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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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츠킨 La-11(Лавочкин Ла-11)'''
소련 최후의 레시프로 전투기로 실전 배치된 소련의 모든 레시프로 단발단좌 전투기 중에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가진 기체였다.[1]
1. 제원
2. 개발 배경
3. 개발
4. 시험 비행
5. 채용 및 생산
6. 개량 및 테스트
7. 배치와 실전
8. 소련의 마지막 레시프로 전투기
9. 둘러보기


1. 제원


초도비행: 1947년
전장: 8.62 m / 전폭: 9.80 m / 전고: 3.47 m
익면적: 17.59 m2
중량: 2,770 kg / 3,730 kg / 3,996 kg
내부 연료탑재량: 846 리터
동력: 쉬베초프 ASh-82FN 공랭식 엔진 (1,850마력) 1기
최대속도: 674 km/h
항속거리: 2,235 km
상승률: 758 m/min
실용 상승한도: 10,250 m
무장: 23 mm NS-23 기관포 3문 (각 225발)

2. 개발 배경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주 힘키에 자리잡고 있던 제301실험설계국(라보츠킨 설계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오직 단좌 단발 전투기에만 모든 개발 역량을 집중해온 기술 집단으로, 그 중에서도 대전 중기인 1943년에 내놓은 La-5FN은 그때까지 소련 공군이 보유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최고의 전투기로 평가받았다. 라보츠킨의 신형은 심지어 2,000m 이하의 저공에서는 숙적 루프트바페의 주력 기종인 Bf 109 보다 낫고 Fw 190과도 견줄만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고공에서는 독일제 전투기와 상대하기 어려웠고 디테일한 부분에서 개선이 요구되는 얼마간의 과제는 남겨져 있었다.

'''"La-7은 의심할 여지 없이 독일기들에 비교하여 성능에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편대 전술이나 사진 정찰과 폭격 같은 거의 모든 전투 상황에서도 적용되었다. 속도와 기동성은 La-5FN을 능가하며, 특히 이착륙 조작이 아주 쉬운 것도 장점이다. 그러나 엔진 주변에 장착된 기총들은 개선이 요구된다. - 제28친위전투기연대장 예브게니 고르바티우크 소령"'''

La-5를 개량한 La-7의 발전형으로 기밀 명칭 "항공기 130(Самолёт 130)" 또는 La-130이라는 설계국 명칭으로 불린 기체는 금속제 La-7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종전 직후인 1946년에 La-9으로 제식 채용되었다 . 그렇지만 개발주임 세미욘 라보츠킨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기술적인 면에서 더욱 진일보하기 위해서 La-130의 추가 개발과 연구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이즈음 소련 공군은 전쟁 도중 종횡무진 활약을 펼친 P-51의 활약을 지켜보고 나서 고공을 멀리 나는 폭격기들을 엄호해줄 수 있는 호위 전투기로 쓸 수 있을만한 전투기를 찾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신예 전투기에는 폭격기와 같은 순항 속도로 날면서 최소한 2,500 km 이상의 장거리 비행 능력이 요구되었다. 그때까지 주로 요격기 용도로 사용되던 소련의 단좌 전투기들로서는 이처럼 긴 거리를 오래 비행할 수있는 단좌기의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용기인 La-9의 항속거리는 1,735 km로 늘어나 있어서 전임기인 La-7의 635 km와 비교하면 3배나 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3. 개발


