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
'''I never sleep, cuz sleep is the cousin of death
난 잠을 자지 않아, 잠은 죽음의 사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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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설적인 래퍼'''.'''God's Son'''
이전 예명은 네이스티 나스(Nasty Nas)였으나 후에 Nasty를 떼내어 랩 네임이 깔끔하게 '나스'가 되었고 이게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다. 한 때는 "King Of New York", "God's Son"이란 호칭으로도 불렸으며 별칭으로 이전 예명이었던 "Nasty Nas" 또는 "Nas Escobar"라고도 불린다.
뉴욕을 비롯한 이스트 코스트 힙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4] 거리의 삶을 묘사하는 것에 매우 뛰어나다. Thug Poet[5] 으로 불린다. 흔히 생각하기 쉬운 뉴욕의 화려한 모습이 아닌 그 이면에 있는 거칠고 삭막한 거리를 풍부한 메타포로 정확하고 세심하게 표현하여 그는 힙합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래퍼이자 전설로 등극할 수 있었다. 현재 미국 내에서 1500만장 이상, 전세계에서 3000만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
2. Illmatic 이전
그는 인종 차별이 극심하기로 유명한 미시시피 주 나체스 출신 뮤지션 '''올루 다라 존스'''[6][7] 가 32세에 본 첫 자식으로, 올루 다라의 아버지 역시 뮤지션으로 올루 다라의 대부와 함께 Mellowderes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미국 전역에서 연주를 하였다. 나스는 이런 음악가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는다. 4년간의 해군 복무를 마친 올루 다라는 뉴욕 시에 정착하고 나스의 어머니 앤 존스를 만나 나시르 존스와 자바리 존스 두 아들을 보게 된다. 가난한 뮤지션이었던 올루 다라는 유럽을 오가며 돈을 벌었고 남은 가족들은 '''나스가 성장한 퀸스브릿지로 이사하게 된다.'''[8]
나스는 자신이 사는 그 동네가 불우한 환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숙한 아이로 자라났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과 넉넉지 못한 수입에도 존스 부부는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올루 다라는 음악을 연주하며 세계를 떠돌아다닌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책장을 만들어 그곳에 다양한 인문 서적을 꽂아 넣었으며, 앤은 좋은 카펫을 깔고 불우한 환경에서 뭔가를 얻기 위해 훔치는 행위보다는 차라리 사주는 쪽을 선택했다. 나스와 자바리는 뮤지션 집안 혈통답게 어린 시절 해외공연을 떠난 아버지의 빈 자리를 그가 남겨놓은 악기로 대신하였다. 어린 나이에 트럼펫을 부는 것이 입술을 망가뜨린다고 못 불게 하였고 7세가 되자 다시 불어보라고 했는데 나스는 다른 곳에 흥미를 느꼈다.
부모의 노력 아래서, 나쁜 길로 빠지는 대신 예술가 집안 혈통답게 어린 시절부터 가사를 만들어왔고 자바리 존스와 나시르의 친구, Ill Will이라 부르는 윌리엄 그레이엄[9][10] 과 함께 음악으로 성장하게 되지만, 마약의 광기가 퀸스를 덮치고 단지 불우하던 환경은 목숨이 위태로운 험악한 환경으로 변모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 나스의 가정은 더욱 힘들어지고 나쁜 길로 인한 건 아니었지만 올루 다라는 더이상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게 되며 앤은 자신의 아이들을 더욱 굳건하고 강하게 키워나간다. 비록 함께 살진 못했지만 올루 다라는 그의 자식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는데, 하루는 자식들이 다니던 학교를 보고 미국의 공교육 현실 속에서, 그것도 할렘가 흑인 아이들이 이러한 교육 시스템에서 자라난다면 안 가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두 아이 모두 학교를 그만 다니는 대신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한다. 그리고 나스가 선택한 것은 음악이었다.
