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인 게이시
'''John Wayne Gacy''''''KISS MY ASS''' [1]
1942년 3월 17일 ~ 1994년 5월 10일 (52세)
1. 개요
미국의 대표적인 연쇄살인자이자 20세기판 H. H. 홈스. 평소에 광대 분장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해왔기에 '광대 살인마'라는 별명이 있다. 다재다능한 인물인데다 평상시에는 이웃들에게도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나, 실제로는 심각한 성도착증이 있었고, 결국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30여명에 달하는 젊은 남성과 소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2.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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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존 웨인 게이시.
게이시의 조상은 폴란드 및 덴마크 계 혈통이었으며, 1942년 미국 시카고에서 자동차 정비공인 아버지 존 스탠리 게이시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게이시는 심장과 몸이 약해서 대부분의 운동을 하지 못했고, 알콜중독자였던 아버지는 이런 게이시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겨 학대했다.[2]
게이시는 엄격한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아버지는 게이시를 얕잡아봤고 마마보이, 형편없는 계집애라고 끊임없이 모욕했다. 알려진 게이시의 기억은 자동차 부품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4세의 나이에 벨트를 채찍처럼 사용해 얻어 맞거나, 빗자루로 머리를 맞아 기절한 일 등이다.
3. 첫번째 결혼
게이시는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으나 노스웨스턴 비즈니스 컬리지[3]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신발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취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시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부장으로 승진했으며 그 해 마를린 마이어스라는 동료 직원과 약혼했다.
결혼 이후 게이시의 장인은 아이오와주 워털루에 있는 3개의 KFC 레스토랑을 구매했다. 게이시는 그곳으로 이사해 1966년부터 장인의 레스토랑 경영을 시작했고 제법 수익이 좋았는데 연 15,000달러(2018년 기준 115,847 달러)와 더불어 식당의 수익금도 받게 된다.
게이시는 2명의 자녀를 가졌고 게이시의 아버지는 아이오와로 찾아와 자신이 했던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정중히 사과하며 게이시의 능력을 인정했다. 게이시는 이 시기를 '완벽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 청년회의소에 참여해 사람들에게 치킨을 나눠줬고 대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4] 청년 회의소의 부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워털루에서 청년회의소란 스와핑, 마약, 매춘과 관련되어 있었고 게이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여러차례 어린 소년들만을 상대로 비역을 시도했고, 만약 거부한다면 농담, 도덕적 시험 따위였다고 둘러대곤 했다.
그러다 10대 소년들에게 저지른 성폭행이 1968년에 크게 걸려서 10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불과 18개월만에 풀려나왔다. 선고 당일 부인은 이혼을 신청했고 곧 정식으로 이혼하게 됐다.
4. 수감 생활
아나모사 주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게이시는 모범수로 살았다. 그는 1개월만에 교도소에서 명망을 얻었으며 18개월 이하의 짧은 수감 기간동안 50명에 불과했던 청년 회의소 교도소 지부 멤버를 650명으로 늘렸다.
게이시는 또한 교도소 수감자의 노동 보수를 늘리고 수감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종류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게이시는 교도소의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미니 골프장을 만드는 일도 감독했다.
1969년 12월 25일 게이시의 아버지가 간경화로 사망했고 소식을 들은 게이시는 바닥에 쓰러져 심하게 울어 교도소 직원들이 끌어내야 했다. 비록 아버지가 어렸을 적의 본인을 심하게 괴롭혔으나 가족간의 정은 남아있었는지 아버지가 죽고나자 매우 슬퍼했다. 장례를 위한 특별 외출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었고 투옥으로부터 2년 뒤인 1970년에 가석방 되었다.
5. 출소 이후
출소 이후 게이시는 어머니의 돈으로 시카고에 집을 마련해 레스토랑 주방 요리사생활을 했다. 게이시는 지속적인 남색성향을 보였고 몇 번 정도 기소도 당했지만 더 이상 징역살이는 하지 않았다.
