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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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9년 결성된 영국 출신 얼터너티브 록(브릿팝) 밴드이다. 브릿팝 4대 밴드 중 하나로, 네 밴드 중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지만 동시에 제일 빨리 브릿팝에서 멀어진 밴드.
이름은 모리세이의 솔로 데뷔 후 첫 싱글 곡 'Suedehead'에서 따왔다고 한다. 모리세이는 라이브에서 스웨이드의 B-Side 곡인 "My Insatiable One'을 커버하기도 하는 등 스웨이드를 상당히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2. 바이오그래피
2.1. 밴드의 결성
Just A Girl (Early Demo)[1]
브렛 앤더슨은 1967년 웨스트 서섹스 주의 헤이워즈 히스의 노동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예술가였으며 택시 운전사인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헤이워즈 히스와 인접한 린드필드의 공영 주택 단지에서 자랐으며 린드필드 초등학교와 오스올 종합 중등 학교를 졸업했다. 청소년기에 그는 후에 스웨이드의 베이시스트가 된 맷 오스먼과 함께 더 피그스(The Pigs), 조프(Geoff)같은 개러지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이후 브렛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진학했지만 학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1987년 즈음에 아버지와 이혼했던 어머니가 1989년 9월, 갑작스럽게 암으로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꿈꾸며 어린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멧 오스먼, 여자친구이자 대학 동창생 저스틴 프리쉬먼과 함께 대학을 중퇴하고 스웨이드를 결성했다. 결성 당시 멤버는 브렛 앤더슨(보컬), 저스틴 프리쉬먼(기타), 멧 오스먼(베이스). 비록 브렛은 10대 시절부터 음악인의 꿈을 꾸고 있었지만 그에게 전업 음악인으로서의 삶에 확신을 갖게 해준 것은 당시 그와 동거중이었던 저스틴 프리쉬먼이었다고 한다. 저스틴의 말에 의하면 브렛이 그 잘생긴 외모로 집에서 얌전하게 채식주의자용 피자 따위나 굽고 있는 모습을 참을 수 없었다고.[2]
이들은 비틀즈, 더 스미스 그리고 데이빗 보위의 곡들을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브렛도 저스틴도 기타리스트가 될 만한 재목은 아니라는 판단하에 프로 뮤지션을 영입하려는 생각으로 1989년 10월 28일 NME지에 구인 광고를 냈다.
이 광고는 19살 소년 버나드 버틀러의 관심을 끌었으며 결국 버나드는 런던으로 상경해서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한 오디션을 봤고 합격하여 스웨이드의 기타리스트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스웨이드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런던에서 결성된 밴드에서 젊은 기타리스트 구함. 스미스, 로이드 콜 앤 커머션 [3]
, 데이빗 보위, 펫 샵 보이즈 관련. 고지식한 음악 마니아는 사절. 실력보다 더 중요하게 따지는 것도 있음. 브렛에게 연락해 주세요."'''
Wonderful Sometimes (Early Demo)
Natural Born Servant (Early Demo)
Be My God (Early Demo)
밴드의 전반적인 컨셉은 글램 록과 레이브 록을 섞은 말초적이며 퇴폐적인 컨셉이었고 사운드면에서는 더 스미스의 영향이 컸다.[4] 결성 초기에는 데이빗 보위의 아류 혹은 철지난 글램 록을 한다고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공연 무대도 매니저 역할을 도맡아 했던 저스틴 프리쉬먼의 부모님[5] 인맥빨로 겨우 얻은 경우가 많았고 공연장에서 사람들이 병이나 깡통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츰차츰 스웨이드 매력에 빠진 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밴드는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밴드는 정식 드러머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1990년 6월, 펑크 밴드의 드러머였던 사이먼 길버트를 영입했다. [6]
1991년 5월 밴드의 핵심이자 동거 관계 사이였던 브렛 앤더슨과 저스틴 프리쉬먼이 결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저스틴 프리쉬먼이 블러의 리더, 데이먼 알반과 양다리를 걸치다가 브렛을 찬 것이다. 저스틴 프리쉬먼은 "브렛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나와 헤어졌죠. 데이먼 알반과 알게되고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언젠가는 브렛과의 관계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브렛과의 마무리는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은 트라우마틱한 이별이었어요. 사실 제가 데이먼 알반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저는 우리가 헤어질 것을 알았어요. 우린 사랑에 빠진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이가 발전했던 거죠. 매우 가까웠고 항상 함께 있었고 그리고 그 시간이 너무나 많았어요. "라고 말했다. 버나드는 "저스틴은 리허설에 늦게 나타나서는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을 내뱉었어요 ― 지금까지 블러가 비디오 찍는 곳에 가 있었어 ― 라니 . 그 때가 정말 둘의 관계가 끝났을 때라고 할 수 있을거에요. 아마도 저스틴이 그렇게 말한 바로 그 날 브렛이 나한테 전화해서 '저스틴을 내쫓았다.' 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라고 회상했다.
