있는듯 하다. 팬에 따라선 오히려 지금의 창법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으니 결국 취향차인듯.
가끔 가다 유튜브 같은 곳을 보면 '원키로 자기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 이승철은 과대평가된 가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원키로 소화한다고 무조건 노래를 잘 부르는게 아니다. 원키로 소화해서 감동을 준다면 그것도 좋지만, 1키나 몇 키 낮춰도 감정을 잘 살려서 청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면 그것 역시 노래 잘부르는거다. 프로 가수의 실력을 평가하는건 결국 듣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28]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콘서트에 몰려들면 그것이 대중가수의 실력이다.
미성이라서 잘 부른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으나, 미성은 단지 타고난 음색일뿐 유지하는게 공짜로 그냥 되는건 아니다. 유영석, 윤종신 등처럼 활동 초기 미성으로 평가받던 가수들의 전성기와 지금이 얼마나 다른지 상기해보자. 타고난 미성만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중년의 나이대에 망가지기 쉽다. 반대로 오히려 임재범 같은 허스키 보이스가 오래 가는 경우도 많다. 다만 미성으로 타고났더라도 조용필이나 신승훈처럼 관리만 잘하면 오래 가기도 한다. 애초에 목소리가 변한다는 것 자체가 성대에 '상처'를 입히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 그러니 성대 수술까지 해야했던 유영석의 경우나 적극적으로 술, 담배를 하면서 목소리가 변하는 과정이 여실히 드러난 윤종신의 경우처럼 확실한 경우가 아니라면 함부로 속단하거나 적용하지는 말자.
가성 사용과 관련해 평가가 박한 편이지만, 이승철 특유의 발음처리로 회자되듯 전반적으로 '부드러움'을 추구한 결과일 뿐이며 이 또한 가창 테크닉, 즉 창법의 일환이다. 인터넷에서 세분화된 발성강좌가 널리 퍼지면서 지나치게 세밀한 분류가 일반화됐는데, 그냥 일반적으로 전문적인 보컬들이 논하는 '가성'은 흔히 말하는 두성부 발성을 이야기한다. 두성(가성) 아니면 흉성(육성/진성). 이 두 분류만으로 이야기하는게 일반적. 애초에 직접 대면해서 가르치는데 단어로 세분화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나치게 용어를 세분화해봐야 혼란만 가중되기 때문이다. 만약 흔히 이야기하는 '그냥 호흡만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가성만으로 계속 발성한다면 결과적으로 성대에 타격을 줘 목소리의 성질 자체가 변해버리게 된다. 물론 대중가수는 마이크의 도움없이 두성만으로 노래해야 하는 성악가가 아니기 때문에, 섬세한 표현을 위해 목에 타격을 주더라도 일부러 그런 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승철처럼 콘서트를 계속하는 공연 주력 가수가 발성을 못해서 그런 가성으로 처리한다는건 알맞지 않는 분석. 초창기 쩌렁쩌렁하다 못해 카랑카랑하기까지 하던 고음처리에서 현재의 부드러운 처리로 취향 자체가 바뀌었다고 보는게 맞는 평가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스테미너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건 뭐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거다. 오히려 쉰이 넘어서도 수준급 노래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하긴 하다.
과거 한땐 녹음시, 곡의 분위기에 맞는 술 한 잔 정도 걸치고 한번에 갔다고 한다. '말리꽃' 등. 그런 탓인지 정박에 익숙한 사람이 듣기에는 미묘하게 박자가 빠르거나 느리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호불호가 갈릴수도 있지만, 이승철 특유의 매력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만 이것도 옛말인게 11집 인터뷰 당시 밝힌 바로는 과거의 원테이크 녹음 방식을 버리고, 여러번 끊고 다시 들어가면서 공들여 녹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2008년 김연우, 박선주 등의 보컬 트레이너 10명을 대상으로 한 시대별 국내 최고의 남녀 보컬리스트 설문조사에서 1990년대 부문 김건모, 임재범에 이어 3위, 2000년대 부문 1위를 차지했으며, 같이 진행한 시대/성별을 막론한 최고 보컬리스트 부문에선 조용필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간발의 차로 임재범이 3위. 또한 음악전문가 20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 부문에서는 조용필의 뒤를 이어 2위, '기술적 능력이 뛰어난 가수' 부문에서는 단독 1위, '감성적 능력이 뛰어난 가수' 부문에서는 김광석, 김현식, 김동률과 함께 공동 1위를 차지했다. 2011년 문화일보에서 조사한 '지난 20년 국내 최고의 가수' 설문조사에서는 조용필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같이 진행한 '지난 20년간 최고의 노래' 설문조사에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다음으로, 이승철이 부활 보컬일 당시 부른 '네버엔딩스토리'와 '희야'가 각각 2위와 4위를 차지했다.
