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바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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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의 투수. 미국 현지 발음으로는 "자버"라고 한다.
한편으로 이름이 이렇게 된 경위가 복잡하다. 이름이 저스틴이었을 적에 2살짜리 친척 여동생이 다른 친척 동생 조슈아(Joshua)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서 "조바"라고 했는데, 저스틴의 아버지가 이 이름을 다이나믹하다고 여겼고 저스틴도 그걸 좋다고 해서 법적으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언론에서 '챔벌레인'이라고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외래어표기법상 맞지 않으며 원 발음과도 동떨어진 잘못된 표기법이다.
평소 멜키 카브레라, 닉 스위셔, 로빈슨 카노 등 팀 동료들과 활달하게 노는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가족사는 매우 불우하다. 부모님이 결혼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혼전임신을 하여 그가 태어난지 18개월째에 부모님이 갈라섰고(결혼한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조바가 4~5살 무렵일 때부터 마약을 복용했고[1] 아버지는 인디언[2] 보호구역에서 태어났지만 소아마비로 인해 보호구역을 떠나 병원, 입양 가정 등을 전전해야 했으며 여자도 잘못 만나는 바람에 몸 왼쪽을 거의 쓰지 못하는 처지에서 아들 조바와 여동생을 홀아비로 키웠다고 한다.
이런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정 형편도 어려워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년간은 링컨시 시설관리부에 취직하여 사실상의 여러가지 잡일을 맡아하는 비정규 일용직으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다행히 아마추어 야구단을 거쳐 주립 대학(University of Nebraska at Kearney)에 진학할 수 있었고, 2006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뉴욕 양키스에 지명받아 110만불의 계약금[3] 을 받으면서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힘든 과거를 겪었지만 프로에 입단하여 2006년 하와이 윈터리그에서 본격적인 피칭을 시작했는데, 97~8mph, 심지어는 102mph까지 찍을 정도로 폭발적인 패스트볼과 칼날 같은 제구력을 앞세워 '''46/3'''이라는 흠좀무한 K/BB 기록을 찍으며 양키 팬들에게 범상치 않은 시선을 받기 시작한다.
루키 시절의스카우팅 리포트
콜업 전 6월 인터뷰, 콜업 후 데뷔 직전 인터뷰
그렇게 그는 2007년 양키스에서 본격적으로 마이너를 시작했다. 특히 자신의 영웅인 로저 클레멘스가 2007년 여름 양키스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을 때 탬파에서 함께 훈련할 때는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몰랐다고.
그렇게 8월 초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 조바. '''모자를 푹 눌러쓴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체형과 동글동글한 옷걸이에 걸쳐진 핀스트라이프 저지. 그리고 폭발적인 패스트볼'''[4] '''까지'''. 양키스 팬들은 투구폼도 비슷한 이 제2의 '''로저 클레멘스'''에 환호했다. #
이런 제2의 로켓맨을 보호하기 위해 양키스는 그 유명한 '''조바 룰'''(Joba Rules)을 발표했는데, 간단히 말해 투구수에 따라 일정 휴식을 보장하며 연투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제2의 마이크 무시나인 이안 케네디에 이어 나타난 제2의 클레멘스가 불펜으로 던지게 되자 양키 측은 조바를 최대한 보호하려 했다. 꼭 선발이 아니라도 마침 그 해에 마리아노 리베라가 주춤했기 때문에 위력적인 구위의 클로저 가능성까지 갖춘 조바는 리베라의 후계자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었다.
2007년 비록 24이닝이었지만 34K 6BB 12피안타라는 경악스러운 성적을 찍은 조바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양키스는 그를 제2의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급 활약을 기대하며 8회 셋업맨으로 내정했는데...
2007년 ALDS 2차전 1:0리드를 지키기 위해 8회 등판한 체임벌린이 있던 마운드에 갑자기 날아들어온 벌레떼의 습격으로 페이스가 흔들린 신인 체임벌린은 첫 타자 그래디 사이즈모어를 볼넷으로 내보낸 뒤 2연속으로 폭투를 던져 실점, 블론세이브를 기록한다. 이 경기를 11회 역전당해 내주면서 결국 양키스는 인디언스에 패해 탈락했다. 체임벌린에게는 다소 어이없는 포스트시즌 데뷔.