저스틴과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끝나고 저스틴과 같이 살던 집에서 나온 후 완전히 맨붕한 브렛은 값싼 아파트[7] 에서 은둔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룸메이트인 Alan의 영향으로 코카인과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저스틴과 동거중이었을 때 브렛은 대마초와 엑스터시를 호기심에 잠깐 했었을 뿐 다른 종류의 마약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밴드에서 해고당한 저스틴은 데이먼 알반의 도움을 받아서[8] 1991년 10월, 드러머를 제외하고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그룹 엘라스티카를 결성하여 펑크와 소닉 유스를 위시한 미국의 노이즈 록에 영향을 받은 음악을 하기 시작한다. 저스틴과 브렛은 나중에 서로 화해했지만 아직까지도 브렛과 데이먼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2.2. 버나드 버틀러 시기
The Drowners (Suede)
Animal Nitrare (Suede)
한편,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런던으로 상경하여 난생 처음 프로 뮤지션으로서 가입한 밴드이자 상승세로 향하고있던 스웨이드가 이대로 해체해버리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 버나드 버틀러는 코카인과 헤로인에 빠져있는 밴드와 브렛을 격려하면서 많은 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9] 밴드는 이런 버나드의 열정으로 절치부심하여 리허설에 돌입했고 그 결과 1992년 2월 인디 레이블 Nude 레코드사와 계약에 성공하여 같은 해 5월, 첫 싱글 The Drowners로 데뷔한다. 브렛은 이 때를 회상하며 "참 이상한 시기였어요. 더 이상 저스틴과 내가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버나드와 나는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있었죠. 저스틴과의 결별은 많은 것들과 관련이 있었어요. 그것은 스웨이드가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하는 진정한 밴드로 변모하는데 촉매제가 되었죠. 저스틴과 헤어졌기 때문에 다스려야 할 크나큰 감정의 동요는 순전히 개인적인 고뇌였어요. 그 괴로움은 페이지 위로 뛰쳐나왔고 거기에는 박차고 일어나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싶은 욕망이 담겨 있었죠."라는 코맨트를 남겼다.[10]
메이저 데뷔 직후 연달아 발매된 싱글들이 차트 상위권에 들고 브렛의 중성적인 성향 및 "남자 경험이 없는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는 등의 도발적인 발언으로 단숨에 유명해진 스웨이드는 브릿팝씬의 문을 열어젖힌 첫 밴드로 평가받는다. 1993년 3월 29일 발매된 1집 Suede는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판매된 데뷔 앨범의 기록을 갱신하고[11] 제 2회 머큐리 시상식에서 대상까지 받았다. 이후 밴드는 북미 투어를 시작하고 1994년 발렌타인 데이에 새 싱글 <Stay Together>를 발매한다.
Stay Together (Stay Together - Single) [12]
그러나 이 때부터 밴드는 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일단, 북미 투어 초반에 버나드 버틀러의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 급히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동안 원래 북미 투어의 오프닝 밴드로서 참여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밴드 크랜베리스 [13] 가 오히려 스웨이드 보다 인기를 얻으면서 복귀 후에는 공연 순서가 뒤바뀌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14] 이 밖에도 밴드의 장비가 도둑맞는가 하면 동명의 가수에게 태클이 걸리는 바람에 강제로 미국 한정 London Suede로 밴드의 이름을 개명당해야 했다.[15] 밴드 멤버들은 미국 진출이 생각했던 것보다 부진한 와중에 갑자기 영국으로 돌아온 것도 불만스러운데, 대신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던 크랜베리스가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버나드보다 먼저 미국으로 돌아갔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충격에 빠져 있던 버나드는 밴드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며 스웨이드 멤버들 및 이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다. 버나드는 공연 대기시간에 크랜베리스의 투어 버스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심지어는 혼자 택시를 타고 다음 공연장으로 간적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팀워크가 무너진 상태에서 밴드는 남아있는 북미 투어와 Stay Together 활동을 지속했고 1994년 3월 22일부터는 본격적으로 2집 Dog Man Star의 녹음을 시작했다.