71년 게이시는 두 딸을 가진 이혼녀 캐롤 호프와 재혼했다. 캐롤은 게이시 여동생의 친구였고 재혼 이후 게이시는 요리사를 그만 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요리사를 그만 둔 이후 게이시는 PDM(Painting, Decorating, and Maintenance) 건설이라는 건설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처음엔 간판 만들기, 콘크리트 붓기같은 비교적 간단한 일을 했었으나 큰 성장을 이뤄 인테리어, 리모델링, 건물 건축 등의 복잡하고 어려운 일까지 확장했다.
이윽고 PDM 건설의 연 매출 총액은 70년대 당시 200,000달러를 넘기 시작했고 사장이었던 게이시는 큰 부를 손에 쥐었다.
6. 두번째 이혼
1975년 말 게이시는 그의 아내에게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 했다. 그 해 어버이날에 부부가 성관계를 가졌을 때, 게이시는 아내에게 이 이후로 성관계를 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던 바 있었다. 게이시는 밤늦게 일을 나가 아침 일찍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이윽고 그의 아내는 게이시가 10대 소년들을 차고에 데려가는 것을 보았고 집 안에서 게이 포르노도 발견했다. 둘은 1976년 3월, 상호 합의 하에 이혼했다.
7. 지역 사회 자원봉사
노우드에서 게이시와 함께 살던 지역주민들은 게이시를 존경했다. 그는 74년부터 매년 열리던 지역 여름축제를 감독했는데, PDM 건설의 힘을 민주당에 무료로 제공하여 정치에도 영향력을 끼쳤고 노우드 도시 경관 조명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율방범대 대장으로도 추대되었으며 시카고에서 매년 행해지는 폴란드 제헌절 퍼레이드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게이시는 75년부터 체포되기까지 햇수로 4년간 이 퍼레이드의 리더를 맡았고 이로 인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영부인인 로자린 카터와도 사진을 찍었다.
지역 봉사협회에 가입한 이후 게이시는 졸리 조커(Jolly Joker)라는 광대 클럽에 대해 알게 되었다. 광대 클럽의 회원들은 병원에 있는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공연을 하고 기금 모금 행사 및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일을 했었는데 1975년 말 게이시는 광대 클럽에 들어가 의상을 디자인하고 광대 메이크업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Pogo the Clown"과 "Patches the Clown"이라는 자신만의 퍼포먼스 캐릭터를 만들었다.
일부 전문 광대들은 게이시의 광대 분장에서 입가 가장자리에 그려진 날카로운 모서리가 전문적인 광대들이 사용하는 둥근 테두리와 다르므로 아이들이 두려워 할 것이라 지적했다. 하지만 게이시는 여러 지역 파티, 민주당 행사, 아동 병원 등에 포고와 패치의 광대 분장을 하고 참석했으며 자신의 광대복을 입고 "The Good Luck Lounge"라는 자선행사에 여러 번 참여해 자선 행사에서 모금활동과 기부를 진행했다.
8. 범죄
게이시는 한창 사업이 번창하던 즈음부터 다시 범행을 시작했다. 문제는 단순한 추행이나 강간만 해서는 감옥에 간다는 것을 깨닫고 피해자를 확인사살하여 입을 막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물론 발각 시 100% 사형이지만 살인범은 사형이 무서워서 살인을 주저하지는 않으니 사형제도가 아무런 억제 수단이 되지 못했다. 게이시는 1972년 첫 살인을 저지른 후, 1974년(추정)과 1975년에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그의 대부분의 살해 행각은 그가 이혼을 하고 독거를 한, 1976년부터 1978년 사이에 일어났다.
