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농공상

 

1. 개요
2. 미국
3. 중국
4. 유럽
5. 중동
6. 일본
7. 한국


1. 개요


士農工商
고대부터 근대까지, 동아시아대한민국, 중국, 일본에서 통용되던 직업의 분류. 한국을 제외한 중국과 일본에서는 사민(四民)이라고도 한다.
상공업 계층보다 농민을 더 우선시하는 관념, 즉 농본사상을 영어로는 "Agrarianism"이라 한다.

2. 미국


오히려 정반대인 상공농사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미국은 태초부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시작된 국가다. 오히려 틀에 얽매이고 보수적이고 딱딱한 관료제 대신 틀에서 벗어나 진보적이고 부드러운 사기업 위주 및 창업 위주의 문화를 지향하고 있는 국가다. 그래서 그런지 공무원은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가 없는 직업이다.[1]
물론, 대통령, 총리(국무장관), 국회의원, 지방의회의원, 장관, 차관 정도로 공무원 중에서 가장 높으신 분들에 해당하는 직업들은 당연히 미국 사회에서도 매우 선망의 대상이며 가장 선호하기도 하지만[2], 사기업 직원들 역시 그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좋은 직장문화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미국이다. 대기업 회장~사장 정도 수준이면 대통령~총리와 맞먹을 정도로 전혀 꿀리지 않는게 바로 미국이다. 보통 다른 나라들은 정치인이 갑이고 기업인이 을인데 비해 미국과 유럽 등 서양권은 기업인이 갑이고 정치인이 을인 경우가 많다.
미국의 공무원은 복지혜택이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사기업보다 급여가 매우 적고 보수적이고 하나도 안 즐겁고 재미도 없는 직장인지라 아무래도 매일매일 즐겁고 재미있게 살고 싶어하는 미국인들이 매우 싫어하기 마련이다. 특히, 미국의 공무원들은 대체로 너드 이미지도 있어서 문(文)보다 무(武)를 더욱 숭상하는 미국인들의 정서와 어긋나 더욱 더 혐오할 수밖에 없다. 졸업을 앞둔 미국의 대학생들 및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공무원 vs 중소기업' 중에서 차라리 중소기업을 간다고 하지 공무원은 절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미국에서는 지방 읍면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은 중소기업보다 돈도 많이 못 받고 여러모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공무원이 대기업보다 훨씬 최고의 직장으로 거듭나게 된 한국과는 정반대의 케이스를 여실히 보여준다.[3]
오죽하면 블랙기업 수준처럼 임금체불이 잦고 직원간 부조리가 매우 심각한 영세기업보다도 더 대우가 나쁜 곳이 바로 공무원이다. 영세기업일지언정 그래도 해당 직무에 대한 경험을 충분히 쌓고 경력직을 통해 더 좋은 회사들로 충분히 이직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다. 게다가 미국의 공무원은 유럽의 공무원과 동일하게 신규 채용을 잘 하지 않고 이전 사기업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토대로 삼아 경력직 위주로 채용한다. 미국은 이 정도로 상공농사인 사회상을 지향한다.

3. 중국


용례는 춘추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士(학자) 農(농민) 工(장인) 商(상인)으로 백성을 분류하였다. 다만 아주 초창기의 士는 학자가 아닌 병사를 뜻했다. 공자를 보면 알다시피 이 당시에는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상류층의 기본 소양이었기 때문이다.[4][5] 이후 군현제가 확립되면서 의미가 변한 격이다.
보통 우리는 사농공상이란 표현을 고려조선과 연관해서 접하기 때문에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중국에서 사농공상 대신 사민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특정한 신분제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민은 그냥 '''백성'''이란 뜻으로 쓴다.
관자에서 사농공상, 춘추곡량전에선 사상공농으로 표기했는데 어느 쪽이든 그냥 백성을 통틀어 부르는 표현이다.
桓公曰: "定民之居, 成民之事, 奈何?"
管子對曰: "士農工商四民者, 國之石民也, 不可使雜處. 雜處則其言哤, 其事亂. 是故聖王之 處士必於閒燕, 處農必就田壄, 處工必就官府, 處商必就巿井."
제 환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고 백성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것을 어찌하면 좋겠소?"
관중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학자, 농민, 장인, 상인 네 부류의 백성들은 (모두)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백성들이므로 섞여 거처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섞여 살게 되면 그 말이 난잡하고 그 (맡은 바)일들이 어지럽혀집니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된 왕의 치하에, 학자들은 반드시 한가롭고 편안한 곳에 거하고 농민들은 반드시 밭과 들판에 거하며 장인들은 반드시 관청에 거하며 상인들은 반드시 저자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관자-
백성들을 네 부류로 나눈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계급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긴 어렵다. 굳이 요즘 식으로 쓴다면 "산업은 1차산업 2차산업 3차산업이 있다." 같은 표현에 불과하다.
사실 중국은 대한민국과 달리 장사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다. 당장 화교를 떠올려보자.[6][7]
여담으로 상인(商人)이란 표현 자체가 "상나라(=은나라) 사람"이란 뜻인데,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뒤 흩어진 상나라 백성들이 장사를 해서 먹고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4. 유럽


