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고
1. 화물
영어: Cargo
화물을 뜻하는 영단어. 예를 들어 화물선은 카고 쉽(cargo ship), 열차의 화물칸은 카고 카(cargo car)라 부른다. 일반적인 트럭들이 바로 카고트럭이다. 다만 화물기의 경우는 항공사명 뒤에 "CARGO"가 붙지만, 기종명에는 카고 대신 Freighter를 뜻하는 F가 붙는다.
화물 신앙의 원 표현인 Cargo Cult의 유래도 바로 이것.
참고로 스타크래프트 1의 각 종족 일꾼들이 자원을 캐서 들고 있으면 그걸 커맨드센터/넥서스/해처리로 보내는 단축키가 'C'인데, Return '''C'''argo의 단축키이다.
2. 바지의 일종
Cargo pants. 카고바지 문서를 참조한다.
3. 과거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 등지에 있었던 천민 집단
프랑스어 : Cagot
바스크어 : Agotes
브르타뉴어 : Cacons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 지역에 주로 존재하던 천민 집단이다. 프랑스어로 카고(Cagot)라고 하며, 스페인어나 바스크어로는 아고테스(Agotes)라고 한다[1] . 인도에 불가촉천민, 한국에 백정, 일본에 부라쿠민이 있다면 서유럽에는 이들이 있었다. 카고는 보통 서유럽에서 기피되던 직업인 망나니와 같은 직업에나 종사할 수 있었다. 다만 한국의 백정이나 일본의 부라쿠민과는 달리 도축업자는 카고로 분류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서유럽권 지역, 특히 게르만족의 권역에서는 고대부터 고기를 도축해 나누는 역할은 그 마을의 '''최고 권력자'''가 하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2] 물론 중세 시대가 되면서 육류의 도축이나 해체는 민간업자들이 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런 풍습의 영향으로 인해 서유럽에는 도축업자를 차별하는 분위기가 없었다. 대신 아무도 하기를 꺼려했던 망나니나 박피공 등의 일을 주로 하곤 했고, 그래서 망나니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직업이 되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인인 돈 보스코 신부가 한 신자의 집을 방문하려다가 실수로 망나니의 집을 신자의 집으로 착각하고 방문했는데, 이에 감격한 망나니 가족들이 그를 매우 환영하자 '잘못 왔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망나니 가족들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처음부터 망나니가 천시되던 직업은 아니었다. 초창기엔 '하느님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이들' 취급을 받았다. 문제는 그것과는 별개로 먹고 살기 위해 별 희한한 일을 하다보니(자살자 집 밖으로 옮기기, 전염병 환자 쫓아내기, 사탄의 책 불태우기, 동물 가죽 벗기기 등등) 안 좋은 이미지가 붙게 된 거다.
3.1. 역사
카고의 기원 자체는 불분명하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서기 1000년 경부터 이런 계층이 존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카고는 우선 일반인들의 거주지와 떨어진 일정한 지역에만 몰려 살도록 강요받았고, 이런 곳은 프랑스어로 '카고테리'(cagoteries) 라고 불렸다[3] . 그리고 카고는 카고가 아닌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었고, 음식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없었다[4] . 거기다가 가축을 기르거나, 방앗간에 출입하거나, 술집을 갈 수도 없었고, 심지어 시장에 진열된 음식을 만지는 것도 금지되었다. 거기에 교회조차도 카고들을 위한 전용 출입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고, 예배가 시작하면, 카고들에게 지정된 좌석이 있는 곳과 카고가 아닌 사람들이 있는 좌석 사이에 레일을 설치해서 두 집단이 서로 섞이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이들은 푸줏간에서 일하는 것도 금지되고, 밧줄 만드는 일조차 금지당하였다. 르네상스기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고도 이들에 대한 대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그 상태로 무수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카고는 집시나 유대인과는 달리 서유럽인들과 인종적으로 다른 집단이라는 증거가 없다. 카고는 주변 사람들과 똑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종교를 믿었으며, 외견상으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오랜 격리와 차별로 인해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의 생활양식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사람들은 카고에 대해 논하는 것조차 꺼렸고, 카고 자신들이 남긴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의 인종은 아니고 여러 개의 인종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신분이 신분인지라 자기들끼리만 통혼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 서로 섞여버려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3.2. 근현대
1911년 브리태니커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카고를 소작농들 사이에서도 거의 구별할 수도 없다고 서술해놨다. 실제로 카고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기 시작한 건 프랑스 혁명기다. 그리고 차별의식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것은 19~20세기.[5]
스페인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카고에 대한 인식이 나아져갔다. 스페인 내전의 영향을 논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 이전에도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내전이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사라져가던 카고에 대한 차별의식에 확인사살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6] 물론 차별 의식이 쉽게 없어지는 건 아니라서, 1964년까지 카고 성씨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차별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의 영향을 따지기엔 카고 자체가 사실 이베리아 반도에선 남프랑스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받는 바스크와 나바라에서만 보이는 지역적으로 상당히 제한적인 현상이었다. 카고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사실 산티아고 성지 순롓길 따른 지방에서만 보이는 현상이고, 스페인 내전의 사회적 참화를 가장 심하게 입은 안달루시아, 카스티야에선 전통적으로 없었던 관습이라 직접적인 연관을 짓기 힘들다.[7]
지금도 아주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자신을 카고의 마지막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나타났다.링크 그녀에 의하면 아직도 피레네산맥 부근에는 카고의 자손들의 마을들이 많다고 하며 카고 성씨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위의 여성의 인터뷰 때문에 잊혀진 줄 알았던 카고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 주로 영어권에서 이들 성씨들을 찾아 '조상찾기'를 해주려는 움직임이 있다. 마침 공교롭게도 위의 인터뷰가 나온 시점에 영국의 프랑스문학자 그레이엄 로브(Graham Robb)가 아마도 역사상 최초로 카고에 대한 책을 써버렸기 때문에 대안 우파의 관심을 끌게 된 탓이다.