어느 날 Def Flesh Crew의 멤버였던 록샌 샨테[11] 는 퀸스의 아파트에서 랩을 하고 있는 나스를 발견하고 그 비범한 꼬마를 퀸스 파크에서 열리는 공연에 함께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 재능에도 아직 햇병아리였던 나스는 아직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감당할 수 없었고 크게 위축되어 랩다운 랩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좌절에도 불구하고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MC Shan, South Bronx, Boogie Down Productions 사이에서 일어난 퀸스브릿지 디스전 등을 들으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절친이었던 Ill Will의 죽음이 그를 냉소적으로 바꿔놓았고, 나스는 더이상 햇병아리가 아니었다. 그가 참여한 Main Source의 곡 ''Live At The Barbeque''에서의 피처링[12] 과 MC Serch의 데뷔 앨범 수록곡 ''Back To The Grill''에서의 피처링[13] 을 통해 내제된 사회적 분노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며 이제까지 없던 엄청난 핵펀치라인을 선보이며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컬럼비아 레코드의 페이스 뉴먼은 나스와 계약을 하게 된다."난 내 분노를 억누르던가, 아니면 그 분노를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쪽이 훨씬 가치있었고." - Nas, 전기 영화 ''Time Is Illmatic'' 中
3. Illmatic, 그리고 그 이후
1994년 4월 발매한 정규 1집 앨범 ''Illmatic''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동부힙합계의 거장(DJ 프리미어, Q-팁, 라지 프로페서, 피트 록)들의 대거 참여 + 나스 본인의 실력이 합쳐지면서 우탱 클랜의 ''Enter The Wu-tang : 36 Chambers'', 노토리어스 B.I.G.의 ''Ready To Die''와 함께 동부힙합의 바이블로 취급되는 등, 음악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절대적인 수준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소스지에서 마이크 5개를 받으며, 판매성적과는 상관없이 음악적인 면에서만은 동부힙합 역사상 최고의 음반이라 할 수있다. 특히 네번째 싱글 곡인 ''The World Is Yours''는 JAY-Z의 불후의 명곡 ''Dead Presidents''에 샘플링되었다.[14]
다만 1집 앨범 ''Illmatic''의 완성도가 너무나 뛰어난 탓에, 앨범을 내는 족족 1집과 비교당하며, 그것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평을 듣는다. 눈물 나는 소포모어 징크스의 대명사급 인물이기도 하다.[15]
2집 ''It Was Written''은 전작의 음악적 성공을 바탕으로 빌보드 차트에 4주동안 1위에 머물렀고 400만장 이상 판매되는 대중적인 성공까지 잡아내며 나스를 메인스트림으로 올려놓는 역할을 했다. 이후 3집, 4집또한 대중적으로 성공하나 상업적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16]
이후 제이지와의 디스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발매된 5집은 그동안의 비판을 싹다 날려버리는데 성공했으며 동시에 힙합 역사상 손꼽히는 디스 트랙인 ''Ether''를 탄생시켰다. 6집 또한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의 성공을 거두는데 성공한다. 이쯤에서 제이지와의 디스전도 마무리되고 8집인 ''Hip Hop Is Dead''부터는 제이지의 회사인 데프젬에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랩을 하는 실력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흑인 빈민들의 삶을 능수능란하게 가사로 풀어내는 한편, 기본에 충실한 스킬로 듣는 이의 뇌를 자극한다. 반면에 비트를 고르는 안목은 별로이지만서도..... 6집 앨범 수록곡이자 나스의 가장 대중적인 음악인 ''I Can''에서도 이러한 그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17]
같은 동부 뮤지션인 제이지와는 몇 년 동안 서로 디스하며 지내던 사이. 총격전이나 린치 같은 무력적 충돌 없이 음악적 충돌만 있었기에, 성공한 디스라고도 한다.[18] 둘이서 서로 앨범 팔아먹기 위해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음모론까지 있을 정도. 결국 2005년 11월. 손을 맞잡으며 화해를 하였다.
또한 2010년 5월 데미안 말리와 콜라보레이션 앨범인 ''Distant Relatives''를 발표. 이 앨범은 현재 레게와 힙합의 조화. 나아가 새로운 장르의 형성이라고까지 호평받고 있다.
