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즈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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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망에서 부랴부랴 탈출하는 독일군과 신나게 그들을 쓸어버리고 있는 연합군의 공군과 지상군.
1. 개요
2. 내용
3. 의의
4. 기타


1. 개요


Falaise pocket. 오버로드 작전 기간 중, 1944년 8월 12일~21일까지 벌어진 팔레즈 계곡에서의 포위 섬멸전을 말한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1만명의 사상자와 5만명 이상의 포로, 그리고 수많은 기갑사단들이 박살나면서 프랑스에서 밀려나게 된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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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 이후 1개월이 넘도록 연합군은 독일군의 방어및 지연전술에 말려들어 상륙지점 인근 내륙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고, 6월 6일 상륙부터 7월 중순까지 12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의 사상자도 비슷했으나 이쪽은 전력보충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에 미군은 7월 25일 코브라 작전을 실행, 독일 육군 제7군의 전선에 구멍을 뚫었고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7월 30일, 미군은 패튼이 곧 펼치게 될 프랑스 횡단의 시작점인 아브랑슈(도시)[1]를 점령함으로써 좌측의 브로타뉴 반도와 우측의 중부 프랑스로의 공격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히틀러는 미군의 선봉을 강력한 기갑부대로 몰아쳐 도로 바다로 밀어내기를 원하였다. 당시 독일군은 노르망디에서의 철수를 검토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명령은 확고하였다. 8월 7일, 모르텡 공세가 4개 기갑사단[2]으로 시작되었다. 곧 이어서 뤼티히(Luttich) 작전이 있을 예정이었는데, 이는 8개 기갑사단을 추가로 증원하여 총 1,400여대의 전차로 북쪽을 찔러들어가서 노르망디의 상륙 교두보를 포위한다는 작전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기갑사단의 기동은 지난해 6월의 쿠르스크 전투 이후 처음이 될 터였다.
이것은 히틀러의 치명적인 전략적 미스였는데. 노르망디 상륙을 애초에 막았으면 모를까, 일단 상륙이 된 이상 병력을 보존해서 프랑스 동북부 삼림지대로 후퇴하고 서부전선의 기갑병력 상당수를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독일의 생명줄인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어떻게든 보전하는 것이 그나마 버티기라도 하는 수였다. 그러나 그와중에 소련은 9월초부터 루마니아 영내에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곧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확보하게 된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잃고 나니 독일은 극심한 석유난에 시달리게 되어, 플로이에슈티보다 생산량이 적은 헝가리 유전과 독일 내의 액화석탄으로 근근히 버티기 되는데, 결국 이는 독일이 계획한 아르덴 대공세에서, 보급 문제를 '연합군의 물자로 해결한다.'라는 기막힌 발상을 생각해내게 된다. 당연히 연합군이 순순히 석유를 내주지도 않았고, 독일군은 500여대의 전차는 물론 보병을 진격시킬 연료조차 마련할 수 없었는데 하필 공세의 주된 목표인 벨기에앤트워프를 확보하기 위해선 120~130km를 진격해야 했었다. 독일군은 운이 따라주어야 최대 60km밖에 진격할 수 없었고, 실제로는 각종 병참문제가 맞물려 공세 초기 이후에는 깔끔히 실패하게 된다.
여하튼, 뤼티히 작전 초기[3]부터 울트라에 의해 독일군의 암호 무선은 족족 감청되고 있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모르텡 공세에 앞서 2개 기갑사단과 2개 보병사단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며 독일군의 초기 공세를 지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독일군은 사전 포격도 생략하면서 기습의 효과를 노렸지만 실패하였다. 날이 밝아지자 로켓탄을 장비한 타이푼이 나타나서 친위대 2SS 기갑사단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이 날 RAF의 전술항공대는 294소티를 수행하였고 200여대의 전차는 30여대만 기동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연합국은 8월 7일 토털라이즈 작전으로 에서부터 팔레즈 방향으로 독일군의 교두보를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캐나다군폴란드군이 주축이 된 이 작전은 목표 달성에는 실패하였지만 연합군의 2개 기갑사단이 독일군의 배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위치까지 도달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곳을 방어하던 독일군은 10여개 사단이었으나, 7월부터 지속적인 연합군의 공세[4]로 탈탈 털린 상태라 기동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위치도 좋지 못했다. 참고로 이 캉-팔레즈 방향 공세에서 전차 에이스미하엘 비트만이 전투 중에 사망한다.[5]
히틀러의 망상과는 달리 공세를 확대할 추가적인 8개 기갑사단들, 즉 제5기갑군은 연합군의 포위망이 닫히고 있음을 즉각 알아챘다. 전선 서쪽에서는 조지 S. 패튼의 3군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클루게는 지속적으로 독일군이 처한 위험을 알리려고 하였지만, 불과 3주 전의 히틀러 암살미수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던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태였다. 8월 15일, 클루게는 전선시찰을 나갔다가 연락이 하루 종일 두절되었는데 히틀러는 그가 B 집단군을 이끌고 항복을 한다고 의심하여 모델로 사령관을 교체하고, 클루게는 음독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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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독일군은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0개 사단 중 이미 8개 사단은 사실상 해체 상태였으며 무장친위대 4개 기갑사단의 전차를 전부 합쳐도 100대도 못 채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리티히 작전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패튼의 3군단은 아래서부터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팔레즈 포켓 안에 고립된 독일군은 항공기들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는데, 이는 포위망에 갇히자 방공부대들의 보존을 위해 이들을 먼저 빼버린 이유도 컸다.
남은 건 후퇴였다. 제12 히틀러 유겐트 기갑사단이 21일까지 퇴로를 열어두는 동안 독일군 30만명과 차량 2만 5천대가 간신히 탈출하였다. 하지만 5만명의 사상자와 남은 20만명의 독일군은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후퇴의 어려움엔 빈약한 도로 사정도 한몫 했다. 포위망 자체가 좁혀지면서 우회로가 막혀 한정된 길에 병력들이 모이는 병목 현상이 빚어진데다, 그 한정된 길도 간신히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오솔길이 대부분이었다. 위의 기록화처럼 하천을 건너는 다리가 자그마한 돌다리 수준인 경우도 많았다. 좁은 길에 많은 병력이 몰리면서 타이푼의 좋은 사냥감으로 전락하였다.