이들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하여 이들의 기원이 어디인지를 알아보려는 시도도 있으나 아무도 이에 응하는 자는 없었다. '''그 연구의 목적이 차별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기 떄문이다.''' 이 외에도 이들을 다시 차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연구가 열심히 이루어지고 있으나,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철저하게 비협조로 일관하고 있어 진척은 아직 없다.
4. 영화
4.1. 2013년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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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벤 하울링, 욜란다 람케. 7분여 남짓한 짧은 영화로, 장르는 좀비물이다.
시애틀 국제 영화제 단편 부문, 씨네캐스트 영화제 단편 부문, 서울 국제 초단편 영화제 국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그 작품성을 널리 인정 받았던 영화로, 좀비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릴이나 호러적인 요소보단 가족애를 주제로 한 감동적인 전개가 일품이다.
서구권 영화지만 대사는 한 마디도 없으니[8]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제목인 “카고(화물)”는 물론 아버지가 짊어진 짐, 즉 아기를 가리킨다.
2018년 5월 17일 개봉을 목표로 리메이크되었다.
【줄거리】
4.2. 2018년
2013년 작의 리메이크 버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1시간 44분짜리로 마틴 프리먼이 아버지를 연기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대동소이하지만 캐릭터가 하나 늘었다. 그리고 러닝타임이 늘어남에 따라 로드 무비 형식으로 바뀌었는데 그럼에도 원작 2013년 버전의 주제는 희석시키지 않은 잘 만들어진 영화. 다만 전개가 상당히 루즈하고 액션이나 호러 요소가 적기 때문에 지루해질 수 있는 점은 약점이다.
[1] 아고테스라고 쳐도 이 항목으로 들어올 수 있다.[2] 고전 동양에서도 볼 수있는데, 진평의 고사에서도 소중한 고기를 나누는 것의 권위를 알 수 있다.[3] 일본의 부라쿠민들도 이런 식의 차별을 받았다. 애초에 부라쿠민이라는 말 자체가 본래는 '마을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참고로 오늘날 부라쿠민이 사는 동네는 동화지구라고 불린다.[4]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대로 카고는 도축업자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에겐 요리사와 같은 직업도 불허되었다.[5] 다른 참고자료 : #[6] 한국에서 백정들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 이유와도 같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신분에 상관없이 독립운동이나 구인구직, 농지 확보를 목적으로 만주로 이주하거나, 국내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백정을 대상으로 한 차별이 없어진 계기가 되긴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6.25 전쟁을 거치면서 봉건적인 계급 의식이 가루가 되어버린 탓이 컸다. 그래서 이미 1960년대만해도 외진 시골에서나 출신 성분을 따지는 판국이 되었다.[7] 스페인 내전 북부 전선의 중심지였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카고 집단이 살았던 바스크 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계급 갈등보다 같은 바스크인이라는 민족적 동질감이 더 강하게 표출되는 지방이다. 게다가 내전 당시 바스크 지방은 자치권을 약속받고 공화파에 서긴 했지만 다른 공화진영 스페인처럼 좌파의 격렬한 반카톨릭 반종교 테러가 상징한 이데올로기적 지역 사회 분열이 적은 편이라 프랑코군 상대로 항복도 일찍했지만 이에대한 보복과 숙청도 그나마 덜한 지방에 속했다[8] 끝부분에서 아기의 배에 써 있는 글은 "내 이름은 로지입니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