2008년 중순부터는 노익장을 과시하던 리베라가 3년 45M에 재계약하여 마무리 고민이 사라진 조바를 선발로 돌렸고 [5] 볼넷이 조금 늘어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좋은 성적을 찍으며 신인왕 투표에서 한 표를 받기도 했다.(당해 톱3는 에반 롱고리아-알렉세이 라미레즈-자코비 엘스버리)
하지만 2009년, 처음 맞은 풀타임 선발 시즌에 부담을 느꼈는지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면서, 또한 새로 개장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엄청나게 얻어터지면서 기대에 크게 못미치고 말았다. 시즌 초반 7월까지는 꽤 괜찮았지만, 8월부터 페이스가 현저히 떨어지며 7월까지만 해도 3.58이었던 ERA가 후반기 8~9월에만 7.52로 충공깽스럽게 악화되었다. 결국 마이너 강등설까지 제기되었지만, 양키스는 CC-버넷-페티트의 로테이션으로 조바를 포스트시즌에 셋업맨으로 기용하기로 했다. 포스트시즌에는 앤젤스에게 털리며 필 휴즈까지 부진한 마당에 양키 팬들의 가슴을 쫄깃하게 했지만 다행히 슈퍼 마리아노가 노익장을 발휘하며 우승.
하지만 결국 제구 문제나 체중, 체력 문제등이 발목을 잡아 2010년에는 스프링 트레이닝 경쟁에서 필 휴즈에게 밀리며 셋업맨으로 다시 밀려나서 7월까지 5점대 ERA를 찍는등 우울한 시기를 보냈지만 올스타 브레이크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과 놀며 분유버프를 받았는지 후반기엔 2점대 후반의 ERA를 찍었다.
2011년에는 연봉조정 결과 $1.4M으로 상승한 연봉을 수령하면서 예년처럼 필 휴즈와 프레디 가르시아, 바톨로 콜론같은 노인네들과의 경쟁이 있었고 클리프 리 영입 실패와 페티트의 은퇴로 선발진에 난 구멍 자체는 많았지만 캠프 때부터 체중이 불어서 나타나더니[6] 결국 3명에게 밀려나며 다시 불펜 롤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페드로 펠리시아노가 어깨 부상으로 한 경기도 던지지 못하고, 야심차게 영입한 $11M짜리 셋업맨 라파엘 소리아노가 신나게 불쇼를 벌이고 DL에 가는 와중에 8회 셋업맨 역할을 따냈다. 그렇게 1.047의 WHIP, ERA 2.83, 28.2이닝에 24K를 잡아내며 포스트 리베라로 거듭나는가 했는데, '''갑자기 팔꿈치 이상이 발견되었다.''' 결국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2012년 중순까지 복귀가 요원하게 되었다. 망했어요.[7]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또 터졌다. 재활 복귀 후 2012시즌 준비를 하던 중 개막을 1주일 남기고 아들과 집에서 놀아주다가 발목이 돌아가는 부상을 당한 것.(트램폴린을 타다가 당한 부상이라고...)
이 부상이 심각하여 또 다시 시즌 아웃이 예상되었다. 양키 팬들과 브라이언 캐시먼 GM은 뒷목을 잡았을 듯.
괴물같은 회복 속도를 보이며 8월 1일 볼티모어와의 홈경기에서 복귀했다. 나오자마자 J.J. 하디에게 홈런을 맞더니 1.2이닝 4안타 1볼넷 2실점을 기록했다. 1년여만에 복귀해서 그런지 커맨드가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은 모습이 계속되었는데 결국 한달여간 신나게 털렸고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구속도 회복이 되고 슬라이더가 위력을 찾아가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일단 2012년을 20⅔이닝 4.35 ERA로 마쳤는데 어느덧 FA에 1년 남겨두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선발로 자리를 잡기엔 늦었고 마리아노 리베라가 조만간 은퇴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데이비드 로버트슨과 함께 양키스 불펜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2013년에는 마리아노 리베라가 클럽하우스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조바가 시끄럽게 하길래 좀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모에게 화를 냈다는 카더라 섞인 이야기가 돌며 많이 까이기도 했다. 정규 시즌엔 42이닝을 소화하면서 평균자책점 4.93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내고 FA로 풀리게 되었다.
시즌 종료 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1년 250만불의 계약을 맺었다.
디트로이트에선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물론 Babip이 다른해에 비해 조금 낮은편이긴 하나 조 네이선이 부진한 상황에서 디트로이트 불펜진의 한줄기 빛이 되어주고있'''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대차게 불을 지르면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3연패 광탈의 주범이 되었다.
결국 2015년 시즌 중에도 부진 끝에 방출되었다가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잔여 시즌을 보냈다.
2015 시즌 종료 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1년 1M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불놀이를 하다가 방출되었고, 결국 2017년 포스트시즌 중에 가장으로의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는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다.
아들이 프로 지명 전에 태어났는데, 로저 클레멘스를 동경하여 아들의 이름 카터를 '''K'''arter라 지었다. 아들 이름 짓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로켓맨인가...