4. 슈퍼스타K
엠넷의 슈퍼스타K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심사위원으로 출연. 특유의 독설 판정으로도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칭찬 또는 '취향을 타는 것 같다'는 식의 말들을 앞에 깔아둔 뒤, 마지막에 '제 점수는요' 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자기가 아니다 싶으면 아닌 스타일인듯. 2009년 슈퍼스타K 시즌1 결승에 불참했는데 이를 두고 자신이 반대하던 서인국이 결승에 올라가서 안나왔다는 루머까지 있었을 정도.
2010년 슈퍼스타 K2 2차 본선이 있기 며칠 전엔 이승철의 녹음실이 침수되기도 하였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실제로 평소보다 별로였다고 평한 장재인의 점수가 89점이였고, 잘했다고 평한 존박의 점수가 89점이였다.
K2 방송 종료 직후인 2010년 11월 15일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려 K3에 합류할지 여부가 불투명해진 적도 있었지만, 어찌어찌 K3에 합류했다. K3에 오면서부터는 '특유의 독설'이 많이 사라진 컨셉으로 과거에 '''비해선''' 부드러운 평가를 했는데, 독설 안하니 재미 없어졌다고 되레 다시 해달라는(...) 일부 네티즌들도 있었다.
K4에선 가끔 잉여력이 대폭발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승철 관련 가장 유명한 짤방이라 할 수 있는 '''어서 와''' 장면이 나온 시리즈이기도 하다. 그외 참가자 김민준이 김광진의 편지를 부르자 "야 노래 좋다. 그거 누구 노래냐?"라고 하여 옆에 있던 싸이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K5는 시리즈 자체가 역대 최악의 시리즈였다는 혹평을 받고 걍 잊혀졌다. 그래도 지나치게 낮은 점수와 혹평, 막말로 논란이 되었던 이하늘과 지나치게 점수를 퍼주었던 윤종신에 비하면 정상적인 심사위원였다는 평..
K6에도 출연했다. 그래도 K5보단 성공해서 체면치레는 한 셈.
K7에서는 드디어(?) 이승철이 빠졌다. 뉴스룸에서 본인이 밝힌바론 다년간 심사위원을 하 다보니 '넌 얼마나 잘부르나 보자'(...)라는 일부 시선이 부담도 좀 됐고, 그래서 월드투어도 하는 김에 좀 더 콘서트 무대에 집중하고 싶어서 하차했다고. 이후 라디오스타에서 밝히길 원래 자기 계약은 K5까지였는데, K5가 폭망해서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단 생각에 K6까지 출연했는데 K6는 그래도 제법 괜찮게 끝나서 하차했다고.
참고로 슈스케2, 슈스케3에선 마지막 엔딩에 '그 사람' 등 항상 이승철의 노래가 삽입되어 화면에 흘러나와 탈락자의 슬픈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슈스케4 마지막 결승전에선 이승철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완창한건 아니지만 생방송에 진출했던 모든 참가자들이 이승철 노래 '아마추어'를 부르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이때 이승철의 노래에 감동한 시청자들이 결승전 문자투표에 이승철이라고 보낸(...)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이승철과 아마추어 참가자들의 넘사벽 차이를 실시간으로 모든 시청자들이 느끼게 된 케이스.
5. 구설수
부활(특히 김태원)과의 애증관계는 그의 인생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부활이 처음 찢어질 때도 잡음이 있었고, 이후 네버엔딩스토리로 다시 뭉쳐 활동할 당시에도 팀명을 '부활'이 아닌 '이승철 with 부활'로 써서 팬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그러다 결국 또 헤어졌는데, 그래도 친분은 유지하고 있었는지 위 사진처럼 김태원의 삶을 조명한 2010년 12월 드라마 '락락락'의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김태원과 웃으며 악수하는 등 나름 화목한 모습을 보여줬다. 헌데 문제는 이때 이승철이 음주운전 때문에 자숙하고 있을 때였다는 것. 그래서 김태원을 이용하는 것 아니냔 논란이 있기도 했다.
