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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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당시 미국 소유의 철갑선들과 기타 전함들의 모습.#
영어로는 Ironclad(ship), Ironclad warship. 독어로는 Panzerschiff. 철갑으로 선체를 완전히 감싼 군함을 말한다. 번역시에는 철갑선, 장갑선, 철갑함, 장갑함 등으로 번역한다.
1. 개요
일반적으로 철갑선은 금속제 선체와 유탄포, 증기 엔진을 갖춘 근대시대의 군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실제 선박이나 연구자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일례로 영국의 워리어함처럼 기본 구조부터 완전히 철제인 철갑선(Iron Hull-Ironclad)이 있었는가 하면, 미국 남북전쟁 당시 모니터 함을 포함한 남군의 철갑선들이나 최초의 철갑선 '라 글루와'의 경우 목조선에 철갑을 씌우거나 목조 골격을 갖고 있었고(Wooden Hull-Ironclad), 위의 세 가지는 각자 개별적으로 발전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철갑선이라 불려온 것들을 위주로 설명한다.
기존 전열함도 포함외교에 사용되었지만, 진정한 포함외교가 시작된 것은 이 철갑선이 탄생한 이후이다. 이런 철갑선은 철갑을 두른 그 특성상 기존의 구형 화포로는 흠집이나 내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아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내지 못하던 국가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 초창기에는 철갑선들도 싣고 있는 화포로 상대 철갑선의 장갑을 뜷을 수가 없어서 철갑선들끼리 싸울 때는 사장되어 있던 충각 공격이 부활하기도 했다.
2. 역사
2.1. 철갑선의 전신 1 : 증기추진 군함
근대시대 증기기관의 발달로, 증기기관은 점차 선박들의 동력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싸움배의 경우 당시 해군 강국이던 영국은 기존의 제해권 장악에 만족하여 증기선의 도입에 부정적이었으며, 반대로 영국에 밀려 해상 장악에 골몰하던 프랑스에서 적극적으로 증기추진 군함을 연구개발하기 시작했다. (다만 나폴레옹 시절에는 증기기관 기술의 미흡함과 나폴레옹의 보수성으로 거부되었다)여기에 스크류 프로펠러의 개발은 이러한 점을 더욱 부채질하였는데, 기존의 외륜식 추진장치는 장착시 거대한 크기 때문에 적의 피격에 노출되기 쉽고 거대한 수차를 장착하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장착하는 곳의 대포의 수를 줄여야 했기에 사랑받지 못했으나 스크류 프로팰러는 그러한 단점을 극복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외륜선도 배 내부에 수차를 장착하는 방법도 고안되었으나, 조종이 매우 힘들어져 로버트 풀턴이 만든 시제품 하나 나오는 정도로 도입이 끝나버렸다. 그래서 1840년대 스크류 추진장치가 배에 도입된 해 중반에 프랑스는 최초의 증기 프리깃을 개발했고, 영국의 제해권에 도전하기 위한 전폭적인 지원과 노력으로 1850년 최초의 증기 추진 전열함 나폴레옹 함이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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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증기추진 전열함인 프랑스의 나폴레옹 함. 나폴레옹 함은 90문 전열함으로 전통적인 전열함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풍향/풍속에 관계없이 증기기관으로 12노트의 속도를 내는 게 가능했다.
나폴레옹 함의 개발로 프랑스 해군이 당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 해군에게 도전장을 내밀자 그전까지 증기선 도입에 부정적이었던 영국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재빨리 자국의 산업 역량을 증기군함 개발에 투자하여 결과적으로 양국의 해군 군비 경쟁을 불러오게 된다.
2.2. 철갑선의 전신 2 : 부유포대
증기추진 군함이 증기기관의 발달로 태어났다면, 부유포대(Floating battery)는 유탄포의 발달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1820~1830년대, 산업기술의 발달로 대구경 고화력의 유탄포가 등장하게 되었고, 더불어 적 선박을 원거리에서 유폭시키거나 불질러 파괴하는 화공기술도 발달되었다. 이런 유탄포의 화력은 기존의 목선으로는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기에 유럽 각국의 해군은 이 유탄포를 설치하고 적의 포격에서 버텨낼 수 있는 부유포대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당연하지만 이 부유포대의 개발과 경쟁, 발전 역시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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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프랑스 부유포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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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에서 활약하는 부유포대.
