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주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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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德宮 宙合樓
창덕궁 후원에 있는 2층 누각이다. 남쪽에 부용지와 부용정, 동남쪽에 영화당, 서남쪽에 사정기비각이 있다. 창덕궁 후원을 관람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건물이다.
2. 이름
이름 ‘주합(宙合)’은 《관자(管子)》에서 유래한 말로 ‘우주(宙)와 합일(合)된다’는 뜻이다.
이 건물 말고도 주합루란 이름을 가진 건물들이 몇 군데 더 있었다. 대부분 독서, 학문 등과 연관 있는 곳들이었다. 창덕궁 동궁에 딸린 도서관 승화루의 원래 이름이 소주합루(小宙合樓)였으며 경희궁의 동궁에 있는 도서 보관용 누각 이름 역시 주합루였다.
3. 역사
1776년(정조 1년) 9월에 정조가 규장각 건물로 처음 지었다.# 규장각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의 글과 그림, 유교(遺敎), 선보[1] 등을 보관하던 일종의 왕실 도서관인데, 세조 때에 처음 설립되었다가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숙종 시기에 규장각을 세워 선대왕들의 어제 등을 모셨으나 그 규모가 작았고 오랫동안 존재감도 별로 없었다.[2]
이후 정조가 즉위한 뒤에 척신들을 견제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 위한 핵심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폭 개편 및 사실상 부활시키면서 건립한 건물이 바로 주합루이다. 규장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2층으로 지었는데 각 층의 이름을 다르게 하였다. 책을 보관하고 사무실로 쓰는 1층은 어제각(御製閣)으로 했다가 숙종의 예를 따라 규장각(奎章閣)으로 고쳤으며, 정책을 논하고 독서하는 2층을 주합루(宙合樓)라 하였다. 규장각의 현판은 숙종의 친필로 쓴 기존의 것을, 주합루의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다.
규장각을 지으면서 기능을 나눌 부속건물들이 필요하여 서쪽에 서향각, 동북쪽에 천석정, 서남쪽에 봉모당과 열고관, 개유와를 지었다. 현재는 이 중 서향각과 천석정만 남아있다.[3]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고 관청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1781년(정조 5년) 규장각을 인정전 서쪽의 궐내각사로 옮기면서 나중엔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 불렀다. 그래도 주합루를 아주 방치한 것은 아니라서 글, 그림, 물품 등을 보관하는 기능은 유지시켰다.
이후 고종 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차츰 사용이 뜸해지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이 러시아 군대를 격파한 뒤 자축하는 파티(...)와 경부선 철도 부설 기념 잔치를 이 곳에서 열었으며# 대한제국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4] 한 뒤에는 순종이 여기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 일본 화가 사쿠마 데츠소노(佐久間銕園)를 접견하고 관료들과 연회를 열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큰 훼손 없이 오늘에 이른다. 2012년 8월 보물 제1770호로 지정되었다.
4. 구조
-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영역에 있다. 부용지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4방에 건물(부속 건물 제외) 4채가 조성되어있는데 그 중 부용지 북쪽의 높은 지대에 넓은 터를 만들고 세운 것이 주합루이다.
- 동, 서, 북쪽의 담장은 일반적인 벽돌과 사고석으로 되어있으나, 남쪽 담장은 취병으로 세웠고[5] , 취병 가운데에 주합루로 올라가는 문인 어수문과 어수문 양 옆에 작은 문 2개를 놓았다.
-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2층 건물이기 때문에 총 칸 수는 40칸이다. 1, 2층의 가장자리 칸들을 전부 툇간으로 꾸몄는데 바깥에 창과 문을 따로 두지 않았다. 실내공간은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1, 2층 합치면 총 12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으로 되어있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얹었다. 모든 기둥은 1층과 2층을 하나로 관통하는 이른바 통주(通柱)로 되어있다. 1층의 중앙의 바닥은 대청마루로 꾸몄고 양쪽에는 온돌을 설치했으며 2층은 전부 마루로 되어있다. #
- 2층의 거대한 규모나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일대에 지은 것을 볼 때, 정조가 이 기관에 어떠한 기대와 어떠한 무게를 두었는지 알 수 있다. 2층에 올라 부용지 일대의 멋있는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업무와 연구에 지친 관원들을 위해 이 곳에 짓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정부 관청 중 하나일 것이다.