1946년 10월 18일, 항공기 130을 기초로 한 훈련기와 엄호 전투기 개발이 소련 각료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두 가지 기종의 개발은 병행해서 진행되었고 시험비행도 함께 들어갔다. 제301실험설계국(ОКБ-301)이 항공기 134(Самолёт 134) 또는 '''La-9M'''이라고 이름붙인 원형기를 완성하는데는 반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947년 5월에는 국립적기 공군과학시험연구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гражданской авиации / ГК НИИ ВВС : 현재의 국립비행센터) 소속 테스트 파일럿인 안드레이 그레고리비치 크라브첸코(Андрей Григорьевич Кравченко : 1899~1963)의 손에 의해 항공기 134의 첫 비행이 실시되었다.
​6월 19일에 항공기 134(La-9M)는 공군과학시험연구소(ГосНИИ ГА)에 딸린 치카로프 비행장에서 국가 시험에 들어갔다. 5일 후에는 원형 2호기인 ''항공기 134D(Самолёт 134Д)''가 도착했다. 이 기체는 날개 지지대(Wing Bracket)에 내부 연료 탱크가 증설되어 가솔린 탑재량이 846리터에서 1,100리터까지 늘어났고, 날개 아래에 매단 낙하식 증조에도 332리터의 연료를 추가 탑재할 수 있어 종래의 소련제 단좌기에 비해 훨씬 긴 항속거리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 기대되었다. 항공기 134는 체르니옙스키 기사가 튜닝을 맡고 항공기 134D는 레즈니코프 기사에 의해 시험이 계속 되었다.
이 전투기도 다른 소련제 시제 전투기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다른 무장 형태가 테스트되었고, 종래는 기수에 23 mm NS-23 기관포 3문이 장착되는 형태로 결정이 났다. 각 기총들은 프로펠러 동조기어가 딸려 있었고 각각 225발들이 탄창이 기관포탄을 공급해주며 당시 소련에서는 최신 장비인 자이로스코프가 딸린 ASN-1N(AСП-1Н) 광학 조준기로 목표를 겨누게끔 세팅되어 있었다. 또한 고공에서 결빙을 막기 위해 물과 알콜을 50%씩 혼합한 세척액을 채운 16리터 탱크에서 전면 방풍창과 프로펠러 스피너를 통해 블레이드에 분무해주는 펌프가 추가되었다.
또한 La-11은 독일 공군에게 노획한 Fw 190 전투기를 나사 하나까지 분해해가며 조사해낸 끝에 상당한 수준까지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라디에이터의 오일 온도는 ART-41(АРТ-41)에 의해 자동으로 조절되었고 실린더 헤드의 온도가 지나치게 올라가면 자동으로 출력을 억제시켜주며, 전동 모터로 움직이는 트림 제어도 비행 도중에 상황에 맞춰 조절되는 편리한 메커니즘이 도입되었는데, 이런 자동화 시스템들은 소련 전투기에는 처음 달린 것이었다. 따라서 전력도 더 많이 필요해서 축전지도 기존의 2배 용량이나 되는 16 kg 짜리를 탑재했다. 정비사는 이 무거운 배터리를 장착할 때면 전용 금속 용기에 조심스레 정확한 자리에 끼워넣어야만 주변 장비가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4. 시험 비행


항공기 134가 크라브첸코 대령이 조종을 맡았던 것처럼 134D는 이반 바실리예비치 치모벤코(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Чимофинко)가 조종간을 잡았다. 두 시제기의 시험이 시작되기 몇 개월 전, 공군시험연구소는 미국제 쌍발 전투기인 P-38L-1의 실물 기체를 가져와 테스트하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1947년 4월부터 P-38의 테스트는 시작되었는데, 기체 중량이 La-11의 거의 2배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항속거리가 항공기134D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선회 성능이 훨씬 좋았던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고, 상승 고도까지도 소련제 신예기가 더 앞지르고 있었다.[2] 그렇지만 중량이 기존의 소련제 단좌 전투기보다 무거운 134D는 La-9 보다 공중전 성능이 떨어졌고, 특히 고도 7,000 m 이상의 고공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긴 했지만 항공기 134D는 늘어난 연료 탑재량으로 처음 목표로 잡은 2,500 km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긴 항속거리는 La-9의 결점을 상쇄하고 있어 제식 채용은 거의 확실시 되어갔다. 이 대목에서는 테스트 파일럿의 평가를 발췌해보자.
​'''"VMG(ВМГ) 프로펠러와 엔진을 한계까지 돌리더라도 수평 및 수직 기동 모두에서 전투 기동에 필요한 힘을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7,000 m 이상의 고도에서는 전투에 충분히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이 고도에서 상승률은 약 7 m/s이고 뱅크각은 40도 이하로만 선회를 수행할 수 있으며, 이 수준에서도 약간의 고도 손실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이 항공기가 전투 가능한 최대 고도는 7,000 m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테스트 마지막으로 공중전을 시뮬레이션했을 때 시야가 평소보다 빨리 어두워지며 약한 두통을 느꼈습니다. 고공 전투에 적응하려면 이러한 비행 편의성에도 대비해야만 합니다."'''

