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부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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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德宮 芙蓉亭
창덕궁 후원의 정자이다. 주합루의 남쪽에 있으며, 창덕궁 후원을 관람할 때 주합루와 함께 가장 먼저 보는 건물이다.
'부용(芙蓉)’의 뜻은 ‘활짝 핀 연꽃’이다. 현재의 현판은 1903년(광무 7년)에 창덕궁 후원의 감독직을 맡았던 동농 김가진이 썼다.
2. 역사
조선 초 ~ 중기에는 없었으며 1707년(숙종 33년)에 창덕궁 후원에 처음 세웠다. 당시 이름은 택수재(澤水齋)였으며, 이후 1792년(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조 연간에는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와 같은 영역이라 왕과 신하들이 활동 공간으로도 많이 활용하였으나, 정조 사후에는 단순한 휴식 공간으로 주로 이용하였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헐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2012년 3월 2일에 문화재청에서 보물 제1763호로 지정하였으며 2012년 9월 보수 공사 때 일제 때 변형된 지붕을 《동궐도》대로 복원하였다.#
3. 구조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으로, ‘丁’자와 ‘亞’ 자를 합친 듯한 복잡한 구조의 형태이며 마치 연못에 발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특징이다. 자세한 건물의 구조는 링크 참조.
3.1. 주련
4. 부용지
부용정의 연못이다.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인 네모난 형태로 수심은 약 1.5m이며 연못 가운데엔 둥그런 섬을 두어 동양의 전통 세계관인 천원지방(天圓池方)을 나타내었다.[1] 남쪽엔 부용정, 북쪽엔 주합루, 서쪽엔 사정기비각, 동쪽엔 영화당이 있다. 위에 언급한 ‘부용(芙蓉)’이란 이름 뜻 처럼 원래 연못에는 연꽃이 많았다.
연못 자체는 부용정보다 역사가 훨씬 길다. 1634년(인조 12년)에 연못을 파고 뱃놀이를 했다고 하며 정조 시기에 고쳐지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부용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찾기 어려우며, 창건 당시에는 ‘용지(龍池)’라 불렸고, 숙종 ~ 정조 시기엔 ‘태액지(太液池)’라 하였다. '태액(太液)'의 뜻은 ‘큰 연못’이고, 옛 중국 황궁의 연못 이름에서 유래하였다.[2]
5. 여담
- 1795년(정조 19년)에 있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종친들과 신하들을 초청해 낚시와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하들과 여러 번 낚시와 뱃놀이를 즐기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 정조가 어느 날 부용정에서 신하들과 술 자리를 가질 때의 일이다. 악기와 상차림 준비가 다 됐을 때, 마침 이 곳에 둥지를 틀었던 제비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려고 빙빙 돌면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가엾게 여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로 부용정에 나올 때마다 제비둥지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6. 매체에서의 등장
조선을 다룬 사극에서 후원으로 많이 나왔다. 아무래도 세트로 후원을 재현하기에는 무리라서 그런 듯하다. 다만 정조 이전 시기에도 이 일대가 나와 고증 오류가 많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중종 시기를 다룬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조정은 분)이가 성인(이영애 분)으로 변하는 곳이 부용정 일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