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 대종상 시상식 논란

 



1. 개요
2. 사건 전개 과정
3. 왜 하필이면 《애니깽》인가?
3.1. 안기부 후원설
4. 후폭풍
5. 누구의 책임인가?
6. 여담
7. 참고 자료


1. 개요


'''"이것이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입니까?"'''
- 일본 영화배우 사토 마사오(미쿠니 렌타로)[1]

가 대종상 시상식을 지켜본 뒤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 원로 영화인들의 아집'''으로 한국 영화계의 발전에다 찬물을 끼얹은 대표적인 사건이며, 대종상 영화제의 최대의 '''흑역사'''이자, 한국 영화 최고의 스캔들.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애니깽》을 본따서, 일명 '''애니깽 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6년 4월 27일에 열린 제34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단 한 번도 관객들에게 선보인 적 없었던 영화 《애니깽》이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등 주요 부분을 수상하면서 영화계는 물론이고 국내 영화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워낙 대형 사건이다 보니 20년이 넘은 지금도 많은 영화팬들의 뇌리에 기억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심지어 영화 및 문화계의 큰 사건이 당해년도의 주요 이슈가 된, 몇 안되는 사건이다.
그만큼 대종상 영화제가 얼마나 최악의 추태를 보여줬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1990년대 한국 영화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인 지금도 충무로의 큰 사건사고 내역을 언급하면 반드시 먼저 등장할 정도로 파급력이 넘사벽급이다. 대종상 시상식 자체가 막장 시상식이다 보니 매년 빠지지 않고 소환되고 있다.
여기에 그 해 연말, 합동영화(서울극장) 곽정환 대표와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가 탈세 혐의로 구속되고, 영화계 전반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인해 충무로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2. 사건 전개 과정


시작은 1996년 3월 예심 심사부터였다. 먼저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던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어 1995년에 개봉하여 비록 큰 흥행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여성의 억압과 욕망을 사실적으로 연출했다는 평단의 찬사를 얻었던 박철수 감독의 《301, 302》가 예심에서 불이익을 받아 박철수 감독이 차기작으로 내놓은 《학생부군신위》의 심사를 거부하며 수거했다는 소식이 충무로에 퍼지기 시작했다.
예심 심사득표 결과 《꽃잎》이 1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근소하게 2위, 《은행나무 침대》가 3위를 차지했고, 《애니깽》은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위의 두 편이 좋지 않은 평을 받은 이유는 바로 집행위원들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사고방식이 갈수록 변화하는 한국영화 제작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할정도로 꼰대기질이 심했기 때문이다. 예심 심사 결과 상위 3편의 영화도 집행위원들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평을 받았지만 다행히 일반관객들 평에서 좋은 평을 얻어 예심을 통과했다.
본격적인 문제는 그 다음부터. 아직 편집조차 안 끝나 '''개봉도 안 된 영화''' 《애니깽》이 주요 부분에 후보로 올랐고, 결국 본선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당시 영화계와 언론에서 주요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예측했던 작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전태일》은 기획상, 《꽃잎》은 여자 신인상만을 수상했으며, 무려 14개 부분에 올라서 주요 부분 수상이 예측됐던 《은행나무 침대》는 신인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데에 그쳤다. 같이 최우수작품상에 오른 《본 투 킬》은 단 한 개의 상도 타지 못했다. 특히 남우조연상은 모두가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던 《은행나무 침대》의 신현준 대신, 《학생부군신위》에 출연한 배우 김일우에게 돌아갔다. 이것은 무관에 그친 박철수 감독을 의식해서 보상의 의미로 준 것이라는 해석이 팽배하다.
그렇다고 《학생부군신위》에서 배우 김일우의 연기가 좋지 않았던 건 당연히 아니다. 충분히 훌륭한 연기력을 선보였으나, 당시 대중의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은 신현준이 상을 받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고 일부 언론에선 사실상 확정으로 보도할 정도였다. 김일우는 그해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남우조연상까지 수상하며 이 영화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으며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하다가 2004년에 세상을 떠났다.
결정적으로 시상에 나온 일부 원로배우 및 영화계 인사들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젊은 감독 및 배우들을 향해 '우리가 있었기에 너네가 있는 거다'는 꼰대 발언으로 불쾌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최우수작품상을 시상하러 온 원로 영화인들은 대놓고 젊은 영화인들에게 일갈을 가하기도 했다.