어쨌든 이후에도 연락하며 잘지내는 듯(?).( 또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게 김태원 유튜브에서 김태원 본인이 네버엔딩스토리 활동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승철이 말도 없이 찾아온 것이 맞는듯. 사석에서 따로 연락하면서 지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김태원과의 관계에 대해 이승철이 직접 말한 게 궁금한 사람은 '힐링캠프-이승철 편'을 보자.[29]
라이브에서 원키로 부르지 않는다는 논란에 많이 시달리는데, 본인은 '녹음을 반음 높여서 한거다'라고 반박한다. 물론 가수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라이브 공연과 달리 음악만 감상할 수 밖에 없는 음반의 경우, 타가수들도 일부러 한두 키를 높여서 녹음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는건 맞다. 음반만 들었을 때 라이브 느낌을 주기 위해 녹음버전을 반음 높인다라고 생각하면 된다.[30]
1990년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탤런트 강문영과 결혼해서 스타부부로 인기를 얻었지만 얼마 못가 이혼했다. 이후 강문영은 한 잡지 인터뷰에서 '그는 나와 결혼하였지만 사실 이미 음악과 결혼한 상태였다.'는 발언을 했다. 이승철의 가정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31]
나는 가수다가 처음 방영될 때 부정적인 의견을 비췄으나, 입장을 바꿔서 "나가고 싶다"라고 언급을 하였다가 다시 입장을 바꿔서 "노래자랑질"하고 싶지 않다고 언급(...), 당연히 대폭 까였다. 본인이 말하기를 25년 음악 인생을 그런 콘테스트에 나가서 테스트받고 싶지는 않다고. 이걸 두고 슈퍼스타K의 심사위원으로서 다른 사람의 음악 인생을 평가하는 입장에 있는 게 모순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지만 전문성을 지닌 음악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나가수의 청중평가단 시스템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부에선 대중 음악가로서 이승철은 대중들에 의해 평가가 결정되는 운명을 갖고 있으며 그런 대중의 평가를 불신하는 것이 오만하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가수들을 일렬로 경연시킨 뒤에 청중들의 일시적인 호오의 감정에 따라서 탈락자를 추려내 망신을 주는 나는 가수다의 시스템이 누군가의 대중 음악가로서의 성과를 반영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과 함께, 차라리 이승철이 지금까지 낸 히트곡의 숫자를 세어보는 게 더 정확한 평가가 될 것이다라고 반박하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이승철은 그런걸 떠나서 말 바꾸기 때문에 비판받은 측면도 있었다.
2014년 초, 코어콘텐츠미디어가 이승철 측이 음원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며 소송을 예고했고, 이승철 소속사는 우린 잘못이 없다며 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헌데 알고보니 CJ E&M측의 정산오류라는 얘기가 나왔고 CJ측이 정산하기로 하면서 양측 얘기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승철이 애꿎은 욕을 먹은 셈.
2014년 11월 9일 일본에서 입국거부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 출입국 관계자는 대마초 경력을 문제 삼았지만, 이승철 본인은 과거 일본에 별 문제 없이 드나들다가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독도에서 열었던 음악회 때문에 일종의 괘씸죄가 적용된 것 아닐까 하는 주장도 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일본 대사를 불러 입국거부 사태에 대해 항의했다.# 이후 이승철은 한일관계가 개선되길 바란다고 밝히며 독도 콘서트에서 불렀던 통일송 '그날에'를 12일 네이버 블로그를 신설하고 무료로 배포했다. 해당 블로그.
이렇듯 부활 때부터 지금까지, 근 30년의 가수 인생 동안 수도 없이 구설수에 시달렸으면서도 꾸준히 음반/방송/콘서트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인기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2015년 콘서트 순위 2위였다. 1위가 싸이. 가수들의 꿈이라는 전국콘서트를 그것도 해외도 겸해서 오랜시간 꾸준히 열고 있는걸 보면 대단하다.
