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사정기비각
1. 개요
昌德宮 四井記碑閣
창덕궁 후원 부용지 권역에 있는 비각이다. 부용정의 서북쪽, 주합루의 서남쪽에 있다.
2. 역사
1460년(세조 6년)에 세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조카들을[1] 시켜 이 일대에서 샘물을 찾게 했다. 그리고 샘 4곳을 발견하여 우물을 만들고 각각 ‘옥정(玉井)’, ‘마니(摩尼)’, ‘유리(流璃)’, ‘파려(玻瓈)’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우물 4개 중 절반은 없어지고 2개만 남았다. 그런데 그마저도 망가졌다. 숙종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남은 우물 2개를 수리한 뒤# 우물의 역사를 담은 비석과 비각을 1690년(숙종 16년)에 지었다. 그래서 이름이 ‘4개(四)의 우물(井)에 대해 기록한(記) 비각(碑閣)’인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인 것이다.
3. 구조
-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둘렀고, 정면(동쪽 면) 앞에 작은 문을 두었다. --왜 만든거야— 문은 일각문으로, 문짝 하단부는 초록색 나무판이고 중간부와 상단부는 초록색 나무 살을 세워놓은 형태이다.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도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그 위에 용두를 두었다. 단청은 모로단청[3] 으로 칠했다.
- 정면(동쪽 면)은 비각 실내로 들어갈 수 있게 출입문을 두었다. 문 양 옆에는 벽을 두었다. 문짝과 벽의 하단부는 초록색 나무판이며 중간부와 상단부, 그리고 문상방 위에는 초록색 나무 살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측면과 후면은 다르다. 벽의 하단부를 벽돌로 쌓았고, 중인방 위에 초록색 나무 살을 세운 형태이다.
- 비각 북쪽에 돌로 만든 용머리 조각이 있다. 근처 우물과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용머리 입을 통해 부용지로 흘러든다. 조각 양 옆에 오얏꽃을 새긴 네모난 돌이 있는데 순종 이어 이후 세운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