3. 왜 하필이면 《애니깽》인가?


사실 예술관련 시상식이라는게 과학이나 체육과 달리 주관적인 요소가 강해 논란의 소지는 자주 있어왔다. 그러나 이 애니깽 사태는 영화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 보더라도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시상식이었는데 바로 작품상을 수상한 애니깽이 '''개봉은 커녕 아직 편집조차 안 끝난 미완성 작품'''이라는 점이었다.
원칙상으로 대종상 후보작으로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은 단 하루라도 유료 상영을 해야 하며, 몇 명이라도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출품이 가능하나 《애니깽》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후보작으로 출품했다. 촬영 도중 간경화로 사망한 배우 임성민을 대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붐 마이크를 치우지 않은 날것 그대로 예선 심사에 출품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선에 진출했으며 본선에서는 어느 정도 작업을 하여 심사를 했으나 완성도는 최악이었다.
사실상 대종상을 주관하던 기성세대의 심사위원들이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년배인 김호선 감독한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을 몰아줬다는 분석이 팽배하다. 그동안 서울무지개, 사의 찬미 등 김호선 감독의 영화들이 유독 '''대종상에서만''' 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강세를 보였고, 애니깽으로 정점을 찍었다는 게 중평. 그렇다고 저 두 작품의 작품성이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정작 수상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할 김호선 감독은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시상대에 서서 '내가 받아야 할 상을 받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수상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감독상 수상부터 객석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당시 사회를 맡은 손범수와 배우 지수원은 차츰 굳은 표정으로 진행을 했다. 최우수작품상으로 호명되자 객석의 박수 소리는 거의 나지 않고 참석한 영화인들의 거센 항의 소리가 났으나 다행히(?) 방송에 잡히지 않았다.
시상식 이후 '당장 개봉하라'는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1997년 12월에 개봉은 했으나 완성도는 시망. 관객수는 200명이 되지도 않았으며 그나마 나온 결과물마저 돈이 없었는지 중간에 다른 흑백 영상 필름을 집어넣기까지 했다.

3.1. 안기부 후원설


사실 《애니깽》은 영화 제작 단계부터 안기부가 후원하는 영화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때문에 '''34회 대종상 시상식은 《애니깽》의 한판승으로 끝날 것이다'''는 예측이 예선심사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본선 시상식은 애니깽의 싹쓸이로 끝났다.
안기부 후원설은 북한이 1969년 제작한 《피바다》에 맞서서 통일 이후에 남북한 주민이 거부감 없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한다는 명목으로 김호선 감독에게 제작을 의뢰한 다음에 영화진흥공사를 통해서 10억원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1995년 국회 문화공보상임위원회의 영화진흥공사에 대한 국정감사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일단 영화진흥공사가 1992년부터 '좋은 영화제작 지원사업'이란 명목하에 김호선 감독한테 애니깽 제작비 총 10억원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흥행 수입의 절반을 받는다는 조건이었지만, 영진공이 그 전까지는 보통 편당 3000만 원씩만 지원해왔기 때문에 당연히 특혜 논란이 일어났다. 게다가 촬영 시작 3년이 지나도록 영화가 완성되지 않자 국회 국정감사에까지 올라간 것이다. 안기부 커넥션까진 아닐지라도, 문화공보부 등 정부당국과 교감 아래 영화제작에 착수한 것은 김호선 감독도 인터뷰에서 인정했다.
《애니깽》은 이어령이 장관 시절부터 기획된 영화였다는것이 월간 키노에서 드러났다. 북한 영화 《피바다》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제작비 중 정부지원금도 포함되었다는 것이 1995년 9월 27일 국회문공위원회 영화진흥공사 국정감사장에서 드러났다. '''"대종상 영화제는 어용 영화제다"'''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고 결국 그 권위는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애니깽》을 제작한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사장은 나중에 안기부로부터 제작비 10억원을 지원받아서 제작한 영화라고 직접 밝혔다. 그리고 영화 《애니깽》이 대종상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주요부분에서 수상을 했을 정도면 작품성이 뛰어난데, 왜 예선에서 홀대받았는지 이해할수 없다는 발언으로 빈축을 샀다.

