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 사건

 


黃嗣永 帛書 事件
1. 개요
2. 황사영의 백서 작성
3. 백서의 내용과 발각
4. 후폭풍
5. 현대의 평가
5.1. 오해
6. 후일담
7. 관련 작품


1. 개요


1801년(순조 1년)에 황사영 알렉시오가 천주교 박해를 막기 위해 외세의 군대를 끌어들여 정부를 뒤집으려는 역적 행위를 하려다 발각된 사건.

2. 황사영의 백서 작성


조선에서 가톨릭을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제천(堤川) 배론(排論:舟論)의 산 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겼다. 황사영이 숨었던 굴의 사진
황사영은 굴 속에서 중국 북경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편지를 썼다. 2자 가량 되는 명주천에 1만 3,311자를 썼다. 명주천에 썼기에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걸 白書로 잘못 알아 '명반[1]으로 쓴 보이지 않는 편지'를 보냈다고 쓰는 책도 있다.
먼저 당시 조선의 가톨릭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활동, 주 신부의 자수와 순교 사실, 신유박해와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간단한 전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조선 국내의 실정과 포교의 방안을 제안했다.

3. 백서의 내용과 발각


백서는 앞부분에서 박해의 전말을 알리면서 초토화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전하며, 신자 하나하나의 상황을 전한다. 그리고 황사영은 청국이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해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주기를 요청했고, 더 나아가서는 청국의 감호(監護)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기를 희망했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했다.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 6만명을 동원해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협박해주기를 희망했다.

本國方在危疑乖亂之際 無論某事 皇上有命 必不敢不從

이 나라는 지금 사방이 위태롭고 어지러운 시기이므로 어떤 일이든지 황제의 명령만 있으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乘此之時 敎宗致書皇上曰 吾欲傳敎朝鮮 而聞其國 屬在中朝 不通外國 故以此相請 願階下 勅該國 使之容接西士 當敎之以忠敬之道 盡忠於皇朝 以報階下之德 如是懇請 則皇上素知西士之忠謹 可望其允從

이러한 때를 타서 교황께서 중국 황제께 글을 보내 "내가 조선에 성교를 전하고자 하는데 들으니 그 나라는 중국에 속해 있고 다른 나라와는 교류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이렇게 청합니다. 중국 황제폐하께서는 조선에 특별히 따로 칙령을 내리셔서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여 마땅히 충성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중국 황조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하게 하십시오."하고 이와 같이 간청하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성되고 근실함을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此亦天府之國 而李氏微弱 不絶如縷 女君臨朝 强臣弄權 政事乖亂 民情嗟怨 誠以此時命爲內服 混其衣服 通其出入 屬之於寧古塔 以廣皇家根本之地

이 또한 모든 생산물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이씨 왕조가 미약하여 겨우 실오라기 같이 끊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대왕대비가 섭정을 하여 세력 있는 신하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므로 정사가 뒤틀리고 혼란하여 백성들은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진실로 이러한 때에 속국이 될 것을 명하여 그 옷을 같이 입게 하고 왕래를 터놓아 '''조선을 영고탑에[2]

소속시켜 황조의 근본이 되는 땅을 넓히십시오.'''

開撫按司於安州平壤之間 命親王監護其國 厚樹恩德 固結人心 天下有  割據遼瀋以東 保其巖阻 生聚敎訓 乘 而動 則此固萬世之基也

안주와 평양 사이에는 안무하는 관청을 개설하고 왕에게 친히 명령하여 그 나라를 살피고 보호하게 하십시오. 은덕을 후히 베풀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굳게 뭉치게 하면 천하에 변란이 있더라도 요양과 심양의 동쪽 지역을 근거로 삼으면, 그 사이가 멀고 험난함으로 보호되고 장정을 모아 훈련시켰다가 틈이 생기는 것을 보아 움직이면 이것이 만대의 기초를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又聞其國王年少 未及聚妃 若取一宗室女 名爲公主 嫁爲國后 則今王爲駙馬 後王爲外孫 自當盡忠於皇朝 亦足以牽制蒙古

또 들으니 조선의 왕은 나이가 어려서 아직 왕비를 맞이하지 아니하였다 하니 '''만약 중국 종실의 한 여자를 공주로 삼아 시집보내서 왕후가 되게 하면 지금의 왕은 부마가 될 것이고, 그 다음 왕은 외손이 되므로 스스로 마땅히 황조에 충성을 다할 것이고, 또한 넉넉히 몽고를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

