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학파

 



1. 개관
2. 특징
3. 몰락
4. 계파
5. 한계
6. 나무위키에 등재된 관학파 인물
7. 관학파의 집권 기간
8. 같이보기


1. 개관


官學派
조선 태조 시기부터 단종 시기까지 조선통치에 일익을 담당했던 관료집단.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후신이라 봐도 좋다.
관학파는 일반적으로 관학(官學), 즉 국가에서 세운 학습 체계를 이용하여 발전하였다. 성균관에서 유학을 배우고 등과한 다음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신 높으신 분들.
관학파=훈구파라는 잘못된 등식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는 네이버 백과사전으로 관학파를 치면 자동적으로 훈구파 항목이 뜬다. 그러나 관학파와 훈구파는 엄밀히 다르며, 훈구파에 일부 관학파가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관학파와는 관련없는 양아치 같은 부류가 다수였고, 대다수 관학파는 이들 훈구파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 단 정인지나 신숙주, 최항 같은 이들처럼 집현전 출신이면서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권력을 누린 이들은 관학파와 훈구파 모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들 때문에 훈구파와 관학파가 혼동되고 있는 셈. 반대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은 관학파긴 하지만 훈구파는 아니다.

2. 특징


존재시기가 너무 짧았지만(불과 50년) 태조 대에서 문종 대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조선 초기 찬란한 문화적 성취 대부분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업적은 세종 시기로 대표되는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조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새 왕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 민심을 얻으려 노력했으며, 고려/불교조선/유교(성리학)으로 갈아치우며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구시대의 악풍습 쇄신이 병행된 덕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무에 있어서도 후대의 사림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세종대왕 시대의 양전 정리 사업을 후대에는 도저히 이런 걸 어떻게 했는지 수학적으로 감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
그리고 이들은 이름부터가 관학(館學)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무능력을 중심으로 성립된 집단일 뿐 아직 성리학은 초기단계에 불과했던지라 사상적으로는 유학에 깊지는 못했다. 때문에 겉으로는 숭유억불을 주장하고 유교를 국시로 삼아야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제로는 유학을 깊이 익히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문장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 것인가를 궁리하고, 스님이랑 놀거나 하는 경우가 수두룩 했다.[1] 물론 후기 사림파 뺨치게 유교원리주의자였던 정도전이나 윤소종 같은 인물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3. 몰락


관학파는 계유정난 이후 훈구파와 은둔 세력(절의파, 청담파 등)으로 갈라지고,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로 대표되는 관료간의 힘싸움이 시작된다.
문제는 계유정난 이후 집현전이 혁파당하고, 조선왕조의 관학에 대한 관심 부재로 성균관, 향교가 점점 부실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죄다 긍정적으로만 해석해서 계유정난 같은 사건이 없었다면 다 좋았을 것이다 정도로 적힌 것이고,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관학파는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국가주도적이고 진취적인 기풍은 국가의 건국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나 적어도 건국자들과 직접 접해본 세대로 지배층이 완성되지 않은 시기까지나 등장하는 것으로, 건국 이후에 시간이 흘러서 주류 지배층이 형성된 이후로는 주류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서 관료들도 형성되게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발전하는 것이 사학(私學)이다.
왕들이 아무리 관학 진흥책을 펼쳐봐야 결국 시험 출제자도 시험을 가르치는 사람도 시험 보는 사람도 한통속으로 굴러가는데 답이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조선의 경우는 예종이 종친을 쳐내고, 성종이 사림을 불러올린 국가이다. 훈구파는 자연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조선의 정치엘리트 변화 양상은 고려와 크게 차이도 없다.