The Wild Ones (Dog Man Star)[16]
The Asphalt World (Dog Man Star) [17]
당시 스웨이드의 곡은 버나드 버틀러(작곡) 브렛 앤더슨(작사)의 콤비 체제로 씌어지고 있었는데 둘의 관계가 완전히 멀어져 버렸으니 작업은 당연히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발매된 Dog Man Star 디럭스 에디션에 나온 둘의 인터뷰를 보면 앨범 전곡의 작곡과정은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가 여러가지 비트를 녹음해서 버나드의 집에 보내면 [18] 버나드는 그것을 토대로 여러 곡을 작곡해서 브렛의 집에 보내고 브렛이 그 중 마음에 드는 곡을 선곡해서 가사를 오버더빙하여 다시 버나드에게 보내는 과정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2집 작업을 시작했을 당시 브렛은 미국 투어가 실패로 끝난데다가 동시에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 Anick과도 헤어지자 빅토리아풍의 대저택을 임대해서 저택에 틀여박힌채로 헤로인을 하면서 보내고 있었으며 브렛과 버나드의 사이도 서로 매니저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굉장히 안좋았기 때문에 밴드는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된 리허설을 진행하지 못했다.
이 둘 사이의 마찰은 Dog Man Star 레코딩 작업 중 더욱 더 심화되었다. 버나드는 1집 녹음시부터 밴드의 프로듀서인 에드 불러를 "자신의 곡을 망치고 있다."면서 별로 탐탁지 않아 했는데 이와 반대로 맷과 브렛은 "프로듀서가 밴드의 음악을 더 듣기 좋게 만들었다."며 에드 블러의 손을 들어주었다. 2집 녹음이 시작되자 버나드는 레코드사에 섹스 피스톨즈의 음반을 프로듀스한 크리스 토마스를 새 프로듀서로 기용하거나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을 하겠다고 건의했으나 크리스 토마스는 비용상의 문제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19] 버나드의 셀프 프로듀싱은 브렛에 의해 거절당했다. 결국, 2집 녹음 중 에드 불러와 계속 충돌하던 버나드는 밴드에게 에드를 계속 기용할 거라면 자신은 밴드에서 빠지겠다고 통보하기에 이르렀고 밴드와 레코드사가 에드를 계속 기용하기로 결정하자 버나드 버틀러는 녹음이 한칭 진행중이던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버나드는 매니저의 끈질긴 설득끝에 혼자 다른 스튜디오를 임대하여 나머지 녹음을 마치고 1994년 7월 8일 밴드를 탈퇴했다. 버나드는 스웨이드를 탈퇴한 직후, 밴드에 가입하기 전부터 사귄 여자친구 Elisa와 결혼했다. 버나드는 Elisa와의 결혼식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복귀했을 때 자신의 장비가 스튜디오 밖에 버려져 있었으며 자신이 밴드에서 해고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버나드 버틀러가 탈퇴하자 밴드는 오디션을 통해 버나드, 스웨이드의 라이벌 밴드 블러에게 팬레터를 보내던 웨일즈 출신의 17살 소년 리차드 오크스를 기타 포지션으로 영입한 뒤[20] , 1994년 10월 10일에 2집 Dog Man Star를 발매한다. 2집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이 1집 <Suede>를 통해서 열어젖힌 브릿팝 열풍에 가려서 활동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훗날 재평가되어 지금까지도 <Coming Up>과 함께 스웨이드를 대표하는 앨범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3. 3집 <Coming Up> 발매와 전세계적인 성공
Trash (Coming Up)
Beautiful Ones (Coming Up)[21]
Saturday Night (Coming Up)
1996년 9월 2일, 밴드는 전작의 음울하며 클래시컬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화려한 기타팝 사운드로 채워진 3집 앨범 Coming Up을 발매한다. 또한 3집 발매 직전, 밴드는 달라진 사운드를 위해 연습실에 들락나락거리던 사이먼의 사촌이자 키보디스트인 닐 코들링[22] 을 정규 멤버로 영입하였다. 2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설레발의 제왕인 NME를 대표하여 영국의 언론들이 버나드 버틀러의 탈퇴를 대서특필하면서 스웨이드가 곧 해체할 것이라는 전망을 담은 기사를 쏟아내자 브렛은 "밴드가 다시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작과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가진 앨범, 즉, 일반 대중들이 즐길만한 팝적인 사운드로 가득찬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채로 앨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Coming Up은 브렛의 비음이 제일 강한 음반이기도 하다.
