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베르투 카를루스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2002 · 2003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2002 · 2003 · 2005[21]
1996-97 · 1997-98 · 1990-00 · 2000-01 · 2001-02· 2002-03· 2003-04



'''1997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호나우두
2위
'''호베르투 카를루스'''
3위
데니스 베르캄프
지네딘 지단
<color=#373a3c> '''2002 Ballond'or'''
수상
호나우두
2위
'''호베르투 카를루스'''
3위
올리버 칸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2002'''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기타 정보'''




[image]
'''라리가 앰버서더'''
''' 이름 '''
'''호베르투 카를루스'''
'''Roberto Carlos'''
''' 본명 '''
호베르투 카를루스 다시우바[1] 호샤
Roberto Carlos da Silva Rocha
''' 출생 '''
1973년 4월 10일 (50세) /
브라질 상파울루
''' 국적 '''
브라질
''' 신체 '''
168cm | 체중 70kg
''' 주발 '''
왼발
''' 직업 '''
축구선수 (레프트백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우니앙 상 조앙 (1991~1993)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92 / 임대)
SE 파우메이라스 (1993~1995)
인테르나치오날레 (1995~1996)
'''레알 마드리드 CF (1996~2007)'''
페네르바흐체 SK (2007~2009)
SC 코린치안스 (2010~2011)
FC 안지 마하치칼라 (2011~2012)
델리 다이나모스 (2015~2016)
''' 감독 '''
FC 안지 마하치칼라 (2012 / 수석코치)
시바스스포르 (2013~2014)
아키사르 벨레디예스포르 (2015)
델리 다이나모스 (2015~2016)
''' 기타 '''
라리가 앰버서더 (2016~ )
''' 국가대표 '''
125경기 11골 (브라질 / 1992~2006)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 별명 '''
악마의 왼발, 로켓 런처
''' SNS '''


1. 소개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평가
5. 지도자 경력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기타

[clearfix]

1. 소개


브라질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이자 라리가 앰버서더. 선수 시절 포지션은 레프트백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라리가 4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을 비롯해 수많은 우승을 이끌었고,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월드컵 1회 우승, 1회 준우승 및 코파 아메리카 2회 우승을 차지하고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 2위에 오르는 등 어마어마한 경력을 가진 선수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브라질 세리 A


선수생활 초기에는 브라질에서 성장했고 1995년 유럽에서 그의 활약에 관심을 보였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가 잽싸게 데려갔다.

2.1.2. 인테르


그는 비첸차와의 경기에서 신고식을 치러 27미터 프리킥으로 1-0 결승골을 넣었다. 그러나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의 카를로스는 부진했는데, 소속 구단은 세리에 A를 7위로 마무리했다. 또한 인테르에서 주전 레프트백으로 활동했으나 불완전한 수비로 굳건한 입지는 아니였다.
인테르에서 주전 레프트백으로 활동했으나 불완전한 한 시즌만 뛰고 인테르가 이반 사모라노를 영입하기 위해 카를로스+현금으로 트레이드가 성립되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2]
이후 2005년,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로이 호지슨 당시 인테르나치오날레 감독이 그를 측면 공격수로 기용하려 했지만, 카를루스는 좌측 수비수로 계속 뛰기 원했다고 밝혔다. 카를루스는 마시모 모라티 인테르나치오날레 구단주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살펴봤지만 해결책이 떠나는 것 밖에는 없다"라고 말을 건냈다. 본인 말에 따르면 윙어로 뛰면서 7경기 7골을 기록했다고 한다.

