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하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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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도자[1] 시절의 하우서.
1. 개요
2. 육군 - 돌격대 시기
3. 무장 친위대 조직
4. 독소 전선
5. 서부 전선
6. 종전
7. 평가
8. 주요 보직 내역
9. 진급 내역
10. 주요 서훈 내역


1. 개요


Paul Hausser[2] 1880년 10월 7일~1972년 12월 21일
하우서는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중장이라는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육군에서 퇴역한 후 무장 친위대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해 '''무장친위대의 아버지'''라 불린다.[3]

2. 육군 - 돌격대 시기


하우서는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벨(Brandenburg an der Havel)에서 프로이센 군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쿠르트 하우서(Kurt Hausser)는 독일 제국 육군 소령이었다. 1892년 군에 입대해 1896년까지 쾨슬린(Köslin)에 있는 유년사관학교를 다녔으며, 1896년에는 베를린 리히터펠데(Berlin-Lichterfelde)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89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899년 4월 20일 소위로 임관해 포젠 시 오스트로보(Ostrowo)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55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03년 10월 1일 동연대 2대대 부관이 되었으며, 1908년 10월 1일까지 5년 동안 이 보직으로 재직했다. 1908년 베를린에 위치한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해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1911년 7월 21일 졸업했다.[4][6]
1912년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다양한 부대의 장군참모 장교로 근무했으며 전후 격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 육군에 머물며 1927년에는 대령이 되었다. 1932년 1월 31일 중장 대우로 퇴역했다. 퇴역하면서 1차 세계대전 참전자들로 구성된 우익 준군사 조직 철모단(Stahlhelm)에 입단해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부장이 되었다. 얼마 후 철모단은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에 편입되었으며 장검의 밤 사건으로 인해 돌격대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친위대에 편입되었다. 실제로 독일 국방군의 육군 원수들 중 하우서보다 임관일이 빠른 이들은 5명 뿐이었으며[7][8][9], 만일 퇴역 안 하고 국가방위군(훗날 국방군) 육군에 계속 남아서 후술한 행적처럼 잘 싸워주었다면 그 역시 무난히 원수봉을 들 수 있었다는 것이 중론.

3. 무장 친위대 조직


1934년에는 하인리히 힘러의 제안을 수락하고 SS의 본격적인 전투 부대이자 무장 친위대의 전신인 SS 전투부대의 육성을 책임지게 되었다.
1934년 11월 15일에는 정식으로 SS에 가입해 239,795.라는 군번을 받았고, 브라운슈바이크 SS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동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또한 브라운슈바이크 SS사관학교 및 자매 학교인 바트 퇼츠 SS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을 제정했다. 하우서 대령은 의기만 높지 실상은 어중이떠중이 모임이나 다름 없던 무장 친위대를 강하게 훈련시키고 하우서의 육군 경력과 이후 무장 친위대 시절의 영향력은 SS 전투부대에 현대식 무기와 장비를 지급하는 데 인색했던 육군의 도움 없이 초기 무장 친위대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전문 규격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35년 8월에는 SS사관학교 총감이 되었으며, 1936년 5월에는 SS 소장으로 승진했다. 6월 1일 SS 군사본부(SS-Hauptamt) 작전부장(Che des Führungsamt)에, 동년 10월에는 SS전투부대 총감에 임명되었다. 민족사회주의를 신봉하기는 했지만 나치당이 주장하는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던 하우서는 SS에 가입한 지 2년이 넘은 시기인 1937년 5월 1일에야 나치당에 가입, 당원 번호 4,138,779를 받았다.
1939년 9월에 벌어진 폴란드 침공전에서는 육군과 SS 연대 '게르마니아', '데어 퓌러', '도이칠란트'로 혼성 편성된 켐프 기갑 사단의 옵저버로 참전했다. 1939년 10월 SS 전투부대가 차량화 사단으로 개편되면서 동 부대 사단장이 되었다. 1940년에 벌어진 프랑스 침공 작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까지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 DR)로 개칭된 동 사단을 지휘했다.