하지만 이 부유포대는 높은 화력과 내구력을 가지고 있으나 엄연한 선박에 부유포대란 이름을 붙인 것에 걸맞게 바지선처럼 자체 추진능력은 거의 없다시피했기에 극히 제한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크림 전쟁에서 부유포대로 큰 재미를 본 프랑스는 그 잠재력에 빅딜을 하게 되었다. 복잡한 기동을 할 필요 없이 말뚝딜을 때려박는 데에는 기동성을 포기하고 방어력-화력에 몰빵한 이놈이 제법 쓸모있었던 것이다.
2.3. 철갑선의 등장
1850년 대 말, 프랑스는 영국의 해상 장악에 도전하는 빅딜을 했다. 그 빅딜이란 다름아닌 최초의 본격적인 철갑선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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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있는 최초의 철갑선인 라 글루와(Gloire)의 모습. 1857년 건조가 시작되어 1859년 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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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 이전의 모습.
라 글루와는 기존의 전열함을 개조한 것으로, 목재 골조에 장갑판과 증기 스크류 추진 엔진을 장착한 최초의 철갑선이었다. 이후로 프랑스는 철갑선 제조에 열을 올려 지속적인 철갑선 건조/보급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영국은 프랑스의 철갑선을 압도하기 위해 뛰어난 기동성과 화력을 갖추기 위해 프리깃함을 저본으로 하여 철갑선을 개발했고, 그 결과 1860년 라 글루와를 능가하는 철갑선 워리어함을 개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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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쪽 모습 #
영국의 철갑선 워리어(HMS Warrior) 함. 지속적인 유지보수를 거쳐 현재도 영국 해군의 상징으로 건선거에 보관되어 있다. 라 글루와 함과는 달리 철골 구조로 만들어진 완전한 철제 철갑선이었다.
이런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은 주변 유럽 각국들에게도 경쟁심을 불어넣었고, 유럽 전역에서 활발한 철갑선이 연구개발 열풍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활발하게 철갑선 경쟁을 벌인 유럽에서는 철갑선을 동원한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고(이 대형 철갑선들의 위력은 너무 강력해서 자연스럽게 전쟁억제효과를 냈다. 영국 해군의 상징이던 워리어 함도 실전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사실 워리어에 감히 덤벼들만한 배가 없기도 했다),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 최초의 철갑선 대결이 펼쳐졌다.
2.4. 최초의 철갑선 대결, 미국 남북전쟁
미국 남북전쟁에서 양측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철갑선의 개발과 수입, 기존 목조선의 철갑선 개조, 실전 배치에 적극적이었다. 먼저 시작한 것은 해군력이 밀리던 남군으로, 1861년 10월 12일 매너서스 함을 실전에 투입해 북군의 증기추진 슬루프함들을 충각으로 공격해 전과를 올렸고, 뒤이어 버지니아 함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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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의 매너서스 함(CSS Manassas). 스팀펑크에 나올 법한 디자인이지만 엄연히 1860년대에 만들어진 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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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의 버지니아 함(CSS Virginia).
이 때 북군은 7척의 철갑선을 건조 중이었고, 스웨덴의 조선 기술자 존 에릭슨이 설계한 모니터 함(USS Monitor)이 완성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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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함의 전체 모습(모형)과 단면도. 잠수함 같지만 잠수함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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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군의 철갑선 뉴 아이언사이즈(USS New Ironsides). 목조선에 장갑판을 두른 배로,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해안을 봉쇄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자신도 해안포대에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
이후 1862년 3월 9일, 햄튼 수로에서 역사적인 철갑선끼리의 첫 전투인 햄튼 수로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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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군의 모니터 함과 남군의 버지니아 함의 대결.
양측은 몇 시간 동안 서로에게 포격을 가하면서 충각 돌격을 시도했으나, 충각 돌격은 전부 실패했고 포탄 역시 약간의 부상자만을 만들고 심각한 피해를 주지 못했고, 결국 서로가 멀어지며 무승부로 끝났다. 다만 목재골조인 버지니아 함은 모니터 함과 달리 포격의 충격으로 내부 구조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은 상태였기에, 모니터 함에 판정승을 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전투 자체는 버지니아 함의 포격이 모니터 함의 조타실에 적중하면서 모니터 함의 함장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끝났다. 이에 모니터 함이 후퇴하고, 버지니아 함은 수리를 요하는 자체 피해도 있고 이미 이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추격을 포기했다. 따라서 전술적으로는 버지니아 함의 승리라고 보기도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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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이 사용한 리치먼드 함(CSS Richmond)의 모형(출처). 당시의 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아예 뱃머리에 활대기뢰를 달았다.
