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역사

 




1. 고대
2. 로마 시대
3. 중세
5. 근대
6. 독립과 독재정권
7. 혁명 이후


1. 고대


튀니지의 역사 시대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르면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와 페니키아를 오가는 무역선이 들릴 중간 기점으로 북아프리카 연안에 우티카 같은 조그만 항구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중간 기착지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항구적인 정착지로 진화해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이곳에 세운 고대 카르타고가 튀니지 지역을 포함해 지중해의 드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강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전까지 카르타고는 서쪽으로는 마우레타니아에서 동쪽으로는 리비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해안 지역과 이베리아 남부, 발레아레스 제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섬을 지배권에 넣으며 번영했다. 이베리아 광산에서 나오는 금, 은, 구리, 제해권을 통해 독점한 브리튼 섬의 주석, 티리언 퍼플은 카르타고의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그 외에 직물업을 비롯한 각종 제조업, 농업도 발달했다. 카르타고의 해상 무역은 지중해 전역 뿐만 아니라 대서양 동안을 따라 브리튼 섬 및 모로코, 카나리아 제도까지를 범위에 두었다.
북아프리카의 페니키아계 도시는 지중해의 무역 주도권과 제해권을 놓고 고대 그리스인들과 불가피하게 경쟁하였다. 기원전 480년에는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시칠리아 및 그리스 본토의 그리스인과와 세 차례의 시칠리아 전쟁, 에페이로스 왕국과의 전쟁을 비롯한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는 이후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된다.
한편 해안가의 페니키아계 도시국가 외에도 내륙에는 오늘날 베르베르인의 선조뻘이 되는 누미디아인, 가이툴리아인이 각각 중북부 아틀라스 산맥과 남부 사하라 지역에 거주했다. 누미디아인은 대부분 정주민, 가이툴리아인은 대부분 유목민이었다. 누미디아인은 해안의 페니키아계 도시와는 경제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카르타고를 비롯한 페니키아계 도시가 성장하기 전에는 정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이런 관계는 페니키아계 도시의 경제력과 인구가 성장함에 따라 자연히 역전되었고 누미디아인은 카르타고 및 페니키아계 도시에서 용병, 소작농으로 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베르베르인의 선조는 카르타고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내륙에서 문화적,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했으며 그리스나 로마와의 전쟁으로 카르타고가 약화되면 그 틈을 타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노력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3세기 중반에서 2세기 중반까지 카르타고로마와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치뤄 세 번 다 패배해 멸망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그리스와 오랫동안 다퉈왔던 시칠리아를 중간에 개입한 로마에게 넘겨주었으며 이후 그 여파로 사르데냐 역시 로마의 영토가 되는 등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다만 그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영역을 상당히 확장하기도 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본토를 침공한 로마 및 로마와 동맹한 누미디아 왕국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였고 카르타고의 영토는 카르타고시 주변으로 크게 축소된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는 물론 카르타고의 멸망 및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의 성립이었다.
1, 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카르타고의 북아프리카의 다른 페니키아계 도시에 대한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원래 카르타고와 라이벌 관계였던 우티카나 하드루메툼 같은 일부 페니키아계 도시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로마 편을 들기도 했다. 카르타고와는 정반대로 이런 도시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서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번영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는 오늘날 안나바에서 수사에 이르는 튀니지의 북부 및 동부만을 포함했고 튀니지 일대의 카르타고의 나머지 영토는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에 넘어갔다. 누미디아는 원래 동부와 서부의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후반에 하나로 통일되었고 제3차 포에니 전쟁 무렵에는 오늘날 튀니지 내륙 지역은 물론 동쪽으로 트리폴리타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로마는 한동안 누미디아를 동맹국으로 삼아 마우레타니아, 가이툴리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에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로마의 내전에서 누미디아는 폼페이우스와 동맹했다가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멸망했으며 오늘날의 튀니지 대부분은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에 병합되었다.