4. 독소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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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동부전선으로 향하는 LSSAH 사단을 지켜보는 힘러히틀러와 하우서 장군.[10] 우측 하단의 장교는 요아힘 파이퍼다.
1941년 8월에는 당시까지의 공적으로 기사철십자장을 수훈했다. 1941년 10월 '태풍 작전' 당시에는 부상을 입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사단장 직을 SS소장 빌헬름 비트리히에게 인계하고 8개월 가까이 요양을 취하다가 익년인 1942년 5월 28일, 무장 친위대 초기 3개 기갑 사단인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를 통합 지휘하는 SS 기갑 군단장으로 전선에 복귀했다.
1942년,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이 포위되는 등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색이 짙어지며 이에 후속하는 소련군의 연속된 대공세로 하우서가 이끄는 SS 기갑 군단에도 비슷한 위기가 찾아왔다.
1943년 2월 하르코프에서 하우서는 소련군에게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한 휘하 군단을 구하기 위해 무조건 도시를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퇴각을 결행했다. 이로 인해 히틀러의 분노를 샀지만, 약 한 달 후인 3월 21일 하르코프를 탈환함으로써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마무리지으며 신뢰를 회복했다.[11] 당시 격분한 히틀러는 일단 하우서의 상급자인 육군산악대장 후베르트 란츠를 면직시켰고, 하우서에게도 따로 책임을 물으려고 했지만 하리코프를 탈환한 공적에 따라 훈장 서훈만이 취소되는 선에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12]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 당시 다스 라이히, LSSAH, 그리고 토텐코프를 지휘해 프로호롭프카에서 소련 제5 근위전차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성채 작전 취소 후에는 제9 SS 기갑 사단 '호엔슈타우펜과' 제10 SS 기갑 사단 '프룬츠베르크'로 재편성된 동 군단을 지휘해 동부 전선에서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었고, 1944년 3월 25일에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야전군 전체가 포위되는 거대한 위험에 직면한 육군기갑대장 한스 발렌틴 후베 장군의 제1 기갑군을 구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통칭 후베 포위망이라 불리는 카메네츠 포돌츠크 포위망의 한쪽을 무너뜨리고 4월 6일 프룬츠베르크 사단이 제6 기갑 사단과 부차치(Buchach)에서 조우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호엔슈타우펜과 프룬츠베르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4월 말 재편성을 위해 제2 SS 기갑 군단은 후방으로 물러났다.

5. 서부 전선


1944년 6월 6일 서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부 전선에 있던 제2 SS 기갑 군단이 노르망디로 급파되었다. 하우서는 휘하 제2 SS 기갑 군단을 이끌고 영연방군을 상대로 전략 요충지 캉을 탈환하기 위한 역공세를 기도했다.
6월 28일 제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이 르 망(Le Mans)에 위치한 자신의 사령부에서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했고, 그 후임으로서 B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의 맹렬한 반대[13]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명령으로 하우서가 제7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최초의 무장 친위대 야전군 사령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제7군 사령관으로서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공적으로 8월 1월에는 SS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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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으로 이동하는 에르빈 롬멜과 영 불쾌해 보이는 하우서 장군.
1944년 8월 15일부터 8월 17일까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한 귄터 폰 클루게 원수 대신 잠시 동안 B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팔레즈 포위전 당시에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력을 탈출시키기 위해 머리에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맹렬하게 전선 지휘를 했다. 팔레즈 포위망 북쪽에서 캐나다 육군 제2 군단을 사력을 다해 저지하고 있던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는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파울 하우서를 자신들의 보병 수송 장갑차에 태우고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했다. 당시 하우서를 구한 것은 제12SS포병연대 5포대장 쿠르츠바인 SS 포병중위였는데 의식을 찾은 하우서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자넬 군사재판에 회부해야겠군. 어떻게 허락도 없이 사령관을 전장에서 옮겨올 수 있나?"

