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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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판 한국사 교과서. 이름 때문에 조선 시대만을 다루는 교과서로 착각할 수 있는데, 북한은 남한식 표현이고 북한의 정식 나라 명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줄여서 '(북)조선'으로 칭하기 때문에, 즉 저 조선력사란 남한식으로 말하면 '한국사'와 같은 뜻이다. 참고로 표지 이미지는 단군릉이다.
2. 상세
북한의 역사사관은 유물사관에 기초하고 조선로동당의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으로부터 파생된 역사인식의 틀인 ‘주체사관’이다. 즉, 역사는 합법칙적으로 발전하며 그 발전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사람’, 즉 인민대중이라고 보는 주체사관을 도출하고 있다.
주체사관의 입장에서는 역사를 인민대중의 투쟁의 역사로 보아 외세의 침략에 대한 투쟁인 반제/반외세투쟁과 내적 모순에 대한 투쟁인 반봉건투쟁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주체사관은 투쟁에서의 최고핵심으로 ‘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무지한 인민대중이 투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김일성과 같은 영명한 지도자(수령)의 존재가 절실하다고 선전하여 유일사상체계, 즉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체제의 정통성 마련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3. 구성
다른 북한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대단원, 소단원의 시작 부분에 김일성, 김정일의 교시를 실어 놓는다. 대부분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얻은 교훈을 통해 자주적이고 창의적이고 슬기롭고 올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내용이 많다. 자주성의 비중이 비교적 높은 것을 빼고는 대체로 한국 교육계에서 목표로 삼는 인간관과 비슷하다.
그다음에는 본문이 나오는데 일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한국사 교과에서 배울 만한 내용은 대부분 언급한다. 문체는 문화어 표기를 사용한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주체사관을 토대로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역사적 사건과 의의를 설명한 후, 연습 문제가 나온다. 주요 질문 내용은 역시 한국에서 배우는 내용과 비슷하다.
3.1. 비교적 균등한 시대별 분량
아무래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근세 조선 시기 사료의 분량이 이외의 시기보다 훨씬 풍부하다 보니 한국사 교과서는 조선 시대에 대한 서술이 많은 편이다.
북한도 이러한 면을 반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고구려-발해 시대[1] ,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간의 분량을 비슷하게 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러한 면은 형식적 틀에서 더더욱 드러난다.
예를 들어 한국사의 문화 부분을 비교해 보자. 과학적 성과가 컸던 조선 전기 시대의 경우 농업, 천문, 의약, 무기, 건축, 지리 등으로 세분화하여 서술하는 대신 고려 시대의 경우 틀을 몇 개 통합하여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사의 경우는 이러한 성향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옛날로 갈수록 사료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교과서는 사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틀을 분할하고 자료의 이름이라도 언급한다. 고려 시대의 경우, 한국사의 경우에는 별다른 지리지가 있었다는 언급을 하지 않지만, 북한에는 당시대의 지리지 이름을 꼭 언급한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도 적용되어 신라 시대의 경우에는 중앙 관직인 13부[2] 에 대해서도 꼭 언급하고, 군사 제도도 9서당 10정 말고도 한국사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4. 북한의 역대 왕조 평가
북한의 주체사관은 역사를 지배층이 아닌 인민, 즉 피지배층이 주도해 나가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보고 지배층 중심의 정권을 '봉건 통치배'로 비하하는 성향이 짙다.
여기서 외세의 침략에 어떻게 대응했냐에 따라 기존 왕조를 2가지로 분류하는데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워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지킨 고구려, 발해, 고려를 높게 평가하고 그와 반대로 신라, 조선[3] 을 비하하는 경향이 짙다. 백제 역시도 '봉건통치배'와 같은 부정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 자신들이 숭상하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나당연합에 같이 멸망한 나라다 보니까 신라보단 그나마 조금 우호적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자주성을 기준으로 본다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밑에서도 설명했듯 지리적 위치가 크다.
