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독트린

 



Truman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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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결과물
3.1. 마셜 플랜
3.2. 'Red Purge'
3.3. 한국전쟁 참전
4. 한계


1. 개요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독트린.
공산주의가 전 세계로 퍼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자유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 주 내용으로, 고립주의와 상반되는 당시 미국의 적극적인 대외 정책이었다.

2. 상세


쉽게 말하자면 '''미국이 전쟁으로 피폐화된 자본주의 나라들을 도와주겠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미국이 직접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론을 받아들이고, 소련을 적으로 돌리는 냉전으로 접어들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의 대소 외교 정책은 비교적 불명확한 편이었다. 주소련 미국 대사 조지 케넌의 '긴 전보(The Long Telegram)', 윈스턴 처칠철의 장막 연설 등 소련을 견제하는 발언들이 나타났지만, 미국에서는 소련이 미국과 양립할 정도의 막대한 힘을 가지진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은 무기대여법으로 소련에 상당한 채무를 지운 상황이었고, 소련도 독소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량이 상당히 고갈되어 대외 정책이 상당히 수그러든 모습을 보였기 때문. 군사력 면에서도, 미국의 손에는 이전에 없었던 핵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와 아시아권에서는 중국장제스 중국국민당 정권과 공조해서 소련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독일의 분할은 미·영·프·소의 4개국 분할로, 일본한반도의 분할은 미·영·중·소의 4개국 분할로 처리하는 식이었다.[1] 다만 영국과 중화민국은 당시 일본과 한반도 점령에 참여할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일본은 미국의 단독점령, 한반도는 미/소 양자분할이 되었다. 하여튼 미국은 동아시아권에서 장제스 정권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거점으로 삼으려 하는 한편, 미국·영국·프랑스·중화민국·소련으로 구성된 UN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을 통해서 국제 문제를 조율하려고 시도했다.[2]
그러나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가 서서히 커져가는 상황 속에서 마침내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사건들이 터지고 만다. 국공내전에서 손쉽게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던 장제스의 국민당군마오쩌둥중국 공산당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1949년 12월에는 대륙본토를 전부 뺏기고 타이완으로 도주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당연히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까지 '''연달아 공산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급속히 커졌다.[3]
게다가 1949년 여름에는 소련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핵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 내에서 도리어 소련을 과대평가해 위기감을 느끼는 국면으로까지 전환된다. 이것이 이란 문제, 동유럽과 그리스·터키의 공산화에 대한 우려 등을 증폭시키면서, 마침내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다.
트루먼 독트린은 세계 정책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먼로 독트린의 완전한 폐기를 전제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공룡의 역할을 하게 된 데에는 트루먼 독트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트루먼의 재임 시기와 맞물려져서 대통령의 정치 인생과 함께 독트린 자체의 효력도 끝나버리나 했지만, 트루먼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독트린은 그 효력을 계속 발휘하였다.

