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크라스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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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Краснов'''
Pyotr Nikolayevich Krasnov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
생몰년도
1869. 09. 22. ~ 1947. 01. 16. 77세
복무
러시아 제국군
돈 카자크 군
독일 SS 친위대
최종계급
중장러시아 제국군
기병대장백군 돈 카자크 군
주요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서훈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2등급[1]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 4등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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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러시아 내전 지원자 부대 지휘부. 우측 두번째가 크라스노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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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카자크 기병사단 신병 환영행사에서의 크라스노프.
1. 개요
2. 생애
2.1. 러시아 제국
2.2. 러시아 내전
2.3. 2차 세계대전
2.4. 전후
3. 관련 인물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돈 카자크(Don Cossack)[4] 출신의 군인, 역사학자, 문학가. 러시아 제국군에서의 최종계급은 중장,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백군에 가담하여 기병대장까지 올랐다. 이후 독일로 이주하여 반 소비에트 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에서 나치 독일을 지지하여 체포되어 반역 혐의로 사형당했다.

2. 생애



2.1. 러시아 제국


크라스노프는 1869년 러시아 제국페트로그라드에서 태어났다. 크라스노프는 돈 카자크의 귀족 출신이면서도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러시아 제국군의 소장, 중장까지 올랐던 장군들인 군인가문 출신이었다.[5] 조부부터 모두 카자크인들로 구성된 기병 부대의 지휘관이었으며 표트르 크라스노프 또한 1888년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곧 카자크 연대 지휘관으로 진급하게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준장으로 진급, 돈·쿠반·테렉 카자크로 구성된 통합 카자크 2사단 예하의 여단장 직을 수행하였다. 1917년 8월에는 2기병군단에 예속되었었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복귀하게 된다.
그 해 10월, 러시아 혁명의 2번째 혁명이었던 10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의 총리였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진압군을 구성하고 사령관으로 크라스노프를 지명하였으며, 페트로그라드볼셰비키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폭망이었던 진압군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군에 의해 패배하였고, 크라스노프는 포로가 된다. 이후 볼셰비즘에 순종할 것을 약속한 다음에 풀려날 수 있었다.

2.2. 러시아 내전


이후 돈(Don) 지역으로 도피하여 돈 카자크의 아타만[6]으로 선출되었다. 볼셰비키가 아직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지 못해 온갖 소국과 군벌들이 난립하는 흐름을 같이 타서, 직접 빌헬름 2세에게 편지를 보내 돈 카자크 공화국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독일 제국의 지원 아래에서 러시아 내전의 백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된다. 돈 카자크 지역에서 약 4만 명의 병력과 대포, 기관총으로 수백여 문을으로 구성된 카자크 부대(Don Army)를 결성하여 차리친, 카미신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하였었다. 지금의 볼고그라드인 차리친에서는 1918년, 크라스노프가 이끌었던 돈 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서부터 표트르 브란겔, 안톤 데니킨과 함께 근 2년간에 걸친 차리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된다.
하지만 차리친에서 공방전 끝에 패배하면서 모스크바까지 진격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후 독일 제국이 1차대전의 패배로 사실상 몰락하자 크라스노프는 러시아 제국삼국 협상에 가입되었던 다른 동맹국에게 지원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독일은 볼셰비키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 그의 시도는 좌절된다.
1919년 1월에는 백군 부대인 남러시아군의 일원으로 가담하여 안톤 데니킨[7] 장군의 강요에 의해서 휘하의 하위 제대로 편입될 것을 강요받기도 하였으나 정작 아타만 선출에서 낙선하는 바람에 독일로 망명하게 된다.

2.3. 2차 세계대전


아타만 선출 회의에서 낙선[8]하는 바람에 독일로 망명길에 올랐던 크라스노프는 1923년 프랑스로 다시 이주하여 반 소비에트 운동을 펼쳤으며 리벵(Lieven)가문 출신의 라트비아 왕자인 아나톨 폰 리벵과 함께 러시아 진실의 형제단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러시아 전군연합이라는 표트르 브란겔 장군이 결성한 단체와 협력하여 대 정보 기관을 보조하였으나 NKVD의 공작에 의해서 와해되면서 이마저도 힘을 잃게 된다.
서유럽으로 망명한 기간 동안 역사소설 "쌍두독수리에서부터 붉은 깃발까지" 3부작을 집필하였다. 대전기 러시아 제국의 몰락에서부터 볼셰비키 혁명, 러시아 내전까지를 다루는 내용으로써 저자 자신의 견해보다는 비교적 중립적 시각에서 권위주의와 무정부주의, 인간의 존엄성과 폭력성, 노동과 파괴, 전쟁의 잔인함, 공포 등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료적으로나 문학적으로도 높게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무수한 저작을 남겼으며 이로 인해 1926년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추천되기까지 한다.
2차대전 발발 이후 초기 동안은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과는 별개로 이것을 일종의 러시아 해방운동으로 생각하였다. 2차대전에 대해 카자크들에게 고하면서 자신의 반공주의와 복고주의를 여실히 볼 수 있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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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장과 러시아 제국에서 받은 훈장을 제외하면 모두 독일 국방군 군복으로 바꿔 입었다.