2005년 R&B 가수인 켈리스와 결혼하였으나, 2010년 이혼하였고 이 이혼이 2012년 7월 발매한 ''Life Is Good'' 앨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앨범 자켓에 무릎 위에 얹은 드레스도 실제 결혼식 때 켈리스가 입었던 웨딩 드레스일 정도. 첫 트랙 ''No Introduction'', 후반 트랙인 ''Bye Baby''에 켈리스와의 이혼과 관련된 나스의 감정이 잘 묻어나 있다. 앨범 평은 ''Illmatic'' 이후로 최고의 앨범이라고 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2013년 7월, 하버드 대학교의 힙합 기록 및 연구소에서 나스의 업적에 대한 경의를 담아 '나시르 존스 힙합 펠로우십'을 만들었다고 한다. 힙합과 관련된 예술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한다고.
2008년에 내한 공연을 가질 계획이었지만 무산된 바 있으며, 2013년 8월 지산 월드락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내한 공연을 가졌다. 비영어권인 국가에서 진행한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represent 후렴구를 연호한다던지, N.Y. state of mind의 'I never sleep, cuz sleep is cousin of death' 부분을 같이 따라부르는 등의 관람객들이 자기 노래를 알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나스 본인도 ''N.Y. State Of Mind''의 "N.Y. State Of Mind" 부분을 "'''Seoul State''' Of Mind"로 개사해서 부르는 등 센스가 돋보이는 호응을 해주었다.
2014년 나스의 데뷔작 ''Illmatic''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인 ''Time Is Illmatic''이 개봉되었다. 외국에서조차 당일치기 개봉 후 온라인으로 구입하여 볼 수 있는 형식을 취했기에 국내 상영 여부가 불투명했으나 국내에서도 2015년 2월 7일부터 9일까지 일시적으로 개봉했다. 이후에도 몇몇 소규모 영화제에서 상영하기도 한다.
''Life is Good'' 발매 이후로 방한도 하고 공연도 열심히 하나 정작 몇 년 동안 앨범을 내지 않아 팬들을 애타게 만들고 있다. 드디어 새로운 앨범이 6월에 나온다는 소식이다. 총괄 프로듀서는 카녜 웨스트.
2년이 지난 2020년 8월, 앨범이 하나 더 나온다고 한다. 한국 시간으로 19일 새벽에 트랙리스트가 공개되었으며, 21일에 발매된더고 한다. 이름은 ''King's Disease''.
4. 디스코그래피
4.1. 정규
4.2. 비정규
- From Illmatic To Stillmatic (2002)[26][27]
- The Lost Tape (2002)[28]
- Illmatic (10th Anniversary Platinum Edition) (2004)[29]
- Greatest Hits (2007)[30]
- Illmatic XX (2014)[31]
- Coachella Nights (2014)[32]
- Illmatic : Live From The Kennedy Center (2018)[33]
- The Lost Tapes 2 (2019)[34]
4.3. 컬래버레이션
- The Firm - The Album (1997)[35]
- Nas & Ill Will Records Presents QB's Finest (2000.12.19)[36]
- Nas & Damian "Jr. Gong" Marley - Distant Relatives (2010)[37]
4.4. 싱글
4.4.1. 빌보드 핫 100 1위
4.4.2. 빌보드 핫 100 2 ~ 10위
4.4.3. 빌보드 핫 100 11 ~ 20위
- I Can (2003)12위
5. 나스에 대한 펀치라인
'''Nas made you look before the heaters
나스는 총을 쏘기도 전에 니 시선을 끌었지
What do it take to be a legend like Nas is
나스같은 전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Kanye West — ''Classic'' (ft. Rakim, Nas & KRS-One)[40]
'''Long live the idols, may they never be your rivals
Pac was like Jesus, Nas wrote the bible
우상들이여, 영원하길. 또 그들이 내 라이벌이 되지 않길.