4. 후폭풍


어이없는 수상 결과에 영화평론가들과 영화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그동안 영화계 내부에서만 쉬쉬하던 이야기들이 씨네21 1996년 5월 14일자 제 52호에 특집 기사로 실렸고, 웬만하면 수상내역만 보도했던 지상파 뉴스에서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대종상 영화제 심사 불공정 의혹 - MBC뉴스데스크 1996년 5월 5일.
이로 인해 후원을 하던 삼성문화재단이 1996년 말에 철수해버렸고, 결국 후원사를 구하지 못하다가 쌍방울이 극적으로 나서면서 다음해인 1997년 35회 시상식은 쌍방울 계열사인 '무주리조트'에서 열렸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터지고 쌍방울마저 부도나는 바람에 다른 후원자를 급하게 찾았지만, 경제위기 와중에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서 1998년 시상식은 열리지 못했다. 그래서 1999년 36회 시상식은 출품작이 1998년부터 제작된 영화들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파급력이 일반 대중들까지 퍼지다 보니 월간지 '스크린'에서 전문가와 영화, 방송 관계자 50여명을 대상으로 가상으로 수상 내역을 설문조사했다. 결과는 이렇다(월간 스크린 1996년 6월 참조).[2]
  • 작품상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감독상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박광수 감독
  • 남우주연상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홍경인
  • 여우주연상 - <301,302> 방은진
  • 남우조연상 - <은행나무 침대> 신현준
  • 여우조연상 - <개 같은 날의 오후> 송옥숙
위 설문에 대한 답변으로 '애니깽'을 언급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후문이다.

5. 누구의 책임인가?