피해자들은 처음엔 회사의 직원이 대상이었으나, 점점 대담해져서 길가는 소년들을 몰래 납치해서 강간 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게이시는 그렇게 남성 30여 명을 살해했다.[5]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이 실종되었다며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단순 가출로 판단하고 수사에 나서지 않았고, 이는 피해자들이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9.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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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시의 범행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은 1978년 12월 13일, 로버트 피스트(Robert Piest)[6] 살해 혐의로 체포되면서다. 피스트는 새로운 사장을 만난다며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약국을 다녀간 뒤 실종되었는데, 그 약국의 새로운 사장이 바로 게이시였다. 게이시가 수사협조를 거부하자 경찰은 영장을 발부받아 가택수색을 했다. 가택수색 결과 2개의 운전면허증과 반지들, 각종 마약과 포르노 잡지들과 게이 관련 서적이 발견되었다. 물론 이 것 만으로는 피스트 살해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 거기다 게이시의 이웃들은 게이시는 절대 그럴 인간이 아니라며 변호하여 수사는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경찰은 마약 소지 혐의로 기소한 뒤 수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이시의 집에서 피스트가 끊은 약국 영수증이 발견되었으며, 이전에 실종된 사람의 차가 게이시의 소유로 된 것이다. 결국 게이시는 자신이 피스트를 죽였고 시체를 차고에 묻었다고 진술한다. 경찰은 게이시가 진술한 차고를 발굴하기에 앞서 끔찍한 악취를 풍기고 있던 집의 마루 밑을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무수한 시체가 발굴되었다. 결국 1978년 12월 22일, 존 웨인 게이시는 자신이 1972년부터 살인을 시작하여 최소 30여 명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물론 이전에 게이시가 체포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실종된 피해자들을 단순 가출로 처리하거나, 살아남은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않는 등,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7] 또한, 당시 게이시는 마을에서 명망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게이시를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피스트의 경우에도 게이시의 집에서 비명소리가 나서 경찰이 출동했지만 게이시를 보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그나마 로버트 피스트 실종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그 부모의 말을 믿고 수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마침내 게이시의 범행이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있었다.
게이시가 밝힌 범행 수법은 먼저 화려한 말빨로 희생자를 유인하여 수갑을 채운 후, 입에 옷가지들을 집어넣어 비명을 못 지르게 한 다음, 강간과 고문을 하고 나서 살해하는 것이었다. 살해한 이유를 묻자 의외의 대답이 나왔는데, 살인을 즐겨서 그 많은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피해자가 나중에 고발할까 봐 죽였다는 것이다. 상술했듯이 게이시는 심각한 성도착증을 지닌 탓에 피해자들을 자기 욕구 충족 대상으로 여긴 것이었다.[8] 당연히 걸리면 사형이지만 애초에 재산범죄도 아니고 살인, 성폭력 등을 저지르는 자들이 사형제도를 의식하여 범행을 자제하지는 않는다.
어쨌건 경찰은 게이시의 진술을 토대로 그의 자택 마루 밑과 다른 소유지에서 29구의 시체를 찾아냈으며 근처의 강에서도 시체 4구를 찾아냈다. 게이시는 시체를 강에 버린 이유에 대해,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오물 문제 때문이라고 밝혔다. 어쨌거나 경찰이 찾아낸 시체는 최종적으로 33구에 달하며 게이시는 그들 모두를 살해한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물론 33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에게 내려질 처벌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1980년 재판 끝에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 확정되었다.
10. 재판
재판 때 게이시는 사법거래도 없이 모든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수사에도 협조적이었으나[9]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선처를 구했다. 변호인은 심신 미약을 입증하기 위해 증인으로 게이시에게 강간과 고문을 당했다 버려진 제프리 링갈[10] 을 내세웠다. 실제로 링갈은 게이시에게 당한 끔찍한 범행으로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었다.[11] 그러나 배심원들은 이 정도로는 게이시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고, 결국 1980년 사형이 선고되었다. 후에 게이시는 영장 발부가 유효하지 않았고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항소했지만, 항소법원과 대법원은 사형이 합당하다고 판단하여 기각했다.[12]
게이시의 사형은 3심 공판이 마무리되고 얼마 후인 1994년에 집행되었다. 게이시는 마지막 식사로 튀긴 새우 12마리, KFC 오리지날 치킨 한마리, 프렌치 프라이, 딸기 1파운드를 먹어치웠고 ''''KISS MY ASS''''[13] 를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게이시의 사형집행 중에 약물이 응고되어 체내에 주입되지 않아서, 튜브를 교체하는 등 소동이 있었고, 이 때문에 다른 사형수들에 비해 꽤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약간의 비난 여론이 있었지만 그를 사형시킨 사형 집행관은 '''"게이시는 그가 죽인 사람들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죽었소."'''라며 답변했다.