2.1.3. 레알 마드리드


[image]
카를루스는 1996년에 시즌이 종료된 후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해 등번호 3번을 받았다.
레알로 이적 하자마자 주전 레프트백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철강왕의 모습을 보여 한 시즌 45경기 이상씩 기용되었다. 1998년 2월에는 테네리페와의 코파 델 레이 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왼발로 경기장 끄트머리에서 감겨 돌아가는 슛으로 골을 넣었는데, 이는 "불가능한 골"로 묘사될 정도로 엄청난 득점이었다. 또한 카를루스가 이적한 후에 레알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다시 강자의 모습을 보여 97-98,99-00,01-02시즌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카를루스는 이적 첫 시즌인 1996-97시즌과 2000-01시즌에 라리가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근데 이때 레알마드리드는 리그 우승 시즌에는 챔스에서 부진하고, 챔스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면 리그 성적이 다소 아쉬운 등의 리그-챔스 반비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2002-03시즌에는 호나우두가 영입되며 브라질리언끼리 친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라리가 최종전에서 마드리드는 레알 소시에다드를 제치고 29번째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아틀레틱 빌바오를 제압해야 했는데, 카를루스는 전반 추가 시간 2분에 프리킥으로 득점을 올려 하얀 군단이 2-1로 앞서나가게 만들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쐐기골에 힘입어 3-1 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준결승 진출에 기여하였다.
2003-04 시즌에는 우승 없이 무관에 그치고 말았지만 2003년 12월 6일에 캄 노우에서 벌어진 FC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카를루스가 선제골을 넣어 20년만의 라 리가 엘 클라시코 더비 첫 원정승을 견인했다.
이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침체기가 시작되는데 리그는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에 밀리고 챔피언스 리그는 04-05시즌부터 09-10시즌까지 계속 16강에서 탈락하기 시작한다. 또한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카를루스의 기량또한 저하되며 스피드로 빨리 메꾸었던 뒷공간을 쉽게 계속해서 내주고 실점에 관여하는 등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레알에서의 마지막인 2006-07시즌은 매우 기량이 하락해 부진하였고 부상까지 겹쳐 리그 23경기 출전에 그쳤고 챔피언스 리그 16강 FC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는 킥오프와 동시에 볼컨트롤 미스로 상대 공격수에 공을 넘겨 주었고 경기 시작 후 10.12초만에 로이 마카이가 골을 성공시키며 유러피언컵 역사상 최단시간 골이라는 안 좋은 기록을 쓰기도 했다. 이 실수로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탈락을 야기해 맹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2007년 3월 9일에 2006-07 시즌 종료와 함께 계약이 끝나면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런데 카를루스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기록한 마지막 골은 라리가 35라운드 레크레아티보전에서 추가시간에 나온 골로 2006-07 시즌 리그 3경기를 남기고 터졌다. 이 골은 팀의 30번째 리그 우승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와 승점 동률을 이루었지만, 상대 전적 원칙에 따라 우승을 차지했다. 마드리드는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벌어진 마요르카와의 최종전이자 카를루스의 고별전에서 3-1로 이겨 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11년을 보내면서, 그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 584경기에 출전해 71골을 기록했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최다 출전 외국인 선수로 370번의 경기에 나섰고, 2006년 1월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세운 종전의 329경기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AC 밀란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거물 파올로 말디니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좌측 수비수로 손꼽혔다. 화려한 경력의 선수이자 선수단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들 중 한 명으로, 카를루스는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의 1번째 임기의 갈락티코스의 주축이었다.

2.1.4. 페네르바흐체 SK


2007년 6월 19일, 터키 쉬페르리그 우승을 거둔 페네르바흐체와 2년+1년 연장 조항 계약을 체결했다. 수천명의 팬들이 웅집한 구단의 홈 구장인 쉬크리 사라졸루에서 입단식을 치렀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페네르바흐체에서 치른 첫 경기에서 베식타시를 2-1로 꺾고 TFF 쉬페르쿠파 우승을 거두었다. 2007년 8월 25일, 시바스스포르와의 리그 경기에서 페네르바흐체에서 첫 골을 머리로 넣었는데, 이는 불과 그가 머리로 넣은 3번째 골이었다. 그는 시즌 말에 부상을 당해 페네르바흐체가 갈라타사라이와 리그 우승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팀은 갈라타사라이에게 우승을 내주었지만, 다음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진출권을 확보했다. 카를루스는 최종 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쉬크뤼 사라졸루에 국내 대회 우승컵을 가져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07-08 시즌에도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2009년 10월 7일,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2009년 12월에 계약이 만료되면 페네르바흐체를 떠날 것임을 밝혔다. 카를루스는 무보수로 레알 마드리드에 복귀할 제의를 받았지만, 브라질 국내로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고, 11월 25일에 공식적으로 떠날 것임을 밝혔다. 그의 페네르바흐체 고별전은 12월 17일 경기로, 셰리프 티라스폴과의 UEFA 유로파 리그 경기에 막판 교체로 출전했다.