5. 채용 및 생산


각종 시험을 통과한 시제기는 '''La-11'''이란 명칭으로 제식 채용될 것이라고 결정되었다. 생산은 힘키(Химки)의 제21공장(21-й завод)에서 이루어지도록 계획이 잡혔다. 모스크바 서쪽 40 km에 있는 이 공장은 그 때까지 La-7과 La-9을 생산한 실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해진 것이었다. 제21공장에서 La-11는 제품 51(Изделие 51)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렸다. 생산은 1947년에 시작되어 1951년까지 계속 되었다. 첫 해에는 100대가 만들어지는데 그쳤으나 이듬해에는 650대가 쏟아져 나왔다. 그후 La-11의 생산은 일단 중단되고, 1949년부터 양산이 재개되어 150대가 더 완성되었다. 마지막 해인 1951년에는 182대가 생산되어 La-11은 각 형식 합계 1,182대가 만들어진 셈이다.

6. 개량 및 테스트


1948년에 La-11는 대전 중에 개발된 투폴레프 Tu-2 쌍발 폭격기의 발전형인 Tu-6 정찰기가 선도기를 맡아 북극 상공까지 비행 테스트를 시도했다. 이 실험은 급격한 온도 변화에 내구성을 입증하기 위한 예심이었다. 1951년 여름에 제81공장에서는 La-11에 ARO-82(АРО-82) 로켓 모터를 추가시키는 개조 작업이 실시되었다. 또 다른 1대는 과급기가 고도에 따라 자동으로 작동되는 절환기를 추가하고 시험을 받았다.
La-11은 사진 정찰기 형식도 개발되어 1950년 7월에 공장 시험을 통과하자 9월 22일에는 국가 시험이 실시된다. 이 기체는 촬영할 때 동체 밖으로 튀어나오고 필요없을 때는 접혀들어가는 AFA-BA-40(АФА-БА-40) 인입식 항공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그 해에 공군의 요청에 따라 전투기형 100대가 정찰기 사양으로 개조되었다. 무장을 그대로 남긴 채 카메라가 추가된 단좌 정찰기 형식은 중량이 늘어나 엔진 출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1951년에는 1,850마력 ASh-82FN(АШ-82ФН) 엔진을 2,000마력까지 향상시키는 튜닝 작업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간단한 개조만으로는 무리가 따르고 엔진 자체를 바꿔야만 할 것이 분명해졌고, 곧 취소되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출력이 1,900마력으로 증강된 ASh-82T가 일류신 Il-14 여객기를 위해 개발되었는데, 이것이 이 엔진의 한계였다. 1950년에는 150대의 La-11에 계기비행을 도와줄 RV-2(РВ-2) 전파고도계와 MRP-48(МРП-48) 비콘 수신기, 그리고 ARK-5(АРК-5) 자동 무선나침반을 장착하는 개조를 받았다. 하지만 모든 생산 기체가 이 사양으로 개수된 것은 아니며, 개조 작업을 하지 않고 공장 비행장에 방치된 기체도 종종 있었다.
한랭지나 동계 작전용으로 길이 2.31m에 폭 65 cm의 스키를 장착하고 이착륙하는 실험도 이루어졌는데, 사실 이런 스키 착륙장치 실험은 소련 공군기에서는 거의 기본적인 옵션 장비나 다름없었다.