5. 부속 건물
5.1. 어수문
昌德宮 魚水門
주합루의 남쪽에 있는 주합루의 정문이다. 이름은 물(水)과 물고기(魚)란 뜻으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그만큼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어수문은 왕만이 다니는 문이며 양 옆에 설치된 작은 문 2개로 신하들이 다녔다. 근데 이 문들이... 어수문과 달리 작아도 너무 작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갈까 말까한 높이인데 이는 ‘저런 자세로 들어가며 겸손함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닐까’라고 후원 가이드가 설명하곤 한다.[6]
1칸 너비로 2개의 사각기둥 위에 다포를 얹고 지붕은 돈화문, 숭례문과 같은 우진각 형태로 꾸몄으며 현판은 세로로 되어있다. 자세한 건물의 구조는 이 곳을 참조.
5.2. 서향각
昌德宮 書香閣
주합루의 서쪽에 있는 부속 건물로 동쪽을 향해 서 있다. 이름은 ‘책(書) 향기(香)가 난다’는 뜻으로 주합루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현판의 글씨는 정조 때 서사관(書寫官) 조윤형(曺允亨)이 썼다. 초기에는 신주나 영정 등을 옮겨 모신다는 뜻의 이안각(移安閣)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래는 서책, 그림 등을 보관하면서 각종 도서, 어진과 어필 등을 말리던 포쇄소였다. 포쇄란, 좀 스는 것과 습기가 스며 망실되는 것을 막고자 햇볕에 내어놓고 말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곳에서 신하들이 모여 임금과 토론하거나, 어진을 그리고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양잠소[7] 가 되면서 순정효황후가 이 곳에서 양잠[8] 하였다. 그래서 한동안 창덕궁을 안내할 때 양잠소로 언급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서향각 본래 기능으로 소개된다. 다만, '친잠권민'(親蠶勸民, 왕실에서 친히 누에를 치는 것은 백성들에게도 권해야 한다)이라는 게판과 서향각 기둥에 붙은 ‘어친잠실(御親蠶室,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방)’이란 주련은 지금까지 걸려 있다. 현재 일반 관람객의 출입은 금지되어있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총 24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되어있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전부 기와로 마감하였고 용두와 취두를 두었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정면 기준 출입하는 칸을 제외하고는 창과 툇마루 앞에 전부 난간을 설치하였다. 측면의 외부는 창의 높이를 짧게 한 다음 머름을 두고 그 밑을 벽돌로 마감하였으며 측면 가운데 칸의 경우, 머름 밑에 교창을 두고 그 아래를 벽돌로 마감하였다.
《동궐도형》을 보면 정면을 기준으로, 왼쪽부터 누마루 1칸, 온돌방 2칸, 대청 2칸, 온돌방 2칸, 그리고 다시 누마루 1칸으로 되어있다. 앞면과 뒷면은 툇마루로 꾸몄으며 누마루가 있는 칸의 앞면과 뒷면에는 툇마루를 두지 않고 누마루로 구성하였는데 누마루의 밑은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공간을 비워두지 않고 벽돌로 마감하였다. 창호는, 건물 외벽의 창의 경우 정(井)자 살로,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띠살로 만들었다.
5.3. 희우정
昌德宮 喜雨亭
서향각의 서북쪽에 있는 정자로 임금이 책을 보는 공간이었다. 1645년(인조 23년)에 세워졌으며 원래 이름은 취향정(醉香亭)이었고 초가로 되어있었다. 1690년(숙종 16년)에 오랜 가뭄으로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곧 비가 내리자 왕이 기뻐하며 이름을 비(雨)가 내려 기쁘다(喜)는 뜻의 희우정(喜雨亭)으로 고치고#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 비슷한 유래로 이름붙은 건물로는 같은 창덕궁의 성정각 영역에 있는 희우루가 있다.[9]
정면 2칸, 측면 1칸, 총 2칸의 간소한 건물로 지붕은 우진각 지붕,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를 올리지 않았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서쪽의 1칸은 온돌로, 동쪽의 1칸은 마루로 되어있다. 기단이 없는 대신 건물의 동, 남, 북쪽의 외곽엔 쪽마루를 두었다. 서쪽엔 책을 보관하는 책장을 가퇴 형식으로 설치했으며 책장의 아랫 부분은 목재를 낙양각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북쪽 담장에 희우정 영역의 정문이 일각문 양식으로 있는데 이름은 희우문(喜雨門)이다.