근대 이전의 어떤 왕조도 봉건식 계급 제도에 기초한 차별적이고 계급적 성향이 짙은 바람직하지 않은 왕조이지만, 그래도 외세로부터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수호한 정권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4.1. 북한 지역 왕조들에 대한 미화 서술
4.1.1. 고조선에 대한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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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민족 최초의 국가로서, 그리고 평양 역사의 시작으로서 고조선을 매우 강조한다. 우선 북한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역사를 3000년으로 설정하며 수도 평양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건국 이래 멸망 시기까지 내내 평양이 수도였다고 주장한다. [4] 한국과 중국 사학계의 초기 요동 중심설/후기 중심지 이동설을 전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고조선 역사를 단군조선 - 후조선 - 만조선(위만조선)의 흐름으로 가르치고 있다. 대충 한국의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과 시대가 비슷하다. 또한, 평양 중심설을 정설로 하고 평양 지역에서 점차 조선반도(한반도)~만주 일대로 영역을 확장하였다고 본다.
한국의 경우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세웠다고 가르치지만, 북한은 단군릉 발굴 및 개건에 따라 기원전 30세기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철기 문명도 한국에서는 기원전 3 ~ 4세기에 시작되었다고 가르치지만 북한은 기원전 12세기부터 철기가 시작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조선은 한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기자조선설을 부정하며, 기자조선이라 부르지 않고 후조선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후조선은 고조선 토착민들 사이의 내부 정권교체에 의해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고 가르친다. 대략 15세기 경에 세워졌다고 하며, 후조선은 국력이 약해져서 이 시기 부여, 구려(졸본부여, 고구려의 전조국가), 진국(삼한)이 독립했다고 한다.지난날 봉건대국주의, 사대주의사가들은 엉뚱하게도 후조선시기의 력사를 중국의 기자와 결부시켜 《기자동래설》, (《기자조선설》)을 퍼뜨리였다.
《기자동래설》은 기자라는 고대중국의 은나라귀족이 조선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우리 나라에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켰다는것이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은 한나라시기에 봉건대국주의사가들에 의하여 조작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 아닌 조선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조선~만조선 시기에 본수도인 평양 왕검성 외에 요동에 부수도를 따로 두었고, 고조선의 멸망 당시 함락된 왕검성은 평양이 아닌 요동의 부수도였다고 본다. 그 결과, 고조선 멸망 후 설치된 한사군이 지금의 서북 지역이 아닌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교육해 지금의 서북 지역이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대신 평양 지역엔 락랑국(최씨낙랑국)이 존재했다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본다.
4.1.2. 고구려에 대한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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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중에서는 고구려에 강한 편애적 서술을 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아예 삼국시대라는 표현을 거부하며 고구려 시대라 칭하며 남부의 백제와 신라는 동시대에 존재한 곁다리 국가로 취급한다.[6] 나아가 현 북한의 수도 평양이 지역적으로 옛 고구려의 중심지였고 초강대국의 핍박을 받는다는 상황 등 현 북한 정권과 고구려를 동일시하려는 시각이 강하다. 사실 남측에도 당대 강대국들과 맞짱 떴다는 식으로 고구려를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제법 있으니 비슷한 케이스일듯.
우선 건국시기부터 B.C 37년이 아닌 B.C 277년으로 가르쳐 이 연도를 바탕으로 고구려를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부른다.
또한 고구려의 성장 과정이나 타 국가와의 갈등에 대해서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비해 상당히 자세히 쓰여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7] 북한의 교과서에 언급되어 있는 고구려사 내용으로는,
- 대무신왕 대의 을두지의 계책
- 모본왕의 요서(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외정
- 신대왕 대에 일어난 명림답부의 좌원 전투
- 동천왕의 요동 서안평 경락
- 고국원왕 대 말기에 유주를 정벌했다고 주장[8]
- 안원왕 대의 오곡성 전투
- 안시성 전투에서 안시성주가 이세민의 한쪽 눈에 부상을 입혔다는 설을 채택
- 연개소문이 당태종에 맞서 북경까지 진출했다고 가르침
또한 똑같은 내용이라도 고구려에 우호적으로 서술하는 내용이 많다.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 전투를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를 격퇴시켰다고 가르치고, 내치는 유능했지만 백제의 전성기에 맞물려 다소 대백제 관계에서 위축되었던 소수림왕 대에 수곡성을 탈환했다고 가르친다. 영토도 장수왕 시절에 내몽골 동부~흑룡강 일대까지 지배했다고 말한다.[9]
또한 당태종 사후의 고구려-당 전쟁도 한국 사학계에서는 당이 대고구려 전략을 원정전에서 소모전으로의 방침을 전환시킴으로 인해 고구려 국력을 소모하게 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보지만, 북한은 고구려가 당과 맞서 이긴 전투를 언급하며 당에게 적극적으로 맞선 시기로 가르친다.