이후 186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측과 이탈리아 사이에 펼쳐전 리사 해전에서 철갑선은 목조선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의 주력 함선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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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해전을 묘사한 그림.
리사 해전은 트리팔가르 해전 이후 쓰시마 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가장 큰 규모의 해상전이었으며, 여기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은 기습을 걸어, 철갑선들이 제1선에서 이탈리아군의 맹렬한 포격을 철갑으로 무력화시키며 충각 돌격을 감행해 큰 전공을 세우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탈리아군의 졸전을 논하는 일부 글에서는 이를 이탈리아군의 멍청함으로 인해 패했다고 주장하는데, 맞는 이야기다. 당시의 화포로는 철갑선의 철갑을 뚫을 수가 없었기에 충각돌격은 최선의 선택이었는데 그걸 무시한데다가 함대의 지휘를 맡은 제독이 미리 연락도 안하고 기함을 바꾸는 등 어리석은 지휘를 하는 바람에 이탈리아 함대가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열함에는 충각 같은 장비가 없어 돌격에 의한 피해는 비슷하거나 전열함 쪽이 더 큰편이었지만 이탈리아 함대의 모랄이 터저서...
이러한 철갑선들의 전공은 목조 전함의 시대가 끝났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으며, 각국이 철갑선을 주력으로 배치하는 시대를 선포하는 효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철갑선의 시대를 연 모니터함과 버지니아함의 최후는 안쓰러웠다. 모니터함은 흘수선이 극도로 낮은 구조적 문제로 인해 운행 중 폭풍우에 의한 침수로 침몰했다. 버지니아함은 정박해 있던 노퍽이 점령되자 배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자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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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876년, 프랑스에서 세계최초로 선체 전부를 철제로 제작한 함선인 르두터블 함을 진수시켰다.
2.5. 철갑선 시대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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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갑선에서 전드레드노트급함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때, 포탑이 도입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의 철갑선들의 모습.@
엄밀히 말하면 철갑선은 목선의 경우처럼 완전히 새로운 성격의 배의 등장으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뢰와 어뢰정, 그리고 어뢰정을 비롯한 소형의 고화력 선박을 주력으로 삼자는 청년학파가 일시적으로 득세하긴 했지만 당시의 기술적 문제와 외양에서 활동하는 데 한계가 명확한 소형선의 단점으로 인해 철갑선의 아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당시의 잠수함은 그렇게 위협적인 수준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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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기의 철갑선 와스카르(Huáscar) 함.* 본래 페루 해군 소속이었으나 해전에서 칠레 해군에게 나포되어 지금은 칠레의 소유다.
그래서 철갑선 시대의 종말은 1890년대에 들면서 기존의 '철갑선(ironclad)'이라는 표현이 점차 사라지고 '전함(battleships)' 이나 '장갑순양함(armored cruisers)'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1890년대 중반~1905년. 1906년은 그 유명한 드레드노트함이 등장한다!)는 이른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전노급전함, Pre-dreadnought)형의 싸움배들이 주력을 차지해갔고, 이들은 기존의 철갑선들보다 더 발달된 선체와 포탑의 일반화, 더 강력한 대포를 장착한 배들이었다. 그러나 이 배들도 따지고 보면 철갑선이 발달한 것이었고, 실제로 철갑선은 이전부터 점차적으로 선체와 내연기관의 발달, 개방된 구조의 포좌/포대를 밀폐된 장갑포탑으로 변경하는 식으로 계속 변하고 있었다.
즉, 철갑선의 뒤를 이어 등장한 전드레드노트급 역시 철갑선의 자손으로 볼 수 있으며, 철갑선이 사라지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성격의 배의 등장으로 밀려난 게 아닌 시대에 맞는 변화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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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드레드노트급함(Pre-dreadnought battleship)인 USS 텍사스. 이후 영국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드레드노트급 함들은 싸움배의 주력이었다.