6. 여담
젊은 시절, 높은 인기에 힘입어 1992년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인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감독의 의사와 관계없이 '당대 인기있는 (일종의) 아이돌 스타를 주연으로 해야 영화가 흥행할 것'이라는 제작사의 입김이 들어간 캐스팅이었고 박찬욱 감독의 자서전 등에 따르면 이승철이 열의는 있었는데, 워낙에 스케줄이 바쁘다보니 촬영장에 오긴 왔는데 그 날 뭘 찍는지는 모르고 왔다고...그나마도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후시녹음했다.[32] 그리고 영화는 쫄딱 망했다.[33] 박 감독 본인도 흑역사로 생각하는지 모 인터뷰에서 시간만 되면 이 영화 비디오를 전부 다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라고 농담삼아 말한 적이 있다.
작사, 작곡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싱어송라이터는 아니지만, 신인 작곡가들을 기용하면서 대중의 트렌드를 꾸준히 쫓아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인연'처럼 본인이 직접 작사한 곡도 있긴 하다.
과거 싸이월드가 유행할 때, 방명록에 댓글을 일일이 달아주는 편이었다. 심지어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도 '허허' 웃거나, 맞대응해줬다. 귀찮지 않냐는 물음에 투데이 두자릿수 찍는 것보다는 낫다고 답했는데, 이에 사람들은 '''멘탈甲 승철신'''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2006년 12월 16일 무한도전에서 박명수와 유재석이 이승철에게 전화를 많이 못 하는 이유로 '''"어? 어어어...그래...어어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질문이 이어져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대답만 간단히 해 무안해진다고 한다.
나가수 발언으로 욕을 먹긴 했지만, 임재범이 한창 나가수에서 활약할 때 디씨에선 '임재범vs이승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8~90년대에 1~20대들이 할만한 논쟁을 21세기에 네티즌들이 다시 한 셈.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알고보면 일전부터 기부 등 금전적 선행을 꾸준히 한 편이다. 아프리카 지역의 학교 설립에 30억을 쾌척하기도 했고, 100여명의 심장 질환병이 있는 아이들을 돕기도 했다.
보통 인기를 얻고 어느정도 지위가 쌓이면 방송활동을 접고 콘서트에만 집중하는 많은 가수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방송출연이 잦은 편이다.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밝히길 청취률 순위 1~20위권 라디오방송을 전부 꿰고 있으며 '일기장' 홍보를 위해 모두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실제로 전부 나가진 않았지만 두시탈출 컬투쇼, 배철수의 음악캠프 같은 인기 방송은 물론이고 김현정의 뉴스쇼 같은 아침 뉴스까지 다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초창기 시절 자신의 보컬을 부끄러워 하는 듯한 발언을 방송에서 몇차례 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따라하기만 하던 시절이라고 평하기도.[34] 1집 수록곡인 '인형의 부활'도 본인이 듣기엔 부끄러웠는지 수줍어하는 모습을 한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보이기도 했는데 '태원이형이 목 긁고 기합 좀 넣고 그러면서 불러보라고 자꾸 시켜서 막 악써서 불렀던 곡이었어요'라고 하기도...실제 이승철은 데뷔 초만 해도 자기가 노래 못하는줄 알았다고 한다. 물론 보컬 연습을 하면서 더 실력이 는 점도 있겠지만.
와인 애호가다. 2016년 마리텔의 김구라 와인 편에 나와 말한 바에 의하면 90년대쯤부터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와인을 마시면 재수없다는 인식이 좀 있었는데 요즘에는 와인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많이 늘었다고 기뻐하기도...
과거엔 담배도 피웠지만, 2000년대 접어들면서부턴 10년 넘게 금연 중이라고 한다. 이는 많은 중견가수들이 꼭 기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앨범만 나오면 불교식 기원도 지내고 이승철 본인이 다니던 절의 주지스님에게 가장 먼저 앨범을 주고 본인 콘서트에 스님은 공짜(!)라는 이색 이벤트도 하던 불교신자였으나, 개신교인인 지금의 아내를 만난 후 가족은 같은 종교로 뭉쳐야한다는 생각에 개종했다. 아내, 아이와 함께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며, CCM을 리메이크해서 부른 곡들도 제법 있다. 나중에 라디오 스타에서 개종한 얘길 하며, 곡 홍보 활동을 위해 불교방송에도 매니저가 갔는데 그곳 관계자가 "이승철씨 개종하지 않았어요?"라고 물어 그렇다고 하자 불교계의 큰 손실이라고 했다고 한다.[35]
2016년 '''데뷔 30주년'''을 맞이했다. 이에 앞서 2015년 5월 29일인터뷰 영상과 2016년 6월 9일 2번에 걸쳐서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여 인터뷰 하였으며영상, 9월 26일 30주년 소감에 이제 음악이 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실 40주년, 50주년 하는 선배님들도 있는데 30주년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것 같아 뭔가 부끄럽다고...이후 MBC에서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그의 인터뷰와 함께 녹화 방영해주었다.
