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블라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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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
'''본명'''
Андрéй Андрéевич Влáсов
Andrey Andreyevich Vlasov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
'''출생'''
1900년 9월 14일, 러시아 제국 로마키노
'''사망'''
1946년 8월 2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정당'''
무소속
'''시민권'''
소비에트 연방나치 독일
'''종교'''
러시아 정교회
'''복무'''
소련군 육군(1919년~1942년)
독일 국방군 육군(1942년~1944년)
러시아 해방군 (1944년~1945년)
1. 개요
2. 일생
2.1. 소련의 영웅
2.2. 패배와 포로
2.3. 나치 부역자
2.4. 종말
3. 평가
4. 매체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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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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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형제 여러분! 볼셰비즘은 러시아 인민의 적입니다. 볼셰비즘은 우리 나라에 헤아릴 수 없는 재앙들을 가져왔습니다. (중략) 굶주림, 강제 노동, 볼셰비키 고문실의 고통도 겪을 만큼 겪었습니다! 들고 일어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서십시오! (중략) '''독일과의 영예로운 평화, 만세!'''

- 1942년 12월 17일자 대국민 호소문[1]

소련, 나치 독일의 군인.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 계급은 중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 소련의 육군 장성이자 '''반역자'''이다. 원래는 소련군의 촉망받는 지휘관이었으나 포로가 된 후 나치 독일 측으로 전향, 러시아 해방군(ROA)의 명목상 지휘관이 되어 나치의 선전에 협조하다가 독일 패망 후 소련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적기훈장, 레닌훈장을 수훈 받았으나, 독일로 망명한 후에는 취소되었다.

2. 일생



2.1. 소련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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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 : 구국의 영웅 블라소프(모스크바 공방전 직후)
원래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정교회의 신학교에 다녔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신학을 그만 두고 잠시 농업을 공부하다가 1919년 붉은 군대 육군에 들어갔다. 장교가 된 뒤 승진을 거듭하여 30대 후반에 장군이 되었다.
1938년부터 1939년까지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 파견되어 장제스의 군사 고문으로 있었다. 소련에서 파견한 장제스의 군사 고문들은 소련군의 엘리트들이었으며, 군사고문을 역임한 바실리 블류헤르바실리 추이코프[2]의 커리어를 본다면 블라소프도 엄청나게 군에서 촉망받는 기대주였음을 알 수 있다. 1930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당시만 해도 장교들의 입당은 매우 까다로왔으며, 그는 공산당이 보기에 "사상이 건전한" 군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부농 출신이었으며, 대숙청 기간 중 아버지가 굴라그에 끌려가는 등 개인적으로는 소련 체제에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1940년에는 제99보병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는데, 그의 지휘하에서 이 사단은 세묜 티모셴코 국방장관에 의해 "최고의 사단"으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그는 붉은 군대에서 촉망받는 육군 지휘관이었다.
1941년 6월에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 블라소프는 중장 계급을 단 제4기계화군단군단장이었다. 그리고 이후 제37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키예프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20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반격에서 대활약을 하였다. 그의 공적은 게오르기 주코프에 버금갈 정도였으며 그는 영웅화되어 소련 선전망을 통해 매우 칭송되었다.[3] 그래서 이 공적으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그는 소련군의 미래였으며, 외모로도 190cm가 넘는 당당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소련군의 엄친아.

2.2. 패배와 포로


그런데 이후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을 밀어붙이자, 독일군을 얕보고 무리한 반격 작전을 계속했다. 이때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었던 키릴 메레츠코프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포위되어 있던 레닌그라드의 추축군 포위망을 지휘하여 뚫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문제는 레닌그라드의 포위가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까지 유지됐을 정도로 견고 했다는 것과, 아직 소련군에게 공세를 수행할 만한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메레츠코프는 처음에 수월하게 독일군의 방어망을 뚫었으나 후속 부대가 돌파구를 받쳐주지 않아 게오르크 폰 퀴힐러가 지휘하는 독일군에게 오히려 6월에 역포위되어 섬멸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스타브카는 메레츠코프를 해임시키고 레닌그라드 방면군 사령관 호진에게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을 겸직하게 하면서 블라소프를 포위망에 갇혀 있는 제2충격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나, 이미 전세가 기운 상태인 만큼 블라소프가 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소련군 수뇌부는 블라소프 장군에게 비행기로 탈출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블라소프는 부하들과 남겠다며 거부하고 근처 농가에 숨었다가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 농부가 그를 "고발"한 것은 블라소프가 자신을 친절히 대접한 농부에게 현상금을 받게 해 주기 위해 시킨 것으로 결국 자발적으로 투항했다는 것이다.
소련에서 이 정도 규모의 패장은 탈출해도 처형될 수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1941년 여름 스몰렌스크에서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 독일군에게 대패한 당시 서부 전선군 사령관 육군 대장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이 모스크바로 송환되어 스탈린의 과오를 감추기 위한 희생양으로 처형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스탈린은 정신을 차리고 군인에 대한 처형이나 간섭은 어느 정도 자제했지만 과거의 행적을 보건대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의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후일 매국노로 펌하된 이후에도 이 점을 굳이 숨기지 않은 걸 보면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 가장 큰 원인이라 보인다. 여담으로 스탈린은 블라소프가 이런 경향을 갖고 있었다는 걸 의외로 모르지 않았는지 항복 소식에, 블라소프가 어떻게 지난 대숙청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했다고 한다.