3. 번외 : 동양의 철갑선 이야기
여기서 잠시 화제를 돌려보자. 동양에는 철갑선이나 그와 유사한 배가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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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에서 복원한 거북선의 모습(출처). 왼쪽의 전라좌수영귀선은 방호판에 철갑을 씌운 형태로, 오른쪽의 통제영귀선은 철갑이 없는 형태로 복원했다.
일단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리나라의 거북선이다. 확실히 거북선은 전근대시대의 선박 중 여러 가지로 가장 철갑선에 근접한 배인 것은 사실이다. 거북선은 기존의 동양 선박들과 달리 완전 밀폐된 방호판을 가지고 있었고, 도선전을 철저히 배제한 채 화력전과 당파전에 최적화된 구조를 가진 배였다. 하지만 거북선이 완전한 철갑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분분하다. 거북선항목에서 보듯이 거북선에 철갑을 씌웠는지조차 현재로서는 100% 답을 내리기가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만 <군함의 역사>(원제 History of Warships: From Ancient Times to the Twenty-First Century)의 저자 James L.George가 저서에서 밝힌 것처럼, 거북선을 철갑선과 연관지어 보는 것에 긍정적인 이론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중국의 몽충(蒙衝)[3] 이나 누선(樓船), 옥선(屋船)등 선체 상부에 사람을 보호하는 구조물을 세운 배들은 많다. 그러나 이런 배들은 방패판과 다락집을 설치해 어느 정도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지, 거북선이나 철갑선처럼 통째로 완전 밀폐 방호판을 두른 선박은 아니다. 또한 일본의 안택선중에 텟코센(鐵甲船)이라는 함종이 있으나, 이 역시 완전한 형태의 방호 장갑을 두른 것이 아니라 선체 겉에 철을 씌운 수준이다.
사실 철갑선의 정의 자체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다. 때문에 완전 밀폐식 방호판을 설치한 배를 장갑선이라 분류하고 거북선을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더 자세한 논의는 거북선항목이나 이 링크로 대신한다.
거북선을 제외한다면 서양 철갑선과 유사한 배로는 일본의 메구라부네가 있다. 거북선의 일본식 이름이기도 한데,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정식으로 서양식 철갑선이 동양에 전해지거나 만들어진 것은 근대에 접어들어서이다. 먼저 우리나라를 보면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대장장이 김기두와 강윤에게 명해 서양에 대적할 만한 무기를 만들 때,[4] 대동강에서 건져올린 제너럴 셔먼 호의 부품과 비슷한 시기 한국에 들어온 중국 책인 '해국도지'에 실려있는 서양 화륜식 싸움배 설계도를 바탕으로 전국의 철과 청동을 긁어모아 목탄증기갑함(木炭蒸汽甲艦)이라는 배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함체를 만들었어도 그 당시 최신장비였던 내연기관을 한번보고 어떻게 만들어볼 도리가 없었으므로, 평양에 보관중이던 셔먼 호에서 내연기관을 가져와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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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너럴 셔먼 호로 알려진 USS 프린세스 로얄의 모습. 이 배가 제너럴 셔먼 호와 동일한 배라는 주장이 있으나, 영어판 위키백과에서는 관련 미 해군 기록에서 셔먼 호 사건과 맞지 않아 부정하고 있다. 제너럴 셔먼 호는 대동강에 처들어왔다가 조선군의 화공에 침몰했고, 사건 이후 부품과 무기를 건져올려 평양에 보관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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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제너럴 셔먼 호 관련 의혹을 주장하는 선박 CSS Shenandoah 사진.