2. 로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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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젬의 원형극장 유적지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는 오늘날 튀니지의 북쪽 절반과 알제리 동부, 트리폴리타니아 해안 지방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었다. 물론 아프리카 속주에 인접한 지역에서는 페잔 일대의 가라만테스 등 여전히 독립적인 베르베르인이 거주하였다. 처음에는 우티카를 수도로 했으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카르타고 시가 재건된 이후에는 카르타고가 수도가 되었다.
로마 시대 아프리카 속주는 수백 년간 팍스 로마나 아래에서 다시금 제국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로마식 도시로 재건된 카르타고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과 함께 로마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으며 화려하고 정교한 모자이크와 도기 공업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제국 여러 지역에서 퇴역 군인을 포함한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카르타고와 아프리카 속주의 로마화가 진행되었으며 카르타고는 국제적인 분위기를 띠는 도시가 되었다. 아프리카 속주에서는 행정 언어이자 제국 공용어인 라틴어 외에도 페니키아어, 베르베르어가 계속 사용되어 언어적으로도 다채로운 양상을 보였다.
지방 역시 관개 시설의 발달 덕분에 로마 제국의 곡창이 되었다. 은 이 당시 올리브와 함께 아프리카 속주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 튀니지 북부를 흐르는 바그라다스 강 유역은 특히 비옥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농업은 주로 라티푼디움이라고 부르는 대농장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농지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베르베르인 유목민과의 충돌도 발생했으나 이들 유목민은 곧 튀니지 남서부의 반사막 지대로 밀려났다.
아프리카 속주 영내에 로마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지역에는 아풀레이우스와 같이 완전히 로마화한 베르베르인도 있었지만 내륙에는 로마 문명의 영향을 제한적으로만 받은 베르베르인 집단이 점처럼 흩어져 분포하였다. 이는 로마가 이민족의 문화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2~3세기에는 아프리카 속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초기 로마 제국 기독교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훌륭한 신학자도 배출되었다.
아프리카 속주는 특이하게도 도나투스 파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지역이기도 했다. 3세기 말 마지막 기독교 탄압에서 발생한 형식적 배교자를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다시 받아들일지의 문제에서 일부 기독교도가 이를 반대하면서 도나투스 파로 갈라져 나왔다. 특히 내륙의 덜 로마화되고 가난한 베르베르인 중에서 도나투스 파가 많았고 카르타고는 카톨릭 교회가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도나투스 파와 카톨릭 간의 충돌을 민족, 계층 간의 투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도나투스 파는 아프리카 속주가 반달족에게 넘어갈 때까지도 존재했으며 4세기 말 연이어 베르베르인 유력자가 반란을 일으킬 때 세력 기반이 되었다.
4세기 말에는 피르무스가 로마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형제인 길도에 의해 진압당했다. 길도 역시 곧 반란을 일으켰다 또다른 형제인 마스케젤과 서로마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 사건에서 반란 또는 진압에 가담한 사람들이 베르베르인 유력자이자 동시에 로마의 장군이나 귀족이었다는 점에서 로마의 아프리카 통치 과정에서 현지 지배층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서로마가 급속히 멸망의 길을 걷던 무렵, 라인강과 남프랑스, 피레네 산맥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 남부까지 들어온 반달족은 같이 들어온 수에비족과 서고트족, 서로마의 군사적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에 429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휘하의 반달족과 알란족을 데리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를 침공했으며 불과 10년만에 카르타고를 공략하며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 전역을 손에 넣고 반달족과 알란족의 왕국, 또는 반달 왕국을 세웠다. 이때 도나투스 파도 반달족을 도왔으며 많은 로마인, 특히 도시 주민과 카톨릭 사제는 지중해를 건너 피난을 가야 했다. 해적이 되어 지중해 일대를 바이킹마냥 휘젓고 로마까지 침공하는 반달족을 쫓아내고 아프리카를 되찾기 위해 서로마 제국이 단독으로, 그 다음에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공동으로 군사 작전을 펴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고[1]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파견해 534년 멸망시킬 때까지 반달 왕국은 거의 한 세기를 존속했다. 그러나 언어적, 문화적 영향은 제한적이었고 행정, 대다수 주민의 생활은 반달족의 정복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은 반달 왕국의 영토에 카르타고를 수도로 하는 아프리카 총독령(Exarchate)을 세웠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해안 도시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만한 역량이 없었고 때문에 내륙은 독립적인 베르베르인 정치 집단의 영역이 되었다. 610년,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헤라클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며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위기에 놓여있던 제국을 구원하고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공격하는 등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크게 약화시켰다. 역설적으로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가 약화되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발흥하여 곧 시리아,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이슬람 군대는 670년경에 아프리카 총독령 및 북아프리카에 대규모 침공을 가하여 동로마 제국 및 현지 베르베르인 왕국과 부족 세력을 패배시키고 정복하였으며 698년에는 카르타고를 함락하고 북아프리카 정복을 마무리지었다. 언어적으로는 7세기 초까지는 라틴어가 제국의 실질적인 행정 언어였으므로 그리스어의 영향은 크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3. 중세


