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네덜란드
1. 개요
네덜란드어: De Habsburgse Nederlanden
프랑스어: Les Pays-Bas des Habsbourg
영어: Habsburg Netherlands
1482년부터 1581년까지 저지대 국가에 존속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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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카럴 더 스타우터(Karel de Stoute)[2] 의 유일한 후계자 마리아 반 부르혼디어(Maria van Bourgondië)[3] 가 1482년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한 후, 마리아의 남편 막시밀리안 1세는 당시 15세의 소년이었던 장남 필립[4] 에게 저지대 지역의 통치권을 물려주었다.[5] 필립은 네덜란드를 부르고뉴 식으로 통치하려고 하였고, 1477년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의회와 맺은 '위대한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저지대에서 나고 자란 필립은 자신의 영지를 잘 이해하였고 훌륭한 통치를 하였다. 그러므로 저지대의 주민들 역시 그를 지지하였다.
필립은 막시밀리안 1세의 중매로 1496년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왕 페르난도 2세의 차녀 후아나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로써 스페인과 저지대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1504년 장모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후아나가 친정어머니의 영토를 물려받게 되었다. 페르난도 2세는 후아나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카스티야까지 섭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에 카스티야 귀족들은 필립을 카스티야의 왕 펠리페 1세로 추대하였다. 펠리페 1세는 즉위 2년 후인 1506년 카스티야에 도착하였으나 얼마 안 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필립이 가지고 있던 카스티야 국왕과 저지대 공작이라는 자리는 장남 카를이 계승하였다.
당시 카를 5세는 겨우 6살 밖에 안 된 어린 아이였으므로 [[펠리페 1세][의 여동생 마르게리타(Margaretha van Oostenrijk, 1480~1530)가 섭정을 맡았다. 1515년 카를 5세가 성년이 되자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돌려 받았고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1516년 사망하자 아라곤의 왕위까지 물려받으면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번째 왕이 되었다. 1519년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 대공국까지 상속받았으며 경쟁자였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따돌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가 물려받은 저지대 지역, 즉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마르게리타의 섭정 이후 1531년부터 카를 5세의 여동생 마리아(Maria van Hongarije)[6] 가 통치하게 되었다. 카를 5세는 동년 브뤼셀에 중앙 행정부를 설치하여 마리아의 통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중앙 행정부는 크게 국가 위원회(Raad can State), 비밀 위원회(De Geheime Raad), 재정 위원회(De Raad van Financiën)으로 구성되었다.
국가 위원회는 정치 현안들에 대한 자문을, 비밀 위원회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 수행에 필요한 법 제정을, 마지막으로 재정 위원회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재정 사안을 담당하였다. 본 위원회는 각각 3명의 귀족, 법률, 재정 전문가로 구성되었으며, 세금 규모를 작성, 징수하는 역할도 맡았다. 또한 각 지역에는 지역 의회가 있었으며, 군주를 대리하는 총독이 있었다.
한편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확장에 나서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투르네, 아르투아, 위트레흐트, 헬러, 흐로닝언 등을 자신의 영지의 일부로 편입하였다. 최종적으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는 17개의 작위와 그 영지, 총 17개 주가 속하게 되었다. 1548년년에는 네덜란드 지역을 제국 내 자치 지역으로 설정하고, 1549년 황제 조칙(De Pragmatieke Sanctie, 1549)을 공표하여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속하는17개의 작위를 사실상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어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모든 권리를 상속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1555년 카를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펠리페 2세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지배하게 되었다. 보통 이 시점부터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불리게 된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와 중앙 정부 간에 갈등은 항상 일어났는데, 주로 세금과 종교 문제에서 나타났다. 특히 당시 유럽은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고, 네덜란드 지역도 이에 예외가 아니였다. 루터교회의 확산은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 큰 위협이었다. 카를 5세는 1550년 피의 칙령(Bloedplakkaat)을 공표하여 루터회 교인들은 누구나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루터회뿐만 아니라 칼뱅파 역시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었고, 카를 5세는 루터회와 마찬가지로 칼뱅파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조치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각 군주들이 개신교의 편에 서면서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카를 5세는 종교 화해[11] 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카를 5세에게 있어 엄청난 정치적 타격이었고, 결국 동년 제위에서 퇴위하여 펠리페 2세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할 수 밖에 없었다.
펠리페 2세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1559년 스페인으로 떠났다. 자연스럽게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펠리페 2세의 이복 누이인 마르게리타(Margaretha van Parma)가 통치하게 되었다. 마르게리타는 카를 5세 때 설치된 기구인 국가 위원회의 자문을 받으며 통치하게 되는데, 특히 이 위원회 위원들 중 앙투안 페레노 드 그랑벨(Antoine Perrenot de Granvelle)은 펠리페 2세의 최측근이었다. 1559년 그는 교회조직이 개편되면서 메헬렌의 대주교가 되고 그 해 스페인 네덜란드의 재상이 되었다.