발해의 경우는 한국의 교과서와 큰 차이가 없지만, 신라보다 앞선 목차에 놓고 있어 오랜 시간 동안 통용되었던 시대적 흐름인 삼국시대 - 통일신라 - 고려의 계보가 아니라 고구려 - 발해 - 고려의 계보로 민족사가 이어진 듯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4.1.3. 고려에 대한 찬양
고려 시대의 경우 조선 력사 최초의 통일국가라 평가하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핏줄,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단일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보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도입 부분에 고려연방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련방국가의 국호는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나라 통일국가의 이름을 살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북과 남의 공통한 정치리념을 반영하여 고려민주련방공화국으로 하는것이 좋을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이 제안은 고려가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였고 또 그것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반영하여 내놓으신 가장 정당한 제안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제안의 정당성을 력사적으로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려에 의한 통일과정, 첫 통일국가의 출현과정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또한 발해부흥운동과 공민왕의 요동 정벌도 한국에 비해 상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대몽항쟁기의 경우 봉건통치배들은 강화도로 도망쳤지만 인민들의 투쟁으로 몽골의 침입을 격퇴시키고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했다고 가르친다. 공민왕의 경우는 3번의 요동 진출의 과정을 상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4.2. 남한 지역 왕조들에 대한 비하적 서술
4.2.1. 신라에 대한 폄하
'봉건 통치배'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일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신라가 최초로 민족통합을 이룩했다고 주장하지만[10] 북한은 이를 부정하고 나아가서 신라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교과서를 서술한다. 따라서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취급 또한 대단히 안 좋은 편이다. [11]
그 이유로 신라는 고구려 영토를 전부 통합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건국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기 때문에 더더욱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통일신라를 후기신라로 부른다.[12]
북한은 북한 지역의 수도를 둔 고려를 조선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로 설정하고자 통일신라를 폄하한다. 신라를 최초의 통일 왕조로 인정하는 순간 민족 정통성을 신라가 위치하던 남한에다 준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은 이를 크게 경계한다.
4.2.2. 백제에 대한 폄하
북한은 신라와 조선을 가리킬 때와 마찬가지로 백제에 대해서도 '봉건통치배'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쓴다. 그리고 신라와 같이 고구려의 원대한 삼국통일의 꿈을 방해한 세력으로 묘사한다.
게다가 4세기 근초고왕과 고국원왕의 대결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명백한 근초고왕의 판정승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이를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군을 물리쳤다고 애둘러 표현한다. 고국원왕의 굴욕적인 전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위에서도 서술했든 고구려와 뿌리가같은 부여계 국가이기도 하고 함께 나당동맹에 멸망한 입장이기 때문에 계백 등은 높게 평가하는 편이고 남한계 왕조치고는 그나마 취급이 낫다. 신라와 조선보단 덜 까이니... 물론 그만큼 관심이 크게 없다고 보는게 더 맞을 듯하다.
4.2.3. 조선에 대한 폄하
북한에서의 조선에 대한 폄하는 신라보다도 훨씬 심하다.[13] 이유는 신라 수도 경주시도 남한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조선의 수도 한양은 아예 대놓고 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로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통성을 폄하하기 위해서는 조선 왕조 자체를 격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5대 역적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속하는 사람은 김춘추, 이성계, 정도전, 이완용, 이승만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성계에 대해서는 고려말 왜구 격퇴에 대한 주체를 생략하는 식으로 이성계의 공을 숨겼다. 또한 위화도 회군으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할 기회를 놓친 사대주의적 역적이라 가르친다. 당연히 조선 왕조 창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다.