팍은 예수였고, 나스는 성경을 써냈지.'''中
6. 기타
- 내한한 적이 있는데, 2013년 지산 월드 록 페스티벌 서브 스테이지 헤드라이너였다. 많은 해외 뮤지션들이 첫 내한공연을 할 때 반응처럼 큰 기대 없이 처음 온 곳에서 의외의 열광적 반응에 놀랐는지 상당히 만족한 모양이다. 공연 후기는 힙합LE 게시물 참조: 후기 1 후기 2
-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상당히 낮은 편으로, 최고의 라이벌이자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제이지는 국내에서도 유명하지만 나스는 마니아층에게만 사랑받고있다. 대신에 그만큼 마니아층의 충성도는 상당한 편이다. 최근에는 내한 공연이나 유튜브 힙합 채널들에서 나스가 소개되면서 인지도가 상당히 올라가기도 했다.
- 상당히 동안이다. 40대 중년임에도 유해진 느낌을 주는 것을 제외하면 얼굴이 리즈 시절이랑 차이가 나질 않는다.
- 하버드 대학에서 'W. E. B. Du Bois Medal'[43] 을 수여받았다. 문화, 인권, 아프리칸 및 아프리칸 아메리칸 공동체에 대한 예술적 기여'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 비트 초이스에 있어서 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전설적인 데뷔 앨범 Illmatic을 제외하고는 비트를 고르는 데 있어 엄청난 네임밸류에 비해 영 맞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물론 랩 실력과 작사 능력이 워낙 타의 추종을 불허하다 보니 커리어에 있어서 큰 지장을 주는 부분은 아니지만 비트 초이스도 좋았으면 완벽했을 것이라고 느끼는 팬들이 꽤나 있는 편. 사실 4집을 제외하면 비트 초이스가 실망스러웠던 적은 없으나, 라이벌 제이지의 비트 초이스 능력이 워낙 탁월했고 카녜 웨스트를 발굴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제이지와 비교되면서 이러한 이미지가 더 심해진 면이 있는 듯 하다.
- 2016년 여름, DJ Khaled "Major Key" 라는 앨범의 "Nas Album Done" (나스 앨범 완성) 이란 노래에 피처링을 하면서, "My album done niggas, Wait and see" (내 앨범 완성됐어, 자식들아. 닥치고 기다려) 라는 멋있는 구절을 뱉었는데, 아직까지 앨범은 안 나오고있다. 현재 본인의 레이블인 Def Jam과의 계약이 끝날 때, 앨범을 낸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2년 뒤 NASIR가 발매되었다.
- 한때 인터뷰로 MF DOOM과의 작업을 고려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성사되었다면 힙합계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흐지부지되었다.
- 의외로 에미넴보다 한 살 어리다. 에미넴은 1972년 10월 17일, 나스는 1973년 9월 14일생.
[1] 발음은 '''나즈'''(nɑːz)에 가깝다.[2] https://today.com/popculture/nas-mature-voice-hip-hop-wbna6786474[3]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에서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잠은 죽음의 형제죠. 안 그런가요?")[4] 덕분에 같은 뉴욕래퍼 제이지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제이지가 비기 사후 뉴욕의 왕이라는 칭호를 이어받았지만 나스를 최고로 치는 매니아들도 상당히 많다. 대중적으로는 제이지가 빌보드 차트 성적 등에서 한참 앞서지만 가사의 깊이, ''Illmatic''의 상징성 등 때문에 힙합 올드팬들은 나스를 더 선호하는 편.[5] The Lost Tape의 Purple을 들어보자. 그가 왜 Thug Poet인지 알 수 있다.[6] Olu Dara. 1941년 생으로 그의 이름은 신은 좋은 분입니다라는 뜻이고 기타와 코넷을 연주했으며 보컬리스트이기도 했다.