중세 이슬람 시대에는 튀니지를 비롯한 로마 시절 아프리카 속주 지역을 그대로 음차해서 이프리키야(إفريقية: Ifriqiya(h))라고 불렀다. 이프리키야의 중심 도시는 670년경 이슬람 군대가 침공할 때 세워진 카이라완이었다. 군사적 거점을 만들기 위해 세워진 도시라 이름도 아랍어로 '요새' 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슬람 제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는 이때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이었으나 이 시기에 군항이 세워졌다. 반면 카르타고, 우티카 같이 로마 시대에 번영했던 도시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우마이야 조의 북아프리카 지배도 8세기 중반 모로코에서 이슬람의 한 분파인 하리지 파를 믿는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아바스 조가 성립되고 나서도 북아프리카에 대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은 약해서 800년경 형식적으로만 아바스 조의 신하이고 사실상 독립 왕조인 아글라브 조가 성립되었다. 백여년 간 튀니지를 중심으로 한 마그레브 지역에 정치적, 군사적 안정이 되돌아오면서 농업과 무역, 문화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이슬람 법률의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마그레브 지역에 말리키 학파가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아글라브 조는 한때 시칠리아를 정복하기도 했으며 시칠리아는 12세기에 노르만인에게 정복 당할 때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한편 알제리 내륙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건조 지대에는 하리지 파의 베르베르족이 아글라브 조와 공존했으나 이후 파티마 조에 의해 함께 멸망당한다.
900년대 시아파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켜 909년 카이라완을 점령하고 파티마 왕조를 세웠다. 파티마 조는 마그레브 전역을 정복해 배후의 위험이 없어지자 969년 이집트를 침공하고 카이로를 세워 수도로 삼았다. 자연히 서쪽 마그레브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약해져서 오늘날의 튀니지인 이프리키야는 파티마 조의 섭정인 지리 조가 실질적으로 독립적으로 통치했다. 처음에는 잠깐 번영하는 것 같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사하라 사막을 통한 무역이 쇠퇴하고 그 대안으로 선택한 해상 무역도 이탈리아 도시와의 경쟁으로 쉽지 않아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다. 1048년 지리 조가 수니파로 전향하며 파티마 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파티마 조는 1058년 바누 힐랄 등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베두인족을 보내 지리 조의 영토를 해안가 일부로 축소시켜버렸다.[2] 약체가 된 지리 조는 노르만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이후 약 백여년 간 이프리키야는 베두인과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러다 서쪽 멀리 모로코 서남부에서 발흥한 베르베르 계의 알모하드 조가 1150년대 이프리키야를 정복하여 이러한 무정부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바누 힐랄 등 아랍계 베두인족의 침공과 이주는 이 지역의 아랍화를 가속시켰으며 이슬람화가 더뎠던 내륙의 베르베르인 거주지에서도 인구가 아랍계로 교체되거나 하여 아랍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13세기 초에 알모하드 조가 결정적인 타격[3]을 입으면서 휘청거리자 알모하드 조에 의해 이프리키야를 지배하던 베르베르계의 하프스 가문은 1229년 독립을 선언하고 하프스 조를 세운다. 하프스 조는 비교적 수명이 긴 편이어서 14세기 중엽에 잠시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맞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프리키야가 다시금 이슬람 세계의 중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사하라를 통한 육로 무역과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이 발달했으며 무역의 발달에 따른 법과 제도도 정비되었다. 문화적으로는 교육과 시, 건축이 발달하고 이븐 할둔과 같은 학자도 배출되었다. 또 베르베르인의 아랍화가 진행되어 아랍어가 더욱 널리 퍼지고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간의 구분이 약화되었다. 레콘키스타 운동을 피해 건너온 이베리아 출신 무슬림과 유대인도 이 지역 문화와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는 한편 이프리키야를 중심으로 국가의 후원을 받는 해적이 활발히 활동해서 유럽 국가가 군대를 보내 침공하기도 하였다. 하프스 조는 15세기 중후만 우스만 칼리프 때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16세기에는 각기 전성기를 맞은 스페인오스만 제국이 세력 대결을 벌이는 지역이 된다. 1534년에 오스만 제국이 튀니스를 1년간 점령하자 오스만의 위협을 피해 스페인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1574년 오스만이 스페인을 물리치고 튀니스를 점령하여 멸망하고 튀니지는 오스만의 튀니스 에야레트(현대 대한민국의 도(道)에 해당하는 최상위 지방행정조직)이 된다.