現今國勢危  決難久支 若爲內服 則奸臣之  自息 李氏之聲勢倍勝 奚但聖敎之安 亦是國家之福 請勿以爲迂 而 採納焉

현재 이 나라는 형세가 크게 위급하여 결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데 만약 중국의 속국이 되면 간사한 신하들의 눈흘김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이씨 왕조의 명성과 위세는 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다만 성교의 안정만을 위함이겠습니까? 이것은 나라의 복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현실에 맞지 않아 사정에 어두운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가려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去年諭帖 獲承數年後差送大舶之命 今也則時勢已變 待然而來 則難望有成 此有一策 可使朝鮮人 奈何不得 束手從命 而但行之頗難 雖然請細陳之

지난해 가르침을 주신 편지에 몇 년 후에는 큰 배를 보내겠다는 분부는 받았습니다마는 지금은 형세가 많이 달라져서 무턱대고 와서는 성공을 바라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한 계책이 있으므로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어찌할 도리 없이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실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나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本國兵力 本來孱弱 爲萬國 末 而 今昇平二百年 民不知兵 上無長君 下無良臣 脫有不幸 土崩瓦解 可立而待也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가냘프고 약해서 모든 나라 가운데 제일 끝인데다가 이제 태평한 세월을 2백년간이나 계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위로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得海舶數百  精兵五六萬 多載大砲等利害之兵器 兼帶能文解事之中士三四人 直抵海濱 致書國王曰 吾等卽西洋傳敎舶也 非爲子女玉帛而來 受命于敎宗 要救此一方生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전선 수백 척과 정병 5,6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서너 명을 데리고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貴國肯容一介傳敎之士 則吾無多求 必不放一丸一矢 必不動一塵一草 永結和好 鼓舞而去  不納天主之使 則當奉行主罰 死不旋踵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한 방의 탄환이나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고,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우호 조약만 맺고는 북 치고 춤추며 돌아갈 것이오. 그러나 만약 천주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땅히 주님이 주시는 벌을 받들어 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王欲納一人 而免全國之罰乎 抑欲喪全國 而不納一人乎 王請擇之 天主聖敎 以忠孝慈愛爲工務 通國欽崇 則實王國無疆之福 吾無利焉 王請勿疑

왕은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 들여 온 나라에 내리는 벌을 면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나라 전체를 잃더라도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자 하십니까?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천주님의 성교는 충효와 자애를 가장 힘쓰는 일로 삼고 있으므로 온 나라가 흠모하고 공경하면 실로 이 왕국의 무한한 복이 될 것이지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청컨대 왕은 의심치 마십시오."합니다.

更將太西諸國 欽崇眞主 久安長治之效 及東洋各邦容接西士 有益無害之事 反覆曉諭 則必然全國震駭 不敢不從 舶數人數 能如所說則大善 若力不及則數十 五六千人 亦可用矣

그리고 또한 서양 여러 나라가 진실 되게 주님을 높이 공경하여 오래 편안하고 길이 다스려진 것을 본받아 동양 여러 나라도 서양 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들이는 것이 매우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해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해서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배와 사람의 수가 능히 말씀드린 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마는 만약 힘이 모자라면 배 수십 척에 5,6천명만 되어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

本國十年以來 致命者甚多 至於聖敎之司鐸 國家之重臣 亦皆束手就死 惡輩雖勅加以逆賊之名 實不得絲毫不忠之  良善之表 已孚於人心矣

이 나라에서 십 년 이래로 순교한 이가 매우 많아서 심지어 성교의 신부와 국가의 중신들까지도 꼼짝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성교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비록 억지로 역적의 죄목을 뒤집어씌웠지마는 실은 털끝만한 불충의 증거도 잡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어질고 착한 태도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미덥고 진실함을 주고 있습니다.