펠리페 2세의 비호 아래 평민 출신인 그가 국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자 다른 귀족 출신 자문 위원들의 불만과 우려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1559년 그랑벨에 의해 발효된 '교회 재조직령'은 네덜란드 토호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하지 않는 규정이었고 이에 귀족들이 폭발하여 그랑벨을 사퇴시키고자 동맹을 맺어 펠리페 2세에게 청원하였다. 펠리페 2세는 처음에 이를 용인하지 않았으나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진출과 이복 누이 마르게리타의 청원에 의해 1564년 마침내 그랑벨을 퇴진시켰다.
그랑벨의 뒤를 이어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대귀족들이었다. 이 대귀족들은 빌럼 판오라녀(Willem van Oranje), 라모랄 에흐몬트(Lamoraal Egmont), 필립스 판 호른(Filips van Horn)이었다. 그러나 경제사정이 악화되고 종교분쟁이 격화되자 펠리페 2세는 1565년 10월, 마르게리타에게 이교도들은 더욱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빌럼 등 소수 대귀족들은 칼뱅교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왕에게 요구했고, 종교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하위귀족들도 이에 동참하여 뢰이크(Luik)에서 '합의(Compromis)'라는 연합을 결성한다.
1566년 4월, '합의'연합을 구성한 하급귀족들은 마르게리타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청원서에는 종교 재판 시 이단에 대한 관용과 의회를 매개로 자신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쓰여졌다. 이 때 그들은 '거지들(geuze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일단 마르게리타는 이 청원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만연했던 가톨릭의 부패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불안이 1566년 8월 10일 성상파괴 운동으로 폭발하였다. 네덜란드의 관리, 귀족, 시민, 빈민층 모두가 동참하여 벌어진 이 운동은 삽시간에 네덜란드 잔역을 휩쓸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연이어 성상파괴 소동이 벌어졌다. 마르게리타는 스페인 본국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조직하여 성상파괴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567년 3월 13일 마르게리타는 모든 네덜란드 귀족들에게 왕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서약을 명령하였다. 에흐몬트와 호른은 서약했으나 빌럼은 거부하고 독일로 망명하였다. 펠리페 2세는 이러한 사건들을 더욱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1567년 8월 22일 마르게리타 대신 알바(Alba) 공(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을 임명하였다. 그는 폭동 재판소(De Raad van Beroerten)를 설치하고 칼뱅교의 무장봉기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약 8000명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이렇게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탄압에 항의한 에흐몬트와 호른도 포함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3. 참고 문헌
- 김영중, 장붕익 공저, <네덜란드史 (세계각국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94, 88~95쪽
- 송미숙, <미술사와 근현대사>,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36~37쪽
4. 관련 문서
[1] 당시 프랑스어 사용지역에서는 주로 프랑스어와 가까운 지방어를 주로 썼다.[2] 네덜란드 명칭, 용맹한 성격 탓에 용담공 샤를(Charles Ier le Téméraire)이라고 알려졌다. 부르고뉴 공국의 마지막 공작이다. 형식상 종주국인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 부르고뉴의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으로부터 로타링기아 왕국의 국왕으로 인정받기 직전까지 갔다가 실패로 돌아갔고 영지였던 저지대와 부르고뉴 본토를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에 있던 로렌에 위치한 낭시를 공략하다가 스위스 용병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3] 이쪽은 부귀공 마리(Marie de Bourgogne)로도 알려졌다. 샤를이 전사한 직후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프랑스가 침공해오면서 겐트 성에 유폐되어 버린 신세가 되었고 이를 막시밀리안 1세가 구출한 후 마리와 결혼하였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고 거기서 승리를 거두어 마리는 부르고뉴 본토를 잃는 대신 저지대 지역의 상속을 인정받았다. 막시밀리안과의 사이에선 장남 필립과 장녀 마르게리타의 1남 1녀를 두었다.[4] 펠리페 1세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필립이라고 불렸다.[5] 막시밀리안 1세는 어린 필립을 대신하여 그동안 섭정을 맡아 네덜란드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본래 영지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야 하자 더 이상 섭정을 할 수 없었기에 통치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6] 1505~1558. 헝가리어로는 합스부르크 마리어(Habsburg Mária).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러요시 2세와 결혼하였으나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가 전사하면서 둘째 오빠 페르디난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할 때까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섭정 직을 지냈다.[7] 릴/레이설(Lille/Rijsel), 두에/도바이(Douai/Dowaai), 오르시(Orchies/Oorschie) 성백령과 투르네투르네시/도르니크도르니크세(Tour et le Tournaisis/Doornik en het Doornikse) 영주령 포함.[8] 프랑스어권으로 분류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일어권이다. 독일어 이름은 '''룩셈부르크(Luxemburg)'''.[9] 후에 영주령으로 전환된다.[10] 4개 백작령을 일괄적으로 1개 주로 취급한다.[11] 그러나 이 종교화해는 가톨릭과 루터교회 만이 해당되는 것으로 네덜란드 개신교의 다수를 차지하던 칼뱅교는 해당되지 않았다. 따라서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여전히 가혹한 종교 탄압이 자행되었다.- 미술사와 근현대사, 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