이에 쿠르츠바인 중위는 부상이 심각했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에 부득이 허락을 맡을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하우서는 그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걱정할까봐 나름대로 유머를 날린 것. 당시의 상황을 하우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적 전차들이 쿠드아르(Coudehard) 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몽 오르멜(Mont Ormel) 구릉 북쪽 도로를 차단했다. 적들은 재빨리 차량으로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로 인해 도로는 완전히 막혀버렸다. 그와 동시에 특정할 수 없는 위치에서 강력한 적의 포격이 개시되었다. 우린 어둠이 깔리길 기다렸다. 소규모의 기갑 전투단을 구성했고, 손상된 차량들로부터 연료를 구해 야간에 이루어질 돌파를 준비했다. 그 와중에 난 박격포 파편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21시경 다시 부대가 집결했다. 비바람이 몰아쳤다. 당시의 탈출로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간에 8월 21일 새벽이 되기 전 제2 SS 기갑수색 대대와 조우했다. 제2 SS 기갑 군단 사령부를 경유해 르 자프(le Sap)에 위치한 제7군 전방 지휘소로 가기 위해 서둘렀다. 가보니 이미 참모장 SS소장 폰 게르스도르프가 집단군 사령부에 상황보고를 한 후였다."

8월 26일 제7군을 위기에서 구한 공적으로 하우서에게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두개골 우측 부위의 부상이 심각했기에 장기간 요양을 취한 후, 1945년 1월 23일 상 라인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상 라인 집단군이 바익셀 집단군으로 개편되면서 SS 제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그에 따라 하우서는 1945년 1월 28일 라인란트의 G 집단군 사령관으로 전속되었다.
이로써 하우서는 유일하게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한 무장 친위대 장교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서부 전선의 방어 전략을 놓고 히틀러 총통과 격론을 벌인 후 G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4월 3일 남서 전구 총사령부 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 3월 초 남서 전구 총사령관은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에서 대전 초기부터 하우서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셸(Heinrich von Vietinghoff-Scheel) 상급대장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하우서는 종전까지 이 한직에 머물렀다.

6. 종전


1945년 5월 9일 오스트리아의 첼 암 제(Zell am See)에서 미 육군에게 항복한 하우서는 서부 방면 무장 친위대 부대들의 무장 해제를 맡았으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도 피고측 증인 및 참고인으로 입회했다. 이후 뉘른베르크 포로수용소 등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 1948년 여름에 풀려났다.[14] 그 후 펠릭스 슈타이너, 요제프 디트리히, 빌헬름 비트리히, 쿠르트 마이어 등 SS 원로들과 함께 무장 친위대 퇴역군인 상조회(HIAG)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남은 생애를 부하들을 돌보는 데 쏟았다. 1972년 12월 21일 루트빅스부르크에서 향년 92세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까지 무장 친위대 퇴역군인 상조회장으로서는 물론 전사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한 하우서는 아래와 같은 무장 친위대 전사 관련 서적을 출간했다. 사후 출간된 《Wenn alle Brüder Schweigen》는 무장 친위대 군인들의 사진집으로 본서의 서문을 하우서 장군이 기고했다.