3. 결과물



3.1. 마셜 플랜


트루먼 독트린과 한 세트로 따라나오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다. 마셜 플랜의 특징은 바로 '(공산주의에 반한다면) 무차별적인 지원'. 따라서 당시 공산주의 소요로 혼란을 겪고 있던 그리스터키 같은 국가들의 반공 정부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원조를 했다. 그리고 이걸로 유럽은 2차대전 피해에서 일찍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서독의 경우 가장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분단국가인데다가 공산권과 가장 인접하여 위험성이 가장 높았던 독일의 특성상 일종의 '방어벽'의 개념으로 우선적으로 지원해준 덕이 크다. 원조 총액은 133억 달러 정도.
왜 하필 공산주의를 주적으로 삼고 이런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마셜 플랜을 펼쳤는가 하면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기한 대로 유럽은 세계 대전 이후 쑥대밭이 되어있었고[4], 식민지 유지 능력이 떨어지자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하면서 식민지들 역시 막 태어난 백지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경제적 어려움은 당연히 찾아오게 되어있고 이는 곧 공산주의의 침투를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한쪽은 '능력에 따라 당신에게 적합한 생활 수준을 보장해드립니다'라고 하고 한쪽은 '모두가 어려움 없이 평등히 먹고 사는 생활 수준을 보장해드립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더 잘 빠질지는 안 봐도 비디오. 그리고 그렇게 공산주의에 물들면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의 중심인 소련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다.[5] 이는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줄어들게 만든다.
직접적인 공산주의가 아니더라도, 자체적인 경제력이 거의 바닥인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처음 선택하는 것은 대개 민족주의와 대중 동원을 통한 농공산업 육성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국가들이 직접 사회주의를 채택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적인 집단 생산 체제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6] 이러한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로 아예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선택한 길이 속되게 말하자면 '돈 뿌리기'였던 셈.
즉, 빨리 모든 국가들을 물질/정신적으로 풍족히 무장시켜서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어찌보면 진짜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잠재적 라이벌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또 도움을 준 당사국인 미국과의 유대관계를 이끌어내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트루먼 독트린의 주요한 목적이였다. 미국내 다양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인도주의+영향력 확대'''라는 두가지 토끼를 동시에 노린 셈.
실제 트루먼 독트린에 대해 당시 미국의 여론은 양분되어있었는데, 찬성하는 쪽은 인도주의와 미국의 대외 영향력 확대가 주요 이유였고, 고립주의자를 비롯한 트루먼 정권의 안티들은 마셜 플랜 등이 당장 나오는 것도 없는데 미국의 혈세를 낭비하는 '''퍼주기 정책'''이라며 반대했다.[7]
다만 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원은 당시 지원을 받은 서/남/북유럽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 미국간의 긍정적인 유대관계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여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발언권을 한층 더 강화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고, 이 관계는 후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창설로도 이어진다. 또 이후 미국은 세계 정세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본격적으로 소련과 냉전 구도를 이루게 된다.
트루먼 독트린은 먼로 독트린 이후 20세기 들어 약간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100여년간 미국의 주요 기조 중 하나로 자리 잡아온 전통적인 '''미국의 고립주의를 뿌리부터 박살내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미국의 이러한 개입 정책은 직접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황폐화를 공인하여 유럽의 권위를 떨어트린, 말하자면 이제는 완전히 유럽의 제국주의가 침몰하고[8] '''미국이 새 시대의 패자로 등장'''했음을 나타내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유럽은 세계적인 정치 권력을, 미국은 경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하면, 이제는 정치/외교 권력의 주도권까지 완전하게 미국에 넘어가 버린 것.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식민지 국가들은 식민지를 갖고 있던 유럽 국가들이 침몰하여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을 보고 더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그리고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합세하여 말 안듣는 이집트를 지난 수백년간 말 안 듣는 다른 나라들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회를 치려다가 자기네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회를 치일 판이 되어 굴욕적으로 철수하는 상황에 이르러 유럽의 패권이 완전히 과거의 영역이 되었음을 인증하고 만다.

3.2. 'Red Purge'


유럽에서는 이렇게 급한 불을 껐지만, 정작 동아시아에서는 위기감만 더욱 커져 갔다. 중화민국이 단순히 밀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타이완 섬으로까지 쫓겨나 버린 것. 따라서 미국에게는 또 다른 거점이 필요했는데, 이 때 선택된 것이 바로 일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전범국가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경제·군사적 원조가 힘들다는 것.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에도 일정한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전후로 소련의 간접통치하에서 이후 이미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위한 작업을 독자적으로 밟아나가고 있었고, 여기에 자극받은 미국의 정책도 직접통치하에서 점차 과격해져 갔다. 1946년 3월에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고, 잇달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이 터졌다. 공산화 확산을 막는 것을 가장 큰 원칙으로 내세우던 미군정이 압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일본에서도 GHQ는 우익 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좌익 세력을 온존시키고 평화헌법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우선 도입을 주창했지만, 국내외적으로 공산주의에 의한 압력이 강해지는 상황이었다.(시모야마 사건을 비롯한 '철도 3대 사건'이 바로 이 시기에 터진 것이다.)
따라서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은 'Red Purge(빨갱이 숙청)'로 불리는 공직·군대로부터의 공산주의자의 색출과 퇴출 작업에 나서게 되며, 사회주의 계통의 인사들은 대개 탄압을 통해 지하화할 정도로 강한 압박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역코스 정책(Reverse Course)이라고 한다. 이후 한반도에 대한 단독 정부 수립 계획이 전면적으로 대두되게 되며, 한국과 일본 두 국가는 '반공의 방파제'로서 육성된다. 닥치고 반공만을 외치다 보니까 전쟁 책임이 있는 군국주의 우익세력들, 전쟁범죄자, 식민지 부역자들이 당장 써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대거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정작 이쪽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미국 본국의 매카시즘. 사실 동아시아에서 이랬으니 미국에서 더 심한 것은 당연한 길이겠지만. 어찌되었건 미국 본국에서도 공직에서 공산주의자가 대대적으로 색출되어 쫓겨나고, 오히려 이것이 정치 도구로 이용되는 등 미국 정치사에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다.