11. 기타
- 시신이 발견된 피해자 33명 중 6명의 신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2011년 신원 확인 수사가 다시 시작되어, DNA 대조법으로 35년 만에 William George Bundy와 41년 만에 Jimmy Haakenson의 신원을 확인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 나머지 6명의 신원은 오리무중인 상태다.[14][15] 그 이외의 피해자들[16] 의 정보는 이곳에도 있다. 링크
- 존 웨인 게이시가 처형당하기 전에 한 마지막 식사의 메뉴는 다음과 같다. [17]
- 12개의 새우 튀김
-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 한 버켓(Bucket)
- 감자튀김
- 딸기 1 파운드
- 사형수로 수감되어있는 동안에는 글과 그림에 집중하여, 1만 통이 넘는 편지글을 썼고 2천 점 이상의 유화(油畫)를 완성했다. 게이시가 가장 좋아한 그림의 소재는 광대의 초상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디즈니의 일곱 난쟁이나 찰스 맨슨, 제프리 다머 등 자신과 비슷비슷한 부류의 흉악 범죄자들이나 연쇄살인자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글과 그림 모두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능력[18] 뿐 아니라 예술적 재능도 충분했기에 기본 윤리 의식만 있었다면 나름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자가 욕망을 이기지 못해 자신과 수십 명에 달하는 타인의 인생을 모두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림 대부분은 피해자 유족들이 구입해 불태웠으나 [19] 소수의 작품은 살아남아 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러 명사들이 그 그림에 서명[20] 을 했고 그들은 게이시의 연쇄살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일반 화가인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악행 때문에 좋은 그림도 묻혀버린 셈.
이후 유가족들에게 게이시의 사형 집행 사실을 통보한 뒤 시신의 인수 여부를 물었고, 유가족이 수용하자마자 즉시 인도하였으며 이후 소재는 비밀로 부쳐졌다고 한다. 물론 시신 모욕은 미국에서도 범죄이므로 공식적인 소재만 비밀이지[21] 당연히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처리되었다. 일단 뇌는 연구소에 기증되었으며[22] 시신은 장례 이후 가족 묘지 혹은 가족들만 아는 모종의 장소에 안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3]
-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엔 아버지 "존 스텐리 게이시"에게 이유없는 학대를 받은 의외의 가정폭력 피해자로 볼수 있다. 물론 이런 그의 과거의 불우한 환경 만으로, 어른이 된 후 이러한 범행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아버지의 폭력성으로 인해 자식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가능성과 그의 아버지의 책임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 현재까지도 미국에 돌고 있는 이른바 광대 괴담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만화 스폰(spawn)에서 등장하는 광대 악마인 클라운(Clown)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인다.[24] 또한 스티븐 킹의 1986년 작품인 그것에 등장하는 광대 모습을 한 우주적 존재 캐릭터인 페니와이즈 역시 존 웨인 게이시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카우보이 비밥에도 게이시를 모티브로 한듯한 통푸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 일본 만화 아카메가 벤다!에 등장하는 인간쓰레기 집단 비밀경찰 와일드헌트의 일원인 챔프의 모티브가 게이시이다.
- 마릴린 맨슨(밴드)의 이전 맴버였던 마돈나 웨인 게이시는 마돈나와 존 웨인 게이시의 이름을 합친 예명이다.
