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조선)/평가
1. 당대의 평가
조선 왕조의 개국자였기에 조선 시대에 쓰인 기록에서는 행적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신격화도 많은 편이지만, 전반적인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천하 제일의 명궁이요 당대 동아시아 최강의 용사인 동시에 전설적인 명장이었다. 또한 적이나 오랑캐라고 해서 무조건 뚜드려잡지 않고 가능한한 항복시켜 부하로 포섭하는 관대한 덕장의 면모도 있었다. 가히 난세에는 영웅이라 할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왕으로서는 행정이나 정책적으로 정도전, 조준 등을 재상으로 세우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2. 고려 말의 토지겸병 문제
대표적으로 고려 말의 재정 파탄을 초래했고, 전시과의 붕괴를 가져온 '''고려 말의 토지겸병 문제''' 해결이 바로 이성계의 대표적인 개혁이자 업적들 중 하나인데 고려 말의 지배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발생한 이 토지 겸병의 문제는 이후 권문세족들의 끝없는 토지겸병 확대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족들이 가진 농장의 비정상적인 확대와 함께 토지를 잃은 양민들이 권문세족들에게 노비로서 위탁하는 일명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 현상이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노비비율이 폭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더 나아가 '''고위 관료층들조차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막장 상황'''으로 하물며 일반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으니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고 그리고 '''군대를 유지할 재정도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 초래될 정도였었다.
이때 권문세족들이 소유한 토지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는데 어느정도였냐 하면 고려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광대했다. 당연히 세족들의 이런 토지확대는 필연적으로 고려 백성들이 먹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토지들 마저도 권문세족들이 몽땅 강탈해가는 바람에 백성들 입장에서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도탄의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
3. 위화도 회군 이후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등이 사전 개혁에 찬성하자 이성계가 토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여, 중앙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고 도의 양전(量田)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반대하는 자는 탄핵·추방하고, 1390년(공양왕 2년) 음력 9월 공사 전적(公私田籍)을 소각하여 철저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듬해 음력 5월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科田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로써 강력한 왕권의 부재를 틈타 중앙 조정의 국사를 관장하는 도평의사사(도당)를 좌지우지하며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대농장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세족들에게 속해있던 투탁노비들 상당수 또한 다시 양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추가로 고려 말 토지제도 문란의 3대 요소로 평가받던 토지겸병과 병작 반수제, 지주전호제는 이후 경국대전에서 이 3가지를 모두 법적으로 금지했는데 이유는 당연히 그만큼 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
4. 국방 기여
또한 국방에도 힘써 고려 말을 지옥으로 만든 왜구들의 침략을 대마도 정벌 등을 통해 사실상 대규모 침략은 조선 건국 이후로는 완전히 종식시킴으로서 새 왕조의 안보를 튼튼하게 만든 것으로도 평가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군인 출신답게 화통한 면이 있어서 조회 때에도 '''"번잡한 예절은 생략하고, 할 말 있는 대신은 빨랑 나와서 의견을 말해 봐"'''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많았으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스타일이었다고. 왕이 되던 날 아침으로 먹은 것이 '''물에 만 밥 한그릇'''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실록에는 '''"평소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지만 한번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하나의 화기(和氣) 덩어리가 되어 많은 이들이 태조를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5. 무신경한 면모
다만 정치가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것인지 상식적으로도 뻔한 정치적 변수에 무신경한 기질이 있었다. 이게 기록에는 덕있는 사람의 면모로 포장되어있지만, 사실은 정치적 무능의 일종이다. 이성계란 사람 자체가 머리 복잡한 정치에는 별로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일례로 전세가 아군측으로 기울어 승기를 잡았는데도 여진족 군인이 왜구를 마구 죽이자 불쌍하니 이제 그만 죽이고 생포하라고 할 정도로 이를 인간적인 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모진 면이 없기도 했다. 이런 면이 있어서 낙마사고 이후 결국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정몽주를 죽이지 않으면 전주 이씨 전체가 멸족당할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차마 손을 대지 못해서 질질 끌기도 했다. 그리고 막내가 왕이 되면 그 형들이 모조리 다 끝이 좋지 않게 될 것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신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괜찮을거라고 과신한 탓인지 막무가내로 막내를 세자로 밀었다. 결국 이성계보다도 정치적 결단을 잘 해낸 것은 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었다. 애시당초 순수 무골인 이성계나 이방과와 달리 이방원은 과거를 급제한 문관출신이라 이런 정치적 게임에도 능해, 정치에 능하지 못한 이성계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위험한 정적인 정몽주를 끔살한다던가. 왕자의 난으로 서열정리를 확실하게 한다던가.