2.3. 나치 부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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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해방군(ROA) 장병들을 사열하는 블라소프. 블라소프의 군복에는 계급장이나 칼라장을 비롯한 아무런 부착물을 달지 않아 정규 독일군 장군이라고는 볼 수 없다.(左) 1944년 러시아 해방군의 전선투입을 수락하는 힘러(右).
블라소프는 심문 과정을 거친 후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블라소프는 포로 수용소에 수용돼 있는 기간 동안 "스탈린보다야 히틀러가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독일 측에 자진해서 협조할 뜻을 밝힌다. 독일군 장교들은 소련 측 부역자들을 포섭해서 반공적인 러시아군을 만들려고 했으나, 슬라브족을 동유럽에서 제거하려던 히틀러는 이를 반대했다.
하지만 최전선의 병력 부족 증상은 당장 해결해야 할 사항이므로 블라소프가 자진해서 독일군에 부역할 뜻을 밝히자 독일군은 그를 베를린으로 데려가서 독일의 심리전에 이용했다. 이후 블라소프는 다른 독일 부역자들과 함께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자유 러시아 군단을 조직하고 프라하 선언문을 발표하고[4], 소련군이 잡혀 있는 포로 수용소를 돌며 자발적인 부역자들을 모집했다. 이렇게 2개 사단의 병력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독일 국방군 육군 소속이었고, 이들과 별도로 무장친위대에는 소련 출신 코사크로 이루어진 다른 제15 SS 기병군단이 존재했다. 자세한 조직은 동방부대 참조.
이들은 "스탈린 체제"로부터 억압받는 러시아 인민을 해방하고 러시아에 자유 국가를 설립하겠다고 주장했으나, 히틀러와 손잡은 그들의 현실은 시궁창. 히틀러는 이들이 이런 선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들을 다시 포로수용소에 넣으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이들은 러시아 해방군(ROA)를 구성했지만, '''명목상 사령관인 블라소프는 전쟁 막바지까지 이들을 한번도 지휘해 본 적이 없었다.''' 독일 측은 이들을 믿지 못해서 제대로 무장을 시켜 주지 않았고, 그저 후방에서 비전투 업무에 종사시켰다. 가끔씩 블라소프는 독일군의 선무 방송이나 심리전에 동원되어 방송을 하거나 혹은 전선에 독일 측으로 귀순하라는 삐라를 뿌렸다. 한편 블라소프는 소련 지역에 가족을 남겨 두고 있었으나, 독일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이후 정식으로 재혼하였다.