若本國敎友 鼓 爲難 則實是壞表樣 太西則乃聖敎根本之地 二千年來 傳敎萬國 莫不歸化 而獨此彈丸東土 不但不卽順命 反來梗化 殘害聖敎 戮殺神司

만약 이 나라의 교우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난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교의 진실된 표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서양은 곧 성교 근본 되는 땅으로서 2천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해져서 귀화하지 아니한 곳이 없는데 홀로 이 탄알 만한 이의 나라만이 다만 천주님의 명에 순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가시나무가 되어 성교를 잔혹하게 해치고 형벌로 성직자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爲此東洋二百年來所無之事 興師問罪 有何不可 據耶蘇聖訓 則不容傳敎之罪 更重於索多瑪惡本辣矣 雖殄滅此邦 亦無害於聖敎之表 此不過大張聲勢 以納傳敎而已

이러한 짓은 동양에서 2백년 이래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 것이 무엇이 옳지 아니하겠습니까?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치심에 의거하면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죄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도 무겁다고 하였으니 비록 이 나라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인데 다만 지금의 이 계획은 성세를 크게 벌여서 전교를 받아들이게 함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청에 대한 속국화 혹은 서양 군대에 의한 협박을 추진한 셈인데, 당연히 이는 반란이다. 세자 책봉이나 후계 과정에서의 갈등으로도 역모가 성립되던 전제군주제인 조선에서, 현대적 의미의 외환의 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으니 정말 엄청난 일이다. 이러한 백서를 가지고 청나라로 가려던 황심(토마스)[3]은 검문에서 걸리고 말았고,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4]
백서 자체는 의금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25년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입수해 교황에게 보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문 보기(위키문헌), [현재 삭제됨]

4. 후폭풍


정순왕후노론 벽파는 다시 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이전까지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은 '문화 충격'+'기득권 지키기'의 성격이었다. 따라서 정순왕후 본인도 피에 굶주린 악녀가 아닌 이상 남인 및 노론 시파를 숙청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뒤엔 적당한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천주교=외세를 끌어들이는 반역자들'이란 인식이 박히고 말았다. 이는 정순왕후가 박해를 끝내고 싶었다고 가정해도 불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조선은 신앙의 자유가 생기기커녕, 더욱 거세게 가톨릭을 탄압하게 만들었으며 지방 유생들을 비롯한 지방 유지와 학자들에게도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크게 심어줬을 뿐이었다. 즉, 기존의 천주교 박해 원인에 '외래 세력에 대한 적개심'까지 합해진 것이다. 조선인을 천시하고 인종차별하기로 유명한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조차도 "조선 정부가 엄벌에 처한 걸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연히 대역죄인이 되어버린 황사영은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을 갔고[5], 황사영의 어머니는 관비가 돼 거제도로 갔으며,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은 아내 정명련[6] 마리아가 제주도로 귀양올 때 추자도에 두고 떠나면서 노비가 되는 걸 면했다. 그 뒤 오씨 성을 쓰는 가족에게 발견돼 보호를 받으며 자라면서 추자도엔 황사영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오씨 할아버지가 황사영의 아들을 발견해 거둬 키운 것으로, 지금도 오씨와 황씨는 서로 형제라며 통혼을 안 한다고 한다.
이 백서로 인해 천주교 박해는 더욱 거세졌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오페르트 도굴사건, 병인양요신미양요로 인해 조선 지배층에겐 내통세력으로 낙인이 찍혀 본격적인 개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천주교도들은 외세와 내통하는 세력으로 지목돼 탄압받아야 했다.

5. 현대의 평가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 샤를르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대사전>, 황사영 항목 中