[7] 훗날 나스가 성공하고 나스의 뮤직비디오에 참여하기도 한걸 보면 지금도 아들과의 관계가 상당히 좋은 것으로 보인다.[8] 퀸스브릿지는 사실상 백인 중산층을 위해 흑인을 수용, 격리하기 위한 주택정책이었다.[9] ''Illmatic''에 수도 없이 언급되는 그 Ill Will.[10] 그 유명한 디스곡 ''ether''를 들어보면 "Ill Will, Rest in peace"("일 윌, 명복을 빈다") 라는 구절도 나온다. [11] 현재는 많이 잊혀진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여성 래퍼계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1세대 여성 래퍼다. 그녀가 Juice Crew소속일때 Boogie Down Production과 Juice Crew의 중심인물을 기준으로 디스전을 벌인적이 있다. '''즉, 랩 역사에 빠질 수 없는 리빙 레전드 KRS-One과 디스전을 벌인 몇 안되는 래퍼중 1명.'''[12] "난 12살때 예수를 패버리러 지옥으로 향했지. 네스티 나스는 미국의 반역자, 경관 살해자, 난 폭동을 일으키지", "대통령의 부인을 계획 없이 납치하고 KKK단처럼 깜둥이 목을 매달아 버릴거야"[13] "난 수녀들에게 자동소총을 흔들어댔고 교회에 있는 선교사 놈들을 털어먹었지. 난 존나 범죄자니까"[14] 사실 ''Dead Presidents''에 샘플링된 곡은 원곡이 아니라 Q-Tip이 리믹스한 버전이다. 이 곡은 2014년에 나온 ''Illmatic XX''의 2번째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다. 또 나스는 훗날 제이지 디스곡인 Ether에서 이것을 거론하며 제이지를 디스한다(...)[15] 하지만 5집 ''Stillmatic''은 ''Illmatic'' 이후로 상업적으로 변했다는 인식이 박힌 나스를 다시 한번 원점으로, 그리고 정점에 올려놓는 앨범이 되었다. 다만 ''Nastradamus''의 영향인지, 메타크리틱 점수는 69점에 그친다.[16] 최근 들어 평이 나아지고 있으며 "Illmatic"만큼은 아니지만 명반으로 칭송받는 편이다.[17] ''I Can''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라는 유언을 남겨서 계몽적이고 희망차게 만들었다고 한다.[18] 다만 제이지가 나스의 동료인 맙 딥의 프로디지의 발레리나 시절 사진을 공개하고 Supa Ugly라는 프리스타일 곡으로 나스의 전 부인 카르멘 브라이언이 앨런 아이버슨 그리고 자신과 성관계를 가진 걸 까발리고 사진까지 보여주는 등 찌질한 면도 있었다. 결국 제이지는 이 사실을 안 어머니한테 죽도록 혼나고(...) 나스에게 사과해야 했다.[19] 나스를 대표하는, 본토의 정통 이스트 코스트 힙합을 대표하는 명작중의 명작.[20] 이쯤부터 이름을 Nasty Nas에서 멕시코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에서 따온 Nas Escobar로 바꾼다.[21] 나스의 가장 유명한 대표곡중 하나인 'Nas is like' 가 수록돼 있다.[22] JAY-Z의 디스곡을 맞디스곡인 'Ether'가 수록되어 있으며 나스의 분기점으로 여겨지는 앨범이다.[23] 기존 제목은 ''Nigger''였지만 제목에 대한 미국 내의 강한 부정적 여론에 ''Nas''로 수정하였다가 결국엔 제목이 없는 채로(Untitled) 발매되었는데, 전작 ''Hip Hop Is Dead''도 비슷하게 원래 ''Nigga''나 ''Hip Hop Is Dead... The N''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하려고 시도했었다. 앨범 커버의 채찍질 흉터가 N을 나타내는 것은 인종차별, 그리고 어떻게 노예가 고문당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한다. 나스는 음반명이 무제로 확정된 뒤에도 "사람들은 이 앨범의 진짜 이름이 뭔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 겁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이 앨범은 아이튠즈(애플 뮤직)와 스포티파이같은 몇몇 스트리밍 서비스들 한정으로 ''Nas''라고 되어 있다.