흥선대원군 집정 전후의 야사를 다룬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따르면 한강에서 치러진 진수식 때 움직이기는 했으나 목탄의 화력 부족으로 고작 '''10자''' 전진하더니 제자리에 멈춰 버렸다.[5] 그것도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조선 백성들이 모여 구경하던 시운전 당시에. 결국 작은 배들과 줄을 연결해 그 배들로 끌어 움직였다. 근세조선정감에서는 당시 흥선대원군이 너무나 부끄러워했고, 이후 그 배를 부숴 대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는 기록이 다르다. 작동은 물론 화포를 배치하고 발포로 목표물을 부숴버리는 데 성공하는 등 상당히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고, 천/지/현 총3척을 만들어 강화도에 훈련용으로 배치했다는 기록도 있는데다,[6] 근세조선정감의 경우 야담집이라 완진히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당시의 조선의 기술 수준이나 상황으로 보았을 때 성능은 제대로 작동했다고 쳐도 목조 범선을 개량한 초기 철갑선 수준이지 당시 서양의 더 발달된 철갑선들에 비하면 뒤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해국도지에 실린 증기선과 와트식 증기 엔진의 설계도 링크
다만 같은 책에 실린 서양식 포가를 본뜬 포차인 마반차와 수뢰의 경우에는 근세조선정감이든 다른 기록이든 호평 일색이다. 나중에 고종이 양무호(揚武號)와 광제호(光濟號)를 일본에 발주해 도입하나 양무호는 대포를 장착한 석탄 운반선, 광제호는 철갑선 이후의 전함이라 논외. 그나마도 양무호는 일본의 사기+고종의 자존심 채우기의 결과물이었다. 광제호는 그나마 나았지만 정작 우리는 배를 다룰 인력이 없어 제대로 쓰지도 못했고, 오히려 일제시기 일본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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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호(揚武號). 무장은 8cm(약 3인치) 포 4문과 5cm(약 2인치) 포 2문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낡은 고물 속사포였다. 1909년 일본 해운회사 하라다 상점에 4만 2천원에 매각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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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제호(廣濟號). 무장은 3인치(7.62cm) 포 3문. 일제 패망 이후 일본인들의 귀환에 사용되었던 것을 끝으로 한국에서 사라졌다. 설치된 통신장비'''만'''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나마 한국사에 남긴 족적으로는 1910년 9월 월미도에 설치된 등대 무선소로 첫 무선전파를 발사/교신에 성공해서 한국 무선통신사에 한 줄을 그은 것.#
중국의 경우 이홍장의 북양 함대에 서양에 발주해서 만든 철갑선들이 몇 척 있었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게 독일산 정원함(定遠)과 동형함 진원함(鎭遠)이다. 두 배는 배의 규모도 아시아에서 가장 컸으며, 심지어 당시 아시아에 배치된 유럽 열강의 대형 철갑선들조차 압도하는 크기를 가진 초 대형함들이었다. 청나라는 북양함대의 철갑선들을 통해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서양 열강 7개국 다음가는 세계 8위의 해군력을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청나라 해군은 청일전쟁 당시 보유한 함대 전력으로 일본을 크게 능가했었다. 열강들도 주력함대는 유럽 본토 방어에 배치해야 했으므로, 열강들의 2급 전력인 동양함대나 아시아함대 등은 청 함대를 쉽게 여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그 진면목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이들 철갑선은 대구경 화포를 탑재하여 위력은 매우 강했으나 당시 서태후가 이화원을 지으면서 공금을 합법적으로 횡령하는 바람에 위기를 맞이한다. 어디가 합법적이냐 싶겠지만, 일단 국왕권이 강한 절대왕정인 청나라에서 왕족이 만들고 싶은 거 만들겠다며 나랏돈 맘대로 가져가는데 누가 태클을 걸겠는가. 했다가는 인생퇴갤인데. 참고로 이때 서태후가 횡령한 돈으로 만든 것 중 대표적인 게 이화원의 석방(石舫). 위정자의 정신상태가 나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려주는 사례 중 하나다. 덕분에 관리/유지비는 물론 포탄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전함 포탄을 얻어맞은 일본 해군은 포탄에서 터지는 콩가루를 맛보고) 진원함의 경우 일본에 노획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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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원함. 무장은 30.5cm 20구경 연장포 2기 4문, 15cm 40구경 단장포 4기 4문, 6파운드 속사포 2기 2문, 3파운드 속사포 8기 8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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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함. 무장은 305mm 연장포 2기 4문, 150mm 포 2문, 57mm 속사포 2문, 47mm 속사포 2문, 37mm 포 8문, 14인치 어뢰발사관 3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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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함의 구조. 출처는 독일어 위키백과*
일본의 경우 보신전쟁 이후 미국에게서 스톤월함[7] (CSS Stonewall)을 사들여 이즈마라고 이름지었다가, 다시 코테츠로 이름을 바꾼다.[8] 처음 남북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미국 남군측의 발주를 받아 만들어졌다가 정작 활약하지 못했고, 나중에 일본에 수입되어 에조 공화국과의 해전과 러일전쟁 당시 활약했다. 함수부분이 해면으로 갈수록 뾰족한 것은 충각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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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테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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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테츠의 내부구조. 출처는 독일어 위키백과*
그 다음으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1864년 류조(龍驤, 일명 조쇼마루, 2차대전시의 항공모함이 그 이름을 이었다.)를 영국의 지원을 통해 스코틀랜드에 발주하여 기함으로 배치하였고, 1878년 후소(扶桑, 1914년 취역한 동명의 전함와는 다르다)를 영국에서 발주해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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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조. 무장은 6.5인치(170mm) 포 2문과 5.5인치(140mm) 10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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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소. 무장은 240mm/20구경 포 4문, 170mm/25구경 포 4문, 7.5mm포 4문, 355.6mm(약14인치) 어뢰 2정. 참고로 이 배의 건조에 도고 헤이하치로가 관여하였다.