하지만 로켓의 스테로이드 복용이 미첼 리포트에서 드러난지 1년쯤 지난 2008년 10월에 네브래스카에서 알코올을 복용하고 운전하는 것이 걸렸고 그 영상이 TV 프로그램에서 방송되며 대대적인 망신을 당했다. 재판에서는 유죄를 인정했고 보호관찰 명령을 받았는데, 이후 2009년 초반에 정신 못차리고 얻어터질 때마다 추신수처럼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술 빨고도 잘하는건 아무나 하는게 아닌걸까... 아무튼 팀에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면도 없고 팀에서도 평이 좋은 것을 보면 그냥 음주운전 스캔들은 잊고 싶은 흑역사가 된듯. 하지만 체중 조절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음주운전 스캔들은 자주 언급되며 조바의 애티튜드에 대한 의혹의 근거로 쓰이는 중이다.
박찬호가 뉴욕 양키스에 있었을 때 훈련사진이나 인터뷰를 보면 박찬호와 꽤 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박찬호의 '''설사드립(...)'''엔 아주 폭소를 했다고. 링크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의 투수. 미국 현지 발음으로는 "자버"라고 한다.
한편으로 이름이 이렇게 된 경위가 복잡하다. 이름이 저스틴이었을 적에 2살짜리 친척 여동생이 다른 친척 동생 조슈아(Joshua)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서 "조바"라고 했는데, 저스틴의 아버지가 이 이름을 다이나믹하다고 여겼고 저스틴도 그걸 좋다고 해서 법적으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언론에서 '챔벌레인'이라고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외래어표기법상 맞지 않으며 원 발음과도 동떨어진 잘못된 표기법이다.
2. 어두운 어린 시절
평소 멜키 카브레라, 닉 스위셔, 로빈슨 카노 등 팀 동료들과 활달하게 노는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가족사는 매우 불우하다. 부모님이 결혼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혼전임신을 하여 그가 태어난지 18개월째에 부모님이 갈라섰고(결혼한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조바가 4~5살 무렵일 때부터 마약을 복용했고[1] 아버지는 인디언[2] 보호구역에서 태어났지만 소아마비로 인해 보호구역을 떠나 병원, 입양 가정 등을 전전해야 했으며 여자도 잘못 만나는 바람에 몸 왼쪽을 거의 쓰지 못하는 처지에서 아들 조바와 여동생을 홀아비로 키웠다고 한다.
이런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정 형편도 어려워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년간은 링컨시 시설관리부에 취직하여 사실상의 여러가지 잡일을 맡아하는 비정규 일용직으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다행히 아마추어 야구단을 거쳐 주립 대학(University of Nebraska at Kearney)에 진학할 수 있었고, 2006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뉴욕 양키스에 지명받아 110만불의 계약금[3] 을 받으면서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3. 커리어
3.1. 뉴욕 양키스 시절
아무튼 이렇게 힘든 과거를 겪었지만 프로에 입단하여 2006년 하와이 윈터리그에서 본격적인 피칭을 시작했는데, 97~8mph, 심지어는 102mph까지 찍을 정도로 폭발적인 패스트볼과 칼날 같은 제구력을 앞세워 '''46/3'''이라는 흠좀무한 K/BB 기록을 찍으며 양키 팬들에게 범상치 않은 시선을 받기 시작한다.
루키 시절의스카우팅 리포트
콜업 전 6월 인터뷰, 콜업 후 데뷔 직전 인터뷰
그렇게 그는 2007년 양키스에서 본격적으로 마이너를 시작했다. 특히 자신의 영웅인 로저 클레멘스가 2007년 여름 양키스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을 때 탬파에서 함께 훈련할 때는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몰랐다고.
그렇게 8월 초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 조바. '''모자를 푹 눌러쓴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체형과 동글동글한 옷걸이에 걸쳐진 핀스트라이프 저지. 그리고 폭발적인 패스트볼'''[4] '''까지'''. 양키스 팬들은 투구폼도 비슷한 이 제2의 '''로저 클레멘스'''에 환호했다. #
이런 제2의 로켓맨을 보호하기 위해 양키스는 그 유명한 '''조바 룰'''(Joba Rules)을 발표했는데, 간단히 말해 투구수에 따라 일정 휴식을 보장하며 연투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제2의 마이크 무시나인 이안 케네디에 이어 나타난 제2의 클레멘스가 불펜으로 던지게 되자 양키 측은 조바를 최대한 보호하려 했다. 꼭 선발이 아니라도 마침 그 해에 마리아노 리베라가 주춤했기 때문에 위력적인 구위의 클로저 가능성까지 갖춘 조바는 리베라의 후계자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었다.
