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브란겔

 

Pyotr Nikolayevich Wrangel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브란겔[1]
1878년 8월 27일 ~ 1928년 4월 25일
1. 개요
2. 생애
2.1. 제국의 군인
2.2. 데니킨 휘하에서
2.3. 남러시아군의 지도자
2.4. 망명 생활
3. 기타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에 가담했다. 백군의 입장에서는 최후의 희망에 가까웠던 인물. 별명은 '''검은 남작'''.

2. 생애



2.1. 제국의 군인


유서깊은 발트 독일인 귀족 가문인 브란겔 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브란겔 남작은 성공한 광산업자였고 표트르 브란겔은 러시아 내전의 주요 인물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가장 풍족한 삶을 보냈다.
삼형제 중 장남이었던 브란겔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광산업을 할지, 직업 군인을 할지 고민하며 계속 갈짓자 행보를 보이다가 러일전쟁에 자원해서 참전한 것을 계기로 완전히 군인으로 진로를 정한다.
브란겔은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시점에서 대위 계급으로 기병중대장을 맡고 있었고 독일 제국과 직접 국경을 맞댄 북서부 방면에 배치되어 동프로이센으로 직접 공격해 들어가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의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1915년에는 대령까지 승진했고 연대장이 되어 남서부 방면의 갈리치아로 재배치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대했다. 여기서 브루실로프 공세가 실행되며 브란겔은 자신의 역량을 어김없이 발휘할 수 있었고 소장으로 승진해 기병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2.2. 데니킨 휘하에서


총력전을 감당하지 못한 러시아 제국은 결국 1917년 2월 혁명으로 멸망했고 러시아 공화국이 세워졌다. 브란겔은 케렌스키 공세의 며칠동안 잠깐 군단장까지 승진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억지로 펼쳐진 공세는 재앙으로 끝났다. 신생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이 사라진 브란겔은 퇴역했고 크림 반도 얄타의 다챠로 은퇴하기로 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다시 한번 10월 혁명이라는 격변이 일어났고 러시아 내전이 터지자 부유한 귀족이자 전직 군인이었던 브란겔은 볼셰비키에게 수감되었다. 브란겔에게는 다행히도 1918년 3월 크림 반도에 독일군이 들어왔고 그 덕에 풀려난 브란겔은 키예프로 가서 가장 가까운 세력인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 파울로 스코로파즈키에게 협력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국은 독일의 괴뢰국에 불과했고 이곳의 막장 상황을 직접 보게 되자 미련없이 떠난다.
마침 이 시점에서 안톤 데니킨예카테리노다르에 거점을 확보하며 반볼셰비키 운동의 주력으로 떠올랐고, 브란겔은 당해 8월에 데니킨의 남러시아군 휘하로 들어가 기병사단을 지휘하게 된다. 남러시아군에 합류한 브란겔과 그의 기병은 높은 규율, 기동력, 돌파력으로 쿠반과 캅카스의 여러 전투에서 승전했고 남러시아 백군의 여러 고위 지휘관들이 사망하며 1918년 말에는 중장에 군단장까지 승진한다. 이 시점에서 남러시아군은 크림 반도와 (남캅카스를 제외한) 남러시아 전역을 확보했고 해군을 통해 해외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백군 최대의 세력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남러시아군의 이후의 진격로를 놓고 데니킨과의 의견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남러시아군의 세력은 강해졌지만 정부라기보다는 군벌에 가까웠기 때문에 의견이 완전히 통합되어 있지 않았고 외교적인 인정도 받지 못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쿠반 카자크의 아타만 표트르 크라스노프는 동진해 차리친을 뚫어 시베리아의 러시아국[2]과 합류할 것을 주장했고 데니킨은 강한 세력을 이용해 속전속결로 북진해 모스크바를 점령해서 빠르게 내전을 끝낼 것을 주장했다. 안정적인 보급선을 확보하고 난잡한 명령 체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크라스노프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지만 데니킨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크라스노프는 단독으로라도 차리친을 공격하지만 차리친의 정치장교의 철통같은 방어로 큰 손실을 입으며 인기를 잃었다. 세번의 공세에서 모두 대패한 크라스노프는 결국 이듬해(1919년) 아타만 선거에서 떨어져서 해외로 망명했다.
브란겔은 크라스노프의 의견을 지지했고 크라스노프가 나가리되며 동진론을 유지하는 유일한 장군이 되었다. 계급이 높아지고 전공을 쌓은 브란겔은 단독으로 어느 정도의 병력을 운용할 권리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차리친을 공격한다. 마침 이전까지 차리친을 방어하던 정치장교레프 트로츠키와의 불화로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요새화된 도시인 차리친은 브란겔의 장기인 기병이 활약하기 힘든 곳이었지만 영국에서 원정온 Mk 전차Mk. A 휘펫으로 구성된 전차 여단과 장갑열차 5대를 동원하고도 수 천 명의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싸움 끝에 1919년 6월 30일 차리친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브란겔은 동진론이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주장임을 데니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힘들게 차리친을 뚫었지만 차리친에 도착한 데니킨은 차리친에서 '''모스크바 공세를 선포했다.''' 브란겔은 짬에서 밀려 더이상 의견을 내는 것을 금지당했다. 훗날 브란겔은 회고록에서 이 순간을 남러시아군에 사형선고가 내려진 순간이라고 묘사했다.
공세가 시작되자 남러시아군은 쾌진격을 이루며 모스크바 남쪽 수십 km지점 까지 갔고 데니킨의 북진론은 일견 옳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데니킨이 진격하는 사이 늘어진 보급선은 네스토르 마흐노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현지 세력의 게릴라전으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니콜라이 유데니치의 발트 백군과 콜차크의 시베리아 백군이 패퇴하며 생긴 여유 병력들이 철도를 통해 남쪽으로 집결해 남러시아군을 포위섬멸했다. 끔찍한 패배의 와중에도 데니킨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12월 20일 브란겔의 지휘권을 박탈한다. 1920년 2월 8일 브란겔은 완전히 사퇴하고 코스탄티니예로 망명했다.
결국 데니킨의 추태를 견디다 못한 남러시아군의 지휘관들은 그에게 최후통첩을 보내고 4월 17일 데니킨은 브란겔을 후임으로 추천하며 브란겔과 교대하듯이 코스탄티니예로 망명한다.