나아가 남한에선 한국사의 양대 위인격인 세종대왕과 이순신조차도 표면적으로는 위인으로 인정하지만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면 상당히 비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조선 왕조의 봉건적 기득권 유지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투로 깎아내리고 이순신 역시 구국의 영웅이기는 하지만 굳이 백성이 아닌 봉건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 싸웠다는 주석을 꼭 뒤에 단다. 이러한 주석을 광개토대왕이나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에 대한 서술에는 달지 않는 것과 바교해볼만 하다. 그리소 세종과 이순신의 출생지는 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위치해있고 무덤도 남한에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들을 띄우면 남한 출신 인물을 띄우는 꼴이 돼서 더욱 경계한다.[14] 사실 북한에서 내뱉는 봉건질서 수호는 고조선, 고구려, 고려시대의 북방계 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무능한 봉건통치배(인조 조정)들은 굴욕적인 화의를 맺었지만, 인민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의병투쟁을 벌여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굳게 지켜 냈다고 마치 의병의 활약으로 승리해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시대에 대한 서술은 일제시대나 대한민국 초기에 조선 시대를 당쟁이나 벌이던 뒤떨어진 시대로 매도하던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매도하여 당시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뤄졌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김정은 시대에는 기존의 '리조 봉건국가'에서 '조선 봉건국가'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전 시대에 비해서는 서술 및 평가가 조금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4.3. 근현대사의 왜곡된 서술
이 시기는 북한 정부의 수립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기에, 대체로 북한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한국 사학계가 반발할 만한 서술이 많다. 3.1운동을 기점으로 현대사로 구분하며, 독립운동의 경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에 두고 설명한다. 또한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의 경우 북침설을 정설로 설명한다.
5. 사회
주체사상은 인민의 능동적인 활동성을 긍정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민중이 주도한 반란을 '~의 난'이라는 표현 대신 '인민봉기', '농민전쟁' 등의 표현을 즐겨쓴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폭동’이란 표현이 북한에서는 인민봉기 또는 항쟁으로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로 부르는 식이다.
민중봉기에 대해서도 한국사에 대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굉장히 풍부하게 서술되어 있다. 먼저 양적으로는 고려의 경우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무신정권기에서 일어난 반란을 위주로 서술하지만 북한의 교과서에서는 그 범위가 원 간섭기를 넘어 고려 말기까지 확대해 서술하고 있다.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 1286년 영월에서의 강윤명의 난
- 1318년 제주도 사용과 김성의 난
- 1323년 충숙왕 대의 임숙의 부임을 반대한 제주도민의 괘서 사건
- 1329년 양광도 안찰사 마계량의 탄핵
- 1352년 5월 서울 관악산 농민 봉기
- 1382년 합주 사노들의 난
6. 사상
위에서 말한대로 북한의 주체사상은 유물론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물론적 성향이 짙은 사상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뭐가 됐든 북한은 근대 이전의 사상을 계급체계를 수호한 사상으로 간주하고 '나름의 의미는 있었지만 결국 계급사회를 옹호하는 한계를 가졌다.'라고 가르친다.
6.1. 기(氣) 사상 중시
역사서술에 있어서 기(氣)라는 것을 중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는 유교에서 말하는 무형, 추상적인 성질을 가진 리에 대비된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개념인 그 기(氣)가 맞다. 이 기를 중시하며 한국 사상사를 유물론적 토대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 삼국시대에 원시적인 기 사상이 만들어졌다고 주장.
- 고려 시대에 이규보를 대표적인 기 사상가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기 사상을 바탕으로 고려 시대에 유행했던 불교를 비판하며 불교에 비판적이었던 학자들의 이론도 소개하고 있다. 놀랍게도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학자는 북한이 싫어하는 정도전.
- 기를 중시한 서경덕과 최한기의 사상에 대한 옹호.[17]
6.2. 기성 종교에 대한 철저한 부정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계급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북한이고 종교는 계급사회를 수호하는데 악용했다고 보기 때문에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가톨릭, 개신교)와 같은 기성 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혹 이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민간에서 주도된 종교 운동이나 독립운동,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된 점에 한해서이다. 그 중에서 불교에 대해서는 결사 운동을 예로 들 수 있다.
천도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으로 가르친다. 무엇보다 천도교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고, 만민평등의 사상을 주창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18] 하지만 결국 봉건적 미신 색채를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가르치는건 여전하다.
그 외에 대종교, 천불교[19] 등과 같은 민족종교 및 자생종교의 경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업적을 기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6.3. 축소되거나 누락된 부분
기성종교의 관념론적 사상에 대단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 윤리와 사상 과목에서 언급할 만한 내용은 많이 생략되어 있다. 그 예로는
- 삼국 시기의 의상의 불교 사상
- 고려 시기의 주요 승려들의 불교 사상
- 조선 시대의 경우에는 서경덕, 이황, 이이의 사상과 17C 이후의 실학을 제외하고는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 있음. 또한, 천주교의 전파 역시 축소•누락됨.
