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현

 


'''역임 지위'''
[ 펼치기 · 접기 ]












'''조선귀족 자작'''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권중현
權重顯 | Gwon Jung-hyeon'''
'''이름'''
권중현 (權重顯)
'''본명'''
재형 (在衡)
'''출생'''
1854년 (철종 5) 11월 27일[1]
충청북도 영동군
'''사망'''
1934년 3월 19일 (향년 79세)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직업'''
관료, 정치가, 군인
'''이명'''
치옥 (致玉)
'''호'''
경농 (經農)
'''본관'''
안동 권씨 (安東)[2]
'''정당'''
'''작위'''
조선귀족 자작
'''약력'''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군부대신
중추원#s-4 고문
'''비고'''
'''을사오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2.1. 사후
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대한제국관료,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안동(安東), 호는 경농(經農)이며 권율의 9대손인 권홍섭(權弘燮)의 차남. 본래 이름은 권재형(權在衡)이었지만 1903년 5월 권중현(權重顯)으로 개명하였다.
구한 말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공신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고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개화파 관료로 갑오개혁에 참여하였고 2년 후에는 독립협회에 참여하였으며 이후에는 친일 행보를 보이다 1905년 농상공부대신(현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부장관)으로서 을사조약에 동의하며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매국노로 비난받으며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당하게 된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3.1 운동이 일어난 뒤 작위 반납 의사를 밝혔다. 1934년 사망한 이후로 을사오적이자 민족반역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으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 생애


1854년 10월 8일 충청도 영동에서 출생했다. 권중현의 가계는 공신 집안이었지만 그의 6대조인 상기(尙琦) 대에 들어와서는 이렇다 할 관직을 배출한 조상이 없었다. 다만 그의 조부인 권경호(權景祜)가 1834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을 뿐이었는데 권중현이 태어난 이후인 1861년 비로소 아버지 권홍섭이 무과에 급제하여 음서참봉을 시작으로 1877년 오위장에까지 올랐다. 이에 권중현 또한 공신 가문의 후손인 점과 아버지가 벼슬길을 먼저 닦아놓은 덕분에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883년 11월 동래감리서 서기관에 임명되었고 1885년 10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가 되었다. 1888년 정부의 명으로 일본을 시찰했다. 1890년 2월 전보국 주사로 임명되었고 1891년 4월 인천항 방판(幫辦)을 겸했다. 얼마 후 주차(駐箚) 일본서기관에 임명되었고 그해 9월 주차 일본판사대신으로 승진했다. 1891년 11월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주일특명전권대사와 교섭하여 1892년 6월 도쿄에서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93년 5월 인천항 방판과 주차 일본판사대신을 사임했다.
1894년 갑오개혁을 주도한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896년 독립협회 발기인 및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899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초명은 재형(在衡)이었는데 1903년 5월 안동 권씨 경중대종중보소[3]에서 31세에서 60세까지의 대동 항렬을 제정하는데에 참여하면서 본인의 이름도 항렬자에 맞게 '중현(重顯)'으로 개명하였다.[4] 1904년 러일전쟁 직후 한국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는 영접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중국 뤼순 등지에 특파되어 일본군을 위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당시에는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는데 농상공부대신은 현재의 농림축산식품부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해당되는 직위였다. 을사조약 때 학부대신 이완용의 조약 체결에 '대일본제국이 조선의 백성들을 먹여살리고 입혀주신다면야 기꺼이 찬성할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억지 논리로 체결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을사오적(乙巳五賊)'에 합류하게 되어서 민족 반역자가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다른 을사오적들과 함께 조선 의사 및 민중들의 습격을 받아서 출퇴근 때도 일본군의 호위하에 돌아다닐 정도였으며 죽을 때까지 암살범의 습격을 받아 도망치면서 목숨을 연명하였다.
이후로도 친일 행적을 계속하게 되면서 1910년 한일병합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재곤과 작위 반납 의사를 밝혔지만 일본이 거절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추원 고문,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내다가 1934년 3월 22일 향년 79세에 자연사사망했는데 을사오적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 살았다.

2.1. 사후


'''1916년 8월 28일'''[출처]
사후 권중현의 자작 작위는 권태환에게 승작되었다.
광복 이후 친일인명사전에 아들인 권태환과 함께 등재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권중현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1960년 한 잡지에 따르면, 권중현의 손자가 고미술협회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3. 둘러보기





[1] 음력 10월 8일[2] 같은 을사오적이완용과 달리 족보에서 영구제명되기는 커녕 '''매국행적은 은폐된 채 자랑스러운 현조로 잘도 미화되어''' 족보에 등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과 링크다. (#사진1)(#사진2)(#출처) [3] 京中大宗中譜所. 서울 안에 있는 종친회라고 생각하면 된다.[4] 대동 항렬을 제정하는데 참여했을 정도면 권중현의 집안인 안동 권씨 안에서도 가세가 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