4. 오스만 제국 시대


오스만 제국의 북아프리카 진출은 바르바리 해적 두목 가운데 하나로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하이르 앗 딘과 그 형 우르지가 1516년 알제를 정복하고 1518년 스스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어 베일레르베이[4]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16세기 중엽은 바르바리 해적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여 지중해를 오가는 기독교 무역선과 해안 도시, 마을을 휩쓸고 다니던 시기로 북아프리카 해안은 이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당시 북아프리카의 현지 이슬람 정치세력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북쪽의 기독교 국가, 특히 에스파냐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발칸 반도와 지중해에서 기독교 국가를 견제할 오스만 제국의 존재는 이들의 생존에 중요했으며 오스만 제국 덕분에 튀니지가 아직도 이슬람 문명권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프스 조에게는 오스만 튀르크가 에스파냐보다 왕조의 존속에 더 큰 위협이었고 1574년 울루지 알리가 튀니스를 최종적으로 알제의 베일레르베이령에 포함시킴으로서 하프스 조는 멸망하고 이프리키야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다.
1587년 울루지 알리가 사망한 후 베일레르베이는 폐지되었고 오스만 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된 파샤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지역을 각각 다스리게 되었다. 파샤 아래에는 세금 징수 등을 맡은 베이, 튀르크 장군과 현지 유력자로 이루어진 협의체이자 중앙 행정 기구인 디완, 예니체리 부대의 지휘관인 아가, 백인대장과 같은 존재였던 데이, 그리고 정부의 주요 수입을 제공했던 해적 등이 있었다. 지배 계층은 대부분 튀르크인이어서 튀르크인 지배자와 튀니지인 피지배자의 분리가 존재했다. 또 튀르크어의 유입으로 베르베르어는 더욱 위축되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은 1591년에 예니체리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하급 지휘관인 데이(dey) 중 한 명을 데이(Dey)로 선출하였다. 데이는 수도에 대한 통치와 군권을 행사하고 파샤를 형식적인 지위로 격하시키고 디완을 해산함으로써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차가 되었다. 데이에 의한 통치는 짧지만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이 회복되었으며 특히 우스만 데이(1598-1610)와 유수프 데이(1610-1637) 하에서 튀니지는 경제적으로도 회복하고 여러 공공사업이 진행되었다. 또 이 시기는 16세기 중반에 이어 해적 활동이 다시금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640년에 데이가 사망하자, 당시 파샤 직을 겸하고 있던 (무라드 쿠르소의 아들) 하무다 베이는 디완이 해산으로 인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유력자들과 지방의 부족들, 파샤라는 직위가 주는 이름값 등을 통해 데이가 되는 데 성공하고 이로서 파샤와 데이에 이어 베이가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하무다의 아들 무라드 2세는 디완을 복원하고 예니체리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1675년 그의 사후 무라드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인접한 알제리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등 혼란한 상황이 발생하고 1702년 무라드 가문의 마지막 베이가 암살됨으로서 무라드 시대는 끝나게 된다. 한편 무라드 시대에는 또한 해적 활동이 감소하고 대신 유럽 국가와의 지중해 무역이 증가하였다. 튀니지 정부는 이 무역을 독점하여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었으나 민간 상업의 성장은 지체되었다.
무라드 2세 사후의 혼란은 1705년 후세인 이븐 알리가 베이에 오름으로서 마무리된다. 이후 튀니지는 후세인 왕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하였으며 1715년 오스만 중앙 정부에서 후세인을 대신할 파샤를 내려보냈으나 후세인 베이를 지지하는 현지 유력자들에 의해 거부당해 오스만 제국이 후세인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야 했을 정도이다. 후세인 조는 오스만의 간섭을 우려해 오스만과의 관계는 최대한 형식적으로만 유지했으며 예니체리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오스만 제국이 인정한 하나피 학파가 아니라 튀니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말리키 학파의 이슬람 법학자를 관료로 임명하고 튀니지/튀르크 혼혈 및 튀니지인의 관직 진출을 확대하는 등 독립적인 면모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튀니지는 유럽으로의 수출이 증가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다. 또 이 시기는 바르바리 해적의 마지막 전성기에 해당한다.
1820년대 이후 크게 악화한 무역수지는 독점 무역으로부터 얻는 이익이 주요 수입원이었던 튀니지 정부가 큰 부채를 지는 원인이 된다. 더불어 산업화에서 뒤쳐졌던 튀니지는 값싼 수입상품의 유통으로 전통적인 제조업이 쇠퇴하며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에 놓이고 만다.