앙시앵 레짐 이전의 유럽 사회는 전통적으로 "사" 계급의 우위가 확정적이었으나, 그 이하 계급의 신분 차이는 명확하지 않았다. 신분을 기도하는 자싸우는 자, 그리고 만들어 내는 자사고 파는자로 나누어 사실상 앞의 두 계급이 뒤의 계급을 지배하는 형식이었던 것. 사농공상에서 "사" 계급의 위치는 기도하는 자싸우는 자가 맡았고, 나머지 농공상의 위치는 만들어 내는 자사고 파는 자가 차지했다.[8]
하지만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하위 계급 내에서도 농민 계층의 지위가 대체적으로 장인 계층이나 상인 계층보다 훨씬 열등한 편이었다. 어느 정도 숙련된 기능공과 석공의 사회적 지위는 농노는 물론이고 자유민 농민과도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중세가 끝나가면서 상인 계급이 크게 성장해, 아예 상인 길드가 자치권을 돈으로 얻던지 싸워서 얻던지 해서 도시지역의 자치정부가 되었을 정도로 커졌다. 이후 상인의 지위는 절대왕정 시대의 중상주의 정책의 수혜를 받아 끊임없이 높아졌다.
장인과 상인의 지위가 높았다는 점에 있어서 사공상농 내지는 사상공농 정도로 요악할 수 있을 것이다. 상인의 지위가 장인보다 낮았거나 비슷했던 시기에는 한동안 사공상농의 구도로 흘러갔고, 이후 중세를 지나 근세/근대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의 기틀이 잡히고 상인의 지위가 장인보다 높아진 시기에서부터는 사상공농의 구도가 자리잡았다.
물론 한국과 정반대로 농민을 지나치게 천대하는 전통에 반발하여 농민의 권익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있었고 (Agrarianism) 그러한 이론과 사상을 가진 정당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현대에도 북유럽을 비롯한 몇몇 유럽 국가들은 이 Agrarian 성향의 정당이 어느 정도 세력을 떨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유하 시필레 前 총리가 소속된 핀란드 중앙당을 들 수 있다.

5. 중동


농민의 지위보다 장인과 상인의 지위가 높았던 사정은 중동도 비슷했으나, 한편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는 상인들의 파워가 동시대의 기독교 유럽 사회와 비교해서도 훨씬 더 강했고 따라서 사상공농의 구도가 유럽 사회에 비해서 훨씬 빠른 시점에서 자리잡았다. 이는 이슬람 자체가 상인이었던 무함마드가 이끌었던 종교였기 때문에, 전근대 어느 문화권보다 상인 계급에 대한 배려가 강했던 종교가 이슬람이였던 것이다.[9]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유럽 사회보다 한 발 앞서 상인의 높은 지위가 확립되고 상업 활동을 일찍부터 우대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중세를 이슬람 문명의 최전성기로 이끄는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이후 근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상업 활동을 다른 생산 활동보다 우대하는 경향이 유럽 기독교 세계에 대한 경계심과 더불어 오히려 유럽 기술의 수용에 의한 기술 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는 의견도 있다. 관련 뉴스