황사영은 외국인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낭만적인 오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사영의 경우 살아 생전 접한 사제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밖에 없었을 것이고, 주문모 신부는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자들의 죽음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스스로 자수할 정도로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또한 황사영이 목격했던 신유박해가 비록 이후에 벌어질 병인박해보단 희생자 수가 적다고 할지언정, 성별이나 신분을 안 따지고 300명을 죽였단 점에서 충분히 거대한 박해다. 그전까지 가장 큰 옥사에 속하는 영조 31년의 옥사만 해도 죽은 사람은 200여 명, 그래도 그들은 양반계층이 주다. 신분과 남녀를 안 가리고 이정도 죽은 일은 전례가 없다시피[7] 했다.
황사영의 방안은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이기 짝이 없어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당시는 청나라 황실 자체부터가 천주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으며, 청은 조선을 자국의 헤게모니 권역으로 보고 있었는데 서양 국가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협박하는 걸 방관할 리도 없다.
전쟁 없이 조정이 청에 복종해 조선이 속국화된다고 해도, 속국의 문제는 단지 '조정의 정권 교체'에만 해당하지 않으며, 조선인 전체에게 부정적 영향이 갈 수 있다. 그리고 서양 군대를 통한 무력시위란 방안도 현실성이 없다. 황사영은 "동양 여러 나라도 서양 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들이는 것이 매우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해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해서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서양 군대가 무력시위를 하면 조선 조정이 '당연히' 선교사를 받을 것이니 무력 충돌이 미미하리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8] 그러나 당시 서구는 황사영이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세계는 아니었으며, 조선이 가톨릭을 허용한다고 한들 제국주의 야심이 있던 서구 국가들이 '무력시위만 하고' 물러날 가능성은 적었다. 더군다나 당대 열강 중 가장 강력한 가톨릭 국가라 할 수 있는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 때문에 교황청과 관계가 틀어진 상태였고 말이다.[9] 수십 년 후 얘기지만 베트남은 가톨릭 박해 문제로 인해 프랑스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가 됐다. 황사영의 주장대로 갔다면 조선은 프랑스(혹은 다른 가톨릭 국가)의 식민지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수로 끝나서 망정이지 구체화가 됐다면 지금의 을사오적 대신 황사영이 매국노로 기억되고 그 황사영으로 인해 강제된 가톨릭 또한 지금의 일제의 잔재처럼 적대시되어 철저히 쓸려나갔을 것이다. 미수로 끝나서 차라리 사람들에게도 가톨릭에게도 다행이었다고 할만하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선 비판을 받는다.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추진 중인 124위 시복시성에 황사영 알렉시오, 그리고 황사영을 도왔던 황심 토마스, 김한빈 베드로 등은 결국 최종 시복시성 대상자에서 제외됐다. 이유는 "황사영이 순교자인 건 확실하지만 교회 밖, 즉 국가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행위를 했기에 제외했다"라고. 물론 2차 시복시성 명단엔 남아있고 신자들도 그를 순교자로 기리면서 그의 무덤과 동상, 기념비 등의 기념물에 순례하고 있지만, 이는 황사영이 옳은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순교한 것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황사영에 대한 온정적인 의견을 거론한다고 해도, "어쩌다 그런 상황으로 몰렸는가"에 대한 온정적 의견이 있는 것이지 "황사영은 옳은 선택을 했다"란 의견은 아니다. '''국가보다 신앙이 소중하다'''는 것과, '''신앙을 위한 군사적 개입은 정당하다'''는 건 다른 명제이다. 특히 한국 가톨릭 입장에선 황사영으로 인해 '외세에 대한 경계와 적개심'이 가톨릭 박해에 섞여버렸다는 게 난감하다.[10]
아이러니하게도 황사영 본인은 자신의 행위를 반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성교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비록 억지로 역적의 죄목을 뒤집어씌웠지마는 실은 털끝만한 불충의 증거도 잡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어질고 착한 태도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미덥고 진실함을 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나라의 교우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난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교의 진실된 표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 발언에서 보듯, 황사영은 조선인 신자들이 털끝만한 불충도 저지르지 않았고 난을 일으킨 것도 아니며 오히려 난은 가톨릭의 진실된 표양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면 "이씨 왕조의 명성과 위세는 배가 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도 영해에 낯선 군함 1척이라도 갑자기 오면 긴장해야 할 처지에[11] 전혀 못본 외세바로 앞에 있다 해도 일반 백성들에겐 먼나라가 온다고 하면 의도가 어쨌든 간에 긴장할 건 불 보듯 뻔하고 무력시위라도 한다면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건 뻔한 일. 당연히 이들은 '침략자'로 인식될 것이고 그렇다면 조정의 위신이 서려면 이들과 싸워 이기는 것뿐이다.[12]
더군다나 일개 개인의 편지가 당장은 힘도 없고 프랑스가 당시에 혼란기라고 해도 편지가 무사히 도착해 시간이 흘러 혼란기가 끝나면, 서양의 제국주의 열풍 시대 때 편지를 발견함으로서 조선으로 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즉, 프랑스 사람들이 이 편지를 읽으면 "아! 조선에선 우리의 지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구나?"라며 침략 구실을 만들게 되어버린다. 당장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화할 때 내세운 핑계가 자국 선교사가 포교하다가 사형당한 것이었고, 청을 침략할 때 영국 원정군에 끼어든 명분이 자국 선교사가 살해된 것이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침략 청원 백서가 발견되면 그야말로 대놓고 침략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상황이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은 믿음 하나 때문에 앞뒤 생각 안 하고 행동한 광신도인 셈이다. 이 편지를 뒤늦게 안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서양 가톨릭 신자 및 선교사들도 기겁할 정도면 이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행동이었는지 알 수 있다.
2002년,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가 공저한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 박노자는 "황사영이 지키려 한 것은 보편적 정의"라며[13] 조선 천주교 신자를 위해 움직일 '외세'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황사영은 천주교를 세계 보편진리로 여겼기에 요즘으로 치면 UN에 탄원한 것이라고 온정적으로 해석했지만, 허동현은 신념을 위해 또 다른 폭력을 부른 건 잘못이라며 이에 대해 비판했다[14]
요약하면 믿음에 너무 심취하여 편협된 시야를 가짐으로서 잘못된 길을 선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좋게 말하면 판단력 부족.[15]