5. 근대


아흐메드 베이(1837-1855)에 의해 튀니지의 근대화 노력이 시작되게 된다. 튀니지는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 이집트무하마드 알리를 본받아 개혁에 나서며 근대적인 통신, 교통, 군대, 교육기관을 도입하거나 도입할 계획을 세우고 1863년에는 (물론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 체제였지만) 헌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그레브의 고질병인 미약한 중앙 정부와 그로 인해 잘 걷히지 않는 세금, 유럽의 산업 혁명으로 생산된 값싼 수입 상품의 범람으로 인한 무역 적자, 가뭄과 전염병 등 자연 재해, 이상의 원인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난과 재정 적자, 거기에 부패(e.g. 중앙은행장이 자본금을 통채로 들고 프랑스로 튐)까지 더해지며 1867년에 튀니지 정부는 파산을 선언하고 만다. 2년 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채권단을 구성하여 튀니지 경제를 정상화해보려고 했으나 이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
한편 19세기에는 이탈리아, 주로 시칠리아에서 많은 수에 이탈리아인 이민자가 유입되어[5] 당시 인구가 백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튀니지 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프랑스는 이를 좋지 않게 여겨서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이후 프랑스는 튀니지 내 이탈리아인을 탄압하여 이탈리아인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무솔리니가 프랑스의 튀니지에서의 이탈리아인에 대한 대우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니까 차별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튀니지를 노리는 나라는 바로 옆의 알제리로는 모자라 튀니지로 진출하려던 프랑스와 당시 막 통일을 마치고 식민지 쟁탈전에 합류한 이탈리아로 압축된다. 이탈리아는 이미 튀니지에 정착한 수십만 명의 이탈리아인을 근거로, 튀니지를 자국의 식민지의 첫 케이스로 삼기 위해 튀니지 쟁탈전에 열심이었으나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진 오스만 튀르크의 발칸 반도 영토 처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튀니지를 프랑스의 영향권에 넣기로 하고 이탈리아에게는 대신 트리폴리타니아 지역[6]의 지배권이 주어진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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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튀니지 국기
프랑스는 튀니지를 평화적으로 점령하고자 후세인 조와 협상을 시도하지만 당연히 될 리가 없고 침략할 구실을 찾던 와중에 1881년 튀니지와 알제리 변경의 한 부족이 알제리를 약탈한 것을 빌미로 군대를 튀니지로 진격시켜 바르도 조약을 맺어 군사권과 외교권을 뺏고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만든다. 뒤이어 재정에 관한 권한 역시 프랑스가 갖게 되면서 후세인 조는 이름만 존재할 뿐 튀니지는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식민지가 된다. 경쟁국 이탈리아는 즉각 항의했으나 주요 열강들이 프랑스 편을 들자 마지못해 1893년 프랑스의 튀니지 지배를 인정한다.[8] 각설하고 1882년에 베이가 사망하자 프랑스는 알리 베이를 즉위시키면서 튀니지와 오스만 제국과의 형식적인 유대도 끊어지게 된다.
프랑스는 알제리의 경우처럼 프랑스인 이주자(콜롱)에게 많은 경제적 특권을 주어 튀니지에 최대한 많은 이주자를 유치하려 노력하였으며 1891년에는 만 명에 불과하던 프랑스인 이주자는 1945년에는 14만 4천명으로 증가한다.참고로 이는 당시 튀니지 인구 전체중 8%에 해당하는 인구였다. 프랑스는 철도와 도로, 병원, 수도, 관개 시설, 교육 기관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농장과 광산을 개발하여 튀니지의 경제 수준, 인구와 튀니지인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숙련 노동은 전부 프랑스에서 공급받았고 급격하게 프랑스인의 농지를 확대하여 프랑스의 정책이 프랑스 본국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며 튀니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1880년대 이후 아랍 세계에 아프가니, 압두 등의 개혁가가 출현하면서 튀니지도 이들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을 유지하되 서양의 합리주의와 과학 기술로 사회를 점진적으로 근대화하려는 운동이 발생하고 이런 사상을 담은 언론 매체가 출현한다. 이러한 운동은 점차 튀니지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여 1920년 데스투르 당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데스투르는 아랍어로 '헌법' 이란 뜻으로 1863년 제정된 헌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탄압과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데스투르 당(그리고 거기서 갈라져나온 신 데스투르 당)은 노동자 세력과 연대하여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다.
1940년에 프랑스 본국이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튀니지는 비시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이곳은 치열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무대가 된다. 1942년 11월엔 튀니지에 전부터 눈독을 들인 이탈리아 왕국에게 양도된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엘 알라메인 전투의 패배로 독일군이 후퇴하고 서쪽에서는 횃불 작전에서 영미 연합군이 수적으로 불리한 비시 프랑스군을 제압한 데다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보급이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1943년 5월 13일 추축국 군대가 항복하여 튀니지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2차대전 후 하비브 부르기바가 이끄는 신 데스투르 당 및 그와 연대한 튀니지 노동자 총연맹(UGTT)(참고로 공산주의와는 상관 없음)은 법아랍주의 계열과의 내부 갈등을 이기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실패하고 알제리 독립을 저지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1955년 튀니지의 독립을 약속하고 1956년 3월 20일, 튀니지는 베이였던 무하마드 8세 알 아민을 국왕으로 하는 튀니지 왕국으로 독립한다.