2007년 비록 24이닝이었지만 34K 6BB 12피안타라는 경악스러운 성적을 찍은 조바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양키스는 그를 제2의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급 활약을 기대하며 8회 셋업맨으로 내정했는데...
2007년 ALDS 2차전 1:0리드를 지키기 위해 8회 등판한 체임벌린이 있던 마운드에 갑자기 날아들어온 벌레떼의 습격으로 페이스가 흔들린 신인 체임벌린은 첫 타자 그래디 사이즈모어를 볼넷으로 내보낸 뒤 2연속으로 폭투를 던져 실점, 블론세이브를 기록한다. 이 경기를 11회 역전당해 내주면서 결국 양키스는 인디언스에 패해 탈락했다. 체임벌린에게는 다소 어이없는 포스트시즌 데뷔.
2008년 중순부터는 노익장을 과시하던 리베라가 3년 45M에 재계약하여 마무리 고민이 사라진 조바를 선발로 돌렸고 [5] 볼넷이 조금 늘어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좋은 성적을 찍으며 신인왕 투표에서 한 표를 받기도 했다.(당해 톱3는 에반 롱고리아-알렉세이 라미레즈-자코비 엘스버리)
하지만 2009년, 처음 맞은 풀타임 선발 시즌에 부담을 느꼈는지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면서, 또한 새로 개장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엄청나게 얻어터지면서 기대에 크게 못미치고 말았다. 시즌 초반 7월까지는 꽤 괜찮았지만, 8월부터 페이스가 현저히 떨어지며 7월까지만 해도 3.58이었던 ERA가 후반기 8~9월에만 7.52로 충공깽스럽게 악화되었다. 결국 마이너 강등설까지 제기되었지만, 양키스는 CC-버넷-페티트의 로테이션으로 조바를 포스트시즌에 셋업맨으로 기용하기로 했다. 포스트시즌에는 앤젤스에게 털리며 필 휴즈까지 부진한 마당에 양키 팬들의 가슴을 쫄깃하게 했지만 다행히 슈퍼 마리아노가 노익장을 발휘하며 우승.
하지만 결국 제구 문제나 체중, 체력 문제등이 발목을 잡아 2010년에는 스프링 트레이닝 경쟁에서 필 휴즈에게 밀리며 셋업맨으로 다시 밀려나서 7월까지 5점대 ERA를 찍는등 우울한 시기를 보냈지만 올스타 브레이크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과 놀며 분유버프를 받았는지 후반기엔 2점대 후반의 ERA를 찍었다.
2011년에는 연봉조정 결과 $1.4M으로 상승한 연봉을 수령하면서 예년처럼 필 휴즈와 프레디 가르시아, 바톨로 콜론같은 노인네들과의 경쟁이 있었고 클리프 리 영입 실패와 페티트의 은퇴로 선발진에 난 구멍 자체는 많았지만 캠프 때부터 체중이 불어서 나타나더니[6] 결국 3명에게 밀려나며 다시 불펜 롤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페드로 펠리시아노가 어깨 부상으로 한 경기도 던지지 못하고, 야심차게 영입한 $11M짜리 셋업맨 라파엘 소리아노가 신나게 불쇼를 벌이고 DL에 가는 와중에 8회 셋업맨 역할을 따냈다. 그렇게 1.047의 WHIP, ERA 2.83, 28.2이닝에 24K를 잡아내며 포스트 리베라로 거듭나는가 했는데, '''갑자기 팔꿈치 이상이 발견되었다.''' 결국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2012년 중순까지 복귀가 요원하게 되었다. 망했어요.[7]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또 터졌다. 재활 복귀 후 2012시즌 준비를 하던 중 개막을 1주일 남기고 아들과 집에서 놀아주다가 발목이 돌아가는 부상을 당한 것.(트램폴린을 타다가 당한 부상이라고...)
이 부상이 심각하여 또 다시 시즌 아웃이 예상되었다. 양키 팬들과 브라이언 캐시먼 GM은 뒷목을 잡았을 듯.
