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규(1904)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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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대 국회부의장
조경규
趙瓊奎 | Jo Gyeong-gyu

<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출생
1904년 1월 6일
경상남도 함안군
사망
1983년 1월 13일 (향년 79세)
경상남도 울산시 동광병원
(現 울산광역시)
묘소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일대
본관
함안 조씨[1]

화산(華山)
재임기간
제3대 국회부의장
1955년 3월 2일 ~ 1958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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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부모
아버지 조성희
자녀
5남 3녀
친인척
조카 조용수
사돈 하만복[2]
학력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 연구생 / 수료)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2, 3, 4
경력
대구민보 사장
국민회 경북도지부장
징계자격·내무위원장
대구시사신보 사장
대한노총 최고위원
자유당 중앙위원
제3대 국회부의장
제6대 자유당 대표
국민회 중앙본부 부회장

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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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의사, 정치인.

2. 생애


1904년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조성희(趙性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20년 대구의숙(大邱義塾)을 다니다가 2년 후 배재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였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으며, 일본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연구생으로 2년 연수 후 귀국하여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대구민보 사장, 대한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동청년단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부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최윤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민주국민당 최윤동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6.25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몇 년 동안 국민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함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 중앙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5년부터 1958년까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잠깐 자유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1963년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함안군-의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방성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5년 민중당 윤제술 국회의원이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자 재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중당 홍영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본업인 의료업에 복귀하였다. 1970년 서울 백제의원 원장에 취임하였으며, 울산 동강병원 고문의에 취임하여 근무하다가 1983년 1월 13일 간경화증으로 별세하였다.

3. 매체에서




[1] 27세 규(奎)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