2.1.5. SC 코린치안스


이후 2010년SC 코린치안스 입단하여 15년만에 브라질 무대에 복귀해 그의 친구이자 前 레알 마드리드 동료 호나우두와 재회했다. 2010년 6월 4일, 카를루스는 인테르나시오나우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해 코린치앙스가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선두로 올라갔다. 팀은 경기를 2-0으로 이겼다. 2011년 1월 16일, 카를루스는 포르투게자와의 경기에서 코너킥을 그대로 골로 연결하는 인상적인 골을 기록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콜롬비아의 톨리마에게 패하며 지지자들의 협박으로 위협을 느낀 카를루스는 구단에 방출을 요청했고, 코린치앙스 구단 관계진들은 이를 즉시 수락했다.

2.1.6. FC 안지 마하치칼라


2011년 2월 12일, 카를루스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FC 안지 마하치칼라와 2년 반 계약을 맺었고, 규모는 약 €10M으로 책정되었다. 한국나이 39세의 나이로 135억원 가량의 계약을 맺은셈이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는 카를루스는 3월 8일에 안지의 주장으로 명명되었다. 4월 25일, 그는 2-2로 비긴 FC 디나모 모스크바전에서 안지 1호골을 기록했는데, 58분에 페널티 킥을 성공시켰다. 4월 30일, 그는 로스토프전에서 페널티 킥으로 2호골을 넣어 1-0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6월 10일에는 스파르타크 날치크를 상대로 20분에 시즌 3호골을 기록해 2-0 승리에 공헌했다.
2011년 9월 11일,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2-1로 이긴 볼가 니즈니 노보고로드와의 경기에서 4호골을 기록했다.
카를루스는 안지에서의 1년차에 28경기 출전 5골을 기록했다. 9월 30일, 그는 가지 가지예프 감독이 경질되면서 안드레이 고르데예프 감독이 대행 감독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안지의 감독 대행을 맡았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2012년 말에 은퇴할 계획을 밝혔지만, 2012년에도 FC 안지 마하치칼라에서 계속 활약한다. 2012년 8월, 거스 히딩크 감독은 모스크바의 기자 회견에서 "호베르투는 세계구급 축구 선수입니다. 모든 도사의 경력은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라고 말하며 카를루스의 은퇴를 밝혔다.