현재 일반 관람객의 출입은 금지되어있다. 현판의 위치가 조선시대와 달리 온돌방 쪽 칸 위에 걸려있어 고증 논란이 일었는데 2016년 문화재청에서 각 궁궐의 현판 원형에 대한 고증 조사를 실시할 때 밝혀졌고# 현재는 원형대로 대청 쪽 칸 위에 걸려있다.
5.4. 천석정
昌德宮 千石亭
주합루 동북쪽 언덕에 있는 정자로 주로 이 곳에서 학자들이 독서를 했고, 효명세자도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활용하였다.
천석정이 정식 명칭이나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란 현판이 걸려있어 보통 그렇게 부른다. 제월광풍관은 ‘비 갠 뒤(霽)의 밝은(光) 달(月)과 바람(風)’이란 뜻으로, 맑은 마음과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비유한 말이다. 전라남도 담양군의 소쇄원에도 같은 뜻의 이름을 가진 건물인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서쪽으로 1칸을 더 달아 누마루를 만들었는데 누마루의 높이가 본채보다 조금 높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홑처마에 창호는 띠살로 되어있고, 공포를 올리지 않은 민도리 양식으로 희우정처럼 단청도 칠하지 않아 일반 양반 집같은 느낌을 준다. 기단과 계단이 없는 대신 건물의 동, 남, 북쪽의 외곽엔 쪽마루를 두고 댓돌을 놓아 외부와 통할 수 있게 하였다.
본채 기준 제일 동쪽부터 대청 1칸, 온돌방 1칸이 있고 그 앞에 툇마루를 두었다. 제일 서쪽의 1칸은 공간을 3칸으로 다시 나누어 북쪽에 가로로 넓은 방 1칸을 두고 그 밑 칸은 왼쪽에 마루, 오른쪽에 온돌방을 세로로 길게 하여 두었고 그 남쪽에 누마루를 달았다.
6. 여담
- 주합루 일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규장각 팔경(奎章閣 八景)’이란 시가 있다.
> 봉모운한(奉謨雲漢) : 봉모당의 높은 하늘
> 서향하월(書香荷月) : 서향각의 연꽃과 달
> 규장시사(奎章試士) : 규장각에서의 시험보는 선비들
> 불운관덕(拂雲觀德) : 불운정의 활쏘기
> 개유매설(皆有梅雪) : 개유와의 매화의 눈
> 농훈풍국(弄薰楓菊) : 농훈각의 단풍과 국화
> 희우소광(喜雨韶光) : 희우정의 봄빛
> 관풍추사(觀豊秋事) : 관풍각의 가을걷이
> 서향하월(書香荷月) : 서향각의 연꽃과 달
> 규장시사(奎章試士) : 규장각에서의 시험보는 선비들
> 불운관덕(拂雲觀德) : 불운정의 활쏘기
> 개유매설(皆有梅雪) : 개유와의 매화의 눈
> 농훈풍국(弄薰楓菊) : 농훈각의 단풍과 국화
> 희우소광(喜雨韶光) : 희우정의 봄빛
> 관풍추사(觀豊秋事) : 관풍각의 가을걷이
[1] 왕실 족보.[2] 영조 시절에도 존재했다는 실록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폐지된 건 아닌 듯하다.#[3] 서북쪽의 희우정은 인조 연간에 세웠다.[4] 移御. 임금이 이사하는 것.[5] 나무로 뼈대를 세운 뒤 뼈대 사이마다 키 작은 나무나 덩굴 식물을 심어 자라게 하는 형태의 담을 말한다.[6] 다만 겸손함을 배우라는 뜻이라는 근거 사료라든가 유물이라도 제시되지 않는 이상은 진지하게 믿으면 좀 곤란하고(...) 그냥 '의미가 아닐까'. 즉 카더라 통신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하다.[7] 비단을 만들기 위해 누에를 치는 곳.[8] 누에 치기.[9] 여기 배경은 정조 시기. 1777년(정조 1년)에 매우 가물었는데, 희우루 건물을 중건할 때와, 완성되고 임금이 처음 행차할 때 비가 내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희우(喜雨)’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10] 實事求是.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