[24] 랩 스킬, 프로듀싱 면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명반으로 칭송받는 앨범. 커버는 Nas와 이혼한 Kelis의 웨딩드레스이다.[25] Kanye West가 전곡 프로듀싱을 담당했다.[26] Nas가 5집을 낸 후, 1집부터 5집까지의 히트송을 모아, 리믹스한 EP로, 몇몇 곡은 이후에 나올 Illmatic 10주년, 20주년 앨범에 두번째 CD에 들어가있다.[27] Edited 버전이라, 중간중간 비속어들이 모자이크 되는건 함정[28] 3, 4집 발매시기에 녹음된 작품들을 수록했다. 해당 곡들은 상업적 어필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레이블에서 빼길 원했다고 한다. 실제로 수록된 곡들은 3, 4집의 여타 트랙보다 훨씬 상태가 좋고 역대급 명곡인 Doo Rags나 Purple같은 곡들도 포함되어 있다.[29] Nas의 1집이자, 힙합 최고의 앨범 Illmatic의 발매 10주년을 기념하는 2CD앨범이다. 1CD는 Illmatic의 구성 그대로 돼있고, 2CD에는 새로운 트랙과, Illmatic 트랙들의 리믹스 버전들이 있다.[30] Nas의 히트송 모음집.[31] Illmatic 20주년을 맞아 발매된 기념비와도 같은 상징적인 2CD 앨범. 10주년 앨범과 마찬가지로, 1CD는 Ilmatic의 구성, 2CD는 새로운 트랙과, Illmatic 트랙들의 리믹스 버전들이 있다.[32] Nas가 Coachella Nights라는 콘서트에서 공연할 당시의 라이브를 녹음한 앨범으로써, 기본적으로 Illmatic 트랙들 라이브가 들어가있고, Nas의 히트 송, Made You Look, Hate Me Now, One Mic, If I Ruled The World와, 중간중간 JAY-Z와 Damian "Jr. Gong" Marley 노래의 라이브까지 있다.[33] Illmatic 발매 25주년을 기념하여 케네디 센터에서 오케스트라 버젼으로 편곡하여 부른 라이브 앨범.[34] 미공개곡이 너무 많아 3, 4까지 나올지도 모른다고 직접 언급했다.[35] Nas, AZ, Foxy Brown, Nature가 랩하고, Dr. Dre가 메인 프로듀싱을 맡은 앨범. 해당 팀은 나스 2집의 Affirmative Action라는 곡에서 처음 선보인 그룹이며, 원래는 Nature 대신 Cormega라는 래퍼가 멤버였으나 빠졌고, Nature가 빈자리를 메꾸었다.[36] Nas가 중심이 되어, QB(Nas가 자란 Queens Bridge)의 래퍼들이 모여서 만든 그룹.[37] 데미안 말리와 함께한 컬래버레이션 앨범.[38] Missy Elliott의 싱글을 EVE, Q-Tip과 함께 피쳐링[39] Jennifer Lopez의 싱글을 피쳐링[40] 나이키에서 에어 포스 프로모션 용으로 공개한 곡. 프리모의 비트 위에 칸예, 그리고 힙합의 전설급 인물들인 라킴, 나스, KRS-원이 랩을 하는, 말 그대로 '''클래식'''. [41] 곡 자체가 자신의 우상인 나스를 실망시켜서 낙담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후에 나스가 Made Nas Proud라는 답가를 불러줬다. 제목 그대로 자신은 실망하지 않았으며, 나의 왕관을 준다는 내용 등 제이콜을 동부 새시대의 왕으로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42] 블로고스피어에서도 이글루스의 모 동인 블로거가 '나스 개새끼'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으나 그 게시물의 나스는 나스 키노코이다. 힙합음악 마니아들이 많은 티스토리에서는 본래의 의미로 쓰이는 편으로, 두 커뮤니티 사이트 간의 문화 차이를 알 수 있는 예.[43] 하버드 대에서 최초의 박사학위를 얻은 흑인 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박사의 이름을 딴 메달.[44] 그때 나스는 LA에 살았었고, 니키 미나즈는 마이애미에 살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