2.1.7. 델리 다이나모스


2015-16 시즌에는 인도 슈퍼 리그 소속 델리 다이나모스의 플레잉 코치로 현역에 복귀하여 노익장을 과시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image]
1992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카를루스는 3번의 FIFA 월드컵과 4번의 코파 아메리카, 1997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그리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했다.
[image]
카를루스는 1997년 조국 브라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크게 기여를 하고, 프랑스와의 1997년 투르누아 드 프랑스 개막전에서 프리킥을 찼는데 그 유명한 바나나슛을 날려 레블뢰골키퍼 파비앵 바르테즈가 꼼짝 못하게 만드는 골을 넣었다. 바나나슛 궤적 도면 (프랑스어) 이러한 퍼포먼스로 당해 년도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기록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맹활약하지만 결승전에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에게 3:0으로 패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펼치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남미 예선에서는 엄청나게 고전하면서 겨우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다.
[image]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카푸와 같이 양 측면을 홀로 책임지고 공수에서 맹활약했다. 공격 전개시 수비 뒷공간 문제는 사람 몸이 하나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약점이었지만, 2002년 브라질은 그 정도 약점은 충분히 상쇄할 만큼 강력한 팀이었다.[3] 더하여 2002년 브라질의 대진은 역대 우승팀의 대진 중 최상이었다. 예선 상대가 코스타리카, 터키, 중국이었고 16강 벨기에, 8강 잉글랜드, 4강 터키였는데 역대 월드컵 다 털어도 이 정도로 편한 대진표는 거의 없었다.[4]
[image]
그리고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호나우두의 멀티골로 2:0으로 승리,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8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4년전 월드컵 결승 패배의 아픔을 씻어낸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해당 년도 발롱도르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나, 정말 간발의 차이로 호나우두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5]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8강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티에리 앙리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결국 1:0으로 패했다. 이 결승골을 허용하는 과정에서 전담 마크해야 할 앙리를 완전히 놓치면서 패배의 원흉이 되고 만다.[6] 이후 카를루스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카를루스 은퇴 이후 오랫동안 브라질은 적당한 대체자를 찾지 못해 고심했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왼쪽 윙이 본래 포지션인 바스투스를 풀백으로 쓰다가 네덜란드의 아르연 로번에게 철저하게 무너졌다. 이후 마르셀루 비에이라가 자리를 잡긴 했으나 당시 라 리가 최고의 레프트 백으로 꼽히던 펠리페는 전성기를 구가하려던 시점에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당하며 수비진에 구멍이 생겼다. 사실 마르셀루 비에이라주제 무리뉴 시절 들어와 공수 밸런스를 잡는데 성공, 지금은 마드리드의 든든한 주전 풀백이 되었지만 2010년 때만 해도 공격력만 좋은 반쪽짜리 선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흔히 '축구 역사상 가장 강한 공격 가담 능력을 보여준 풀백'으로 묘사되는데, 그만큼 카를루스의 공격력은 수비수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왼쪽 후방에서 공을 가지고 상대 진영으로 올라가는 오버래핑 능력은 당대 선수 중 가장 뛰어났고, 특히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 1기 시절을 보면 지네딘 지단이 왼쪽 윙어로 출전하여 중앙으로 들어가 플레이메이킹을 하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하는데, 그 때 비워진 왼쪽 측면을 카를루스 한 명에게 맡길 만큼 장악력이 확실하며 왼쪽 윙플레이를 전담하며 혼자서 레알의 왼쪽 측면을 전담했다. 그럼에도 공격력이 뛰어난 선수라 레알의 왼쪽 측면 공격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엄청난 사이드 파괴력을 보였다. 또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반대쪽 날개를 책임졌던 카푸와 마찬가지로 발재간이 상당히 좋았는데, 그 어떤 선수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발재간을 바탕으로 브라질 선수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기술들을 자주 선보였는데, 현역 선수 중 폴 포그바처럼 쇼맨십이 훌륭했으며 화려한 개인기로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선수였다.