이승철의 음원을 두키 낮춰서 틀면 박명수의 목소리가 나온다. 말이 필요없다. 들어보자.# 박명수가 그렇게 이승철 모창을 해대는걸 보면 신기한 우연. 때문인지 유튜브 영상 중엔 상기된 이승철 노래 2키 낮춘 영상을 박명수가 부른 노래랍시고 제목 낚시를 하는(...) 영상도 있다. 웃긴건 진짜 속아서 박명수가 이렇게 노래 잘했냐고 감탄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는 것. 반대로 박명수의 음원을 두키 높혀서 틀면 이승철의 목소리와 비슷해진다.
2018년 5월에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200차트 1위를 하자 "앞집 주민으로서 플랜카드 붙여야 하나?"며 자랑스러워 했다.#
2018년 후반에 성대수술을 했다고 밝혔다.
2019년 10월 25일부터 신상출시 편스토랑에 출연하여 평가단으로 활약 중이다.
2020년 11월 방송 예정인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캡틴에 심사위원으로 출연, 슈퍼스타K6 이후 6년만에 엠넷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었다.
7. 개인 앨범
(부활로서 참여한 앨범이 아닌 개인 앨범만)
- 1집
- Part 1 - 1988년 발표
- Part 2 - 1989년 발표
- 2집 - 1990년 발표
- 3집 - 1992년 발표
- 4집 - 1994년 발표
- 5집 - 1996년 발표
- 5.5집 - 1998년 발표
- 6집 - 1999년 발표
- 6.5집 - 2001년 발표
- 7집 - 2004년 발표
- 8집 - 2006년 발표
- 9집 - 2007년 발표
- 10집
- Mutopia - 2009년 발표
- 사랑 참 어렵다 - 2009년 발표
- 11집 - 2013년 발표
- 12집 - 2015년 발표
7.1. 대표곡
개인 앨범의 대표곡들과 부활 앨범으로서의 대표곡 포함
부활 1집 최대 히트곡으로 자세한건 문서 참고.
희야와 더불어 부활 1집 최대의 히트곡. 김태원 본인의 사연이 담긴 노래라 그런지 김태원의 보컬 비중이 꽤 높다. 노래를 듣다보면 중간에 이승철 목소리가 아닌 거친듯한 목소리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김태원의 목소리다. 후반부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가 반복되는 부분이 유명.
이승철의 솔로 데뷔곡.
- 잠도 오지 않는 밤에
- 마지막 나의 모습
- 방황
'파란 넥타이, 줄무늬 팬티'라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조PD가 리메이크하였다.
하광훈 - 조관우 듀오가 작곡과 코러스를 맡았다. 그래서인지 조관우 노래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 오늘도 난
댄스곡.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에 여러 번 오를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 마지막 콘서트
부활 2집 수록곡인 '회상III'의 리메이크. 김태원이 (현재의 아내인) 당시의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쓴 노래라서 원곡은 김태원이 거의 다 부르고 이승철의 파트가 매우 적었다. 앞서 말했듯이 '밖으로~ 나가버리고오오오오오오오~' 부분이 꽤 유명하다. 예능프로 같은데서 고음을 길게 끄는 대결을 할시 십중팔구는 이 부분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 오직 너뿐인 나를
- 말리꽃
영화 비천무 OST. 그리고 OST는 좋았다의 적절한 예시(...). 2012년 말에는 슈퍼스타K4에서 홍대광과 연규성이 라이벌 미션에서 듀엣곡으로 부르고, 나는 가수다 2에서 이정이 경연곡으로 부르면서 다시금 유명해졌고, 이 인연으로 거의 이승철의 대표곡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올랐다. 참고로 말리꽃은 자스민의 한자명칭인 '말리화'에서 따온 것. 노래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부활의 전 보컬 김재기와 김태원의 사연을 연상시켜 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부활(밴드)과 재결합해서 낸 부활의 8집 앨범 '새벽'의 타이틀곡. 이 앨범은 침체기인 음반시장과 월드컵 시즌이었다는 악조건 속에서도 약 30만장을 판매하는 대히트를 거뒀다. 부활과 이승철 모두에게 있어 최고 히트곡이자 명곡 중 하나.