6. 일본


일본의 사농공상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에도시대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계급 체계는 사농공상 순 그대로이나, 사에 선비 대신 일본의 무사(武士)가 들어간다. 무사, 즉 사무라이가 득세했던 일본의 사회상황이 반영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대 조선과 달리, 상공업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던 에도시대의 상인들은 공식적인 사농공상의 순위와 달리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파워가 셌다고 한다. 상공업의 발달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토지 생산에 기반한 경제에 의존하던 대부분의 다이묘들로서는 점차 상인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가서, 오죽하면 오사카[10] 의 상인이 대노하면 천하의 다이묘들이 벌벌 떤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유럽과는 달리 이 상인 계급들은 근대화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을 뿐이지, 다만, 조연 정도는 되었다. 일단 에도시대부터 나름 재벌가문이었던 미쓰이같은 가문이 유신 웅번 측에 자금을 대었고, 이들은 그 덕분인지 몰라도 이들 재벌 가문은 메이지 유신 후 국가와 결탁하여 독점재벌로 성장했다. 그리고 재벌 가문들은 화족이 되었다. 이 외에도 조금 더 뒤에 유명해진 미쓰비시, 스미토모 재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 경제의 발전사와 함께 했다. 하지만 덕분에 일본은 상업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1차 산업인 농업이 붕괴되어 버렸고, 이는 에도시대 후기에 일본 국민의 평균 신장이 감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물론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 자체를 금기시한 것도 있다.)
다만 일본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상인이 대우받지는 않았으며, 에도 막부가 상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역을 금지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는 일본의 사농공상제도가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2000년경을 기점으로 일부 교과서에서 사농공상제도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었다.[11] 사농공상이 삭제된 최근의 교과서 내용에 의하면 무사(武士)만 상위계급이고 농민을 백성(百姓), 상공업인을 정인(町人)이라고 하며 백성과 정인은 대등한 관계였다고 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일부의 상인은 무사보다 상위로 취급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7. 한국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각 자기의 분수가 있습니다. 선비[士]는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고, 농부[農]는 농사에 힘쓰며, 공장(工匠)은 공예(工藝)를 맡고, 상인(商人)은 물화(物貨)의 유무(有無)를 상통(相通)시키는 것이니, 뒤섞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
- 성종실록 140권, 성종 13년 4월 15일 계축 2번째기사- 中
당시 조선 역시 사농공상은 단순히 신분을 나누는 형식일뿐 딱히 그렇게 큰 차별을 두지 않았다. 애초에 당시 조선에 최고 인기 직업은 '''역관'''이다.
이 문화는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전래되었으며, 고려 후기와 조선 시대 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실제 조선 시대에는 사농공상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였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성종 대 3건, 연산군 대 2건, 중종 대 2건, 광해군 일기 중초본에 1건, 현종 1건, 헌종 1건, 고종 7건으로 지극히 저조하다.
사농공상의 순서는 당시 신분제의 순서 그대로이다. 사는 중국과 다르게 선비를 뜻하고 농은 농민을 뜻하며 공은 공장을 뜻하며 상은 상인을 뜻하였다.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학문(혹은 정치)을 하는 선비들을 가장 고귀하게 생각했으며, 꼭 필요한 식량을 만들어내는 농민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우리네 생활에서 쓸모있는 도구를 만들어내는 공장(장인)이 그 뒤를 이었으며, 아무 것도 안 만들어내고 물건 팔아 이득을 내는 상인들을 잉여 취급하는 이념이었다.[12]
유교의 이념에 의해 통치되던 조선 사회의 특징과도 같은 사회 계급으로, 생각해 보면 조선은 이를 너무 융통성 없이 적용하여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 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조선이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 망했다고 하기엔, 개항 시기부터 시작해 임오군란 이전까지를 보면 상당히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옳지 않다. 그 이후는 일제에 의한 속국 신세라 개혁을 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갑오개혁의 개혁안은 1880년대 초에 이미 논의된 내용이다.) 또한 사농공상이 그리 엄격했으면 정조 때 수원에서 연암 일파 등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던 양반의 상업 종사가 실제로 일어난 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사농공상의 문제점은 그 차이를 너무 과도하게 해석해서 격차를 크게 벌려놨다는 것. 유교의 사농공상 이념에 의하더라도 원래는 사>농>공>상 정도여야 되는 것이 사>>>>(넘사벽)>>>>농>>>>공>>>>상 의 상태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이념은 한국에선 필요한 이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농업 기반의 사회에서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자기 집에서 농사 짓고 사는 사람이 많으면 소출이 늘고, 그렇게 되면 세곡도 늘어나니 큰 변화가 있을 리 없는 농경시대에는 이러한 규칙이 효율적으로 먹혀 들어갔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식량생산의 증진을 위해 농업을 상대적으로 중시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또한 이미 상업에 어느 정도 관대했던 전 왕조인 고려가 흑사병의 창궐로 인한 원나라 상업 초토화의 나비효과로 큰 경제적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정이 엄격하게 상업의 흐름과 규모를 통제하는 체제를 지향했다는 배경도 있었다.
또한 당시 현실을 살펴보자면 사실 사(선비)만 양반이었고 농공상은 양인이었기 때문에 농공상 사이의 차이는 얼마 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상인 중의 일부는 상인 생활을 하다가 외국인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레 외국어를 익혀서 역관이 되며 중인으로 신분상승을 하기도 하고, 공장 중에 재능 있는 사람은 관직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13] 기회가 없는 농민이 제일 불쌍한 것일지도 모른다.[14]
그리고 또한 질소 비료의 개발 이전에는 기근이 21세기보다 더 잦았으므로 사실 식량을 만들지 않는 공업과 상업의 우선 순위는 농업보다 낮은 게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일단 식량이 없으면 누구나 굶어죽으니.
사실 사농공상은 사회적 신분제라 하기는 하지만 막상 신분제로 보기가 어려운게 '''일단은''' 사농공상 4가지에서는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농민이 상인이 될 수도 있고, 공인이 농민이 될 수도 있으며, 농민이건 상인이건 공인이건 누구나 양반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될 수도 있다.'''가 실제 맘먹은대로 되는건 아니다. 이는 현대에서 누구나 '''경영자가 될 수는 있지만'''' 모두가 경영자가 되지는 않은것과 비슷하다. 차라리 농민,상인,기술자들이 신량역천처럼 다른 직업으로의 이직이나 과거응시가 제한되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농공상에 대해서 이런 부분이 제한되지는 않았다.