브라질 국가대표팀과 레알 마드리드의 후임인 마르셀루도 공격력이 뛰어난 풀백이지만 둘 사이에는 플레이스타일의 차이가 꽤 있는데, 마르셀루는 사실상 스트라이커에 가까워서 왼쪽 측면 공격과 빌드업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호날두의 뒤에서 모드리치와 함께 왼쪽 측면 빌드업을 하고, 아래에서부터 경기를 조립하는 플레이메이커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카를루스는 플레이메이커가 아닌 압도적인 스피드와 뛰어난 개인기, 뛰어난 피지컬로 왼쪽 측면을 박살내고 크로스를 올리고 슈팅을 하는 클래식 윙어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왼발은 '''악마의 왼발'''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교했는데, 거리에 상관없이 상당히 정확한 크로스를 보여주며 팀의 세트 피스 키커로 자주 나섰다. 장거리 로빙 패스를 뻥뻥 날려주기도 했는데, 이 또한 경악스러운 수준의 정확도를 자랑한다.
정확도도 정확도지만 카를루스의 왼발 킥은 '''역대 최고 수준의 파워'''를 자랑하는데, 특히 프리킥 상황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였다. 워낙에 강력한 파워를 자랑해서 골대 안으로 향하기만 하면 대부분 골이 되었고, 슈팅 기술까지 좋아서 인플레이 상황에서의 무각도 발리 슛, 감아차기 슛, 바운싱 슛 등 수비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슈팅을 구사했다. 거기에 프리킥 상황에서는 소속팀에서는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데이비드 베컴, 국가대표에서는 히바우두, 호나우지뉴 등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들이 있음에도 특유의 미친 왼발로 직접 프리킥이나 중장거리 프리킥을 담당하기도 할 정도였다. 사실 정확도는 살짝 모자란 편이었지만 워낙에 킥력이 뛰어나고 큰 각도로 휘어서 거리에 상관 없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였다. 덤으로 스로인도 잘 했다.
카를루스는 '''피지컬이 좋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이기도 했다. 그의 신장은 168cm로, 당시 기준으로도 굉장히 작았지만 몸은 전체적으로 다부지고 탄탄하였으며 허벅지 근육은 차범근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이 허벅지 근육은 카를루스가 엄청난 스피드를 낼 수 있게 해주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100m를 10.9초에 끊는 수준이었다.[7] 그는 당시의 브라질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호나우두만큼 빠른 선수였고, 32세가 된 2006년에도 레알 마드리드 팀 내 100m 달리기 1위를 차지했다.[8] 이러한 스피드와 왕성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왼쪽 사이드를 끊임없이 오르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엄청난 점프력인데, 이 점프력 덕분에 키 차이가 무려 34cm나 나는 체코의 공룡 얀 콜레르를 상대로 공중볼을 따내기도 했었다.
또한 카를루스는 폭발적인 스피드로 돌진하거나 미드필더와 콤비네이션 플레이를 펼치며 상대 측면 수비를 분쇄하는 등 '''현대 축구의 공격형 풀백'''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선수이다. 보통 공격형 풀백이라 하면 마이콘, 다니 아우베스, 마르셀루 비에이라 등을 떠올릴 텐데, 풀백의 정점을 보여주던 2009-10 시즌의 마이콘이나 21세기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평가받는 아우베스조차도 공격 시 폭발력은 카를루스에 미치지 못한다. 마이콘과 아우베스의 전성기를 생각해 보면 카를루스의 공격력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알 수 있다.[9]
다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수비적인 부분이다. 사실 카를루스의 수비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슬라이딩 태클을 효과적으로 사용했고, 필요시에는 상대 공격을 파울로 거칠게 끊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력과 반응 속도가 매우 빨라서 1:1 상황에서는 상대의 돌파를 거의 허용하지 않았으며, 공중볼 싸움에도 능했다. 그러나 파올로 말디니비셴테 리사라수 같은 동시대 월드클래스 풀백들에 비해 공격에 많이 치중했던 편이라 뒷공간으로 파고드는 선수를 놓치는 실수가 종종 있었고, 위에서 말했던 쇼맨십, 즉 겉멋이 든 플레이를 즐기는 성향 때문에 위험한 상황을 종종 내주었다. 월드컵 같은 큰 경기에서도 성공률이 낮은 아크로바틱 플레이를 즐기다 실점을 한 적이 있다.[10]