6. 독립과 독재정권


왕국으로 독립한 튀니지는 그 이듬해에 입헌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체제가 전환되었다. 초대 대통령에 하비브 부르기바가 당선되었으나 그는 헌법까지 바꿔가면서 30년간 장기집권을 했고, 결국 1987년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에게 쫓겨났다. 하지만 세속주의 정책이나 여권신장 정책,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운동 후원 등 대내외적으로 꽤 괜찮은 정책도 수행해서인지 부르기바는 독재자 치고는 아직까지도 국민들의 평가가 좋은 편. 튀니지 혁명 이후에도 웬만한 도시의 큰 길에는 하비브 부르기바의 이름이 붙어있으며 어쩌다 정치 이야기에서 이 사람이 나와도 그다지 까이지 않는다.

7. 혁명 이후


2010년 12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3년간 독재를 해온 벤 알리 정권에 대항해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자세한 사항은 튀니지 혁명 참조. 하지만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2013년 와서도 혼란을 겪었다. 살라피즘이란 극단주의를 숭배하는 자들의 난립과 이에 맞서는 세속주의자들의 반대로 국가 비상 사태를 연이어 선언할 지경.
우여곡절 끝에 2014년 1월 26일 신헌법이 통과되었다. 광신적인 아랍 국가들 사이에선 이례적으로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근거로 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와 여성의 인권 보장을 강조한 서구적인 헌법이었다. 국내외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2014년 말 치러진 총선과 대선에서 세속주의 성향의 "니다 투니스(튀니지의 외침)"가 승리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튀니지의 민주화 이행을 주도해 온 시민단체 연합체 '국민4자대화기구'는 다원적 민주주의 구축에 이바지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실업률이 높아서 2017년 1월 14일에 튀니지 전역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심각한 실업으로 인해 분신자살이 급증하고 있어 큰 골칫거리다.# 그리고 튀니지에서는 2018년 1월 8일에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되었고,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2018년 1월 9일에는 반정부시위로 200명이 체포되고 십여명이 부상당했다.#
2017년 7월 27일에 여성에 대해 모든 폭력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무슬림 여성이 비무슬림 남성과 결혼을 금지하는 이슬람 결혼법 폐지까지 추진하려 하고 있다.# 1979년 반왕정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 축출 이후 이슬람 신정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화된 이란이나 2011년 같은 아랍의 봄 시기 민주주의는 커녕 군사 쿠데타와 내전, 다에쉬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의 득세와 테러, 정치적 혼란으로 개판이 된 이집트리비아, 시리아, 이라크등과는 다르게 진보, 개혁적인 방향으로 사회 변혁이 이뤄지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2017년 9월 15일, 44년만에 튀니지는 무슬림 여성과 비무슬림 남성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폐지했다.#