7. 배치와 실전


일련의 시험을 끝낸 La-11는 차례 차례 일선 전투기 부대에 배치가 시작된다. 운용 부대는 유럽 방면에서 극동까지 광범위했는데, 사할린쿠릴 열도 남부의 이투루프(Итуруп) 섬의 전진 기지에도 배치되었다. 이 전투기를 수령해서 몰아 본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La-11을 가리켜 '''라보츠킨의 드럼스틱(Барабанные палочки Лавочкина)'''이라는 별명이 붙여지면서 나름 호평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얼마 후 운용 도중에 엔진이 비행 도중에 갑자기 멈춰버리는 증상이 가끔 일어나 그 평가는 떨어졌고, 효과적인 운용 체제를 갖추기 까지는 시간이 약간 필요했다.
La-11은 1950년 4월 8일에 발트해 상공에서 미 해군의 정찰기를 격추시키며 첫 실전을 경험하게 된다. 소련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간지 이즈베스티야(Известия)에서 발표된 보도 기사에 따르면 이 사건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하면서도, 추락한 기체는 B-29라고 단정지어 발표했다. 소련 잠수함의 전파신호를 감청하고 수집하기 위해 서독 비스바덴 기지(Wiesbaden AB)에서 이 기체를 띄웠던 미국은 함구하고 있었지만, 실은 이 정찰기는 B-29가 아니라 B-24의 해군형인 프라이배티어(Consolidated PB4Y-2 Privateer)였다. 이 공격으로 인해 10명의 승무원은 모두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VP-26 대원들로부터 "Turbulent Turtle"이란 별명이 붙여졌던 이 기체(Bu No 59645)를 격추시킨 소련 공군 제11전투비행연대의 조종사 블라디미르 도킨(Б. Докин) 중위는 미국 정찰기가 영공 침범 금지 명령을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먼저 사격을 가해왔다고 증언했었는데, 양측의 조사 결과가 너무도 다르고 생존자도 없어서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듬해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6일에는 태평양 함대 소속 La-11 조종사인 이반 루가셰프(И. Лукашев)와 미하일 시튜킨(М.Щукин)은 La-11으로 블라디보스톡 부근의 영공을 넘어온 미 해군의 록히드 P2V 넵튠(Lockheed P2V Neptune) 해상초계기를 격추시켰고, 연이은 군용기 격추로 인하여 미소 관계는 얼어붙으며 험악해져 갔다.