대종상 영화제의 총책임을 맡은 한국영화인협회, 한국영화배우협회가 급격히 발전하는 한국 영화판에서 본인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자 저지른 일이라는 해석이 많다. 문제는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을 담은 진행일지, 즉 백서도 없다는 것이다. 당시 협회 이사를 맡은 원로배우 김지미는 개판이 된 대종상 시상식에 대해 지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외려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는 젊은 영화인들을 비하하는 내용의 인터뷰까지 했다. 참고로 두 협회 모두 원로 영화인, 원로 배우들이 주가 되어 정권에 빌붙는 형태를 취한다고 알려졌고 이런 이유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배우 및 영화인들은 오히려 외면하고 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한국 영화계는 80년대 중반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박광수, 장선우 감독을 위시한 신진 세력들이 등장하여 조금씩 세대교체와 물갈이가 되고 있는 중이었고 1990년대 중반부터 기존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른 감수성과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들이 무섭게 등장하고 있었다.
위에 언급된 장선우[3], 박철수, 홍상수 감독들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전통적 충무로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거나, 외부에서 불쑥 등장[4]한 인물들로 순식간에 젊은 세대의 시선을 사로잡아서 한국 영화의 미래로 주목받는다. 강우석, 강제규 같은 충무로 출신들[5]도, 선배 세대들과는 완연히 다른 성향을 보이면서 철저하게 사전기획에 입각한 영화제작 시스템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그 이전에는 감독하고 제작자들이 대충 술 먹다가 '야 대충 이런 거면 먹힐 거 같은데?'하면서 시작하고 감독이 시나리오, 캐스팅, 마케팅의 모든 전권을 가지고 움직였다면, 1990년대 초,중반 부터는 할리우드처럼 전문 프로듀서가 주 수요층의 성향을 분석해서 시나리오의 전개를 결정하고, 이것을 가지고 프리 프로덕션 체제, 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금융권과 대기업의 투자를 받아서 제작하는 기획 영화가 등장한다. 주먹구구식의 가내수공업에서 전문적인 영화 산업으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한국 영화판에서 최초의 기획 영화는 1992년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로 이 작품을 제작한 오정완은 1996년 《은행나무 침대》에서 현재까지도 통용되는 영화 제작 시스템을 확립했다.
그간 안성기, 강수연으로만 인식되던 한국 배우층 역시 1990년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 오디션에서 합격한 신인들을 시작으로 TV 드라마에서 활약한 탤런트들이 90년대 중반 대거 충무로로 몰려들어 조금씩 두터워지기 시작했고, 90년대 후반부터 그동안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들도 영화계에 진출하면서 조금씩 세대 교체가 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문화 산업의 가능성을 보고 대기업들이 투자에[6] 나서면서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기존의 전통적인 충무로 질서[7]가 해체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1996년 애니깽 사태와 시상식장에서의 꼰대 발언은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신세대의 출현에 위기감을 느낀 기존의 노땅들이 영화판 내에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벌인 수작이라는 추측이 팽배하다.
1990년대 한국 영화계의 세대교체기 이후 신진 영화인들과 대기업 등의 거대 자본들의 결합으로 《쉬리》, 《JSA》, 《친구》 등의 흥행작들이 폭발하면서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1990년대 이전 영화인들은 임권택, 안성기, 박중훈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태[8]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판에서 밀려난 자칭 원로 영화인들이 대종상 하나만 붙잡고 감투질이나 하면서 이권을 챙기느라 자기들끼리 이전투구나 하는 짓이다. 이런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대종상 영화제의 권위는 '''19년 후, 역대급 병맛 영화제로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감독 및 배우층이 얇고 정부 후원을 받아서 제작하던 1950~199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꼰대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면서 갈 곳을 잃어가게 되고 병신짓거리를 저지르다가 34회 대종상 시상식을 계기로 제대로 사단이 크게 난 것이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에서는 《은행나무 침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그리고 문제작 《애니깽》이다. 《은행나무 침대》는 철저하게 사전기획속에 금융권의 투자를 받아서 제작했으며 소재 또한 기존의 한국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판타지였다. 《전태일》과 《꽃잎》은 오랜기간동안 대중문화에서 철저하게 금기시된 5.18 민주화운동노동자라는 소재에 과감하게 도전해서 성공하였다. 이렇듯 전자의 세 편은 기존 한국 영화의 제작 형태를 벗어나서 다양한 장르와 소재로도 충분히 관객들의 성향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으며, 제작진 및 출연배우 대부분이 젊은 신진급이었다.[9]
반면에 《애니깽》은 제작과 주연배우 대부분 원로 영화인들[10]로써, 앞의 세 편의 영화들이 평단과 관객들의 지지를 한 몸에 얻으면서 충무로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자 우선 대종상 시상식에서부터 이 작품들의 수상을 가로막고 새롭게 자라는 영화인들의 새싹을 짓밟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새로운 변화에 목말라하던 대중들까지도 격한 반발에 나서게 된다.
최우수 작품상을 시상하러 나온 원로배우 장동휘의 발언은 이 시상식이 어떤 시상식인지 확인사살을 시켜주기도 했다.

'''평소 설날이 되면 많은 후배 영화인들이 나에게 찾아와 세배를 합니다. 앞으로도 그래주시길 바랍니다.'''

사건 당시에 대종상을 취재했던 연예, 영화부 기자들이 이 발언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 자자하다.[11] 시상식장에서 꼰대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던 장동휘는 2005년 사망했다.

6. 여담


김호선 감독은 경기도 이천시에서 후원한 춘사영화제 운영 과정에서도 각종 비리를 저질러서 검찰에서 기소했으며, 2013년 영화감독협회에서 제명당했다.[12] 그 외에도 대종상 영화제, 신상옥 영화제 등 김호선 감독이 운영에 관여한 행사마다 비리 의혹이 산더미다(링크 1, 링크 2).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1983년 미성년자 성범죄로 구속되었던 전과까지 있다.''' 피해 여성이 당시 중2의 소녀였다고 한다. 연기 강습을 핑계로 피해 여성을 여러 차례 성폭행하였고, 피해 여성은 부모에게 피해 사실을 숨겨오다 피해 여성이 김호선의 아들을 출산하자 부모가 김호선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되어 경찰에 고소한 것이다. 즉 애니깽 사태 이전부터 영화계의 온갖 사건사고의 중심에 서있던 질이 더러운 인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15년 다시 한 번 재현된 막장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신현준은 이 애니깽 사태의 최대의 피해자였다. 당시 주요 부분에서 수상할 거라고 예상했던 《은행나무 침대》가 《애니깽》의 수상 개수도 못 미쳤었고, 게다가 100% 수상이 확실해 보였던 '''남우조연상''' 부분에서 신현준이 수상에 실패함과 더불어, 최우수 작품상이 《애니깽》으로 확정된 순간 그가 당황하는 표정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었다.[13] 하지만 이런 총체적 난국의 대종상 영화제의 사회를 5년째 버젓이 맡았고, 배우가 아닌 진행자로서의 행보만 보여준 덕분에 수많은 영화인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로 낙인찍히고야 말았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런 그의 행보가 꼰대 행세를 하는 일부 선배 배우들의 행보와 너무 닮았다는 말도 있다. 더 이상 배우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힘든 상황에서 그가 현재 직위를 맡고 있는 '영화배우 협회'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나 매년 안습한 진행으로 욕을 먹는 대종상 시상식도 몇 년째 진행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원로 영화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 많이 목격된다는 점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7. 참고 자료