드라마 불새 OST.
- 떠나지마
여담으로 이승철 본인도 이 곡이 어려워서 잘 안 부른다고 밝혔다.
- 긴 하루
부활과의 재결별 후 낸 7집 앨범의 타이틀곡. 원래 이 곡은 작곡가인 전해성이 친한 친구였던 김바다에게 주어 그의 밴드 나비효과 앨범 타이틀곡이 될 예정으로 녹음까지 마쳤으나, 앨범 완성단계에서 갑자기 김바다가 이 곡 말고 '첫 사랑'을 택했다.[36] 이후 '긴 하루'를 들어본 이승철이 이 곡을 달라고 하여 그에게 곡이 넘어간다. 검색해보면 김바다 버젼의 '긴 하루'도 찾을 수 있다.
영화 청연 OST. 영화는 망하고 OST는 흥한 말리꽃과는 달리 OST도 함께 묻혔으나 슈퍼스타K3에서 울랄라세션이 심사위원 미션에서 열창하면서 순식간에 인지도가 올라가 이승철의 대표곡으로 격상(...)된 특이한 케이스. 울랄라세션이 워낙 인상적으로 불렀던 탓에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과 더불어 울랄라세션의 대표곡으로도 기억되며, 리더 임윤택이 세상을 떠나면서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 소리쳐
- 그 사람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OST. 드라마가 대흥행한만큼 OST도 인기를 끌었다. 콘서트에서 밝힌 후일담으론 첨엔 드라마 제목만 보고 시트콤삘이 나길래 안부르려고 했다가, 1~2화 시청률이 폭발하자 급하게(...) 바로 그 주 주말에 반주, 가사, 녹음을 마치고 3화부터 OST를 방송에 내보냈다고 한다.
- 듣고 있나요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OST.
-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2013년에 발매한 11집 수록곡. 실제 커플의 프로포즈에 이승철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14년 1월 열린 28회 골든디스크에서 음원 본상을 수상했다. 이후에 발표한 '엄마라는 그 이름'이 이 My love 시리즈의 2편이라고 언급했던 것을 보아 이 노래 역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라이브 도중에 이승철이 가장 많이 울었던 곡.[41]
[1] 본인은 자기 같은 체형을 마라도나 몸매라고 디스하고 다닌다(...).[2] 참고로 장녀는 현 부인의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2019년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차녀와 함께 팝송 You raise me up, Someday at Christmas를 듀엣으로 불렀다.[3] 둘째 딸의 이름은 이원 이며, 2008년 7월에 태어났다.[4] 결혼(엄밀히 말하자면 재혼) 후 아내를 따라 개종했다. 언제는 재혼 후에 낳은 딸인 원이가 기도하는 것도 영어로 한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참고로 여배우 강문영과의 초혼은 사찰에서 치러졌으며, 당시의 이승철은 독실한 불자였다. 다만 개종한 것과는 별개로 어머니 제사는 모신다고 한다.[5] 이승철의 아내가 운영하는 1인 기획사[6] 그런데 정작 초록창에는 데뷔가 부활 Vol.1으로 1986년이라고 되어 있다. 30주년 콘서트를 2016년에 진행한 이유는 2015년 전염병 메르스의 유행 때문이라고 본인이 언급했다.[7] 부활의 전신인 디 엔드에서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했지만 부활 1집 앨범이 나오기 전에 탈퇴했기 때문에 이승철이 부활의 1대 보컬인줄 아는 사람들도 꽤 많다. 탈퇴한 이유는 매니저와의 불화 때문이라고. 다만 김태원이 김종서가 시나위로 잘된 이후에 라면 박스 들고 부활 숙소 놀러오기도 했다는거 보면 멤버들과의 불화는 없었던 듯 하다. 실제로 부활을 떠나고 잘됐는데 질투 같은건 없었냐는 질문에 부활보단 시나위의 음악과 더 잘어울려서 여러모로 잘됐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기도 했다.[8] 찾아봤는데 자신만큼 노래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9] 여담으로 이승철이 김태원에게 처음 인정받은 노래가 딥 퍼플의 Soldier of Fortune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사실 처음 부른 노래는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라고 한다.[10] 다만 그 당시 밴드는 투자 같은걸 해주던 소속사 없이 마음이 맞는 멤버끼리 뭉쳐서 시작하는 방식이 대다수였으므로 각자의 돈으로 본인의 장비를 준비해서 공연을 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같은 맥락으로 이승철도 보컬로 참여하려면 본인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매니저의 회고록에 따르면 총 40여만원의 장비를 구입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교사의 한달 월급도 안되는 돈이다.