브렛 앤더슨은 투어 후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새 작곡 파트너가 된 리차드 오크스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파티에 혼자 안 데려가는 등 일부러 리차드를 반감금시켜서 작곡을 하게 했다고 한다. 3집의 프로듀서인 에드 불러는 "모든 데모 트랙들은 어쿠스틱 기타, 봉고, 탬버린, 브렛의 목소리 등으로 구성되었고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행한 작업은 마크 볼란이 특유의 사운드를 만든 방법론과 동일했다."고 밝혔다. 베이시스트 맷 오스먼은 "2집 녹음 후 프로듀서인 에드 불러와 밴드 멤버들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3집의 방향성이 정해지자 에드 불러와 우리들은 무척 즐겁게 앨범을 작업했다 "라고 회상했다.
3집 Coming Up은 발매 직후 150만장이 넘게 팔리고 앨범의 수록곡들 중 절반의 곡이 싱글커트 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했으나 버나드 버틀러가 있던 시기까지의 음악을 좋아하던 기존 팬들이 등을 돌리게 되면서 스웨이드의 팬층은 갈리게 된다. 앨범 발매 후 스웨이드는 1년간 월드 투어를 돌게 되는데 밴드는 인도, 태국, 필리핀, 중국 등 동양의 여러나라를 방문했으며 영국 밴드 사상 최초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물론 서양인의 입장에서) 처음 접한 동양의 신비로운 정서는 이 후 밴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23] 월드 투어 중 발매한 B-Side모음집인 Sci-fi-lullabies 또한 좋은 평가를 들었다. 더블 시디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디스크1에는 버나드 시절의 곡을 디스크2에는 버나드 탈퇴 후 작곡된 곡들을 실어 밴드의 음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앨범이다.
2.4. 밴드의 암흑기
Everything Will Flow (Head Music)
She's in Fashion (Head Music)
1999년 발매된 4집 Head Music은 사운드의 중심이 기타팝에서 일렉트로니카로 다시 바뀌었는데 이는 앨범 프로듀서의 교체와[24] 전작의 주요 작곡자였던 리차드 오크스보다 브렛 앤더슨과 닐 코들링의 비중이 두드러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웨이드가 처음 해체했을 때 브렛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밝힌바에 의하면 "4집 앨범에서 공식적으로 리차드가 앨범에서 작곡한 곡은 3곡인데 그마저도 Down이란 곡은 실질적으로 자신이 작곡했으나 '리차드 오크스가 3곡이상 작곡에 참여해야 한다.'는 레코드사와의 계약조건 때문에 리차드의 이름이 들어간 곡"이라고 한다. 4집 작업 당시 자신의 역할이 현저하게 적어진 리차드는 리허설 때 자신이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곡의 연주를 거부했으며 이 때문에 밴드에서 해고될 뻔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5집에 참여하게 된 알렉스 리가 거론되었다고 한다.[25] 또한 이 앨범은 스웨이드의 곡 중 유일하게 브렛이 작사에 참여하지 않은 곡(닐 코들링이 작사,작곡한 Elephant Man)이 들어있다.
4집 녹음시에 멤버들의 상태는 최악이었는데 크랙과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었던 브렛은 스튜디오에 그의 마약친구들을 불러 마약을 하며 지내고 닐은 투어 중 얻은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앓고 있었다. 브렛과 닐이 신시사이저로 전자 사운드를 실험하고 있을 때 달리 할일이 없던 다른 멤버들은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가곤 했다고한다. 브렛은 훗날 인터뷰에서 3집과 4집의 시기를 "버나드 없이도 밴드가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약에 빠진채로 몸부림치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Positivity (A New Morning)
이후 닐 코들링이 결국 만성피로증후군으로 탈퇴하고 브렛은 재활치료센터에 들어가게 되면서 밴드는 긴 공백기를 가지다가 2002년, 새로운 키보디스트로 알렉스 리를, 프로듀서로 더 스미스, 블러, 크랜베리스등의 히트 앨범을 프로듀스한 스티븐 스트릿을 영입하여 새 앨범 A New Morning을 발매한다. A New Morning은 기존보다 긍정적인 곡조의 곡들이 앨범을 가득 채웠으며 브렛 앤더슨 특유의 비음이 완전히 없어지고 작곡측인 측면에서 한 멤버가 주가 되어 작곡을 하지 않고 여러 멤버들의 곡을 배분하여 앨범에 싣는 등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앨범이었지만 이는 스웨이드의 아이덴티티가 사라진 평범한 팝 앨범이 돼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한다. 브렛 앤더슨은 이 앨범에 대해 "밴드가 최초로 마약에 의지하지 않고 만들어낸 앨범"이라는 평을 내렸다.