  • 자세한 내용은 월간 키노 1996년 7월호에 자세히 실려있다. 월간 의 김종원 기자가 직접 투고했다.
  • 씨네21(표지는 배우 이정재) 제 52호-대종상, 권위는 가고 쇼만 남았다.
[1] 2013년 4월 14일 향년 90세로 작고.[2] 일부는 후환이 두려워 답변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대중들을 대신하여 답변을 낸 것이므로 당시의 대중성향이 어떤지 파악 할 수 있다.[3] 하지만 장선우는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2002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몰락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4] 장산곶매 같은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이때부터 영화판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영화계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5] 이 두 명은 1980년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에 제작스탭으로 참여하면서 영화계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6] 《은행나무 침대》는 최초로 금융권의 투자를 받아 제작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투자 주체가 변화하기 시작한 게 바로 90년대 중반부터라고 보면 된다.[7] 군소 10여 개 영화사들이 국산영화 편수만 채운 다음에 정부로부터 외화수입권 얻어서 먹고 살고, 말단 조수부터 시작해서 몇 년간 차근차근 도제식 수업을 받아야만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고, 한 영화는 무조건 한 극장에서만 단관개봉을 하는 등, 당시의 한국 영화계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전국적인 개봉관 집계, 관람객 집계 같은 것도 전부 엉터리였고, 한 마디로 산업으로서의 영화도, 예술로서의 영화도 아닌 엉성한 구조였다.[8]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안성기를 제외한 임권택과 박중훈도 메인스트림에서는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2020년이 넘어서면서 안성기도 이 대열에 합류하는 중이다. 그나마 박중훈과는 달리 영화 출연은 끊기지 않고 있다.[9]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은행나무 침대'는 심혜진을 제외한 나머지 주연진들은 신진급이었는데, 신현준은 '장군의 아들'로 데뷔한 충무로 라이징 스타였고, 진희경은 모델활동을 하다가 1994년 충무로로 진출했으며, 한석규는 톱 탤런트로 명성을 얻고 1995년 충무로로 진출하였다. '꽃잎'은 이정현이 오디션으로 선발된 초짜 배우였다. '전태일'은 홍경인의 나이가 갓 스무살이었고..[10] 김호선 감독과 주연배우 임성민, 장미희는 전작 '사의 찬미'를 같이 작업했다.[11] 과거 정치계나 관료사회, 문화계 등에서 새해나 설날 아침에 예의상 세배를 하러 오는 전통(?)이 있긴 했지만, 후배 좋으라고 하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폐쇄적인 분야에서 철저하게 위계질서를 확인시켜주는 인맥질이 주목적이었고, 점차 소위 높으신 분들의 세과시 행사로 변질되어갔다.[12] 다만 영화감독협회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단체이며, 김호선이 영화감독협회에서 제명된 건 보수 성향의 원로 영화인들끼리의 추악한 이권다툼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정진우 항목에 링크된 기사들을 보면 알 수 있다.[13] 당시 인터뷰에선 '원래 본인은 '꽃잎','전태일' 중 한편이 최우수 작품상을 받을것 같았고 함께 시상식에 온 배우들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다른 영화가 느닷없이 수상해서 당황했었다. 그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것 같다'고 말했다.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들 및 일부 영화인들은 애시당초 '애니깽'이라는 영화를 몰랐거나 알고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주요부분을 수상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후일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