2.3. 남러시아군의 지도자


드디어 브란겔은 남러시아군의 지도자로 취임하지만 남은 영토는 크림 반도 뿐, 대부분의 병력은 포로가 되었고 협상국이 보내준 무기는 노획되었으며 데니킨의 폭압적인 정책으로 민심도 떠났다. 볼셰비키의 주의를 끌어주던 시베리아 백군도 발트 백군도 사라졌다. 심지어는 물주인 협상국조차 더이상 백군에 대한 기대를 거두고 지원을 줄여나갔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브란겔은 백군의 패전의 원인을 고쳐 나가고자 했다. 우선 군인이 스스로 지도자가 된 데니킨이나 콜차크와는 다르게 별도의 정부를 조직해 표트르 스톨리핀 내각의 농업부 장관이었던 알렉산드르 크리보셰인을 정부 수반으로 하는 남러시아 정부를 선포했다. 크림 지역에서는 크리보셰인의 계획에 따라 토지 개혁이 실행되었고 농민들이 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규율도 떨어지면서 약탈과 유대인 학살 따위에나 골몰하는 안드레이 시쿠로[3]와 같은 무능한 장군들은 해임되었다.
외교적으로도 경직되어 있었던 러시아국과는 달리 폴란드, 핀란드, 캅카스 등 러시아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했다. 유일한 예외는 우크라이나였는데 대신 러시아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연방의 구성국에 포함하는 연방국가로 개조하고 우크라이나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비 볼셰비키 군소 세력들과 적극적인 동맹 정책을 내놓았고 심지어는 아나키스트인 마흐노의 흑군에게도 사절을 보냈다. 마흐노에게 보낸 사절은 처형당했지만 녹군 일부와는 약간의 협력관계를 약속받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런 피를 깎는 노력에도 이미 다른 백군들에게 질릴대로 질린데다 1차 대전의 종료로 평화 분위기에 들어간 영국과 미국은 더이상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붉은 군대의 공격도 목전에 달했다. 정권을 막 넘겨받은 4월 몇 차례의 파상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비좁은 크림에 고립되어 있는 한 식량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6월 28일 식량을 얻기 위해 곡창지대인 타우리다 북부(현, 우크라이나 헤르손 주)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마침 당시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가 키예프까지 들어오며 볼셰비키의 관심이 폴란드 방면에 집중된 순간이었고 브란겔은 3만이 조금 안되는 군을 지휘해 붉은 군대 1만명을 포위섬멸하는데 성공한다. 전선에 구멍이 뚫리며 브란겔의 군대는 빠르게 타우리다 북부를 확보했고 드네프르 강을 따라 방어선을 세운다. 그러나 붉은 군대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고 미하일 프룬제가 직접 지휘하는 군이 증원되어 들어왔다. 마흐노도 볼셰비키와 동맹해 백군을 괴롭혔다. 8월부터 10월까지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고 격화되는 전투는 마치 1차대전의 서부전선과 같은 참호전의 양상을 띄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지금까지 백군에게서 노획한 전차, 장갑차, 야포까지 끌고왔던 반면 브란겔 군은 알보병이 대다수였고 그나마도 폴란드와 소비에트가 종전하며 병력의 양의 차이도 압도적으로 변했다.
10월 28일 붉은 군대의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브란겔의 군은 다시 크림 반도에 갇혔다. 프룬제는 소비에트에 합류한 브루실로프까지 동원해 남은 백군 전원에 대한 사면까지 약속하며 항복을 요구하지만[4] 브란겔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11월 11일 브란겔의 명령에 따라 대규모의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군인과 그 가족들, 민간인을 포함해 146,000여 명이 통칭 브란겔의 함대에 탑승했다. 데니킨이 돈-쿠반 지역을 포기하고 후퇴할 때 물자와 민간인은 버려두고 군인들만 대충 함대에 태우던 뒤죽박죽이던 모습과는 달리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목적지는 코스탄티니예였다.
프룬제의 약속을 믿고 크림에 남기로 결정한 이들에게는 끔찍한 최후가 기다렸다. 항복한 이들에게 사면은 없었다. 레닌에게 권한을 받은 벨러 쿤[5] 과 로젤리아 제믈랴치카는 대규모의 처형을 시작했고 이 적색 테러로 최소 12000 ~ 50000명, 최대 12만명까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러시아군의 멸망으로 남아있는 조직화된 백군 세력은 사실상 소멸했다. 연해주의 그리고리 세묘노프, 몽골의 운게른, 아야노마이스키의 아나톨리 페펠랴예프 등 남아있는 조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기껏해야 수천 명 정도 되는 군대라고 부르기도 뭣한 조직들 뿐인데다 얼마 안가 전부 볼셰비키에게 멸망했다.