2.5. 밴드의 해체
2003년 역대 스웨이드의 싱글들을 모은 앨범 <Singles>와 밴드 공식 전기인 <Love and Poison>이 발매되었고 브렛 앤더슨은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스웨이드의 해체를 선언한다. 막판에 런던 현대미술연구소(ICA)에서 5일밤동안 한 공연이 꽤 인구에 회자되었다. 첫날밤은 1집 컨셉으로 1집곡 전부, 둘쨋날은 2집 컨셉으로 2집곡 전부, 셋째날은 3집. 이런식으로 전 앨범을 불렀으니 괜찮은 마무리였달까.
스웨이드 해체 후, 리차드 오크스는 Sean McGhee와 Artmagic이라는 프로젝트를 결성해서 EP 한장을 발매했다.
사이먼 길버트는 태국에서 소수성애자로만 구성된 그룹 Futon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닐 코들링과 멧 오스먼은 주로 세션으로 활동했으며 브렛 앤더슨의 솔로시절 라이브 투어를 같이 돌기도 하였다.
스웨이드 해체 후 브렛 앤더슨은 탈퇴한 전멤버 버나드 버틀러와 The Tears라는 그룹을 결성하였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앨범 한 장만을 내고 해체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연세대 대강당에서 내한공연을 가졌는데 브렛은 관객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솔로 활동 시기 다시 한번 내한하여 공연을 가졌고 2011년 스웨이드를 재결성 했을 때는 지산 락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참여하기도 하였다.[26] The Tears는 2006년 브렛의 솔로 활동과 버나드의 프로듀서로의 완전한 전업을 이유로 해체된다.[27] 이 밖에 활동이 중지된 이유로 거론되는 것은 투어 중 갑자기 브렛 앤더슨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브렛이 더 이상 투어를 돌기 싫어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버나드 버틀러는 한국에서 솔로로 깜짝 내한 공연을 펼친적이 있었다. 후지 록 페스티벌 행차로 일본에 가다가 비자 문제로 서울에서 하루 묵다가 스팽글이라는 클럽에 들르게 되었다. 거기서 스팽글 죽돌이 죽순이들과 카드게임 "shit head"를 했었는데, 버나드 버틀러가 카드게임에서 지면 다음날 공연하는 것으로 내기가 되었었다. 버나드 버틀러는 졌고, 그날 밤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지에 버나드 버틀러 공연 긴급 공지가 올라왔고, 그 다음날 스팽글에서 깜짝 공연을 하였다. PC 통신망을 타고 소문이 퍼져 약 200명이 모여 관람. 100명은 공연을 못보고 돌아가야만했다. 공연 전날 사람들 앞에서 닉 드레이크의 Nothern Sky를 연주했다고 한다. 공연 멤버 중 키보디스트는 전 Denim 의 멤버였다. 출처는 크르르르 위키
The Tears의 해체 후 브렛 앤더슨은 4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Leo Abrahams와 함께 작업한 3집과 4집은 메인 스타덤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평균 리뷰점수로 7점을 받는 등 나름 성공했다. 브랫의 솔로 활동시 스웨이드의 멤버였던 맷 오스먼과 닐 코들링이 각각 베이스와 키보드 세션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2.6. 재결성
결국, 2010년, 브렛 앤더슨은 버나드 버틀러를 제외한 3집 시절의 멤버들로 스웨이드를 재결성하여 투어를 시작했다. 새로운 베스트 앨범과 이전에 발매한 앨범의 디럭스 에디션 등도 새로 나왔다.