#그리고 2018년 1월 튀니지 정부가 여성 인권을 침해한다고 비판받아온 ‘결혼지참금’ 풍습을 금지하고, 딸과 아들이 유산을 공평하게 나눠 갖도록 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 튀니지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지방선거를 실시했다.
현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민주화 정부에 대한 청년 세대의 지지가 상당하다고 한다. 덕분에 사회 분위기도 활짝 피어서 자국 비판에도 관대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시장으로 여성인 수아드 압데라힘이 튀니지 역사상 최초로 여성 시장에 당선되었다.[9] #튀니지는 아랍권에서는 최초로 남녀동등상속을 추진하고 있다.
#2018년 11월 22일에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발하는 시위가 발생되었다. 그리고 12월 19일에는 교육정책을 바꾸라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튀니지에서는 한 기자가 분신한 사건을 계기로 시위가 발생되었다.#
튀니지에서는 대형병원에서 미숙아 11명이 사망한 뒤에 부모에게 종이박스를 담아서 보낸 사건으로 인해 의사들이 항의시위를 하고 보건부장관까지 사퇴하는 등 여론이 불타오르고 있다.#
#베지 카이드 에셉시 튀니지 대통령이 중병으로 수도 튀니스의 군병원에 입원했다. #다행히도 건강을 회복하여 병원에서 퇴원했지만 결국 2019년 7월 25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92세. 이후, 모하메드 엔나세우르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새로 선출된 카이스 사이에드의 임기 시작(2019년 10월 23일)까지 대행 직무를 수행하였다.
튀니지에서 폭탄테러가 발생되자 안전상의 이유로 니캅착용을 금지시켰다.##
튀니지의 여성단체들과 시민단체는 여성의 날을 맞이해서 재산상속의 평등을 촉구했고 남녀차별을 없애라고 요청했다.#
튀니지 1차 대선에서 기존의 정치세력들이 대거 탈락했다.#
#아랍의 봄으로 축출된 튀니지 벤 알리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망명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망했다.
2019년 10월 6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엔나흐다가 1위를 차지했지만, 의석은 급감한 반면, 신생정당인 칼브 투네스가 2위를 차지했다.# 13일 2차 대선에서 법학교수 출신인 카이스 사이에드(61)가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 되었는데 젊은 층에서 무려 90%의 몰표를 주었다.#
#엘리에스 파크파크 튀니지 총리가 7월 15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7월 25일에 새로운 총리로 히셈 메시시 내무부 장관이 지명됐다.#
국회의장인 라치드 간누치에 대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정당들까지 가세해 불신임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와 그의 정당인 엔나흐다가 정치적 불안을 조장했다는 것이 이유인데, 불신임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전체 217명 중 109명의 찬성표가 필요하다.#
엔나흐다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불신임안 통과에 실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국 안정을 위해 연정 대상 정당들을 어떻게 달래느냐에 달려있을 것으로 보인다.#