8. 소련의 마지막 레시프로 전투기


이와 같은 군사적 마찰로 인해 La-11의 부대 배치에는 속도가 붙었고 1950년 6월 25일에 극동의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공군을 통하여 전면전에 투입되었다. 중국 공군 마크를 그려 넣은 전투기에 소련 조종사가 올라타 실전에 참가한 La-11는 두 번째로 PB4Y-2를 격추시켰고, 한반도 파견이 끝날 때까지 P2V, B-26 인베이더 폭격기를 추가로 격추시켰다. 그러나 반대로 미군 조종사가 탄 F-51D 머스탱 같은 유엔군 전투기에 의해 많은 La-11이 격추되기도 했는데, 특히 실전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없는 중국과 북한 조종사가 모는 기체의 손실이 더 컸다. MiG-15가 한반도에 등장한 후에는 1개 비행연대에 2개 대대는 MiG-15가 배치되고 1개 대대는 La-11이나 Yak-9 같은 레시프로 전투기가 남겨져 임무 출격을 계속했다.
중국이 La-11를 소련으로부터 구입해 운용한 시기는 1950년이었으므로 본가인 소련과 거의 같았다. 그러나 중국 공군의 La-11은 별 성과를 올리지도 못한 채 종종 격추되었고, B-29 중폭격기를 요격하는 임무에도 동원되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전과는 거두지 못했다. La-11는 B-29의 순항 고도인 1만 미터까지 올라가는데 26분이나 걸렸고, 이 고도는 상승한도에 가까와 B-29 보다 고작 20 km/h 빠른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접근 경보를 받고 발진한 상태에서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는데, 몇 년 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육군과 해군 항공대가 저지른 실수를 그대로 답습한 셈이다. 웃긴 것은 소련기가 1만 미터에서 요격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몇년 전만 해도 말도 안되는 헛소리였다는 것으로 2차대전 당시 생산된 기체들은 La-11의 선조격인 La-5와 La-7도 4천 미터만 넘어가도 성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똑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기체인데도 말이다.
북한 공군 같은 경우는 한국전이 발발한 직후 1차 지원 분량으로 145대의 군용기를 소련으로부터 건네받을 때 이 전투기도 함께 수령했었다. 북한은 1950년이 저물기 전에 239대의 항공기를 더 지원받았는데 그중에서 La-11은 40대였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기록은 1951년 11월 30일에 북한 공군의 반 텐 바오(Ван Тень бао, 혹은 왕 텐바오)가 미 공군의 F-86 세이버를 1기 격추시켰다는 것인데, 중국인의 이름과 구분하지 못한 문서상의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1952년 초 시점에서 한반도에 전개하고 있던 제351전투비행연대에서는 MiG-15를 제외한 오직 1개의 비행대대만이 La-11을 갖춘 마지막 부대로 남아 있었다. 이 12대의 피스톤 엔진 전투기는 이듬해인 1953년 여름까지 비행을 계속했고, 느리고 낮게 나는 B-26를 주목표로 삼고 작전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 시기쯤 되면 소련에서 훨씬 뛰어난 고성능 전투기를 대량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기존의 레시프로 전투기는 골동품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세대 교체는 UN 공군도 똑같았다. 그래도 La-11은 1960년대 초까지 훈련기로 계속 쓰였고, 그 외에도 시험기나 표적기로 재활용되기도 했다.
UN 공군의 세대교체에 대해 첨언하자면 6.25전쟁 당시 UN군도 많은 레시프로기를 전선에 투입하였다. 그 기체들은 2차대전 말이나 전후에 출현한 매우 강력한 기체들로 P-51 머스탱이나 F8F 베어캣이나 그리폰 엔진을 장착한 슈퍼마린 시파이어 47형, 호커 시퓨리같이 서방 연합군의 항공기술력이 총집약된 최강의 기체들이었다. 독일도 패망하지 않았다면 Ta152BV 155, 일본의 경우 Ki-94J6K 진푸, N1K-J 시덴, Ki-117(Ki-84 하야테의 최종개량형)등을 투입했었을 것이고. 그런 기체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레시프로기를 당당하게 내밀 정도로 소련도 나름대로 갈고닦은 기술력이 있었다는 것. 문제는 소련 공군, 방공군의 엘리트 조종사들은 더욱 뛰어난 MiG-15를 비롯한 제트기를 몰고 있었고 La-9와 La-11, Yak-3Yak-9같은 기체는 중국이나 북한 공군의 조종사가 몰았다. 위에도 적혀있지만 이들의 기량은 서방연합국의 엘리트 조종사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고 소련제 레시프로기들은 대부분이 처참하게 격추되어 빠르게 제트기로 세대교체가 되고 말았다.

9. 둘러보기





[1] 단 항속거리와 극지성능, 고고도성능을 제외하면 La-9가 전체적으로 더 뛰어났다. La-9의 개량형이라기보단 장거리 호위전투기용 파생형이기 때문.[2]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소련군이 손에 넣은 P-38 전투기의 수퍼차저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던 탓이다. 결정판으로 불리는 P-38L의 고공 성능은 2차 대전 전투기들 중에서 상위권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