2.4. 종말


그러나 블라소프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의 흐름은 바뀌어, 소련군은 독일군을 밀어붙이며 서쪽으로 진격했고, 소련군은 1945년 1월에는 독일령까지 다가왔다. 병력의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르자 그제서야 독일 국방군은 ROA를 무장시켰고 2월에 ROA는 진격해 오는 옛 전우들을 향해서 총부리를 겨눈다. 그러나 이미 전황은 돌이킬 수 없었고 ROA의 주력은 체코로 후퇴하였다.
체코에서는 당시 저항 세력에 의해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나치 독일에 있는 것이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블라소프는 서방 연합국에 항복할때 도움이 될까해서 '''또 독일을 배신하고''' 체코 파르티잔에 협조해 무장친위대로부터 프라하를 해방시키는데 일조했다. 전투 끝에 무장친위대 측은 파르티잔과의 휴전을 통해 프라하에서 철수했고, 러시아 해방군은 이에 숟가락이나 얹은 셈이다.
이 때 체코 파르티잔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이들은 블라소프와 ROA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서 체코에서 추방시킨다.[5] 결국 블라소프와 ROA는 체코를 떠나 서부전선으로 가서 조지 S. 패튼 장군의 미 육군 제3군에 항복했다. 이때만 해도 이들은 서방 연합군이 전후 소련군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며, 자기들에게 동정적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도 히틀러처럼 소련과 서방 연합군이 다시 맞붙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가지고 미 육군에 항복하기는 했지만, 연합국은 이들의 운명을 이미 1944년 얄타 회담에서 합의한 지 오래였다.
블라소프는 나치의 동맹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에스파냐로 망명할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부하들을 버리고 망명할 수는 없다고''' 대부분의 부하들과 함께 했다. 미군은 미리 소련과 짜고는 블라소프를 호송하는 척하다가 소련에 넘겨 주었다. 블라소프를 호송하던 미 육군 헌병들은 상부의 명령대로 소련군이 체포할 때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를 두려워한 ROA 2사단장 등 일부는 자살했다. 그 외 군복과 군장을 버리고 도주하던 다른 ROA 장병들 다수가 사살 및 체포되어 끌려갔고, 운 좋게 도주에 성공한 이들은 신분을 위조해 숨어 살아가야 했다. 그나마 소련 위성국에 숨는 데 성공한 자들은 해당국 정부가 알고도 모른척 넘어가서 송환을 피하는 일은 많았다고 한다.
블라소프 체포를 맡은 스메르시 장교는 미군의 지프에 탄 블라소프를 대번에 알아보곤, "여기 블라소프가 있다"라고 소리쳤다. 블라소프는 이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내가 블라소프다. 나를 죽여라"라고 말했으며, 그 장교는 "스탈린 동지께서 너를 심판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6] 소련군 특무기관인 스메르시는 블라소프를 비롯한 여러 ROA 장병들의 반역 행위를 조사했는데 블라소프는 이 과정에서 순순히 모든 걸 인정했다. 그가 소련 체제에 대숙청으로 인해 상당한 회의를 갖고 있었고 반인륜 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점,[7] 부하들을 팔아넘기지 않고 혼자 투항한 점[8] 등을 보면 개인 영달이나 욕심을 위해 투항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으나 그래도 매국행위를 용서받을 수는 없었다. 그 뒤 공개 재판이 열렸고 블라소프 본인은 물론 ROA 1사단장 부냐첸코를 포함한 고급 장교 12명이 사형 선고를, 나머지도 징역형을 선고받고 확정 후인 1946년 8월에 사형이 전원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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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 집행된 블라소프와 ROA 고위 장교들
제일 왼쪽에 매달린 사람이 블라소프다.
소련으로 끌려온 그는 12명의 ROA 고위 장교들 전원과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이 사진은 NKVD의 처형을 기록한 유일한 사진인데, 원래 대숙청 시기 NKVD의 처형은 소련 정권의 치부나 다름없으니 공개할 일이 없었다. 반역자의 처형이고 법정에서 정식으로 판결을 하고 집행만 NKVD가 맡아 사진이 남을 수 있었다.
한편 이들은 모두 군인이면서도 교수형을 받았는데, 이는 반역자에 대한 명예 박탈의 의미가 강했다. 전세계 어느 나라나 사형을 시행하는 국가에서 미군이나 베트남군을 제외하면 모든 군인에 대한 사형 집행은 군인의 전통적인 사형법인 총살형이 기본이다. 소련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민간인만 교수형으로 집행하고, 군인에게는 대숙청 당시에도 총살형을 집행했다. 따라서 교수형으로 처형한 것은 한마디로 너희들을 군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군인에게는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9] 이들은 소련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마지막 인물들이었다. 그 외 체포된 ROA 장병들은 현지에서 사살되거나 잘해봐야 시베리아굴라그행이었다. 죽을 고생을 하다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한 후에야 감형되어 석방될 수 있었다.

3. 평가


반공적인 서방 측에서는 이들의 운명과 부하들에 대한 그의 행동이 동정을 사기도 했지만, '''조국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조국을 침략한 침략자에게 협조했다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러시아 최고법원은 블라소프 및 부역자들을 사면해 달라는 요청을 여지 없이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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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절 일부 반소 망명 러시아인들에 의해 위와 같이 미국에 추모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몰락한 현재에도 독소전쟁의 상흔과 나치 독일에 대한 혐오를 크게 가지고 있는 현지 러시아인들에게 블라소프는 그의 개인적 사정은 어쩔 수 없더라도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그저 나치와 파시스트에게 협력한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4. 매체에서



5. 둘러보기




[1]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177[2] 블라소프의 후임자이다. 훗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소련 측 지휘관.[3] 때문에 배신하기 전까지의 블라소프만을 존경한다는 이들도 있다.[4] 이때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대통령인 에밀 하하와 고위직이 참석했다.[5] 체코에 망명해 있어봐야 소련군의 진주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국되기 때문에 이들은 더더욱 소련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6] 출처: 이대영,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 6. 천년제국의 최후. 호비스트 출판.[7] 애초에 직접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도 없었으니...[8] 이 점이 베네딕트 아놀드와 결정적으로 달라서, 서방에서 그를 동정하는 요인이 되었다.[9]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현역 군인들인 육군원수로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이자 총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 그의 부하이자 국방군 작전부장인 알프레드 요들, 공군원수이자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이 그래서 군인 신분이라 총살형을 요구했다가 소련 수석 판사인 이오나 니키첸코 육군소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원 군인들도 교수형으로 죽었고, 헤르만 괴링은 남아있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청산캡슐을 마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