6. 왕씨 몰살
태조 이성계는 혼자서 고려를 구한 수준의 불세출의 명장이자 전설적인 전공을 세웠고 고려 말의 폐단에 일격을 날리며 새 나라를 창업한 위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민중의 신망이 높았던 최영이나 (본의는 아니었다고 한들) 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을 숙청하고 죽이는데 일조하기도 하였으며, 한국사의 드문 대규모 학살자이기도 하다. 새 왕조가 건국되고 그 전 시대의 기득권 세력인 왕족이나 귀족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이렇게 전대 왕족들을 몰살한 사람은 이성계가 유일하다. 사실 자수성가에 나온 설명처럼 우리나라는 귀족들이 대대로 자기들끼리 지배한 역사인데 고려 왕씨는 스스로 고구려 귀족 혹은 중국 귀족의 태생이라 주장하였지만 고려사조차 왕실의 조상에 대해 의문을 가진 노근본 왕족이라 전례없는 학살과 차별이 더 의미심장하다.
얼마나 철저하게 왕씨들을 색출했는지 왕씨인 줄 알고 숨겨주면 사형, 왕씨와 혼인하여 인척이 되어도 사형을 당하였다. 문종 대에 이르러서 이러한 조치가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조선 말기인 1880년에도 의흥 박씨(義興 朴氏) 박응상(朴應商)이라는 자가 본래 부계 성씨가 왕씨(王氏)인데 모계 성씨인 박씨를 따랐다며 왕씨로 회복하고자 상소를 올렸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박응상의 조상 박수검은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사당까지 있었는데 이 일로 박수검의 사당도 헐리었다.[1]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베었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0일 기축 두번째 기사)
그래서 전국의 왕씨를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등으로 인해 개성 왕씨 문중에서는 가문의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왕씨가 아니라도 왕씨와 연을 맺고 있던 개성 사람들은 일가붙이를 학살한 이성계를 굉장히 증오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조선과 한양 자체를 싫어했을 정도이다.[2] 또한 고려 무신정권에서 왕을 갈아치워도 민중들의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경우를 보면 도읍을 한양으로 옮김으로써 기득권을 잃게 된 영향도 있는 걸로 보인다.
한편으로 이런 왕씨에 대한 학살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에 대해서 부정론자들의 반응으로도 곧잘 사용되는데 대충 말하자면 '개성 왕씨는 그토록 무참하게 갈아버리고는 전주 이씨는 대우받길 원하느냐' 라는 논조,
6.1. 주원장과의 비교
비슷한 시기 명(明) 태조 주원장도 대상은 다르지만 이성계의 왕씨 몰살에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는 않으니 숙청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숙청은 피할 수 없다지만 처형당한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고, 형벌은 잔혹하였다. 개국 공신들 가운데 제대로 명을 살다 죽은 이는 탕화(湯和) 한사람 뿐이었으니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주원장의 숙청으로 사형당한 수가 자그마치 10만 여명이였다. 심지어 사형방법도 잔인하여 주원장은 박피(剝皮) 즉 피부 벗기어 죽이기를 즐겨 하였는데, 주원장의 영향인지 역대 명나라 황제들은 박피(剝皮) 행을 많이 행하였다. '대명왕조(大明王朝)는 가죽 벗기기로 시작하여 가죽 벗기기로 끝났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후대 청나라 역사가 조익은 "그의 잔인함은 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일이다. 의심 많고 죽이기 좋아하는 것은 그의 천성이라 하겠다"는 말로 명 태조 주원장을 평했다.