5.1. 오해


다만 황사영에 대한 비판이 워낙 거세다 보니, 백서 사건 이전엔 처형하더라도 양반 남성에게만 집행했고 여성이나 평민 이하의 백성에겐 관대했는데 황사영 때문에 더 거세졌다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백서 사건 이전에 있었던 신유박해에서도 양반만 죽였던 건 아니다. 이는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문서만 잠깐 훑어보아도 알 수 있으며, 양반만 죽였다거나 하는 건 근거 없는 오해다. 신유박해까지의 순교자들 중 양반 남성들이 있지만, 그것은 양반 남성'도' 죽인 것이지 양반 남성'만' 죽인 게 아니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든다면, 음력 8월 26일 황심을 만나 황사영은 박해의 경과와 교회의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 주교에게 발송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여성만 거론하더라도, 그 전인 음력 5월 24일에 이미 조정은 강완숙 골룸바, 강경복 수산나,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한신애 아가타를 참수했다. 그리고 참수 이틀 후엔 또 윤점혜 아가타, 정순매 바르바라를 처형했다. 즉 백서 사건 때문에 여성 등에게도 박해가 확대됐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실관계가 잘못된 것이다.
다만 주 타깃이 양반 남성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박해의 처음 목적은 반대파 탄압으로 남인을 탄압하기 위해 그들이 많이 믿던 천주교를 금지한 거니까. 물론 당연히 천주교가 금지니까 천주교를 믿는 일반인 남녀를 안 가리고 처벌받은 건 사실이지만...

6. 후일담


후에 황사영과는 인척인 정하상[16] 바오로가 천주교를 옹호하기 위해 상재상서란 책을 썼는데, 여기서도 황사영은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니라며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황사영의 후손이 남아있지만, 그의 가문은 황사영에 대해 그다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고 감추고 싶어한다고 한다. 황사영 4대째 되는 손자가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의 아들인 황사영의 5대손은 도쿄에서 외국어 학원 원장으로 지내다가 사망해 일본에도 황사영의 후손이 살고 있다.

7. 관련 작품


  • 1980년대 문화방송에서 방영한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선 백서를 나무토막 사이에 넣고 황심이 나무꾼으로 변장해 지게로 나무토막을 가득 싣고 검문을 통과하던 도중에 수레와 부딪히면서 넘어져 수문장이 우연히 발견해 들통나는 것으로 연출됐다. 결말은 당연히 사망. 드라마에선 종교상으로 그런 것이란 말을 하며 모진고문을 받는다. 당시 김조순을 연기한 연기자가 "가소로운 놈,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그딴 사교에 대한 믿음이나 지껄이느냐. 천하에 둘도 없는 역당에겐 거열이 가장 어울린다!" 라고 한다.