2011년 한국에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로 첫 내한을 했다. 마지막날 엄청난 폭우속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몰려 11년 지산락페의 최고 공연으로 꼽히고 있다. 브렛 앤더슨은 공연 시간내내 사방팔방 뛰어다녔고 'Beautiful Ones'에서는 귀여운 표정까지 지었다. 특히 'Saturday Night'에선 무대 밑으로 내려와 관객들과 소통했다. 팬들은 이 때가 스웨이드 최고의 내한이라고 꼽고 있다.
2012년 신보작업을 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고 러시아에서 열린 공연에서 처음으로 신곡들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앨범에 실릴 곡으로 정해진 곡은 Sabotage 한 곡이었다.) 브렛은 신작 앨범에 대해 "3집 Coming Up 앨범까지 프로듀스를 맡은 에드 불러가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앨범의 분위기는 예술가가 마약을 하고 만든 느낌의 앨범이고 2집과 3집의 중간적인 사운드" 라고 밝혔다. 또한 10년만에 컴백하여 앨범을 내는 밴드의 앨범이 아닌 데뷔앨범을 내는 신인밴드의 자세로 앨범을 제작했기에 지금까지 만든 앨범 중 가장 함들게 작업한 앨범이라고 한다.
It Starts and End With You (Bloodsports)
Hit Me (Bloodsports)
For The Strangers (Bloodsports)
2013년 2월 첫 싱글 <It Starts and End With You>을 발표하며 다시 활동을 재개한 스웨이드는 3월 18일 6집 <Bloodsports>를 발표했다.[28] 6집의 평가는 메타크리틱 82점으로 높은 편이다. 새로운 무엇은 없지만 기존 스웨이드가 선보였던 음악들을 맛깔나게 절충했다는 평이 대체적이다.
Night Thoughts 앨범 티저 트레일러
2015년 9월 24일 싱글 공개된 곡, Outsiders
Like Kids (Night Thoughts)
2016년, 7집 <Night Thoughts>를 발표하여 팬들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스웨이드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했던 <Bloodsports>의 기세를 이어갔다는 반응. 오는 2016년 8월 12일. 펜타포트 록페스티벌 내한을 확정했다
2016년 8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첫번째 날 헤드라이너로 등판하여, 화려한 무대매너와 훌륭한 공연으로 관객들을 열광하게 했다. 특히 공연 중 브렛은 전성기 시절의 마이크 돌리기를 선보이는 동시에 젖다 못해 찢어진 셔츠로 뇌쇄미를 폭발시키며 수 많은 관객들을 입덕시켰다.
The Blue Hour 앨범 티저 트레일러. 앨범 발매일은 2018년 9월 21일이며 프로듀서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스매싱 펌킨스, 나인 인치 네일스 등과의 작업으로 유명한 알란 모울더(Alan Moulder).
2018년 6월 4일 새 앨범 The Blue Hour의 첫 싱글 The Invisibles가 공개되었다.
Suede - Life Is Golden (Official Video) (가사 번역)
3. 디스코그라피
4. 여담
- 브렛 앤더슨(보컬), 리차드 오크스(기타), 닐 코들링(신디사이저) , 멧 오스먼(베이스), 사이먼 길버트(드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사이먼 길버트는 커밍아웃한 게이이다. 그의 경험은 브렛이 곡을 쓸때 도움이 되기도 했다.[29] 참고로 리차드 오크스를 제외한 밴드 구성원 전원이 채식주의자 및 골초인 것으로 유명하다.
-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와 1996년 영입된 키보디스트 닐 코들링은 서로 친척 관계이다.[30]
- 2019년 현재 기준 SNS를 하는 멤버는 맷 오스먼과 닐 코들링 뿐이다. 플랫폼은 인스타그램과 트위터.[31] 브렛 앤더슨도 트위터 계정이 있기는 하나, 개인이 아닌 소속사에서 주로 운영 중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reallybanderson 라는 트위터 계정은 브렛 앤더슨의 계정이 아닌 사칭 패러디 계정이다. 관련 기사
- 한때 애플 뮤직을 비롯한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1집부터 5집을 들을 수 없었으나, 현재는 풀렸다.