7. 현대의 평가
사방팔방에서 위기에 처한 고려 말기에 전국 각지의 반란군과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원나라 황제가 보낸 군대, 나하추 같은 멸망한 원나라의 군벌, 남쪽에서 패악질을 부렸던 역대 최강의 왜구, 그리고 심심하면 침입했던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동아시아에서 싸울 수 있었던 적들을 상대로 전부 대승을 거두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고려마저 멸망시켜버림으로서 '''당대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들과 싸워서 이긴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3] 한 마디로 왕이 되지 않았어도 이순신과 쌍벽을 이루는 ''''상승불패(常勝不敗)의 명장\''''으로 칭송받았을 위인이다.[4]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수많은 세력들을 격파한 그도 인생에 있어 딱 한 번 패배를 하는데, 바로 아들 이방원과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이었다. 한마디로 아들빼고 다 이긴 역대급 ''''불패명장\''''이라 할 수 있다.
7.1. 북한의 평가
북한의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선, 이성계를 고려를 배반한 역적이라고 규정하고 리조 봉건 시대의 괴수라면서 엄청나게 폄하하기도 했다. 북한 역사서적의 '리성계' 서술
김일성 생전엔 그가 금야군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는 아예 열차 커튼을 닫아서 보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이는 군사 정권 시절 한국 사회에서도 조선 시대를 무조건 당쟁이나 벌이던 뒤떨어진 시대로 매도하던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매도하여 당시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뤄졌다고 보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면 재평가될지도.
이성계가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당시로선 혁신적인 정치방식을 시도한 혁명가적 면모도 보였고, 민본주의에 기반한 정책도 펼쳤지만, 동시에 한국사에선 드문 대규모 학살자이기도 했다. 물론 새 왕조가 건국되고 그 전 시대의 기득권 세력인 왕족이나 귀족 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전근대사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전대 왕족과 기득권 귀족들을 몰살했다고 기록된 사람은 이성계가 유일할 것이다.[5]
7.1.1. 애매한 상황
하지만 동시에 근세사 파트가 아예 붕 떠버린 북한 입장에서는 마냥 백안시만 할 수는 없어서 좀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다. 남북이 각자의 영역 내에서 한반도의 역사적 정통성을 제시하자면 남한은 진-삼한-신라(+가야)/백제(+마한)-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상고-고대-중세-근세-근현대의 흐름을 완성할 수 있지만, 북한은 아무리 용을 써도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으로 남북국시대와 근세 조선시대가 공백이 된다.[6] 지역별로 따지면 남한도 고려를 빼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고려의 수도 개성은 완전 접경지대로 역사적으로 경기수도권에 속했던 데다가 원래 남한 땅인 것을 6.25로써 북한이 뺏어간 것이라 남한에서도 충분히 지분을 요구할 수 있고, 고려 부수도 2곳(동경-경주, 남경-서울)이 남한에 위치해 있고 대몽항쟁기에는 아예 남한 영토인 강화도로 38년간이나 수도를 옮긴 전적도 있는데다가, 조선왕조는 고려의 승계국가로 그 자산을 거의 모조리 흡수했기 때문에 다시 서울을 점유하고 그 자산(특히 고려사와 같은 서지자료들)을 물려받은 남한 쪽이 북한 쪽에 비해 월등히 연구 성과가 높을 뿐더러 해방 후 전쟁 이전까지 개성시가 남한에 속했던 관계로 개성 박물관에 위치한 양질의 고려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주요 유물 문화재는 북한이 아닌 남한에 위치하고 있다. 게다가 서희, 강감찬, 최영, 정몽주 등 고려시대 주요 인물들도 남한 지역 출신 인물들이고 묘소도 남한에 위치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경우를 보아도 고려가 대놓고 고구려 후계국을 자처한데다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삼국시대 역사서들도 죄다 남한에 남아있고(북한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원본 한 권도 가진 게 없다) 중국 현지 조사, 연구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결과를 축적해 온 상태이기 때문에 남한은 북한 사학계의 믿는 카드라 할만한 고구려에 대해서도 나름 할 말은 있다. 게다가 그 '''고구려조차도''' 북한이 고구려 역사 704년을 다 갖는 것도 아니고 만주 지역이 그 중 463년을 가지고 북한은 평양에 도읍한 나머지 241년만을 가질 뿐이다. 신라 991년사와 백제 677년사가 모두 온전히 귀속되는 남한과 대비되는 부분. 마지막으로 조선왕조로 오면 빼도박도 못할 남한 영역인 서울을 수도로 삼은 정권이라 북한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평양이든 삼수갑산이든 서울에 종속된 지방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7] 북한이 괜히 6.25중에 그렇게 욕하는 조선왕조의 실록을 한 세트 통째로 실어간 게 아니다.