3.3. 한국전쟁 참전


명목상으로는 UN군 이름 아래 참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군의 영향력이 매우 컸던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UN군 참전 또한 미국의 외교 방향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트루먼 독트린이 세계의 공산화를 우려한 결과 나왔으니 연장선상에서 적화통일을 부르짖으며 시작된 6.25 전쟁에 미국이 참여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만약 미국이 이 시기 고립주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면 6.25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거나, 개입하더라도 소련처럼 비공식적인 소극적 개입에 그쳤을 확률이 높았을테니 생각해보면 굉장히 중요한 담화.

4. 한계


트루먼 독트린에 따른 적극적인 반공 지원 정책은 일단 1950년대까지 기본적인 미국의 정책 기조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재정 압박'''이었다. 마셜 플랜의 금액도 만만치 않았을 뿐더러, 6.25 전쟁 등으로 소요된 전비와 원조 금액이 막대했기 때문. 일례로 1945년부터 1964년까지 한국에 지원된 금액은 '''33억 9,000만 달러'''였는데, 마셜 플랜으로 지원받은 국가들의 평균 원조 액수가 4억 3,000만 달러 수준인 것을 생각하면 무척 막대한 것이다.
결국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원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에게만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이른바 로스토우 플랜을 내세우고 원조 감축 정책을 펼쳐 나간다. 마침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 공존을 내세운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냉전에 온풍이 부는 호재가 나타났다. 이에 맞춰 미국은 1960년대 초반까지 비교적 간접적 군사력인 집단 방어 체제의 구축을 통해(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 한·미·일의 상호 방위 체계) 국방 부담을 덜어나갔다.[9] 여기까진 좋았는데...
'''베트남 전쟁에 끼어들면서, 미국이 원하던 구도는 완전히 박살난다'''. 베트남 전쟁에 끼어들면서 기껏 해체되나 싶었던 트루먼 독트린 구도가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 데다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잔뜩 뒤집어쓰게 된 것. 가뜩이나 존슨 행정부는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복지 중심의 경제 정책) 정책으로 재정 부담이 커진 데다가, 대외적으로도 브레튼 우즈 체제에 입각한 금본위제도가 어긋나기 시작했으며, 68운동 등 반전 운동이 확산되며 프랑스 등 서구 선진국에서조차 반미를 내세운 자본주의 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리처드 닉슨이 집권하면서, 미국은 국제 개입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후퇴하는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게 되고, 트루먼 독트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10]
[1] 이때의 중국은 당연히 장제스 국민당 정권 즉 중화민국이다.[2]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에서 자본주의 진영이 미/영/프/중(장제스 정권) 4개국이니 충분히 소련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3] 도미노 이론 자체는 1954년에 나왔지만, 중국본토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시점에서 미국 정부는 아시아권 전체로 공산주의의 물결이 퍼질 것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었다.[4] 심지어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다.[5] 다만 유럽의 사민권은 원래 사회민주주의가 폭력적 방법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마르크시즘의 방법론이랑 결별하면서 나온거라 소련에 확 기울진 않는다.[6] 예를 들어 가말 압델 나세르이집트자와할랄 네루인도 등이 사회주의적인 집단 생산 정책을 선택하여 경제 재건의 방안으로 삼았고, 그럼에도 사회주의 국가로 직접 경도되지는 않으면서 소위 제3세계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7] 심슨 가족에서 번즈가 "유럽으로 넘어갈 뻔한 1조 달러를 지켜냈다!"면서 자랑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게 바로 마셜 플랜으로 지원되어야 할 달러를 번즈가 빼돌려서 꿍쳐놓은 것이었다. 이 달러는 에피소드 후반에 번즈와 심슨, 스마더스가 '''자유를 찾아''' 쿠바로 망명했다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털리고 만다'''(...).[8] 마셜 플랜으로 인해 미국의 자본이 유럽으로 대량 유입되면서, 그동안 북미를 은근히 한수 아래로 보던 유럽이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를 거치며 사실상 미국 아래로 들어가는 상황 역전이 이뤄진다. 물론 이런 위기감과 배타적 민족주의로 인한 유럽 폭망이라는 실책을 다시 저지르지 말자는 의미에서 EU 창립의 초석이 되긴 하지만.[9] 미국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라고 양국 정부를 강력하게 압박한 것도 이때문이었다. 하루 빨리 국교 정상화를 통해서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의 부담을 일본에 떠넘기고 동북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확고한 삼각군사동맹 체제를 굳힐려던 것이다. 이런 미국의 압박 때문에 결국 협상은 졸속으로 진행되었고 이게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10] 다만 개입주의 자체는 이후 네오콘 세력 등에 의해 부활하게 된다.