[1] 1차인 461년에는 서로마가 300척의 배를 준비해 무리해서 반달을 치려고 하지만 노련한 반달족의 왕 겐세리크의 화공 작전에 함선이 싹 다 불타버린다. 낙담한 황제 마요리아누스는 라벤나로 돌아가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궁정 관료들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러고 나서 궁정 관료의 좌장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인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하나, 4년 후 다시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한다. 그러자 동로마는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보내 준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동, 서로마는 반달족을 치려 한다. 동로마의 주도 아래 10만이나 되는 군대가 편성되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가는데, 잘못된 인사 책정이 일을 그르친다. 동로마 황제의 처남이었던 바실리스쿠스가 총사령관이었는데 군사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근데 상대가 심히 언밸런스. 상대인 반달왕 겐세리크가 평화 협정을 핑계로 항구에 함대를 주둔할 걸 권했고, 그거에 낚여서 바실리쿠스는 또 그대로 한다. 그러자 겐세리크는 7년 전 경험을 되살려 다시 화공을 시전하고, 함대는 활활 잘도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허무하게 서로마 재생 작전은 망해버렸고 이때부터 동로마가 버린 서로마는 그냥 빈껍데기였다.[2] 이러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힐랄 침공의 원인과 결과에 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3] 원래 버전에서는 레콘키스타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보다는 알모하드 조의 내분이 보다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기독교 군대에 의한 패배는 그 결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4] 단어의 본래 뜻은 '총사령관'이나, '대총독' 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5] 최대 13만 명까지 튀니지에 살았다. 그당시 튀니지의 인구를 생각하면 상당한 수.[6]리비아 북서부.[7] 그리고 이 명분은 이탈리아가 1911년 오스만한테 전쟁을 선포하고 리비아를 침공하는 명분이 된다.[8] 그리고 이 사건으로 삐친 이탈리아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체결, 삼국 동맹에 가담한다.[9] 참고로 수아드 압데라힘 시장은 이슬람주의 성향의 정당 소속 정치가면서도 머리에 히잡을 쓰지 않고 맨 머리를 드러내고 현대식 양장을 입고 시정을 운영한다. 튀니지가 얼마나 아랍 이슬람권에서 종교적으로 세속화된 나라인지 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