[1] 어디까지나 한국처럼 7급 9급 행정직에 온 국민이 목메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경찰공무원이나 소방공무원 등은 한국보다 더 선망(존경)의 눈으로 본다. 게다가 모병제 국가라서 군인에 대한 대우는 징병제 국가인 한국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정도이다. 식사비를 대신 내주는 것 정도는 기본적인 미덕으로 여겨질 정도.[2] 오죽하면 도널드 트럼프가 대기업 회장을 하다가 대통령이 되었을까. 물론 트럼프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신은 재물욕을 엄청 많이 채웠으니 이젠 권력욕을 엄청 많이 채우기 위한 것도 있다.[3] 한국에서는 7급 공무원이 삼성전자&현대자동차보다 훨씬 좋은 직장으로 거듭난지 오래이며 결혼상대로도 대기업 직원보다 7급 공무원이 훨씬 더 선호된다. 대기업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해고당할 수 있지만 공무원은 누구나 무조건 60세 정년 꽉꽉 채우고 퇴직 이후의 연금도 일반 대기업 직원들보다 매우 많이 받기 때문이다.[4] 이런 경향은 동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전쟁은 노예가 아닌 시민계급, 즉 권력자의 것이었다. 인류에게 신분제가 나타난 것도 청동기 때부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경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던 셈이다.[5] 또한 그 시기에는 직종이 그렇게 세분화 되어 있지 않았다. 현대의 화학, 문학, 법학들은 당시엔 싸잡아서 철학이었으며 정치가는 군인인 동시에 학자이기도 했다. 플라톤을 비롯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그토록 많은 분야에 업적을 지녔던 것은 이런 세분화되지 않은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한다.[6] 근데 명나라, 청나라때는 해금령이 있었기에 상업이 유럽에 비해 뒤쳐지게 된다.[7] 하지만 이런 경향은 고대, 기원전 시기에는 제법 흔한 풍토였다. 후술한 바와 같이 상인이란 말은 상나라 사람에서 유례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거주할 땅이 없어 떠돌아다님을 뜻했다. 시대가 오래될 수록 지역의 닫힌 사회는 심화되며, 외지인을 배척하는 풍토도 심해지는데, 천성적으로 떠돌아야만 하는 상인들은 썩 좋은 취급을 받지 못 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주신 중 하나인 헤르메스가 관장하는 영역이 전령, 상인, 도둑이라는 것에서도 이런 풍토에서 기반한다.[8] 이는 플레잉 카드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클럽의 구분에서 알 수 있다.[9] 당초 이슬람 발흥지는 농경사회도 아니었다. 유목과 상업이 주업인 지역이었다.[10] 당시에는 수도였던 교토의 외항이었다.[11] 물론 국정교과서가 아니므로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사농공상제도를 가르치는 교과서도 있다.[12] 그냥 파는 정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투기나 되팔렘과 같이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치우는 식으로 막대한 이득을 본 이들 역시 있었다.[13] 그렇지만 사대부들은 절대로 역관이나 의관들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여기지 않았다. 조선 성종 때 역관들을 사대부 반열로 옮기려고 성종 자신이 제안했으나 설공찬전의 저자이기도 했던 채수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당대 가장 깨어 있던 지식인 중 하나였던 (설공찬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어찌 보면 상당히 과격한 사상을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채수마저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14] 기본적으로 조선 법제상의 신분제도는 양-천제였다. 즉 양인(양반, 중인, 평민)과 천인(노비, 백정, etc)의 이원구조였다. 법적으로 양반과 평민은 같은 신분이지만 사회 통념 상의 신분 제도가 반-상제였으므로 (양반-중인-평민-천인)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후자가 적용되었다. 단 법제 상의 신분 제도 덕분에 힘들기는 했지만 평민이 얼마든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양반으로 올라갈 길이 '''좀 힘들지만''' 열려있었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과거 합격자의 50%정도가 평민 출신.) 그래봤자 감투 쓰면 겪어본 것도 있겠다, 있어 보이는 척 붓과 한지로 키배 뜨며 단점 고칠 생각 하지 않았던 것는 마찬가지였던지라……. 이건 현재까지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