3. 의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이 작전까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잃은 전차는 1,300여대나 되었으며 56개 보병사단 중 15개 사단은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히틀러의 영국해협 항구들을 사수하라는 무리수는 서부전선의 숙련된 고참 병사들과 많은 기갑장비를 상실하게 만들었고, 이후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선공은 사실상 꿈도 못꾸는 상태가 되었다.
1940년의 프랑스 전격전과는 달리 전차는 더 이상 독자적인 공격 수단이 되지 못함이 명백하였다. 보병들은 더 이상 전차를 보고 공황상태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독일군의 기갑사단들은 연합군의 보병과 전차의 연계플레이[6]를 뚫지 못하였다. 또한 전술 항공기까지 포함된 입체적인 공격에 취약함을 드러냈다. 역으로 조지 S. 패튼은 이 공세에서 사실상 전격전에 가까운 기동을 선보였고 성공하였다.

4. 기타


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캠페인의 마지막 미션에서 미군 시점으로 독일군을 포위하고 확장팩인 테일즈 오브 밸러의 캠페인에선 독일군의 시점으로 탈출을 엄호한다. 콜 오브 듀티 3에서는 아예 캠페인 전체가 팔레즈 포위전을 다룬다.
서든 스트라이크 4의 연합군과 독일군 캠페인에서 다룬다. 연합군은 영국군 시점으로 탈출하려는 독일군의 측면을 박살내며 포로 노획을 하는 미션이고[7] 독일군 시점 캠페인은 영국군의 우주방어 라인을 분쇄하고 추후 말 그대로 떼같이 몰려오는 영국군과 미군 기갑사단을 피해 탈출로로 보병이든 기갑이든 쌔빠지게 내달려야 한다.[8]

[1] 당시 독일의 서부전구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미군이 아브랑슈를 점령하게 되면 그들이 덤불(보카주 지대)로부터 빠져나와 무엇이든지 할수 있게 된다라고 경고했다. -타임라이프 2차대전 전집에서 발췌[2] 제116기갑사단, 제2기갑사단, SS 1, 2기갑사단[3] 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에서 구현된 317고지 전투는 바로 실제 역사에서 독일군의 당시 반격 경로상의 핵심지점이었다. 이곳은 미군 1개 보병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1주일 간의 전투 끝(독일군 수 개 기갑사단과 해당 대대를 미끼로 한 미군 구원군 수개사단+공군의 대결이었다.)이 대대는 50%의 사상자를 입었고 독일군의 항복 권유가 2번 있었으나 방어에 성공했다.[4] 굿우드 공세, 블루코트 작전, 코브라 작전 등[5] 단, 누가 비트만을 잡았는지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영국군 또는 캐나다군파이어플라이의 공격으로 인해 전사했다는 설이 정설이다.[6] 군대 용어로 '보전합동전술', 더 큰 차원에선 '제병협동술'이라고 부르며 현대의 모든 군대(한국군을 비롯)는 당연히 주기적으로 훈련을 하고있다. 이것은 1940년 당시의 프랑스가 구사했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때의 전차가 단순히 보병에게 보조했다면 이것은 보병과 전차, 또는 성질이 다른 지원/전투부대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펼치는 기동전의 전술이다. 또한 대전 기간간에 공군과 보병이 활용가능한 대전차공격체계와 무기 발전의 영향도 컸다.[7] 이 미션에서 처칠 전차크롬웰 전차, 연합군 미션 2인 헤지로우 전투에서 미군 기갑사단에 2기가 지원왔던 셔먼 파이어플라이 전차를 써볼 수 있다.[8] 이 미션에서 처음 시작하면 티거 1대와 판터 1대가 기본 시작 병력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