2.4. 망명 생활


브란겔의 함대는 코스탄티니예에 한동안 정박했고 브란겔은 함상 생활을 시작했다. 1921년 10월 바투미에서 출발한 배가 갑자기 브란겔의 배를 들이받는 일이 발생하자 소련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육지로 내려갔다.
1923년에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신 러시아 전군연합(Русский Обще-Воинский Союз, ROVS)을 창설했다. 브란겔은 망명한 백군 계열 러시아인들을 하나로 묶는 조직으로 만들고자 했고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7년 다시 브뤼셀로 이사해 광산 기술자로 일했다.
1928년 4월 25일 갑작스레 발병한 결핵으로 급사했다. 유가족들은 소련의 요원에 의한 독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러시아 전군연합을 창설했던 유고슬라비아로 옮겨져 정교회 성당에 묻혔다.

3. 기타


  • 브란겔의 존재는 볼셰비키에 있어서 상당한 위협이었고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다에서 백군의 대표로 그를 콕 집어서 언급할 정도였다.
  • 유명한 별명인 검은 남작은 체르케스식의 검은색 전통복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그가 딱히 체르케스인과 큰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차대전 당시 체르케스 카자크들을 지휘하면서부터 즐겨 입게 되었다.
  • 그가 세운 러시아 전군연합은 처음에는 브란겔의 이상에 따라 반공주의, 근왕주의를 이념으로 삼고 대다수의 백계 망명객들을 포괄하는 거대조직이었지만 소련 정보기관의 집요한 공작으로 지도부가 암살, 납치되며 세력이 약해졌다. 그나마도 백계 러시아인 2세대가 민족주의 논리로 친소적으로 변하며 세가 더 약해졌다. 2차 대전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많은 회원들은 개별적으로 추축국의 편을 들었고 브란겔의 이름을 팔아서까지 자유 러시아 군단에 참여했다. 조직의 명맥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고 회원 일부가 돈바스 전쟁에 노보로시야측 의용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 독일식 표기인 브랑겔로 오기하는 일이 많다.[2]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쿠데타 이후 모든 백군 세력들은 명목상으로는 러시아국에 속해 있었지만 콜차크의 명령을 제대로 듣는 세력은 없었고 명령을 강제할 방법도 없었다.[3] 훗날 독소전쟁 때 나치에 부역해 자유 러시아 군단에 소속되었다가 표트르 크라스노프 옆에서 목이 매달렸다.[4] 물론 프룬제의 단독 행동이었고 레닌은 프룬제가 독단적으로 이 약속을 한 것을 질책하며 백군이 요구를 받지 않을시 처형할 것을 지시했다.[5]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도자였다. 헝가리에서 보수파에 밀려난 후 러시아로 와서 활동하다가, 훗날 대숙청 시기에 숙청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