나는 모든 카자크들에게 이 전쟁이 러시아와의 전쟁이 아니라 러시아의 피를 팔아넘기고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 그 부하들과의 전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주님께서 독일의 병사들과 히틀러를 도와주시옵소서. 황제 알렉산드르 1세께서 1813년, 프로이센에서 거둔 성공을 성취하게 해주시옵소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는 달리 히틀러는 한 동안 비 게르만인 출신의 인력을 군에 활용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의 전황이 나빠지자 카자크들을 비롯한 슬라브 계열의 이른바 동방민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나이도 이미 70대에 이르는 고령이었으므로 카자크들의 결집에 표트르 크라스노프가 사실상 얼굴마담의 대표자적 성격으로 활동하게 된다.[9]실질적인 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것은 헬무트 폰 판비츠 중장이었다. 그렇게 결성된 SS 카자크 1기병여단은 주로 후방에서 파르티잔 진압 작전에 참가하면서 점차 그 잔혹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후에는 점차 규모가 커져서 사단급으로 재결성되며 나중에는 SS 15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커졌다가 끝에는 러시아 해방군으로 소속이 옮겨진다.
하지만 외인부대를 적극 활용하였던 시점에는 이미 전황은 연합국 측에 완전히 기운 상황이었다. SS 15 카자크 기병군단 병력들은 독일군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일단 계획상 연합국에 항복했어야 했기 때문에 영국군을 찾아가기 위해서(...) 전투를 계속 치뤘다. 결국 영국군에 크라스노프를 비롯한 백계 카자크인들 대부분이 항복하였고, 소련으로 송환되지 않을 것을 약속 받았다.

2.4. 전후


그러나 영·미·소 3국은 얄타 회담에서 소련 측에게 나치 독일에 가담한 소련 내 민족을 포함한 소련 관련 포로들을 모두 소련으로 넘겨받을 것을 약속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크라스노프를 비롯한 안드레이 시쿠로 등의 나치 가담 카자크인들은 소련 군사법정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SS 15 기병군단의 지휘관인 독일인 헬무트 폰 판비츠도 포함하여 모두 12명이 소련 군사법정에 회부된다. 당연히 빠짐없이 모두 사형을 언도받고 교수형에 처해진다.
크라스노프는 마지막 증언에서 실질적인 지휘를 한 것이 아님을 참작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소련에서 카자크의 주요 인물에 대한 재판은 2차대전 만이 아니라 러시아 내전의 일까지 들추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수형이 확정된다. 마지막 증언에서는 어찌되었건 성장하고 발전하는 러시아의 모습에 대한 생각과 회한을 말하기도 하였다. 1947년 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교수형이 집행된다.
이러한 크라스노프를 비롯하여 수많은 카자크인들이 소련으로 송환되어 노동교화형, 사형에 처해졌다.[10] 일련의 사건에 대해 나치즘의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일부 민족주의적인 측면에서 이들을 동정하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나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SS 친위대에 가담한 이들이 엄연히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 러시아에서도 이들에 대한 동정은 없다시피 하다. 일부 망명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나 추모되는 편이다.
크라스노프를 포함한 12명에 대해서 소련 해체 이후인 1994년에 추모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히 나치에 가담하였던 인물들이기 때문에 추모비는 훼손과 복구를 거듭한 끝에 부동산 문제로 철거되었다.

3. 관련 인물


  • 안드레이 시쿠로 : 백군 출신 카자크 장교. 나치 독일에 망명하여 2차대전기 때 가담하였었으며 이후 처형된다.
  • 이반 코노노프 : 적군 출신 카자크 장교. 볼셰비키에 의해서 탄압받았던 과거를 숨기고 적군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나치 독일에 항복한 장교.
  • 헬무트 폰 판비츠 : 국방군 소속 카자크인 부대의 지휘관.
  • 안드레이 블라소프 : 투항부터 사망, 추모의 과정이 크라스노프와 유사한 점이 많다.
[1] Order of St. Stanislaus II class[2] Cross of St. George IV class[3] 좌측 첫번째는 후임 아타만인 아프리칸 보가옙스키 장군, 좌측 두번째는 안톤 데니킨 장군.[4] 흑해 동북부로 흘러들어가는 돈 강 일대에 16~17세기 경 자리잡은 카자크 일족. 현재의 로스토프-나-도누가 중심지이다.[5] 카자크의 역사 관련 서적을 출간하기도 하였다.[6] 카자크 인들의 지도자라는 의미. 과거에는 황제에게만 부여되었던 직책이었다.[7] 특히나 백군이 형성될 무렵에 크라스노프에게 명령권의 제한을 주기도 하는 등 갈등이 있었던 편이었다. 이건 데니킨의 남러시아군 뿐만 아니라 러시아 동부에서 활동하는 알렉산드르 콜차크와 그리고리 세묘노프 등의 상황도 비슷했다. 이러한 백군 전반에 만연한 조직 분열은 내전에서 백군이 가진 한계점으로 작용한다.[8] 후임 아타만이었던 "아프리칸 페트로비치 보가옙스키(Afrikan Petrovich Bogaewsky)"는 안톤 데니킨 장군, 표트르 브란겔 장군과 함께 모스크바로 진격했으나 실패해 서부의 백군 운동 전반이 사실상 궤멸된다.[9] 같은 카자크 백군 출신 망명자였던 안드레이 시쿠로 장군 또한 같은 포지션이었다.[10] 이에 대해서 린츠 대학살, 카자크의 배신, 카자크인 송환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