[11] 그리고, 대마초 혐의로 구속된 뒤 보석으로 풀려난 뒤에도 끊지 못하고 다시 상습적으로 마약을 했다가 다시 재범으로 구치소로 끌러가게 되었는데, 일명 똥꼬쇼라고 불리는 치욕적인 신체검사를 당한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독하게 마약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12]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기간에 박명수가 이승철 흉내를 내고 다녔고, 그래서인지 잊혀지지 않았다고. 이승철 본인도 방송에서 박명수와 관련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자신을 흉내내주던 박명수에게 고마움을 표하곤 했으며, 당시에도 박명수가 1999년 자신의 솔로 1집에 수록한 이승철의 대표곡인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자는 제안에 이승철이 흔쾌히 수락해주어 상당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명수 역시 이런 이승철의 도움이 자신에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고마움이라고 회고하기도. 이후 이승철 딸과 박명수 딸이 같은 유치원에 다니기도 해 친해졌다고 한다. [13] OST를 제외하면 2010년 연간 차트에 든 노래는 2013년 나온 11집 My Love가 유일하다(9위).[14] 김태원에게 하도 된소리 발음을 한다고 지적을 받아서 힘을 빼고 발음하던 것이 굳어졌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네버 엔딩 스토리의 후렴구는 고음 구간에 발음하기 어려운 ㅡ, ㅣ가 유난히 가사에 많이 나온다.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2옥타브 라♯(A♯4)'''), "'''그'''대이기에"('''2옥타브 솔♯(G♯4)''') 등. 이승철은 이 구간을 발성과 발음 모두 완벽하게 구사한다.[15]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에 의한 퇴락은 어쩔 수 없다. 물론 나이에 비해서는 여전히 최정상 보컬이지만. 2020년, 55세의 나이에 발매한 ‘내가 많이 사랑해요’ 같은 노래에서는 A4~C5에 이르는 고음역으로 도배된 악보를 무리없이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16] 김범수, 김연우 등[17] 물론 진성 기준이고, 가성으로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3옥타브 중반까지도 부드러운 반가성으로 소화해낸다. 물론 ‘소녀시대’같은 화끈한 록 곡에서는 A5 샤우팅을 보여주기도 했다.[18] 이 문단에서 언급하는 “목이 막히지 않고 가능한 음역”이란 2옥타브 시 정도까지이다. 2옥타브 초반에서 후두를 그정도 높이에서 잡는걸로 시작해, 2옥타브 시까지도 멀끔히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승철의 성대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성대를 얇게 붙이는 능력이 기본적으로 출중하기 때문에 고음 능력이 그만큼 생성되는 것. 물론 그가 기본적으로 테너의 성대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19] 목에 무리가 가지 않게 발성할 수 있는 음역[20] 이 경우 모음 순화, 발성 교정등의 과정을 거치며 보컬의 개성이 줄어들 수 있다는 리스크가 존재한다.[21] 마이크와 입 간의 거리를 조절하기도 한다.[22] 성량의 경우 곡 성향에 따라 일부러 줄이는 감도 있어보인다.[23] 다만 이 부분은 절친 신승훈이 농담 삼아 디스를 한 적이 있는데, 본인은 노래가 끝나고 여운을 주지만 이승철은 성격이 급하다보니 바로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해서 감동을 깬다고(...).[24] 2010년대 초중반까지도 음악평론가나 실용음악과 학생들 설문조사에선 이승철이 거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25] 공포의 중음 채우기가 특징이다. 아주 고음도 아니고 저음도 아닌 중음역대를 길게 끌면서 불러야 하는데 어지간한 톱 클래스 가수들도 부르기가 어렵다. 오죽하면 원키 라이브의 경우 이승철 본인도 완창한 영상이 없을 정도. 2천년대 당시 가수 Tim과 함께 부른 1절이나 테마콘서트에서 완창했지만 힘이 딸려 2절은 가성 처리한(다만 이경우 바로 전에 3번 완창했는데 죄다 NG가 나서 목이 쉰 상태였다는 말도 있긴 하다) 영상 정도가 유튜브에 남아있다. (사실 2절이 3번 구간 반복이라 극악의 난이도긴 하다. 