7. 평가


육군에서의 경력과 무장 친위대 창설과 조직에서 세운 공으로 무장 친위대 내에서는 사실상 '''대선배'''이자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는 요제프 디트리히테오도어 아이케도 각 사단으로 들어갈 인력 수급에 대한 알력을 하우서와 벌였어도 그에게 버릇 없게 대하지 못했다. 디트리히의 경우 하우서 장군에게 눈치가 보여 상급대장 승진을 하우서가 승진한 이후로 미뤘을 정도였다.[15] 군사적으로도 SS임에도 불구하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히틀러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하르코프에서 SS 기갑 군단을 철수시킨 것 등으로 높게 평가 받는다.
또한 이레나 센들러가 2500명의 유대인 아이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항아리에 넣어 몰래 친구의 집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 밑에 묻어두었는데, 파울 하우서는 '''이를 알았으면서도''' 도로 공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그 자리를 집째로 갈아엎은 뒤 도로를 깔아버린 일화가 있다.
다만 이런 일화만 가지고 파울 하우서가 무장친위대 내에서 양심적인 군인이었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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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에 촬영된 사진인데, 가장 오른쪽에 오버코트 입은 이가 파울 하우서다. 그리고 저 장소는 최소 12만 명, 최대 32만 명이 죽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노동 수용소인 마우타우젠-구젠 강제수용소의 '''죽음의 계단'''이다. 강제수용소를 시찰까지 다닌 고위 장성이 학살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다.[16]
그의 지휘 하에 놓인 백골사단은 소련에서 포로 학살과 심각한 약탈 행위로 악명이 높았으며, 제국사단은 남프랑스와 소련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거나 지원했고, 아돌프 히틀러 근위사단은 이탈리아 파르티잔 토벌 작전에서 진압을 명목으로 숱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그의 기갑군단은 1943년 9월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2달간 발칸 반도로 파견되어 크로아티아 이스트리아 반도의 파르티잔을 진압하면서 2000명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400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전후에도 무장친위대 이익단체인 HIAG를 창설해서 역사를 왜곡하는[17] 회고록들을 간행했다. 이로 인해 서독 정부는 하우서의 회고록들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했다. 하우서가 HIAG를 통해 프로파간다하려 했던 무장친위대 무오설을 역사학자들은 비판을 넘어 아예 비웃음거리, 괘씸한 언어도단으로 치부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우서가 홀로코스트의 일환으로 인종 말살을 직접적으로 명령한 적이 확인되지 않은 것, 그리고 이레나 센들러알베르트 괴링의 선행을 모른 척 하고 넘어가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무장친위대의 창설자이자 대선배, 야전 지휘관이자 고위 장성이며, 아이케나 토텐코프 사단 같은 그의 휘하 부대원들이 자체적으로 저지른 인종말살과 전투과정에서의 범죄 행위를 묵인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도의적인 책임은 하우서 본인도 지는 것이 마땅하다. 법적 책임은 면했지만, 수많은 학살이 벌어진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고위 관료로써 그가 져야 하는 책임에 면죄부를 주고 그를 양심적인 군인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 이는 개인적인 성품과 같은 단편적인 사실들만 가지고 그의 직위가 부여한 책임으로부터 그를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일부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부실하기 짝이 없던 전범 재판에서 몇몇 사실만 보고 적당히 넘어가주었다는 이유만으로 하우서를 참군인, 그리고 무장친위대 신화[18]의 상징으로 떠받들고 있다.

8. 주요 보직 내역


  • 1934.11.15 : 친위대 가입(대원 번호 239,795)
  • 1937. 5. 1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가입(당원 번호 4,138,779)
  • 1939. 7. 2 ~ 1939.10. 9 : 켐프 기갑사단 파견참모 겸 연락장교
  • 1939.10. 9 ~ 1941.10.14 : SS 차량화 사단장, 개칭 후 제2 SS 기갑사단장
  • 1941.10.14 ~ 1942. 5.28 : 입원 가료
  • 1942. 5.28 ~ 1942. 9.14 : SS 기갑군단 지휘관
  • 1942. 9.14 ~ 1944. 6.28 : 제2 SS 기갑군단장
  • 1944. 6.28 ~ 1944. 8.20 : 제7군 사령관
  • 1944. 8.16 ~ 1944. 8.17 : B집단군 사령관
  • 1944. 8.20 ~ 1945. 1.21 : 입원 가료
  • 1945. 1.23 ~ 1945. 1.28 : 상 라인 집단군 사령관
  • 1945. 1.28 ~ 1945. 4. 3 : G집단군 사령관
  • 1945. 4. 3 ~ 1945. 5. 8 : 남서 전구 총사령부 참모

9. 진급 내역


  • 1892. 3.15 : 견습 생도(Kadett)
  • 1899. 3.20 : 소위(Leutnant)
  • 1909. 8.19 : 중위(Oberleutnant)
  • 1914. 3.26 : 대위(Hauptmann)(가진급 일자 1913.10. 1)
  • 1918. 3.22 : 소령(Major)
  • 1923. 4. 1 : 중령(Oberstleutnant)(가진급 일자 1922.11.15)
  • 1927.11. 1 : 대령(Oberst)
  • 1931. 2. 1 : 소장(Generalmajor)
  • 1932. 1.31 : 중장 대우 예편(Charakter als Generalleutnant)
  • 1934. 3. 2 : SA 대령(SA-Standartenführer)
  • 1934.11.15 : SS 대령(SS-Standartenführer)
  • 1935. 7. 1 : SS 상급대령(SS-Oberführer)
  • 1936. 5.22 : SS 소장(SS-Brigadeführer)
  • 1939. 6. 1 : SS 중장(SS-Gruppenführer)
  • 1939.11.19 : 무장 SS 중장(Generalleutnant der Waffen-SS)
  • 1941.10. 1 : 무장 SS 대장(General der Waffen-SS)
  • 1944. 8. 1 : 무장 SS 상급대장((Generaloberst der Waffen-SS)[19]