4. 평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파올로 말디니, 비셴테 리사라수와 함께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으로 군림했고, 국가대표팀에서 무관인 말디니와는 다르게 네 번의 국가대항전 우승을 차지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리사라수보다 챔스에서 더 많은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한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레프트백이 경기에 미칠 수 있는 최고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고 인정받으며 '''축구 역사상 최고의 풀백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그의 후계자인 마르셀루 비에이라가 카를루스를 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그건 카를루스의 업적을 너무 간과한 의견이다. 마르셀루가 2010년대 최고의 레프트백인 것은 사실이지만, 카를루스는 당대 최고의 레프트백을 넘어서 클럽과 국가대표 동료들인 라울 곤살레스, 루이스 피구, 데이비드 베컴, 히바우두, 카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선수이기도 했다. 혁명적인 퍼포먼스로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할 뻔 했으며[11], 10년간 정점의 기량을 유지하는 등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결정적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카를루스가 마르셀루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12]
또한 세계 최고의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11년간 주전으로 뛰었으며,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A매치 100경기 출전을 달성하여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는 점에서 임팩트와 꾸준함 모두 역대급으로 평가받는다.

5. 지도자 경력


2011년 9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FC 안지 마하치칼라로 이적했다. 선수 겸 코치로서 현대 프로 구단에서는 보기 힘든 경우. 안지 구단의 구단주가 카를로스의 오랜 팬이어서 가능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1 시즌이 끝나자 선수에서 은퇴하고 코치진으로 남아 안지 팀에 머물기로 했다. 더불어 안지의 새로운 감독이 바로 거스 히딩크.
선수 시절 페네르바흐체 SK에서 3년간 뛰었던 경험이 있고, 이때 터키에서의 생활에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한다.[13] 그러한 좋은 경험 때문이었는지 2013년 6월 터키 쉬페르리그의 시바스스포르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올 시즌 구단에서 카를루스를 뒷바라지하려고 아낌없이 투자하여 영입한 시시뉴와 마누엘 다 코스타, 그리고 라피크 제부르가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현재의 좋은 성적에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 주고 있다. 카를로스가 지휘봉을 잡은 시바스스포르는 2013-14 시즌에 5위를 차지하며 UEFA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따냈지만 아쉽게도 UEFA 유로파 리그 출전 자격 미달로 박탈당했다. 그리고 2014-15 시즌에는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결국 12월 21일부로 사임하였다. 리그에서 2승 4무 8패 승점 10점를 기록하며 전체 18개 팀 중 17위를 기록하였다. 2015년 1월 2일 터키 쉬페르리그 소속의 아키사르 벨레디예스포르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7월 6일 인도 슈퍼 리그의 델리 다이나모스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동시에 3년 만의 현역 복귀를 선언하였다. 즉, 선수 겸 감독으로 뛰는 것. 현재는 은퇴하여 감독으로만 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2002
  • 발롱도르 드림팀 2군: 2020
  • FIFA 올해의 선수 2위: 1997
  • UEFA 올해의 수비수: 2001-02, 2002-03
  • UEFA 올해의 팀: 2002, 2003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8, 2002
  • 세리 A 올해의 팀: 2010
  • FIFA 100: 2004
  • 트로페오 EFE: 1997-98
  • 볼라 지 프라타: 1993, 1994, 2010
  • 옹즈 드 옹즈: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5
  • ESM 올해의 팀: 1996-97, 1997-98, 1999-00, 2001-02, 2002-03, 2003-04
  • 골든풋: 2008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2006
  • 레알 마드리드 명예의 전당: 2012
  • ESPN 2000년대 베스트 XI: 2009
  • 마르카 레알 마드리드 역대 UCL 베스트 XI: 2018
  • 마르카 레알 마드리드 역대 베스트 XI: 2012, 2017
  • 돈 발론 2000년대 베스트 XI: 2010[14]

7. 기타


  • 2010 시즌 SC 코린치안스의 부진의 책임을 지라는 극성 팬들의 협박에 못 이겨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조국에서 보내려는 계획을 전격 수정,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FC 안지 마하치칼라로 이적했다. 구단주 술레이만 케리로프는 카를로스의 37번째 생일날 부가티 베이론을 사 줬다고 한다.
  • 2011년 6월 22일, 크릴리아와 안지의 경기 도중 크릴리아 팬이 카를루스를 향해 바나나를 던지자 화가 난 카를로스는 경기장을 나가 버렸다. 바나나 던지기는 유럽 축구 팬들의 대표적 인종 차별 악습의 하나로, 상대 선수를 원숭이 취급하는 악질적인 행위이다.[15] 세계 최정상급 선수였던 카를루스를 대상으로 이런 몰상식한 짓을 했다는 게 볼썽사납기 그지없었다.[16]
  • 2002 한일 월드컵때 목욕탕에 간것이 사진에 찍히기도 했으며(...),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3차전[17] 일본과의 경기에서 벤치가 아닌 필드 바깥쪽에서 말년 병장 자세로 경기를 보는 것이 짤방으로 쓰이기도 했다.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이 일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 1997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에서 보여준 바나나 프리킥[18]은 두고 두고 회자가 되고 있다. 당시에는 과장하기 위해 혹은 관심없는 몇몇 기자들에 의해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슛이라고까지 불렸다. 하지만 2010년 프랑스 과학자들의 논문에 나온 내용처럼,[19] 사실 과학적인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이른바 마그누스 효과에 의한 것으로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 못한다는 것은 그저 웃기거나 과장하려고 하는 말. 단지 인간으로서 저 정도의 마그누스 효과를 만들어낼[20] 사람이 전 세계에 몇 명 안 될 뿐이다. 그런 탓에 현재까지도 카를루스의 슛에 비견될 수 있는 선수는 몇 안 된다. 그의 슛 파워를 이야기해 주는 단적인 예가 있는데, 프리킥 때 카를루스의 공을 맞은 수비수가 뇌진탕을 일으켜 경기가 중단된 사례가 있다. 속칭 로켓 슛. 여담이지만, 카를루스 본인이 어디선가 이야기하기를 '잘못 맞았다'라고 한다. 임팩트가 잘못 됐다라고 이야기했다고도 한다. 카를루스의 직접 프리킥은 레이저빔처럼 일직선으로 뻗어가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평상시와는 다른 뭔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라이문도 오르시의 축구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왼발 바나나 킥처럼 이것도 재현하고자 했는데 안 됐다고 한다