[1] 브렛 앤더슨이 10대 시절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 Emily에 대해 쓴 첫 자작곡.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2] 대학생 시절부터 브렛 앤더슨은 중성적인 스타일의 꽃미남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저스틴 프리쉬먼이 그를 봤을 때 첫인상도 "저 사람의 성별이 남성이라면 꽤 귀엽겠는걸."였다고. 참고로 브렛이 저스틴과 알게 됐을 때의 첫인상은 "말을 더듬는 언어장애를 갖고있나"였다고한다. 이후 브렛은 저스틴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전공을 도시계획과에서 그녀와 같은 건축과로 바꾼다.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3] 1980년대 초반 데뷔한 소피스틱 팝 밴드. 스미스랑 성향이 유사하며 브릿팝과 챔버팝에 큰 영향을 미쳤다.[4] 버나드 버틀러는 지금도 스미스가 세계 최고의 밴드이고 조니 마가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이며 작사력으로도 밥 딜런보다 모리세이가 한 수 위라고 주장한다(...).[5] 저스틴의 아버지는 2차세계전쟁 도중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서 모든 가족을 잃어버리고 난민아동들을 위한 기숙학교로 보내졌던 유대계 헝가리인이었다. 그는 후에 훌륭한 건축가가 되어서 earth-quake-proof이라는 재단을 설립했고 또 London에 있는 가장 유명한 명소들 중 하나인 Centrepoint 와 Canary Wharf 의 설계에 참여했다.(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6] 그 전까지는 드럼 머신을 사용하거나 세션 드러머들을 영입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밴드의 첫 데모를 녹음할 당시 드럼을 연주한 사람은 무려 더 스미스의 드러머였던 마이크 조이스.[7] Animal Nitrate 뮤비 초반에 나온 아파트가 바로 브렛이 살던 아파트이다.[8] 데이먼 알반은 엘라스티카 데뷔 앨범의 키보디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9] <Pantomime Horse>와 <Moving>은 같은날에 완성한 곡이라고 한다!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10]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11] 이 기록은 1년 뒤인 1994년 오아시스의 데뷔 앨범이 갱신했고 1년 뒤인 1995년 엘라스티카의 데뷔 앨범이 다시 갱신했다. [12] Stay Together는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뽑힐 만큼 명곡이지만 정작 버나드를 제외한 밴드 멤버들(특히 브렛)이 가장 싫어하는 곡이라고 한다. 밴드가 곡을 싫어하는 이유는 곡 자체보다는 곡을 녹음할 즈음부터 시작된 브렛과 버나드의 대립과 미국투어의 실패로 엉망으로 치닫고 있던 밴드 내의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참고로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와 베이시스트 멧 오스먼은 이 당시 밴드가 돌아가는 상황에 화가나서 녹음 중 여러번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반면 버나드는 이 곡을 당시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곡이라며 스웨이드의 곡 중 특히 좋아하는 곡이라고 호평했다. 다만,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에 회상에 의하면 당시 버나드는 (B-side를 포함해서) 브렛이 작사한 가사들의 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3] Dreams, Ode my Family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락밴드.[14]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크랜베리스는 1집이 영국에서 별 반응을 못받자 실망하고 밴드를 해체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웨이드의 오프닝 공연을 맡으면서 미국에서 인기를 얻게되고 이를 발판삼아 전세계적으로 성공한다. 2집은 아예 미국에서 녹음하기까지 했다.[15] 이 이름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아니, 그녀가 허가하지 않는 이상 유지될 수 밖에 없다.[16] 브렛이 가장 좋아하는 스웨이드의 곡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곡은 Dog Man Star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빠짐없이 밴드의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해당 곡의 작곡자인 버나드 버틀러는 오케스트레이션이 들어간 앨범 버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Dog Man Star 20주년 박스셋이 나오면서 원 버전이 공개되었다.[17] 원래 버나드는 이 곡을 25분 이상의 대곡으로 작곡하였고 앨범에 적어도 10분은 넘게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프로듀서 에드 불러는 앨범에 이 한 곡만 너무 돋보이게 만들 수는 없다며 길이를 반으로 짜르자고 했다고 한다. 