10. 주요 서훈 내역


  • 1939. 9.18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0. 5.17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1. 8. 8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2. 5. 9 : 1939년 제정 전상장 은장
  • 1943. 1.30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황금 기장
  • 1943. 7.28 :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261번째 서훈)
  • 1944. 8.26 :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90번째 서훈)

[1] 이전 서술에서는 여단지도자라 서술돼 있었는데 나뭇잎 3개짜리 칼라장은 1942년 친위대 계급장이 개정되면서 본래 집단지도자를 가리키던 것이 여단지도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저건 1942년 이전에 사용하던 버전이라 사진상의 하우서 장군은 집단지도자 계급을 달고 있었다고 봐야 맞다.[2] 파울 하우저라고 부르거나 번역하는 이들이 있는데 Hau/s(묵음)/ser가 아니라 Hau/ss(ㅅ와 ㅆ의 중간 발음)/er, 순으로 읽기 때문에 파울 하우서가 맞다.[3] 이에 따라 "아버지"라는 뜻의 "파파(Papa)" 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4] 독일 육군의 참모교육과정은 '''입학자의 75%가 3년 후의 졸업 때까지 탈락한다'''고 하는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력은 하우서 장군이 대전 후반기에 친위대와 알력이 심했던 육군 부대들을 지휘하면서도 트러블이 나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5] 무장친위대 장군들 중에서는 1차 대전 당시 나이가 어려 참전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으며(쿠르트 마이어가 대표적),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무장친위대 장군이 된 이들은 대부분 독일 제국 육군의 병사나 위관급 장교로써 싸우다 전후에 제대한 이들이다. 하우서처럼 1차 대전 이후에도 군인, 그것도 장교로써 군대에 복무하다가 무장친위대로, 그것도 초기에 넘어온 이들은 드물다.[6] 그리고 파울 하우서는 다른 무장친위대 장성과는 달리[5] 파울 하우서는 퇴역 이전에 독일 국방군 육군 전신인 독일 제국군 육군과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 육군에서 다른 육군 장교들과 함께 복무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파우서보다 나이도 적고 임관년도도 느린 후배 장교, 그것도 새까만 후배 장교들이였다. 아무리 독일 국방군 육군 장교들과 장성들이 무장친위대 장교들을 불만스럽게 생각해도 자기들의 선배 내지는 대선배한테까지 저렇게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무례하게 굴 수 있을까? 당시 독일의 권위주의, 군국주의 분위기와 하우서 장군의 능력, 그리고 히틀러가 무장친위대를 국방군보다 좀 더 우대했다는 걸 생각하면 어림없는 소리다.[7]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75년생, 93년도 임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76년생 95년도 임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78년생, 97년도 임관), 페도어 폰 보크(80년생, 98년도 임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56년생, 75년도 임관)[8] 보크는 하우서와 동갑인데다가 생일은 하우서가 더 빠르며(대신 임관년도는 보크가 빠르다.), 뵘에르몰리는 원수 계급 수여 당시 74세의 고령이라(뵘에르몰리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이미 62세에 오헝 제국군의 원수까지 오른 군인이었으며, 1차 대전이 끝나고 퇴역한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살다가 1938년과 1939년까지 나치 독일이 체코를 병합함으로 인해 독일 시민이 된 후, 프랑스 침공 성공 이후인 1940년 10월 28일에 독일군 명예원수 직위를 얻은 케이스다.) 