[1] 명반을 물에 풀어 천에 글을 쓰면, 마른 상태에선 그냥 천으로 보이지만 천을 물에 담그면 글씨가 보인다고 한다.[2] 만주 신화에 따른 만주족의 발생 근거지, 중국 길림성 영안현[3] 황심은 1796년에 서양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유항검 등이 시도했던 대박청래운동 때 밀사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이땐 1801년과 달리 서신을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했지만 구베아 주교는 요청을 기각했다. 그리고 유항검도 신유박해 때 가족과 함께 체포돼 옥살이하다 백서 사건에 연루돼 처형된다.[4] 게다가 당시 청나라가경제의 치세였는데, 이 시기 청나라는 조선, 일본처럼 천주교를 박해하던 상황이었다.[5] 역모사건 시 백부, 숙부같은 직계가 아닌 경우엔 유형 3000리에 처했다.[6] "정난주"라고도 한다.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이다.[7] 조선 초기의 왕씨 몰살이 있었기에 아예 없진 않았다.[8] 실제로도 수십 년 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조선은 서양의 힘을 느끼게 된다. 비록 겉으론 깨닫지 못한 척했지만 적어도 조선 조정에서만큼은 수뢰포나 화륜철선 개발 등으로 서양에 맞설 무기를 개발하려 시도했고, 그걸로도 안된다는 판단이 서자 대원군이 물러난 뒤 결국 개항하게 된다.[9] 황사영 백서가 작성된 당해인 1801년에는 그나마 정교협약으로 인해 공포정치 시절보단 관계가 호전되어 있었지만.[10] 일본도 시마바라의 난 이후에 가톨릭이 '반정부 세력'이란 인식이 제대로 박혀 혹독한 크리스트교 탄압의 계기가 됐다지만, 시마바라의 난은 단순히 키리시탄에 대한 탄압만이 아니라 당시 다이묘들의 과도한 징세와 학정에 대한 반발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종교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일종의 '민란(잇키)'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많다. 당장 키리시탄을 싫어하던 낭인들조차 대거 가세한 반란이었다. 그래서 막부도 기독교 반란이라기보다는 단순 민란으로 해석하여 다이묘들도 처벌했다. 기독교 탄압은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걸 그대로 했을 뿐이다.[11] 일반 어선이라 할지라도 어선임이 확인되기 전까진 경계해야 한다. 그게 진짜 어부들이 탔는지 아니면 어부를 가장한 간첩이 탔는진 확인해보기 전엔 모른다.[12] 모가디슈 전투만 봐도 소말리아 사람들은 명백하게 좋은 의도를 지닌 미군이 아닌, 시시때때로 폭정을 일삼는 현지 군벌들의 손을 들어줬다. 사람은 같은 폭력이라면 그래도 살기 위해 지배층 쪽 폭력의 편에 서거나 침묵하게 되어있다. 이방인은 믿기도 어렵고, 설령 믿었는데 미적지근하게 굴다 떠나면 손들어준 사람들은 매국노가 되니까. 아프간에서도 탈레반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 취급이지만, 미군은 어중간하게 굴다가 늦어도 수년내에 떠날 게 분명하고, 남은 아프간 사람들이 탈레반에게 학대당할 게 뻔한지라 그냥 침묵하거나 탈레반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다.[13] 오늘날 몇몇 독재국가의 인권탄압에 대해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것과 비슷하게 해석해볼 수 있다. [14] 생각해보면 허동현의 주장이 더 맞을 수도 있다. 당시엔 국제 기구같은 게 전무했고 그 당시에 이성적으로 행동하자면 오히려 조정에 목숨걸고 탄원하거나 아니면 타협해서 더 이상 박해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옳다. 하지만 이 인물은 그저 믿음 하나만 살리려고 다른 이들을 생각도 안 했기에 그렇다. 이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베트남과 알제리가 일제강점기 당시의 한반도처럼 고통받다가 20세기 중반에 대규모 전쟁까지 치르고 난 후에야 간신히 독립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그리고 프랑스가 조선을 속국화하는 도중에 평소 이들과 사이가 나쁜 영국이나 프로이센, 혹은 다른 열강들도 조선을 먹으려고 달려든다면 조선은 그날로 열강들 싸움에 새우 등 터진 신세가 돼 지옥문이 열릴 게 자명하다.[15] 이 판단력이라는 것이 가톨릭 신학교내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아동 성추행범 등 도덕적으로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통과하는 사람은 대개 한국 정도의 카톨릭 신학과정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되는 건 판단력 부족으로 교리 해석을 잘못하거나 황사영처럼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을 해서 교회를 말아먹거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제나 신학생에 대해 '판단력 부족'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심한 비난 중 하나라고 한다.[16] 이 사람은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천주교 신자였다. 기해박해 때 어머니 유 세실리아,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순교했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됐다(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 가롤로도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됐다(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한편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형의 딸과 결혼했으므로, 정약용의 집안과 인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