  • 굉장히 적극적이며 쇼맨십이 넘치는 선수인데, 그래서인지 다른 선수들과 시비가 자주 붙는 편이다. 일례로 2000년 UEFA 슈퍼컵에서 갈라타사라이 SK의 백전노장 게오르게 하지 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다. 그 후의 1:1 상황에서 노련한 하지에게 드리블로 완전히 관광당한 후 반칙으로 드리블을 끊어내 하지를 넘어뜨린 뒤 두 팔을 들어 보이며 "봐! 내가 이겼지?"하는 눈빛을 쏘아보내며 말도 안 되는 정신 승리를 시전한 적이 있다.
[1] 외래어 표기법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 (#)[2] 여담으로 이후 카를로스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기량이 만개하며 세계적인 레프트백으로 자리잡게 되지만 당시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던 사모라노는 인테르에서 부진한 모습만을 보였고 이후 새로 영입된 호나우두와의 주전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밀려 백업 공격수가 되었고 인테르 시절 총 101경기에서 26골만을 득점하며 인테르 최악의 영입 중 한명이 되었다. 게다가 이후 인테르는 카를로스가 떠난 뒤 영입하거나 유스에서 승격한 대체자들이 연달아 망하면서 믿고 맡길만한 전문 레프트백이 부재하다는 레프트백 저주에 시달리고 만다.(인테르의 레프트백 저주는 이후 06/07 시즌이 돼서야 파비오 그로소막스웰이 영입된 뒤에야 해결되게 된다.) 이후에도 축구계에서도 가끔 역대 최악의 선택 중 하나로 언급되곤 한다.[3] 카를루스와 카푸가 노쇠한 2006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때만 해도 워낙 발이 빠르고 체력이 좋아 활동량이나 공격 후 복귀 속도가 빨랐고 스리백을 썼기에 윙 백을 뚫었다고 해도 포 백처럼 바로 위기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함부로 측면에서 기웃대다가는 순식간에 역으로 털릴 위험이 높았고, 그 이전에 선수 한명 한명이 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브라질을 상대하면서 제대로 대열과 태세를 정비하고 공을 탈취, 전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4] 이건 준우승팀 독일도 마찬가지다. 조별리그 상대가 사우디아라비아, 아일랜드, 카메룬이었고 16강이 파라과이, 8강이 미국, 4강이 대한민국이었다. 그 쉬운 대진표에도 불구하고 16강과 8강에서 고전을 면치못했고 오심에 힘입어 겨우 8강을 통과했다. 네덜란드는 이미 지역예선에서 떨어졌고, 아르헨티나포르투갈, 프랑스가 조별리그 탈락하고 이탈리아스페인대한민국에게 덜미를 잡히는 등 자이언트 킬링이 굉장히 많이 발생한 대회라 이런 대진표가 나왔다.[5] 이에 대해서는 월드컵이 치뤄지기 전까지 시즌 통합 16경기 정도 밖에 뛰지 못한 호나우두보다 월드컵 우승뿐 아니라 챔스 우승까지 차지한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더 적합한 발롱도르 수상 후보자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호나우두가 결승전에서 대회 MVP 올리버 칸을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한 점과 24년 동안 지속되던 6골 득점왕 징크스를 깨트린 임펙트로 인하여 발롱도르는 호나우두에게 돌아갔다.[6] 가만히 서서 따라가지도 않고 먹힐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7] 하지만 티에리 앙리 같이 역대급으로 빠른 선수한테는 스피드로 승부해도 밀렸다.