4. 계파


관학파에도 여러 파벌이 존재했는데 태조 이성계 때는 정도전 계열과 이방원 계열과 반정도전 계열이 있었고 정종 때는 박포 계열과 이방원 계열, 원로 계열이 있었다. 그러다 태종 때는 외척, 공신 쪽의 파벌과 태종 친위세력 쪽의 파벌이 있었고 그 외에도 원로계열 또한 있었다. 그러다 세종 초에는 구왕파 파벌과 신왕파 파벌로 나뉘었고 세종 집권기에는 신왕파가 계속 우세했다. 그러다가 문종 때부터는 다시 계파가 나뉘는데, 친김종서파와 반김종서파가 대립했고 단종 때 계유정난 이후로는 친수양대군파와 반수양대군파로 나뉘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친수양대군파가 승리한다.

5. 한계


소위 말하는 실무분야의 능력 에서도, 사실 성균관이나 향교 역시 어차피 서원과 같은 유학 커리큘럼인 것은 다름 없어서 특별히 체계적으로 실무 능력을 배양하거나 이러한 인재를 육성하는 절차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외교적인 부분에서 쓸모가 많은 사장을 중시했다거나 하는 점이 언급되고, 무엇보다도 이후의 사림파가 임금을 도와 국정을 보좌하는 관료, 아주 쉽게 뭉뚱그리면 실무 담당 행정가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까웠다는 것'이 문제다.
성종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삼사로 대표되는 청요직이 실무외적인 부분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초임 관료시절부터 행정실무나 외정, 군정보다는 중앙정부에서 말발을 세우는 것이 엘리트코스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이럴 수 있는 배경이 바로 학맥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사림파 고위 대신들의 행적을 보면 잠깐 돌고 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실무 경험이 하나도 없는데도 고위관직으로 나가는 신기한 모양새가 자주 발견된다. 당장 극초기인 조광조만 봐도 6급 초임을 삼사인 홍문관에서 시작해서 육조좌랑을 스쳐지나간 것을 제외하면 삼사 관직만으로 정2품 대사헌까지 올라간다.
조광조는 좀 과도한 속도였고, 사화로 죽었기 때문에 판서와 정승을 지내지는 못했지만, 중앙내직의 비실무직만으로도 고위 관료가 되는 것이 가능하고 이걸 엘리트코스 취급한 것이 조선시대 사림파 집권기의 모습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반면에 학맥으로 이끌어주는 이런 루트가 없어서 외직도 하고 실무도 거치고 군사 경험도 있는 초기 관학파들이 현장경험 때문에 실무능력이 인정받는 것이다.

6. 나무위키에 등재된 관학파 인물



7. 관학파의 집권 기간


  • 조선시대의 건국부터 제1차 왕자의 난까지의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 공신 내각: 조선 건국 (1392년) ~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 제1차 왕자의 난부터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 즉위까지의 비상 내각: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 태종 즉위 (1400년)
  • 태종 즉위부터 세종 즉위까지의 외척,공신,학자,군인 등 범 관학파 집권: 태종 즉위 (1400년) ~ 세종 즉위 (1418년)
  • 세종 즉위 이후 태종 승하까지의 구왕파 내각: 세종 즉위 (1418년) ~ 태종 승하 (1422년)
  • 태종 승하 이후부터 세종 승하 때까지의 관학파 단독 집권: 태종 승하 (1422년) ~ 세종 승하 (1450년)
  • 세종 승하 이후 김종서, 황보인의 정승 제수 때까지의 하연 내각: 문종 즉위 (1450년) ~ 김종서, 황보인의 정승 제수 (1451년)
  • 김종서, 황보인의 정승 제수 때부터 계유정난 때까지의 김종서, 황보인 내각: 김종서, 황보인의 정승 제수 (1451년) ~ 계유정난 (1453년)
  • 계유정난 이후 세조 즉위까지의 수양대군 내각: 계유정난 (1453년) ~ 세조 즉위 (1455년)
이후의 문서는 훈구파 참조 바람.

8. 같이보기



[1] 이런 경향은 신진사대부 출신 관학파보다는 문벌귀족에서 관학파로 흡수된 케이스에서 심했다. 대표적으로 진주강씨 출신인 강회백이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