사실상 명예직이라는 걸 감안하면 나이까지 하우서보다 위인 원수는 3명이다.[9] 비단 육군 뿐만이 아니라 국방군 해공군까지 범위를 확대해봐도 마찬가지인데 우선 해군에서는 에리히 레더만 하우서보다 빨리 임관했으며(76년생, 하우서보다 3개월 먼저 임관), 공군 원수들 중에서는 하우서보다 빨리 임관한 인물이 '''아예 없다.''' 그리고 나무위키에 개인 항목이 작성된 상급대장 이하 독일 국방군 장성들 중에서 하우서보다 빨리 임관한 사람은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78년생, 97년도 임관)뿐이다. 또한 파울 하우서의 최종 계급인 최상급집단지도자와 동급인 독일 국방군 상급대장까지 오른 59명의 장성들 중에서 그보다 짬이 높은 사람은 단 1명 뿐이다.(그 한 명이 바로 Wilhelm Adam이라는 장성인데 임관일이 고작 10일 차이난다. 게다가 소위 임관이 아니라 단순히 군입대 시기만 따지면 하우서가 몇 년 이상이나 선배다. 그리고 같은 최상급집단지도자들 중에서 하우서보다 나이가 많은 이가 있긴 한데 바로 프란츠 자페어 슈바르츠이다. 다만 이 사람은 명예직으로 받은데다가 군 경력은 1차대전 당시 육군 중위까지 오른 게 전부이다.)게다가 공군과 해군 상급대장들 중에서는 파울 하우서를 뛰어넘는 짬을 가진 이가 없다.[10] 히틀러의 기준으로 왼쪽에 서있다.[11] 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기갑부대를 시가전에 성급하게 몰아넣었다고 하우서를 비판했으나 3월 10일 자로 하리코프 시내로 진격을 명령한 것은 폰 만슈타인이다.[12] 폭풍 속의 씨앗이라는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록에도 언급되는데, 하르코프에서 퇴각당시에 한말이 간지난다. "늙은 나야 별로 상관없지만, 젊은 병사들이 더 걱정이다."[13] 에르빈 롬멜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국방군 장교들의 반발이 극심했다고 한다. 이유는 국방군은 친위대따위에게 지휘 받지 않는다.[14] 이레나 샌들러가 2500명의 유태인들을 구해준 것과 자신이 총애했던 알베르트 괴링의 유태인과 포로 석방을 묵인해줬기 때문에 꽤 빨리 석방될 수 있었다. 같이 수감되었던 (카를 게브하르트·카를 브란트 등 생체실험에 환장한) 인간 말종들이 처맞고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뒷이야기와, (같이 수감되어 있던) 그의 주치의가 내뱉은 "저런 개새끼들…죽어서까지 남에게 민폐를 끼치냐?"는 디스를 남겨두고.[15] 심지어 그 막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하인리히 뮐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마저도 하우서에게는 깍듯이 대해야 했다.[16] 하지만, 파울 하우서 본인은 학살을 일삼던 무장친위대 내에서 민간인 학살을 엄금한 인물이었기에, 이 일이 자행되고 나서 그러한 조치를 뒤늦게라도 취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그렇다 하더라도 전후의 행적은 결코 도덕적이지 못했다.[17] SS해골부대가 강제수용소 위병 근무만 섰을 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던가, 무장친위대는 전방 전투부대였기에 후방에서의 잔학행위를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던가... [18] 무장친위대는 다른 친위대와 다르며, 독일 국방군과 함께 제4의 군종으로써 독일 국가를 위해 전투에만 힘썼다는 주장. 이 신화는 무장친위대를 친위대 내의 민간인 학살부대, 친위대 경찰부대, 수용소 경비대와 분리하여 학살의 책임을 희석한다. 거기다 더 나아가 전쟁 후반기 무장친위대 외인부대에서 다른 민족들을 받은 것을 두고 무장친위대는 NATO의 선구자적인 범유럽적 조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며, 무장친위대는 수많은 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데다 친위대 내 학살부대와의 인적 교류, 인원 재배치도 숱하게 이루어졌다. 이를 주장한 사람이 바로 하우서다.[19] SS 내에서는 단 4명만 존재하며 무장 친위대에선 단 두 명만 이 계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