이후로는 장갑순양함, 전 드레드노트급 함들이 등장하면서 철갑선의 주력시대는 끝나게 된다.
4. 기타 정보
초기의 철갑선들은 근해나 강에서 활동하던 철갑선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돛을 달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외양에서 석탄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 열강의 해외진출이 확대되면서 석탄 보급 역시 안정화되었고, 이후로는 점차 돛이 사라져 갔다.
또한 초기의 철갑선들은 당시에는 좋은 강재를 만들기 어려웠고, 싸움배 제작용으로 이미 대량으로 사서 쌓아둔 목재의 소비를 위해 목조선이나 목조 골격에 철판을 덧붙이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사실 1830년대부터 철골 구조를 선박 제조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때는 기술의 부족으로 철골 구조선은 외부 충격에 쉽게 구조가 변형되었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물에 닿은 철이 부식되는 문제 때문에 외양으로 나가는 철갑선들은 추가적으로 구리 코팅까지 필요로 해 많은 돈과 노력을 요구하였다. 이후 1870년대 공업의 발달, 특히 뱃세머 공법을 통해 쉽게 다량의 강재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완전 철골 구조선들이 주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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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의 확장팩 대전사에 장갑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위 사진이 게임 속 모습으로 뒤의 은색 배 두 척이 철갑선.
그냥은 뽑을 수 없고, 유럽 열강의 경우 혁명을 한 이후 홈 시티 카드로 받아올 수 있다. 받아올 수 있는 횟수는 무한정이나 한번에 최대 2척만 배치 가능. 성능이나 유닛의 성격은 프리깃과 모니터함의 중간 정도. 아메리카 원주민 국가들은 생산할 수 없다. 아시아의 경우 영사관에서 포르투갈과 조약을 체결하면 업그레이드로 단 1회에 한해 한 척을 받을 수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함선에 보너스를 주는 카드가 많다보니(특히 일본), 한 척의 성능만 놓고 보면 카드 잘 발라준 '''동양이 앞선다.''' 어?[9][10]
토탈 워: 쇼군2/사무라이의 몰락에도 등장. 로어노크, 로셰앙, 워리어의 3종류가 등장하며, 셋 중 하나만 골라 한척만 배치 가능하나 성능은 가히 바다의 제왕급. 본항목에도 언급된 코테츠 또한 3함종보다 한급 낮은 함선으로 등장하며, 6척의 생산 제한이 걸려 있고 저 셋보다는 약하지만, 역시 다른 함선에 비하면 매우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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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5에 철갑함이란 이름으로 등장. 산업 시대부터 생산 가능하다. 위 사진이 그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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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상 모습.*
해상 유닛이나 연안 항해만 가능하며(게임 시작하자마자 대양항해가 가능한 폴리네시아는 예외), 업그레이드시 전함으로 승급한다. 좀 늦게 나오지만 더 강력한 거북선이라 보면 된다. 하지만 거북선의 기본 성능이 워낙 좋아 실제론 거북선보다 조금 더 좋은 정도. 거북선의 하위판인 캐러밸은 말할 것도 없다.
