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의 조별 라운드의 진행 상황 중, 1조와 2조에 대해 정리하는 페이지.
1. 1조
시드 배정국: 아르헨티나
1.1. 1경기 프랑스 4 vs 1 멕시코
역사적인 월드컵 초대 대회의 첫 경기. 몬테비데오의 포시토스 경기장에서 치러졌으며 월드컵의 아버지인 쥘 리메의 노고를 기리는 뜻으로 우루과이가 프랑스에게 스타트를 넘겨주었다.[3] 그리고 19분에 역사적인 월드컵의 첫 골이 터졌고, 그 골의 주인공은 프랑스의 공격수 뤼시앵 로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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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앵 로랑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월드컵 최초의 부상자도 나오게 되는데 그 주인공은 프랑스 골키퍼 알렉스 테포였다. 전반 24분에 멕시코의 공격수 메히아와 충돌하여 부상#s-2을 입은 것이다.[4] 당시에는 선수 교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5] 테포의 자리를 누군가가 대신 메워줘야했고 그 자리는 라이트 하프백[6] 이였던 오귀스탱 샹트렐이 맡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선수 교체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것이 월드컵 최초의 선수 교체에 대한 기록이다.[7] 어떻게 봐도 멕시코가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경기는 프랑스가 4대1로 이겼다.
1.2. 2경기 아르헨티나 1 vs 0 프랑스
월드컵 역사상 거의 유일한 '''눈 내리는 경기장'''에서의 시합이었다. 월드컵에서 눈 내리는 경기장을 거의 볼 수 없는 이유는 월드컵은 지금까지 단 두 번을 제외하고[8] 6월에서 7월쯤 개최하기 때문이다. 이때 북반구에서 개최했을 때는 당연히 눈이 오지 않고(남반구와 북반구의 계절이 서로 반대로 적용하기 때문) 그렇다고 해서 남반구에서 눈이 무조건 오는 것도 아닌 것이 지금까지 월드컵을 개최한 남반구 나라들은 우루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남아공 딱 5개밖에 없었다. 이 5개의 나라 중 먼저 남아공과 브라질은 비교적 따뜻하므로 눈을 보기가 어렵고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눈이 많이 내리는 7월이나 8월이 아닌 6월초에 시작해서 6월 25일에 끝났고 칠레 월드컵 역시 5월 30일에 시작해서 6월 중순에 끝났다. 아르헨티나나 칠레도 이 정도면 늦가을~초겨울 정도의 계절이므로 눈이 내리기도 힘들다. 따라서 지역적으로도 다소 추운 쪽에 속하고 7월 중순에 월드컵을 치른 1930년 우루과이 대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눈 내리는 월드컵 경기가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순조로운 출발을 막은 팀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의 루이스 몬티는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 뤼시앵 로랑에게 부상을 입혀 경기장 바깥으로 내쫓았다. 이런 식으로 몬티는 프랑스 진영을 헤집고 다녔다. 게다가 81분에 프리킥으로 결승골까지 넣는 10점짜리 활약을 선보였다.