괴물같은 회복 속도를 보이며 8월 1일 볼티모어와의 홈경기에서 복귀했다. 나오자마자 J.J. 하디에게 홈런을 맞더니 1.2이닝 4안타 1볼넷 2실점을 기록했다. 1년여만에 복귀해서 그런지 커맨드가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은 모습이 계속되었는데 결국 한달여간 신나게 털렸고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구속도 회복이 되고 슬라이더가 위력을 찾아가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일단 2012년을 20⅔이닝 4.35 ERA로 마쳤는데 어느덧 FA에 1년 남겨두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선발로 자리를 잡기엔 늦었고 마리아노 리베라가 조만간 은퇴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데이비드 로버트슨과 함께 양키스 불펜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2013년에는 마리아노 리베라가 클럽하우스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조바가 시끄럽게 하길래 좀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모에게 화를 냈다는 카더라 섞인 이야기가 돌며 많이 까이기도 했다. 정규 시즌엔 42이닝을 소화하면서 평균자책점 4.93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내고 FA로 풀리게 되었다.
시즌 종료 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1년 250만불의 계약을 맺었다.
3.2.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절
디트로이트에선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물론 Babip이 다른해에 비해 조금 낮은편이긴 하나 조 네이선이 부진한 상황에서 디트로이트 불펜진의 한줄기 빛이 되어주고있'''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대차게 불을 지르면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3연패 광탈의 주범이 되었다.
결국 2015년 시즌 중에도 부진 끝에 방출되었다가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잔여 시즌을 보냈다.
3.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2015 시즌 종료 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1년 1M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불놀이를 하다가 방출되었고, 결국 2017년 포스트시즌 중에 가장으로의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는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다.
4. 그 외
아들이 프로 지명 전에 태어났는데, 로저 클레멘스를 동경하여 아들의 이름 카터를 '''K'''arter라 지었다. 아들 이름 짓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로켓맨인가...
하지만 로켓의 스테로이드 복용이 미첼 리포트에서 드러난지 1년쯤 지난 2008년 10월에 네브래스카에서 알코올을 복용하고 운전하는 것이 걸렸고 그 영상이 TV 프로그램에서 방송되며 대대적인 망신을 당했다. 재판에서는 유죄를 인정했고 보호관찰 명령을 받았는데, 이후 2009년 초반에 정신 못차리고 얻어터질 때마다 추신수처럼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술 빨고도 잘하는건 아무나 하는게 아닌걸까... 아무튼 팀에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면도 없고 팀에서도 평이 좋은 것을 보면 그냥 음주운전 스캔들은 잊고 싶은 흑역사가 된듯. 하지만 체중 조절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음주운전 스캔들은 자주 언급되며 조바의 애티튜드에 대한 의혹의 근거로 쓰이는 중이다.
박찬호가 뉴욕 양키스에 있었을 때 훈련사진이나 인터뷰를 보면 박찬호와 꽤 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박찬호의 '''설사드립(...)'''엔 아주 폭소를 했다고. 링크
[1] 최근에도 마약 구입이 잠복근무 경찰에게 단속되어 구속되었으며 현재도 가끔씩만 교류하고 지낸다고 한다. 구글에 Joba Chamberlain을 검색하면 나오는 무서운 아줌마(...)가 조바의 어머니.[2] 2010년대 활동한 MLB 선수 중 단 셋 뿐인 북미 원주민 혈통이다. 나머지 둘은 뉴욕 양키스의 나바호 혼혈 자코비 엘스버리, 밀워키 브루어스의 카일 로시.[3] 1라운드이긴 하지만 거의 2라운더나 다름없는 41순위 선수에게 110만불은 지나치단 의견도 많았다. 실링 자체는 뛰어나지만 몸무게도 300파운드 가까이 나가는지라 무릎 수술 경력이 있는 선수에게는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그와 비슷한 평가를 받던 조나단 브록스턴도 결국 체중 문제로 부상을 달면서 망가지기 시작한 점을 고려하면 체임벌린 역시 체중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4] 과 날카로운 슬라이더, 우타자용 커브, 좌타자용 체인지업의 조합은 CC 사바시아를 연상시키긴 했다만.[5] 조바가 매우 뛰어난 발전을 보이고 필 휴즈와 이안 케네디까지 나타나자 양키스는 "양키 클리파드"로 불리던 타일러 클리파드를 워싱턴 내셔널스로 보냈다. 그때 받아온 불펜요원 조나단 알발라데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201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가게 되었다.[6] 본인 말로는 집에 체육관을 만들어서 근육을 붙였고 기자들 평에도 몸이 단단해졌다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러셀 마틴 등 여러 선수들이 벌크업 한답시고 체중 불렸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맞았고 또한 조바의 경우는 체중 때문에 무릎 부상 우려가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체중이 느는 것은 절대 좋지 않은 일이었다.[7] 이렇게 불펜이 풍비박산나면서 새로운 팜 출신 셋업맨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데이비드 로버트슨이다. 로버트슨은 투수진이 모두 로또나 다름 없었던 2011 양키스의 디비전 우승에 있어 일등공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