확장팩에서는 성격이 약간 바뀌는데, 우선 대양항해는 일단 가능해진다. 다만 연안항해시 행동력효율이 2배로 증가되므로 연안항해에 유리한건 여전하다. 다만 새로이 추가된 해양근접유닛으로 편성되었기에, 해안도시 공격시엔 행동력이 살짝 곤란할지도? 여담이지만 업그레이드 유닛이 전함에서 구축함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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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워 시리즈중 나폴레옹: 토탈 워에도 출연한다. 위는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의 포트릿.#
기존의 엠파이어: 토탈 워에 등장했던 증기선(Steamship)의 개량형 선박이다. 설정상으로는 철갑을 덮었다고 하지만 정작 게임 상에서는 선체 어디서도 철갑을 찾아볼 수도 없고, 고급 선박이라고는 해도 범선 중 최강급인 전열함과 붙으면 작살난다. 증기기관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함포 수가 고급 전열함보다 적기 때문. 기억하자. 전열함의 천적은 같은 전열함 아니면 구포함/로켓쉽이다.
전함소녀에서 철갑선 버지니아가 보스로 등장한다. 버지니아도 뜬금없지만 더 뜬금없는 줌왈트급의 등장으로 묻혔다.
바람의 검심에도 연옥이라는 이름의 철갑선이 등장한다. 실제 역사상의 철갑선인 코테츠와 유사한 외관과 스펙을 갖췄으며 시시오 마코토가 흑선내항을 재현하기 위해 구입했다.
6. 관련 항목
[1] 그리고 버지니아 함은 봉쇄된 항구에서 자침했고 모니터 함도 이동중 태풍으로 침몰해 둘 다 격침되지 않았다.[2] 그 때문인지 문명 5 오리지날 버전에서는 전함을 철갑선의 업그레이드 개념으로 내놓는다. 나름의 고증일지도.[3] 몽동이라고도 부른다[4] 이 두사람은 면제배갑을 제작하는데도 주력했던 사람들이고, 특히 김기두는 당대 최고의 대장장이로서 유명한 사람이었다.[5] 당시 서양에서 사용되는 연료는 당연히 석탄이었다.[6] 배와 항해의 역사(김성준 저), 화염조선(박재광 저)등 참조[7] 함명에서 볼 수 있듯이 남부연합이 덴마크에서 발주했다가 본국으로 오는 길에 전쟁이 끝나서 미국 손으로 넘어왔다. 스톤월은 그 유명한 명장 스톤월 잭슨 장군의 별명에서 딴 것.[8] 참고로 이름이 참 많이도 바뀌고 팔자도 기구한 배인데, 처음 프랑스의 라르망 조선소에서 만들 때의 이름은 '스핑크스'였고, 남부연합에 매각되기 전 프랑스가 법을 바꿔 판매를 불허하자 덴마크에 '스텔쾨더(Stærkodder)'란 이름으로 매각되었으나 라르망 조선소와 덴마크간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후 어찌어찌 남군에 팔려 '스톤월함(CSS Stonewall)'이란 이름을 받고 태평양 건너 미국에 도착하니 구입한 남부연합은 박살난 상태였고, 배의 책임자 페이지 선장은 쿠바의 해군 대령에게 16,000달러에 팔아버렸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다시 돈을 들여 이 배를 사왔고, 전쟁이 끝난 상태라 소집해제되어 항구에서 조용히 쉬나 싶더니 이번에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막부가 선금 3만 달러를 지불하고 잔금 1만 달러는 배를 받은 후 내기로 하여 이제 일본으로 팔려가나 싶더니 보신전쟁이 터져 당시 겉으로나마 중립을 유지하던 열강들의 결정으로 발이 묶여있다 1869년 2월에 신정부군 소속으로 일본에 도착했고 이름도 '코테츠함(甲鐵)'이 되었다. 이후 에조 공화국의 함대를 물리치는 데 일조하고 뒤이어 하코다테 해전에도 참가하였으며, 1871년 12월 7일 '아즈마(東)'로 개칭되고, 1888년 항구 경비용으로 전환되었다. [9] 모딩해서 철갑선을 아시아나 아메리카 원주민이 뽑아보면 좋은 카드/불의 제단 춤빨로 서양 철갑선을 발라버린다. [10] 실제 역사에서도 아시아 해역에 배치된 서양 철갑선들은 2선급 함선이 대부분이라 최신식으로 직수입한 청의 철갑선보다 약했으니 어찌보면 고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