여기에서 브라질 출신 심판 아우메이다의 실수가 하나 터지는데, 경기를 6분 일찍 끝내버린 것이다. 프랑스 선수들의 격렬한 항의 끝에 심판은 경기를 재개했고 선수들 중에는 샤워를 하다 말고 다시 끌려나온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1.3. 3경기 칠레 3 vs 0 멕시코
멕시코는 칠레를 상대로 복수혈전을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칠레의 공격수 카를로스 비달에게 시작한 지 3분 만에 골을 먹히고 후반 7분에는 수비수 로사스의 자책골[10] 까지 겹치면서 전의 상실. 65분에 비달에게 다시 한 골을 먹히면서 멕시코의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1.4. 4경기 칠레 1 vs 0 프랑스
프랑스는 이틀 사이에 2경기를 연속으로 치른데다가[11] 아르헨티나에게 패배하여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반면 상대인 칠레는 멕시코를 이전 경기에서 3대0으로 이긴 터라 분위기가 프랑스와 정반대였다. 프랑스는 골키퍼 테포가 전반 30분에 사베드라의 페널티 킥을 막아내며 기세를 올렸지만 후반 22분, 칠레의 수비아브레에게 헤딩 결승골을 내주고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1.5. 5경기 아르헨티나 6 vs 3 멕시코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보면 당시 주장이었던 마누엘 페레이라가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그 이유는 대학교 법과 시험 때문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스트라이커 로베르토 체로가 불안발작증세로 경기를 뛸 수 없었고 또 다른 공격수 마리오 에바리스토[12] 는 부상이 채 낫지 않아 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아르헨티나의 감독 올라사르는 후보 선수 중 대표 경험이 전무한 기예르모 스타빌레에게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맡기는 모험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대박!!! 스타빌레는 데뷔전인 멕시코전에서 해트트릭[13] 을 터뜨리며 아르헨티나에게 승리를 안긴다. 페레이라, 체로, 몬티가 없어도 아르헨티나는 강했다. 멕시코의 골키퍼 본피글리오가 아르헨티나의 파테르노스테르의 페널티 킥을 막아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1.6. 6경기 아르헨티나 3 vs 1 칠레
페레이라가 시험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이러면 전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했던 스타빌레와 함께 위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체로는 아직 발작이 낫지 않았으니 제끼고.. 마리오 에바리스토는 부상이 좀 괜찮아졌으니 써보기로 할까.. 여기에서 스타빌레는 2골을 넣어 자신의 해트 트릭이 뽀록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루이스 몬티는 칠레의 수비수 아르투로 토레스를 걷어찼다.[14] 그로 인해 경기는 심각하게 거칠어졌고 아예 그라운드에서 패싸움을 하는 단계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 패싸움은 경찰이 와서 진정시키기까지 30분 가량 계속되었다.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난투극이 일어난 경기로 기록되었다.
2. 2조
시드 배정국: 브라질
2.1. 1경기 유고슬라비아 2 vs 1 브라질
당시 브라질은 2조에서 시드 배정을 받았다. 시드를 받은 만큼 진출할 확률이 높아보였는데 웬걸.. 전반에만 2골을 먼저 먹히는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다 2대1로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브라질은 남미에서 나름 강호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선수들 간의 갈등이 꽤 심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브라질 초기의 슈퍼스타였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도 상파울루 주 리그 내의 갈등으로 아예 월드컵에 참가조차 하지 못했으며, 나머지 선수들도 히우와 상파울루로 나뉘어 사이가 좋지 못했다. 아무리 유고슬라비아가 장거리 여행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다고해도 쪼개진 팀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2.2. 2경기 유고슬라비아 4 vs 0 볼리비아
난적 브라질을 꺾고 사기충천한 유고슬라비아. 게다가 볼리비아는 월드컵 이전의 A매치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당시 남미 최약체 팀이었다.[17]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볼리비아에 불운이 찾아왔다. 전반 8분[18] , 아웃사이드 라이트 구메르신도 고메스가 유고슬라비아의 수비수 밀루틴 이브코비치와 충돌하면서 다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고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선수 1명이 부족해지는 불리한 상황이 일어나고 말았다. 결과가 더욱 뻔해졌지만 볼리비아는 생각보다 잘 버텨내며 후반 15분까지 0대0의 균형을 맞추었다. 하지만 결국 이반 베크에게 골을 허용하자 힘이 다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골 폭풍. 4대0으로 승리를 거둔 유고슬라비아는 준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게다가 볼리비아는 멀쩡한 득점을 도둑맞는 또 다른 불운까지 겪었다.