- 조커가 나오는 실사 영화들에 간간히 묘사되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초반 은행강도 씬에서 강도들이 쓴 마스크는 존 웨인 게이시가 쓰고 다녔던 마스크와 흡사하며,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에선 주인공 아서 플렉이 공연하는 소극장 이름이 Pogo인데, 이는 존 웨인 게이시의 별명중 하나였던 "Pogo the Clown"를 떠올리게 한다.
[1] 그의 마지막 유언이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내 엉덩이에 키스나 하시지"인데, 쉽게 말하면 한국의 엿먹어, 좆까에 해당하는 욕설이다.[2] 실제로 1960년대 이전의 미국은 가부장적인 나라였다.[3] 노스웨스턴 대학교와는 다르다.[4] 할랜드 샌더스한테서 따온 듯하다. 마침 경영하던 곳도 KFC였고.[5] 후에 시신이 발견된 피해자 33명의 목록[6] 당시 15세 였다. 즉 1963년생이다.[7] 게이시가 피해자들의 시신을 완벽하게 숨겼기 때문에, 경찰이 실종된 피해자가 살해되었다고 추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8] 그러니까 피해자를 사람으로 안봤다는 거다.[9] 담당 수사관에 따르면, 게이시가 범죄 사실을 털어놓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10] 링갈은 게이시에게서 풀려난 후,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수사를 하지 않았다. 링갈은 1979년 게이시에게 당한 피해에 대한 회고록을 썼고 2000년 에이즈로 사망했다.[11] 이는 피고인이 이 정도로 자기 통제력이 전혀 없는 미친 자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 것이다.[12] 게이시가 사형되기 한달전 인터뷰를 보면, 그가 사형 판결에 굉장히 억울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범죄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을 정도.[13] "웃기고들 있네", 또는 "X까"로 해석한다. 이에 게이시의 재판을 담당한 변호인은 자기를 죽여봤자 희생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14] 윌리엄 번디와 지미 학켄슨은 가족및 친인척이 수사에 어느정도 도와줘서 신원확인 40년만에 된것이다.[15] 다만 2020년대에는 기술이 더 발전해 이 6명의 신원을 확인 할수 있겠다.[16] 신원 밝혀진 자들[17] 미국은 사형집행이 이루어질 때 주정부 법무부 대변인이 나와서 사형집행이 언제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언론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발표를 한다. 이때 사형수가 마지막 식사 때 어떤 음식을 마지막으로 주문하여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까지 모두 공개한다.[18] 고교 중퇴, 교도소 수감 등 인생의 2차례 큰 위기에서 모두 사업에 성공하여 재기하고 가정까지 이룬 것만 봐도 능력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19] 공식적으로 게이시가 죽은 교도소 앞에서 화형식까지 치렀다니 게이시에 대한 원한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20] 저명한 야구선수들은 물론이고, 닉슨 전 대통령마저 낚였다.[21] 당연히 경찰과 장례업자는 알고 있겠지만, 가족이 밝히지 말라고 하고 장례를 정상적으로 치렀으면 밝히지 않을 것이다.[22] 일반인의 뇌와 다른 점이 없어서 놀랐다고 연구자들이 증언하기도 했다.[23] 실제로 서양에서는 사형을 당하거나 무기징역을 살던 중 감옥에서 죽은 가족은 가문의 불명예라 하여, 인수를 거부하지 않고 가족묘지에 매장하더라도 어디가 그의 묘지인지 알 수 없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경우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죽거나 한 사람이 아니라 흉악범이 사형 혹은 감옥에서 병들어 죽었으면 가족들이 시신 인수를 하기는 하나, 대개 선산에 매장하고는 직계끼리만 위치를 공유하여 시기 맞춰서 간단한 제사만 지내주는 수준으로 제3자는 거기 있는 무덤이 누구 건지도 모르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단순히 백수 혹은 노숙자로 죽었거나 했으면 정상적인 장례 및 매장. 제사가 이뤄진다.[24] 연쇄살인마라는 특징은 빌리 킨케이드가 가져 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