또한, 버나드는 당시 어느 기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브렛을 "너무 게으른데다 락스타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있는 인간"이라며 비난했는데 하필이면 잡지의 발행일이 이 곡의 보컬 녹음을 하는 날과 겹쳐서 녹음날 아침 그 기사를 브렛이 보고 말았고 브렛은 버나드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심정으로 보컬을 녹음하였다고 한다. Dog Man Star 20주년 박스셋이 나오면서 원 버전이 공개되었다.[18] 버나드는 원래 그냥 편하게 드럼 머신을 사용하려 했으나 자신이 너무 독단적인 것 같아서 일부러 사이먼에게 비트를 녹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19] 같은 시기 크리스 토마스는 펄프에 고용되어 명작 Different Class 를 만들게 된다. 재밌는 이야기는 펄프의 초기 메이저 프로듀서가 스웨이드의 프로듀서 에드 불러 였다는 것. 크리스 토마스로 프로듀서가 교체된 이유 또한 "에드가 스웨이드만 신경쓰고 우리 밴드는 신경쓰지 않는데 차라리 비싼 프로듀서를 고용하면 프로듀서가 더 밴드의 음악에 신경쓰지 않을까?" 였다.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Different Class.[20] 당시 리차드는 버나드의 탈퇴 소식을 접한 뒤 스웨이드에게 자신의 데모를 보내면서 "나처럼 뛰어난 기타리스트를 뽑지 않는 이상 너희 밴드는 끝났어"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결과 리차드 오크스는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밴드의 새 기타리스트로 뽑힌다.[21] 최홍만이 입장할때 쓰기도 한 곡이며 그들의 노래 중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 이 곡의 데모 이름은 Dead Leg인데 이 이름의 유래는 베이시스트 멧 오스먼이 새로 합류한 기타리스트 리차드 오크스에게 "너 10위안에 들어갈 히트 싱글을 쓰지 못하면 다리 한 쪽 못쓰게 될줄알아"라고 협박한 것이라고 한다. [22] 닐과 브렛은 둘다 패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등 서로 통하는 면이 많았기에 만난지 얼마 안 돼서 서로 절친한 친구가 됐다고 한다.[23] 4집 앨범에 동양 풍의 곡조가 많이 삽입 되어있는 이유가 이 때문. 도가사상과 명상은 브렛 앤더슨이 마약을 끊는것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는 밴드 해체 후 동성애에 관대한 태국으로 이주하기까지 한다. 그는 태국에서 열린 성소수자 가수 오디션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24] 4집의 프로듀서는 뉴 오더의 앨범들을 프로듀싱한 스티븐 오스본이 맡았다.[25] Strangelove의 키보디스트이자 기타리스트. Coming Up 활동시에 브렛과 리차드가 Strangelove의 앨범에 코러스로 참여하여 알게되었다.[26] The Tears 내한공연의 분위기는 열광 그 자체였다. 공연 후 시작된 브렛과 버나드의 팬미팅에서는 브렛의 팬들 중 한명이 그 당시 브렛이 자주입고 다녔던 스타일과 비슷한 양복 한 벌을 맞춰서 선물하고 버나드의 팬들 중 한명은 버나드의 솔로앨범에 싸인을 받으러 앨범을 갖고 왔지만 주최측에 의해 압수되었다가 (The Tears는 스웨이드의 재결성이 아닌 새로운 밴드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팬미팅때 기존 스웨이드의 물품을 반입금지 시켰다.) 버나드가 그 앨범이 자신의 솔로앨범임을 알아차려서 무사히 사인을 받는 등 많은 해프닝이 있었다.[27] 90년대 후반 이후로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보다 프로듀서 활동의 비중이 높아졌던 버나드 버틀러는 2008년 이후 프로듀서로의 완전 전업을 선언했다. Duffy의 대박 데뷰앨범 Rockferry역시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다. 2002, 2003년 동안 리버틴즈의 싱글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피트 도허티가 영 상태가 안 좋던(..) 때라 버나드와 팀워크가 맞지 않아 도로 그만둔다. 이 때를 두고 버나드 버틀러는 후에 말하길, 자신과 브렛 앤더슨 사이의 불화는 리버틴즈 내의 불화와 그 막장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였다. 애초에 완벽주의자 버나드와 즉흥 연주파 피트 도허티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28] BDSM행위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29] 데뷔 초 자신을 "남자 경험이 없는 양성애자"라고 말하면서 중성적인 이미지로 유명해진 브렛은 2013년 인터뷰에서 2011년에 자연주의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디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으며 현재 애가 둘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뮤지션들의 사생활에 대하여 대중들이 관심을 갖는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30] 정확히는 사촌지간이다.[31] 참고로 이전 멤버인 버나드 버틀러도 인스타그램 및 트위터 계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