2.3. 3경기 브라질 4 vs 0 볼리비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브라질이 아무리 탈락이 확정되었다고 해도 페루를 제외하면 모든 A매치 상대에게 5골차 이상은 벌어졌던 볼리비아를 상대로 득점이라도 많이 터뜨리자는 각오로 나왔고, 그렇게 4대0으로 볼리비아를 물리쳤다.
3. 4강 진출팀
1조 1위 : 아르헨티나
2조 1위 : 유고슬라비아[20]
이후 정보는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에서 기재.
[1]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까지 승리팀에게 주어지던 승점은 2점이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너무 무승부가 많아 승부차기 일변도의 경기가 펼쳐지자 FIFA에서 어느 쪽이든 승부가 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부터 승리팀의 승점을 3점으로 올렸다.[2] 괄호안은 한국시간[3] 같은 시각 4조에서도 미국과 벨기에가 파르케 센트랄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1조 프리미엄으로 월드컵의 스타트는 이 경기로 흔히 이야기한다.[4] 초기의 축구에는 축구 선수들이 대부분 발끝으로 공을 찼었다. 그래서 축구화 앞에 강철로 된 코를 붙인 축구화가 많았다. 물론 월드컵이 열리던 시절이 그 정도로 옛날은 아니지만 축구화가 무거운 것에는 변함이 없어서 한 짝에 500g이 넘었다.(현재의 축구화 무게는 아무리 싸구려라도 250g 정도이고 정말 가벼운 것은 150g정도밖에 안 나간다) 그걸로 턱을 맞았으니.. 게다가 테포는 당시 유럽 정상급의 골키퍼였다.[5] 부상당했으면 부상당한 채로 뛰고 뛸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면 그냥 선수가 없는 대로 뛰어야했다. 선수 교체가 처음으로 도입된 월드컵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다.[6] 오늘날의 위치라면 미드필더의 자리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드필더라는 개념이 없었고 이 자리의 선수는 대부분 수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7] 여담으로 현대적인 선수 교체는 1965년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찰턴 애슬레틱 FC의 키스 피콕이 최초의 교체 선수로 알려져 있다.[8] 2002년 월드컵때는 장마 문제로 5월부터 6월까지 했고, 2022년 월드컵은 더위 문제로 11월부터 12월까지 월드컵을 한다.[9]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출신 다비드 아레야노의 동생[10] FIFA 월드컵 역사상 첫번째 자책골이다.[11] 현재는 한 번 공식 경기를 뛴 축구 선수는 48시간 이내에 다른 공식 경기를 치르지 못하게 되어있어서 이런 식으로 다음 경기를 치를 수 없다.[12] 형 후안 역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하프백으로 활약하였다.[13] 2006년 이전의 월드컵 기록을 보면 스타빌레가 월드컵 최초의 해트트릭 기록자로 되어있다. 하지만 미국의 버트 파테노드의 득점이 한 점 누락된 것을 발견했다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현재는 파테노드가 최초의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로 기록되어있다.[14] 이런 투지 넘치는 선수들의 특징 중 하나는 가끔 자신이 반칙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더 난리를 치는 경우가 있다. 몬티가 그런 경우였다.[15] *표가 붙은 베니베누투와 두카는 자리가 부족하여 22인 출전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피파 보고서에는 이름이 올라가 있어 기재하였다.[16] 피파 공식보고서와 RSSSF 문서에는 페트코비치가 위키피디아에는 두샨 마르코비치가 출전했다고 올라와있다. 하지만 페트코비치에 대한 다른 문서는 거의 없다.[17] 1927년의 페루와의 시합에서 3대2로 진 것을 제외하면 코파 아메리카 등 이전의 모든 A매치에서 최소한 5골 차 이상으로 패배했다.[18] 후반 15분이라는 기록도 있다.[19] 당시 브라질과 유니폼 색깔이 흰색으로 같았기 때문에 우루과이의 유니폼을 빌렸다.[20] 1930년 월드컵에 참가했던 유럽팀 4팀 중 유일하게 4강에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