7. 관련 문서
[1] 의도적으로 신라와 백제의 비중을 낮게 한 점이 눈에 띈다.[2] 한국의 교과서에서도 언급하기는 하지만, 법흥왕이 설치한 병부, 통일신라 때 핵심부서로 자리잡은 집사부를 제외하고는 설명하지 않는다. 반면 북한은 신라 13부의 명칭, 기능을 전부 소개하고 있다.[3] 북한의 정식 명칭으로는 리조.[4]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고 1960년대 리지린 이래 원래는 요동 중심설이 정론이었으나, 단군릉 개건 이후 1999년 평양 중심설로 정설을 뒤집어버렸다. [5]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의 위치를 토대로 고구려가 7세기 즈음에 한강 이북을 어느 정도로 회복했다고 보는 듯하다. 단양에 온달이 싸웠다는 전설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수나라 시절때 신라에게 수백 리의 영토가 뺏겼다고 하는데 온달의 전사 시점 이전이나 이후나 고구려-신라의 전선은 진흥왕 대와 큰 차이가 없다. 만약에 진흥왕 대의 영토가 고정된 채로 연개소문의 주장대로 신라의 영토가 확장되었다면 사실상 고구려-신라의 갈등 전선이 보다 북진되었을 것이다. 다만 한강 하류까지 고구려가 차지했다는 북한의 분석은 사료상 이견의 여지가 있다.[6] 한국사에서 고조선 시대의 진, 삼국시대의 가야, 마한, 부여를 바라보는 태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7] 물론 남한 학계가 아래 내용들을 몰랐던 게 아니라 한국사 교과서의 분량상 생략한 것이다. 역사에 있었던 것을 전부 다 쓰자면 이론상으론 수십만권 분량으로 만들 수도 있다.[8] 한국에서는 광개토왕 대에 요동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고국원왕-소수림왕 대에 요동을 장악핬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유주자사 진과 관련된 사료. 북한 교과서에서는 이 사건을 중요하게 언급한다.[9] 한국사학계에서도 종종 간접 통치영역 내지는 영향권으로 내몽골 동부~흑룡강 일대까지 보는 경우가 있다. 물론, 교과서 지도는 직접 통치영역(요동반도~만주 일대)을 바탕으로 수록되어 있다.[10] 사실 이것도 더 깊게 파고들면, 당시 삼국에 민족통합이란 개념 자체가 있었겠느냐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특히 건국신화가 연결되는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는 왕족도 박-석-김씨로 나뉘는데다 건국신화부터 궤를 달리 한다.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 하여 오랑캐 취급했다. 그러나 통합 이전에나 남남이였던 것이고 통합한 직후부터 신라는 민족통합을 주장하기 시작, 후임 고려왕조도 신라를 이어받아 다시 통합했다는 입장을 견지해 그것이 조선과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라가 민족통합 시도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틀림없고 한국 사학계가 이를 긍정하는 것이다. 물론 통일신라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후삼국으로 분열된지라 남한의 역사학자들도 왕건의 통일 및 발해 유민 통합을 높게 쳐주는 건 사실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목민 인식이 소멸한 것도 고려시대이다.[11] 북한의 3대 독재자들은 경주 김씨에서 분적된 전주 김씨이므로 따지고 보면 신라왕조의 후손이다.[12] 고구려 멸망 이후의 신라의 대당 항쟁 부분은 언급하고 있다.[13] 당장 5대 역적 중 2명이 조선 건국의 주역이다.[14] 정작 북한에서 고려의 구국 영웅으로 떠받드는 강감찬 역시 현재의 서울 관악구(당시 양광도 금주) 출신이고 무덤도 현재 남한 땅에 소재한다.(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시) 다만 강감찬은 북한 땅의 개경 정부를 위해 싸웠으나 이순신은 남한 땅의 한양 정부를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15] 한국 교과서에서는 언급도 거의 안되지만 여기에는 상당히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16] ‘일본 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에 맞선 한성 군인과 인민들의 애국적 폭동’으로 설명한다.[17] 최한기의 사상은 서경덕과 더불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성리학에서의 이 대신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기를 우선시했고, 이것이 주체사상의 바탕이 되는 유물론적 성향과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16C의 사상적 흐름을 설명할때도 적용되어 상대적으로 북한 교과서는 이이와 이황보다 서경덕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18] 그리고 또 북한에는 조선로동당의 ‘우당’으로 내세우는 천도교 정당인 천도교청우당이 있다.[19] 불교 계통의 자생종교. 일제강점기 백두산 일대를 근거지로 하였으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