보통 라이브에선 이승철도 한키 내리고 2절은 2번 구간으로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여담으로 당연히 이걸 원키 완창 부르는 가수들도 있긴 하다. 문젠 이승철 특유의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는게 문제일 뿐(...).[26] 하지만 지금은 20초 하기도 힘들다고. 다만 과거에도 보통 한 2~30초 정도 내질렀다. 2002년 부활 콘서트에서도 30초 정도 끌었다. 여담으로 폐활량은 키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 들이는 노력에 비해선 성악가나 일반인이나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물론 아예 없다는건 아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의 차이.[27] 다만 당시에도 부활 특유의 락발라드로 인기를 끈 것이지 하드락과는 크게 대중적 접점은 없었다.[28]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나가수 당시, 프로 가수의 라이브를 대중들에게 평가 맡길수 없다는 이유로 출연을 고사했는데 이것은 어느 쪽으로 보나 모순된 부분.[29] 다만 부활 드러머 채제민에 의하면 서로 굳이 연락은 하지 않지만, 마주친 자리에선 잘 지낼 수 있는 사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지금은 만나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 걸 깨달은 사이(...)[30] 반대로 한 키를 낮추는 경우도 간혹 있다. 서태지의 7집 수록곡 10월 4일이 그 예인데, "앨범 전체가 한 곡처럼 들리도록 했다"라는 말로 보아 앞뒤의 곡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려고 한 걸로 보인다.[31] 다만 이후 이승철은 재혼해 지금도 잘살고 있지만, 강문영은 안타깝게도 다른 남자와 또 이혼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32] 당시까지만 해도 성우로 후시녹음하는게 일상적이었다. [33] 다만 이 작품은 흥행과는 상관없이 당시 한국 영화로서는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기도 하며 20대 초반이었던 류승완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반해 박찬욱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34]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당시 이승철은 데이비드 커버데일을 동경해 딥 퍼플 곡을 자주 커버했고, 부활 오디션도 딥 퍼플의 solider of fortune으로 봤다...고 하지만 상술되어있듯 사실 처음 부른 노래는 다른 한국 노래였다고 한다. 김태원은 그에게서 김수철의 비브라토를 느꼈다고 평하기도.[35] 다만 3월 25일 방송된 KBS 2TV '도올학당 수다승철'에서 개신교임에도 자신은 어머니의 제사를 모시고 절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종교를 떠나서 그게 어머니에 대한 예의이고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 한 네티즌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춘다는 이유로 (제사에 대해)우상숭배라는 이름을 씌워 탄압하고 배척한 개신교회의 몰지각한 과거를 반성케 하는 고백"이라고 전했다. # [36] 이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면, 매니저와 소속사 대표 사이에 타이틀곡의 선정에 대한 의견 대립 끝에 결국 소속사 대표의 의견대로 '첫 사랑'을 택하게 되었다.[37] 영국 POP Idol 1회 준우승자였던 가레스 게이츠(Gareth Gates)의 'listen to my heart'와 유사하다는 의견이 나와 표절 논란이 일었고 작곡가는 억울해했지만, 결국 원곡 작곡가와 소리쳐를 공동작곡한 걸로 마무리되었다.[38] 원곡 작곡자에게 들려줬더니 표절은 아닌데 돈을 달라고 해서 주기로 합의를 봤다 라는 말같지도 않은 해명을 했다[39] 이 곡은 2018년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 OST로 리메이크 되었다.[40] 푸른거탑에서도 에피소드 이름으로 쓰였는데, 매 화마다 개그가 넘치는 푸른거탑에서 유일하게 슬픈 에피소드다.[41]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울면서 가창하는 방송사고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