[8] 하지만 호나우두인터 밀란 시절이 전성기였지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하락세여서 스피드가 떨어진 상태였다. 실제로 호나우두는 전성기 시절 100m를 10.6초 만에 돌파 하여 카를루스 보다 좋은 기록을 세웠었다.[9] 물론 이들은 카를루스와는 다른 장점이 있다. 마이콘은 거의 홀로 팀의 측면을 책임질 정도로 공수 양면에서의 밸런스가 좋으며, 경기를 스스로 주도할 수 있다. 아우베스는 주변 선수와 콤비네이션을 펼치는 플레이에서는 독보적이며, 중원 싸움에도 가담할 수 있는 풀백이다.[10] 특히 월드컵에서 프랑스와의 경기 때마다 실수가 유독 컸는데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에선 실수로 코너킥을 내줘 지단에게 헤딩골을 내주는 바람에 가뜩이나 밀리는 경기가 더 안좋게 끌려갔고 2006년 독일 월드컵 8강 프랑스 전에선 지단의 프리킥 상황에서 멍때리다가 티에리 앙리를 놓쳐버렸고 결승골이 되며 탈락했다.[11] 2002년 발롱도르 2위, 1997년 FIFA 올해의 선수 2위[12] 카를루스는 국가대표팀에서 뛰어난 퍼포먼스로 FIFA 월드컵 우승을 비롯해 네 번의 우승을 이끌었지만 마르셀루는 중요도가 낮은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1회 우승을 제외하면 메이저 대회인 월드컵코파 아메리카에서 미네이랑의 비극을 비롯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2018 월드컵에서 팬들이 뽑는 드림팀에 한 번 뽑히기는 했는데 그마저도 1998, 2002 월드컵에서 카를루스가 보여준 퍼포먼스에는 턱없이 부족하다.[13] 단 이스탄불의 교통 체증에 대해서는 '지옥'이라는 표현을 썼다.[14] 링크[15] 같은 브라질 선수인 다니 아우베스도 2014년 바르샤 소속으로 비야레알과의 경기를 뛰던 중 똑같은 조롱을 당한 적이 있다. 카를루스와 다른 점은 쿨하게 바나나를 주워서 먹는 현명한 대처를 했다는 것. 이후 바나나를 던졌던 상대팀 서포터는 경기장 영구출입 금지 처분을 당했고, 더불어 축구선수들 사이에서는 바나나를 들고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고 해시태그로 "weareallmonkeys(우리는 모두 원숭이입니다)"를 다는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이 유행했었다.[16] 여담으로 정작 카를루스 자신도 파라과이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를 상대로 '일어나! 인디오~'라며 차별 용어를 쓰다가 침 세례를 맞은 바 있다.[17] 당시 브라질은 16강 진출이 확정된 상태여서 주전 선수들을 쉬게 했었다.[18] UFO슛으로도 불리는데 UFO슛은 이 슛을 멍하니 지켜볼수 밖에 없었던 파비앵 바르테즈가 마치 UFO같았다고 말하면서 이름이 유래되었다.[19] Gill, Victoria (2010년 9월 10일). “Roberto Carlos wonder goal 'no fluke', say physicists”(물리학자 왈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환상적인 골은 '뽀록이 아님.). BBC News.[20] 축구공이 아무리 가볍다고하더라도 저정도의 마그누스 효과로 공을 회전시킬려면 엄청난 각속도와 굉장한 공의 속도가 필요하다. 공을 보면 거의 골문 밖을 나갔다가 휘어 들어오는데 보통 최고 레벨의 선수들이 30m/s(108km/h) 정도를 찬다면 저 슛은 40m/s(144km/h)를 넘는다는 것이 대부분의 정설이다. 밥만 먹고 볼만 차는 사람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니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는 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