사실 역적 프레임 씌우자면 자기들이 그렇게 띄워주는 고려 역시 왕건이 궁예 통수친 것이 된다. 어쨌든간에 아무리 욕을 하고 뭘 하고 해봤자 한반도의 500여년을 조선왕조가 통치했음은 부인할 수 없고, 그 창업군주로써 북쪽 출신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북한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근세사에 자기 지분 들이밀려면 이성계 말고 딱히 내세울 건덕지가 없다. 특히나 고려 이전 유적은 죄다 작살났고 조선시대 유적은 별 볼 일 없고 아예 궁궐 유산이 전무하다시피 한 북한 입장에서는 이성계 덕에 남겨진 함흥본궁만 해도 엄청난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지금 함흥본궁만 해도 한국전쟁 때 파손된 것을 없는 돈 들여 거의 완전히 복구해놓고 함흥력사박물관으로 쓰면서 귀중한 문화재라고 띄워주고 있으니 그 츤데레적인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1] 다만 왕씨로 태어났다고해서 무조건 죽거나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멸시받았고 양반신분을 회복했음에도 과제에급제하여도 승진에 한계가있어 종2품이상까지 출세할수가 없었다. 때문에 조선왕조는 왕씨들에게 있어 생지옥판이자 철전지원수의 대상이었고 조선왕족들역시 이를경계하여 항상 왕씨들을 감시하거나 역도로 몰아 차별하였다. 아마 박응상이 사형당한것도 왕씨라는 죄목보다는 가문대대로 왕씨임을 속이고 박씨로 살았으니 가문대대로 사람들을 속이고 희롱했다는 죄목이 더컸고 박씨 공명첩이 있었던것도 아니었기에 왕씨라서 사형당했다기 보다는 박씨를 사칭하고 관직에 나간 죄를 물어 사형당한것이 더크다고 볼수있다.[2] 개성 지역에 전해지는 민담 가운데 이성계를 뒷담까는 내용의 민담이 유난히 많다.[3] 그 점에선 최영과도 비슷한데 최영은 고려 빼고 나머지 세력들과 전부 싸우고 이겼으며 이성계의 출현 전까지 그 모든 적들을 상대로 혼자서 캐리했다.[4] 조선 건국 이전까지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처럼 같은 무패명장인 이순신과 비교하는 평가도 있다. 물론 이순신은 노량에서 전사하면서 성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역성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던데 비해 이성계는 살아남고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역성혁명까지 이룩했다는 점에서 차이점도 크다.[5] 당장 왕건만 봐도 여러 호족들을 혼인 정책 등으로 아우르는 정책을 썼다. 이렇게 된데는 이성계가 고려 무장 시절 그만큼 비주류 출신으로 고려의 기득권 세력에 무시받은 증오가 쌓였다는 것+정도전이 이를 적극 추진했던 탓도 컸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6] 게다가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바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427년까지 534년간이 비어있다. 그 중 한사군 기간이 대부분이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한사군이 북한에 위치한 것을 부정하니 원... 남북국시대에도 신라와 발해의 변경에 불과했다. 그나마 남경남해부가 북청에 설치된 정도가 고작.[7] 고려는 삼경제 같은 부수도 제도도 운영했고 지방 토호 세력의 권세가 막강해서 수도치고 개경의 위상이 막강한 편은 아니었다. 반면 조선은 부수도 없이 한양에 권력을 몰빵한 나라였고 지방행정력도 고려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막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